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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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규덕
千奎德|Chun kyu-deok


파일:천규덕.jpg

이름
천규덕(千奎德)
출생
1932년
경상남도 부산부 서대신정
(現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
사망
2020년 6월 2일[1] (향년 88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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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본관
영양 천씨
가족
부인, 장남: 천호진, 차남: 천수진
체격
180cm, 110kg (현역 시절 기준)
특기
당수, 격파
별명
당수귀신
주요 커리어
1975년 한국프로레슬링 헤비급 챔피언
1978년 극동 태그매치 챔피온

1. 개요
2. 생애
2.1. 데뷔 전
2.2. 데뷔 후
2.2.1. 역도산과의 인연
2.2.2. 장영철 사건과 황소 3마리 잡기 이벤트
2.2.3. 해외진출
2.3. 은퇴 이후



1. 개요[편집]


천규덕의 여러 사진들
【 펼치기 • 접기】

파일:external/image.tagstory.com:8080/V000312706_0.jpg

챔피언 시절.
파일:external/spnimage.edaily.co.kr/PP08091000021.jpg
50대 시절. 원래 천씨남자들은 이렇게 생겼어
1990년대 후반(60대 중반) 시절

파일:external/www.xportsnews.com/chon%202.jpg

2008년(70대 중후반) 모습

파일:external/heraldk.com/20140829000171_1.jpg

2014년 모습. 오른쪽에서 2번째.[1]


대한민국의 1세대 프로레슬러.

김일에 비견되는 한국 프로레슬링계의 전설로 사실상 대부격 되는 인물 중 하나다. 배우 천호진의 아버지로도 알려져있다.

필살기인 당수치기, 2단 돌려차기와 당수귀신이란 별명으로 유명했다. 김일, 장영철과 나란히 암울한 한국사회에 희망을 주었던 당대 최고의 프로레슬링 스타였다.


2. 생애[편집]



2.1. 데뷔 전[편집]


경상남도 부산부 서대신정(현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허약한 몸을 단련하려고 중학교 2학년 때 태권도(당시엔 흔히 ‘당수’라 불림)를 시작했다. 6년제인 대신중 4년 때(1949년) 중퇴하고 ‘비행기를 타보고 싶어’ 육군항공대에 자원입대했다. 휴전 후 여의도에 배치돼 황기 사범이 운영하던 무덕관에서 운동을 하며 3단(최종적으로는 공인 6단)을 땄다. 또한 공군본부에서 태권도부 사범이었다고 한다. 1960년 부산으로 부대를 옮긴 그는 낮에는 훈련을 받고 밤이 되면 태권도를 가르치며 운동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실제 프로레슬링을 하기 전에도 이미 태권도 고단자로 싸움을 굉장히 잘했다고 한다.

프로레슬링과의 인연은 29세이던 1961년 부산에서 맺었다. 부산으로 전출간 그는 퇴근 후 남항동의 ‘종합체육관’에서 태권도 사범을 했는데 여기서 레슬링 사범 장영철을 만났다. 어느날 남포동 밤거리를 걷는데 동네 전파사 앞에 몰린 사람들을 따라서 본 텔레비전에 역도산의 경기가 기가 막히게 멋있게 보였다고 한다. 그걸 보고 그도 장영철에게 자신도 레슬링을 해보고 싶다고 해서 입문하였다고 한다. 둘은 부산에서 경기를 열기도 했다.

둘이 부산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열었는데 반응이 좋아 ‘서울로 올라가자’고 의기투합했지.

서울운동장 정구장에서의 첫 경기는 포스터 몇 장 붙였을 뿐인데 경기장이 인산인해야.

1년에 1∼2번 휴가를 얻어 상경해 게임을 하곤 했지.

-천규덕 -


이후 천규덕은 스승이자 동료였던 장영철과 함께 서울로 활동 무대를 옮기고 1963년 정식으로 프로레슬링에 데뷔했다. 출처1출처2 출처3


2.2. 데뷔 후[편집]


천규덕의 인터뷰에 따르면 TBC(동양방송) 개국기념으로 레슬링 TV중계를 한 것이 본격적으로 인기몰이를 한 계기가 됐다고 하며, 거구의 일본 선수들을 때려눕히는 것을 구경하러 장충체육관에 프로레슬링 관중이 몰려들자 박정희 정권이 적극 후원했다고 한다. 이때 박종규 경호실장이 협회장을 맡고 비원 안에 연습장도 마련해 주었다고. 1963년 준공된 장충체육관이 프로레슬링의 메카가 된 것도 비슷한 맥락. 일본 선수들과 한 달에 한 번은 경기를 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2] OBS 전설의 시대 2회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온다.

천규덕은 프로레슬러로서 김일에 버금가는 활약을 했다. 김일이 박치기의 달인이라면 이쪽은 당수[3]를 주특기로 삼았다. 우월한 신체와 상대방의 기술이 들어가 꺾인 팔을 오로지 그 팔의 힘만으로 도로 펴는 굉장한 근력을 소유하였고 기술도 상당했으나, 답답한 경기 운영과 흥행성의 부족으로 실력에 비해 인기가 따르지 않았다.[4]

챔피언 타이틀 운도 별로 없었던 편. 장영철과 함께 하던 시절에는 장영철에 이은 '2인자'에 가까운 위치였는데, 천규덕은 나이가 장영철보다 어렸고 장영철은 정통파 아마추어 레슬링 사범이라는 관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레슬링 도장을 생업으로 하고 있던 장영철과는 달리 당시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제대하기 전 까지는 프로레슬링에만 온전히 전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일이 나서게 된 뒤에는 김일의 독보적인 행보 때문에 역시 2인자 정도에 머물렀다.


2.2.1. 역도산과의 인연[편집]


천규덕은 역도산을 TV에서 보고 레슬링을 하게 된 인연 때문에 롤 모델로 삼고 흠모했다. 그는 경기 중 항상 검정 타이츠[5]를 입었는데 이 역시 역도산을 따라한 것이었다. 또한 역도산을 따라 실제 일본으로 갈 뻔도 했다. 1963년 가을에 역도산이 레슬링 전용경기장을 장충공원에 짓겠다며 방한했을 때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다른 레슬러들과 함께 천규덕도 육군 상사로서 군복을 입고 역도산의 숙소였던 조선호텔에 도열, 인사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역도산이 수행원에게 '군복 입은 선수를 일본으로 데려 갈 테니 준비시키라’하고 천규덕에게는 “손의 크기가 나와 비슷하군. 일본으로 올 생각 있나.” 하며 일본 진출을 약속했다고 한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천규덕은 부대에 돌아가자마자 제대 신청을 했고, 일본에서 연락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그해 12월 역도산이 칼에 맞아 숨졌다는 비보를 접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출처1, 출처2.


2.2.2. 장영철 사건과 황소 3마리 잡기 이벤트[편집]


2012년 천규덕의 인터뷰에 따르면 1965년에 있었던 장영철 사건[6]을 만회하고 프로레슬링 중흥을 위한 이벤트였다고 한다. 그가 1970년대 초반에 했던 이 황소 잡기 이벤트는 최배달이 소뿔을 격파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장영철 사건’을 만회하기 위해 뭔가 이벤트가 필요했어.

마장동 도축장을 찾아가 부탁하자 흔쾌히 소를 내주더군. 두 방 때리니까 죽어.

며칠 후 다시 연습했는데 역시 두 번 치자 쓰러졌어.

자신이 붙어 ‘황소를 맨손으로 때려 죽인다’고 TV광고까지 했어.

그런데 중앙정보부 감찰부장이 남산으로 들어오라고 전화를 했어.

주눅이 들어 갔더니 ‘천 선수, 공화당 상징이 황소인데 그걸 때려죽이겠다는 게야? 정부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며 중지하라고 하더군.

광고까지 나갔다고 사정했더니 ‘그러면 한두 방에 끝내지 말고 여러 번 때려 황소가 그렇게 세다는 것을 보여준 후 죽이라’고 하데.

결국 15번이나 쳐서 죽였어.”

- 천규덕 -



2.2.3. 해외진출[편집]


해외진출도 성과가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불운이 따랐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일의 주선으로 미국 진출을 했을 때는 일본인 역할을 하라는 미국 단체의 지시에 굴욕을 느끼고 미국 진출을 포기하고 귀국해버려서 무산되었다.

“1972년 미국 테네시에 가니 프로모터가 ‘여기는 흥행이 중요하니 특기가 있어야 한다. 당신 특기는 뭐냐’고 묻더군.

그래서 커다란 돌 몇 개를 준비하라고 했지. 경기에 앞서 당수로 수박만 한 돌을 격파했더니 관중들의 호응이 대단했어.

다음날 곧바로 테네시주 태그매치 챔피언과 게임을 주선해 주더군.

파트너는 일본교포 ‘BY 장’이었는데 바로 챔피언을 땄지.”

- 천규덕 -


미국 프로모터와 1년 계약을 했지만 두 달 만에 끝나고 말았다.

“경기를 앞두고 ‘게다’와 일본 전통 옷을 입으라는 거야.

‘나는 코리안이다. 일본 옷을 입고 출전하지 않겠다’고 했어.

테네시는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많은 흑인 전사자가 나온 곳이었어. 그래서 내게 일본 옷을 입히고는 때려눕혀지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지.

물론 애국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겁도 많이 나서 곧바로 보따리를 싸 돌아왔어.”

- 천규덕 -



2.3. 은퇴 이후[편집]


1985년 링을 떠난 후 선수 시절에 적을 둔 영진약품[7]에서 1987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근무했고, 퇴직 후 친구와 건축업에 손댔는데 2~3년 하다가 잘 안됐다고 한다.

1998년에는 신한국프로레슬링협회 프로레슬링 동우회를 만들었다.

국내에 처음으로 WWE 레슬링 RAW가 방문했을 때 당시 특별 게스트로 김일 등과 함께 관중석에 앉아 시합을 관람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도 건강관리를 꾸준히 해온 덕분에 말년에도 꽤 정정했지만 2020년 6월 2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자 화랑무공훈장 수훈자로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 지병으로 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장남 천호진이 당시 열연했던 드라마 한 번 다녀왔습니다를 챙겨봤지만 안타깝게도 결말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장지는 국립 서울현충원.[2] 참고로 김일은 NWA 한국지구 프로모터 자격도 가지고 있어 여기에 북미쪽 인맥까지 끌어들인다. 때문에 대중의 관심도가 떨어진 장영철 계와 사이가 험악해지기도 한다.[3] 가라테촙을 말하며 이 역시 역도산의 주특기이다. 당시 중계방송에선 당수가 나올 때 캐스터가 "태권!"이라고 외쳤다.[4] 김일은 박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기술에 능하였고 경기 내내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주도하였다. 장영철도 몸을 날리는 기술을 많이 구사하여 박진감으로 인기를 끌었고, 나중에 등장한 여건부는 더 말할 것도 없다.[5] 2014년에 채널A에서 방송한 그때 그 사람(40회)에 따르면 타이즈가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 부인인 송숙자 여사가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아들들의 도복도 모두 직접 만드는 등 손재주가 좋았다고 한다.[6] 1965년 5개국 친선 프로레슬링 대회에서 난투극을 벌인 장영철이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레슬링은 쇼'라는 보도가 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7] 영진약품 김생기 회장이 정식으로 채용해줘서 제대하자마자 입사해서 퇴임까지 24년간 근무했다고 한다. 선수로 뛸 때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훈련을 했다고 하며 무역부장까지 지내다 1987년 정년퇴직했다고 한다. 얼굴마담이 아니고 진짜 일해서 15년만에 무역부장이 됐다고 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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