청나라 치하 티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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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개
2.1. 청나라 멸망 이후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티베트만주족청나라의 관계에 대한 문서. 청나라 치하 티베트라고 하면 달라이 라마 7세 재위기간(1720년)부터 신해혁명(1912년)까지를 다룬다.

2. 전개[편집]


과거의 해석은, 만주족중국의 다른 야심찬 이민족 정복자들처럼 그들 지배의 통치나 정당화에 중국식 방법을 적용했고, 그 결과로 사실상 문명화된 중국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청나라의 실상을 제대로 반영했다 보기 힘들다. 청 통치자들은 일인 다역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여러 부류의 신민들(만주족, 몽골인, 티베트인, 한인)을 동시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스렸다. 청나라황제는 중국 백성에게는 천자였고, 몽골인에게는 중의 칸(대칸)이었으며, 티베트인에게는 차크라바르틴(전륜성왕)이었다. 청나라는 다양하면서도 다민족적인 세계 제국이었다.

이번원(理藩院)은 만주어로 '바깥 지역을 통치하는 기구'를 뜻한다. 이번원은 중국 본토의 외부 지역, 즉 몽골과 티베트 등을 관리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중화제국 역사상 최초의 행정 기관이었다. 6부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이번원은 수도에 관청을 두고 있었으며, 이번원에 소속된 지방 관료들의 규모도 거대했다. 한족 지식층은 거의 모두 이번원에서 배제되었고, 대부분은 중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로 행정이 운용되었다.

하버드 중국사 청 / 윌리엄 T. 로


달라이 라마 5세의 사후 후임 선정을 두고 호쇼드의 탠진징길갤뽀(བསྟན་འཛིན་ཇིང་གིར་རྒྱལ་པོ)[1] 라잔(ལྷ་བཟང༌།)과 섭정 상게걈초(སངས་རྒྱས་རྒྱ་མཚོ།)가 마찰을 빚었다. 상게걈초는 창양갸초(ཚངས་དབྱངས་རྒྱ་མཚོ)를 달라이라마 6세로 세웠으나, 그와 준가르의 접촉을 주시하던 강희제는 라잔을 지지하였다. 호쇼드의 통치력을 회복하고자 했던 라잔은 그 기세를 몰아 1705년에 상게걈초를 살해한 후 예셰갸초(ཡི་ཤེས་རྒྱ་མཚོ)를 새로운 달라이라마 6세로 옹립했다. 강희제는 달라이라마 6세를 책봉함으로써 호쇼드를 지지했다. 그러나 라잔의 행보에 불만을 품은 청해호쇼드 세력과 상게걈초의 지지세력은, 1708년에 동티베트 리탕(ལི་ཐང)에서 태어난 창양갸초의 환생자 칼상갸초(བསྐལ་བཟང་རྒྱ་མཚོ་)를 달라이라마 7세로 옹립해야한다고 반발하면서 준가르를 끌어들였다. 강희제는 칼상갸초가 쿰붐(སྐུ་འབུམ) 사원에 들어가는 의례를 지원하여 그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상황을 관망하였다. 1717년 체왕 랍탄이 달라이라마 7세의 보호를 명분으로 라싸에 체링 돈둡의 병력을 보내어 라잔을 살해하고 상게걈초 잔당과 결탁하였다. 그리고 청해호쇼드가 달라이라마 7세를 칼상갸초를 호송해오는 중이라고 선전했다.

체왕 랍탄은 반라잔 귀족인 탁체파(སྟག་རྩེ་པ)에게 '사쿙(ས་སྐྱོང)'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그를 정부(간덴 포브랑)의 수반으로 세웠다. 그러나 실권은 섭정 노릇하던 체링 돈둡에게 있었다. 당시 선교사가 점령자들이 "1718년 내내 왕국 사람들에게 전례 없는 잔학 행위를 했을 뿐"이라고 비판할만큼 체링 돈둡을 위시한 준가르인들은 공포 통치를 자행하였다. 강희제는 호광총독(湖廣總督, hūguwang ni uheri kadalara amban) 어런터이(erentei, 額倫特), 시위(侍衛, hiya) 서렁(sereng, 色楞) 등에게 청군을 보내어 라싸로 가게끔 했으나, 이들은 7월부터 카라우수(kara usu, ནག་ཆུ།)[2]에서 준가르군과의 야전에서 어런터이 등이 전사하는 등 패퇴하고 윤8월 초순에는 포위 속 요새에서 굶주림과 전투 등으로 괴멸당했다.

강희제는 청해호쇼드 세력을 회유하여 그들의 협력을 약속받는 한편 달라이라마 7세를 책봉했다. 1720년 청군은 청해호쇼드와 칼상갸초를 쿰붐에서 라싸로 데려왔고 라싸에 진군하여 준가르 세력을 제압했다. 칼상갸초는 1720년 11월 혹은 1721년포탈라궁에서 달라이 라마로 공식적으로 즉위했다. 청군은 1723년까지 라싸의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체류하였고 준가르와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고 철병했다. 그러나 청해호쇼드의 수장인 롭상단진은 자신이 티베트의 왕(갤뽀)가 되고자 무력을 행사했다. 달라이라마 7세 정권의 까론(བཀའ་བློན)들은 섭정 선정에 앞서 이번원에게 청나라에 대해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까론들은 군사 원조까지 요청하였는데, 청군이 다시 파병되어 청해호쇼드를 압박하고 티베트로 진군하면서 롭상단진은 준가르로 도피했다.

옹정제는 논의 끝에, 과거 라잔 한에 의해 아리(མངའ་རིས)의 총독이자 까론으로 임명돼 반준가르 노선을 견지하면서 청군을 지원했었던 캉첸내(ཁང་ཆེན་ནས)를 총리서장사무(總理西藏事務)로 삼았다. 그러나 달라이라마 7세 정권내 반대파는 청의 대신이 라싸에 도착하기 직전 캉첸내를 죽이고 달라이라마 7세의 권위를 내세워서 청나라에 정부 승인을 요청했다. 달라이라마 7세의 권위를 이용 해서 새로운 정부 숭인을 청조에 요청해 왔다. 한편 친캉첸내 까론 포라내(ཕོ་ལྷ་ནས)는 달라이라마 7세와 그 실세들이 준가르 및 롭상단진과 야합하였다고 청에 고발하고 차병하는 한편 판첸 라마를 옹립했다. 준가르의 갈단 체링이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달라이라마 7세와의 접촉을 시도하자, 옹정제는 준가르를 압박하고 군사를 보내어 달라이라마 7세를 내지(쓰촨성)와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자 했다. 청나라는 겔룩파의 후원자와 라싸 방위라는 협력의 명분으로 2000명의 청군을 주둔시키고 티베트측으로부터 물자나 주둔비를 부담시키지 않았다. 1729년 준가르를 대대적으로 공략해서 긴장관계를 해소한 청나라는 주둔군을 500명으로 감축하고, 건륭제는 즉위 직후 완전한 철군을 원했으나 티베트 정부가 주둔 연장을 요청하면서 임시 연장의 형태로 지배를 확립해나갔다.

포라내의 사후 그의 차남 규르메남걀(གྱུར་མེད་རྣམ་རྒྱལ)이 자위를 세습하였는데, 그는 캉첸내계 인사들의 지지를 받으며 중국의 종주권을 폐지하고자 했다. 그는 1748년 황제를 설득해서 라싸의 청군을 100여 명으로 감축하였다. 암반들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놓였고, 나아가 건륭제가 준가르 사절의 티베트 방문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규르메남걀의 계획은 친청 인사들에 의해 암반들에게 입수되었고, 암반 푸칭(fucing)과 랍돈(labdon)은 규르메남걀과 그 수행단을 유인해 암살했다. 살아남은 롭상태시는 암반 및 기타 중국인들을 살해하고 준가르로 도피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이에 건륭제는 달라이 라마 7세 칼장갸초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대군을 진주시켰으며, 1751년 1월, 만주인 반디(bandi)가 라싸에 들어와 주장선후장정(西藏吉後摩程)을 체결했다. 이 장정을 통해 암반이 병력을 거느리고 간덴포브랑 내정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였다.

1788년, 1791년 구르카-청 전쟁 이후, 건륭제는 암반의 상주만으로 티베트를 통치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지하였다. 전쟁 중 달라이 라마와 네 까론이 암반과의 상의 없이 사안들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건륭제는 장내선후장정 29조를 만들어 '금병체첨(金瓶製簽)' 및 암반에게 인사권과 외교권 개입을 허용했다. 결국 18세기 말, 티베트는 전례 없이 정치적 자주성과 독립성이 훼손되었고, 달라이 라마와 청 황제간 최은 관계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는 정치적, 행정적인 관계로 강화되었다.

청 황제는 티베트 불교의 수장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었다.(최은 관계) 물론 자치권을 상당히 부여하기는 했지만 청과 준가르의 충돌 가운데 번부가 되었고, 그에 수반하는 대신(amban)이 상주했다. 그 외 만주족을 비롯하여 어원커족, 나나이족, 다우르족도 제국의 통치 과정에서 티베트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건륭제만주원류고를 편찬하며 '만주'라는 이름 역시 만주족이라 불리기 전의 여진족 및 만주 지역의 퉁구스 제족들이 티베트 불교를 통하여 티베트 불교의 문수보살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러허성(현재의 청더시)에 피서산장을 건설했을 때 사원 중 일부는 티베트 건축물과 비슷하게 짓기도 했었다. 티베트는 청과 네팔과의 전쟁에서 청에 원병을 해주기도 했었다. 또한 티베트를 통치하다보니 주변 국가인 네팔, 시킴, 부탄을 복속시켰으며, 남서부 국경으로는 무굴 제국과 접했으며, 접해있진 않았으나 지리적으로 무굴 제국의 벵골아삼 등과도 가까웠다보니 티베트를 통해 무굴 제국 동부와도 교류를 했다.

내몽골 지역의 몽골계 제부는 청나라에 일찍 복속되었고, 지리적으로 만주와 가까이 접한 곳이었기에 서로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기도 했었다. 만주족이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인 것, 만주 문자 역시 내몽골의 영향이 가장 컸다. 원대부터 몽골인들이 만주와 중국 대륙을 점령하면서 베이징에 대도를 세웠고, 북쪽에는 지금의 내몽골 시린궈러 맹에 상도를 세웠다. 상도, 대도를 통해 만주, 몽골, 중국을 지배하면서 동시에 이들의 정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원나라는 티베트를 통해 티베트 불교 및 일부 티베트 문화들도 받아들여 몽골과 내몽골, 중가리아의 문화는 티베트의 영향도 받게 되었다. 내몽골과 만주는 티베트와 마찬가지로 티베트 불교권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나, 청나라 강남의 한족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티베트 불교를 반만 감정을 바탕으로 무시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태평천국 운동 때 적지않은 수의 티베트 불교 사원이 파괴되었다.

2.1. 청나라 멸망 이후[편집]


티베트는 훗날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의 간섭을 받고 짧은 시기 영국의 보호령이 되면서 동시에 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생각도 했었다. 훗날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해 청이 무너지면서 티베트는 자연스럽게 청과 중화민국으로부터 벗어났다. 중화민국 시기에는 티베트는 실질적으로 독립되었으나 중국은 티베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티베트를 중국의 고유 영역으로 간주하였으며 세계 열강들에게는 미승인국으로 취급되었고 둥베이(만주)에 중심을 둔 중화인민공화국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을 대만으로 내쫓아내고 6.25 전쟁 와중 1951년 티베트를 침공해 티베트를 병합했다.

3. 관련 문서[편집]



[1] '징길갤뽀'란 '징길' 대왕이라는 뜻으로, 칭기즈 칸을 의미한다.[2] 지금의 살윈강(떵뤈강) 상류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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