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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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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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평안북도지사
차인태
車仁泰 | Cha Int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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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44년 8월 11일 (79세)
평안북도 벽동군
학력
휘문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 학사)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정치외교학 / 석사)
재임기간
제9대 평안북도지사
2003년 5월 ~ 2007년 2월
경력
문화방송 아나운서실장
제주문화방송 대표이사 사장
경기대학교 다중매체영상학부장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고문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
병역
예비역 육군 중위
가족
배우자 이선희 슬하 2녀
종교
개신교 (예장통합)[1]

1. 개요
2. 일생
3. 여담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스터 MBC[2]

대한민국의 방송인.


2. 일생[편집]


평안북도 벽동군 출신의 실향민으로, 어린 시절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잠깐 보내고 분단 뒤인 1949년에 일가족이 월남하여 경주에 정착했다가 6.25 전쟁이 휴전되어 서울로 와서 휘문고등학교연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하였다.

미스터 MBC라는 별명이 있지만 의외로 라디오 시절의 MBC(1961년 서울 개국)에서 처음 방송 경력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연세대 재학 중 1965년 동아방송 전국대학방송경연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 방송에 입문하였고,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에 입사하였다가 1967년 퇴사하고 학군단 5기로 입대하여 중위로 제대했다.

이후 1969년 8월 MBC-TV 개국과 함께 입사하여 활동하였다. 그의 경력 중 가장 유명한 프로그램은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진행한 MBC 시절 장학퀴즈를 꼽을 수 있다. 장학퀴즈가 MBC에서 방영되던 시절을 기억하는 40대 이상들은 거의 다 이 모습으로 기억할 것이다. 후배 아나운서들에게 장학퀴즈 진행에서 물려준 뒤인 1993년에는 장학퀴즈 20주년 기념 특집[3]에서 사회를 보기도 했다. 또한 평일 아침 방송된 '차인태의 출발 새 아침'도 오래 진행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MBC 라디오 초창기에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한 경력이 있다. 1970년대까지 별밤은 명확한 컨셉을 잡지 못하고 개편 때마다 전문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교양 프로와 가수가 진행하는 음악 프로를 오가곤 했는데 차인태도 교양 프로 시절 진행을 맡았다. 이 경력으로 별밤 10,000회 특집 방송에 2대 별밤 지기로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의외로 MBC 뉴스데스크는 오래 진행하지 않았음에도[4] 불구하고 메인뉴스 진행자 이미지가 강한데, 그 이유는 뉴스데스크의 주말에디션인 MBC 뉴스센터(1981~1984)를 꽤 오랫동안 진행하였기 때문이다.[5] 뉴스센터가 뉴스데스크로 재통합된 이후인 1986년에 주말 뉴스데스크를 진행하였으며, 1987년 2월 8일을 끝으로 손석희 아나운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하차했다.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6], 이후 실향민이자 남한 방송인 신분으로 북한을 직접 방문했다. 또한 평안북도지사(이북 5도 문서 참조)를 지내 고향의 명예 도지사가 되었다. 이북 5도 지사는 차관급 명예직 공무원으로서 이북 5도의 사무를 보는 명목상의 지자체장이다.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남자 1000m에 출전한 김기훈이 대한민국 동계올림픽 도전사 최초로 금메달을 따는 역사적인 순간을 중계하기도 했다.

그 사이 1979년경 아나운서실 제1부 차장대우, 1980년 차장, 1981년 제1부장으로 각각 승진하고 1986년 부실장도 겸했다. 1988년 제1부장 자리를 후배 송재익에게 넘기고 1989년 아나운서실장, 1992년 아나운서실 방송위원을 거쳐 1993년 편성이사까지 올라 2년 동안 맡았고, 1993년 7월 11기 MBC바둑제왕전 우승자 이창호 6단(당시), 준우승자 유창혁 6단(당시) 시상식에 참석했다. 1995년 ~ 1998년 제주문화방송 대표이사 사장을 끝으로 방송 현업을 떠나 경기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정년퇴임 후에는 서울문화예술대학교 석좌교수를 지내고 있다.

매우 독실한 신앙인으로,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교회 장로 자격으로 참여한 간증 영상 등이 간혹 등장한다. 아래 영상은 신촌성결교회에서 진행한 신앙강연이다.


2019년 3월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에 선임되어 2021년 3월까지 임기를 수행했다. 후임에는 전 국회의원인 박찬숙이 취임했다.

2023년 2월 18일 장학퀴즈가 방영 50주년만에 다시 특별 초대 MC겸 최창기 MC를 다시 서게 되었다.

3. 여담[편집]


  • 자동차생활 1984년 9월 창간호 중 카라이프 포커스 코너에는 차인태 아나운서와 그의 가족들의 생활을 다루었다. 당시 차인태가 운행했던 차량은 현대 스텔라 자동차였다.
  • MBC 놀면 뭐하니? '장학퀴즈' 특집에서 유재석이 분했던 '유인태' 역할이 바로 차인태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4.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8 09:23:04에 나무위키 차인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영락교회 은퇴장로로 섬기고 있다[2] 1991년 있었던 MBC 개국 30주년 특집방송에서 아예 대놓고 '차인태의 30년, 차인태와 MBC'라고 자막을 띄워줬을 정도였다.[3] 985회[4] 그것도 추성춘 앵커가 건강상 이유로 뉴스 진행이 불가능해지자 후속진행자(엄기영)의 투입 전까지 임시로 진행한 것이었다.[5] 2010년에 방송된 40주년 특집 뉴스데스크에서도 뉴스데스크 앵커들을 소개할 때 차인태와 김혜현을 1980년대 앵커로 소개한 것으로 보아 문화방송 측에서도 종합뉴스(1989, 1991~1993) 시절은 물론 심층시사(1981~1984) 시절 뉴스센터의 진행자들 역시 뉴스데스크 앵커로 분류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뉴스센터를 뉴스데스크와 별개로 보더라도, 차인태는 1986년에 주말 뉴스데스크의 진행을 맡았으므로 당연히 차인태를 뉴스데스크 앵커로 보아도 무리는 없다. 80년대 뉴스데스크 간판이었던 이득렬도 1981년에는 뉴스센터 진행자였다.[6] 실황중계시 메인캐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