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모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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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모리슨
Jim Morrison

파일:JimboColor.jpg
본명
제임스 더글러스 모리슨
James Douglas Morrison
출생
1943년 12월 8일
미국 플로리다주 멜번
사망
1971년 7월 3일 (향년 27세)
프랑스 일 드 프랑스 파리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가수, 시인, 배우, 영화 감독
소속
도어즈 (1966 – 1971)
서명
파일:짐 모리슨 서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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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조지 스티브 모리슨[1], 클라라 모리슨
형제자매
여동생 앤 로빈 모리슨
남동생 앤드루 리 모리슨
동거인
파멜라 커슨
묘지
}}}
프랑스 일 드 프랑스 파리 20구 페르 라셰즈 묘지
신체
178.4cm, 59kg(전성기 때) → 82kg(사망 직전)
학력
앨러미다 고등학교 (전학)[2]
조지 워싱턴 고등학교 (졸업)[3]
세인트 피터스버그 주니어 칼리지 (편입)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 (편입)
캘리포니아 대학교 LA 캠퍼스 (영상영화학 / B.A)
혈통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아일랜드계 미국인, 영국계 미국인
종교
무종교[4][5]
활동 기간
1963년 – 1971년
장르
사이키델릭 록
사용 악기
보컬
데뷔
1967년 도어즈 앨범 The Doors
레이블
엘렉트라 레코드(Elektra Records)
별명
The Lizard King, Mr. Mojo Risin', 3J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도어즈 결성
2.3. 전성기
2.4. 쇠퇴
2.5. 사망
3. 여담
4. 관련 영상
4.1. 영화 《도어즈(The Doors)》
4.2. 다큐멘터리 《이상했던 시절(When You're Strange)》



1. 개요[편집]



파일:짐모리슨.jpg

<math> The</math> <math> Lizard</math> <math> King</math>[1]


미국의 가수, 시인[2], 음악가, 영화 감독.

사이키델릭 록 그룹인 도어즈의 리드 싱어이자 프론트맨, 시인이었다. 당대로서는 거의 혁명적이었던 과격한 무대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으로 유명하며, 후대 프론트맨들이 시도한 과격한 퍼포먼스들을 까마득한 옛날인 1960년대에 로저 달트리, 믹 재거와 함께 정립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0년대 미국에는 베트남 전쟁, 68혁명 등의 사회적 배경을 토대로 카운터컬처(Counterculture)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기득권층(꼰대)에게 반항하고자 하는 이 문화의 선두에는 프랑스 시인 랭보의 반항심과 통찰력을 계승받은 짐 모리슨이 있었다. 그의 시적·은유적인 가사, 핫한 외모, 상식에 어긋나는 기행들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여러 젊은이들을 홀리고 있다.

27살에 생을 마감한[3] 그가 묻힌 페르 라셰즈 묘지[4][5]에는 아직도 팬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파일:external/28.media.tumblr.com/tumblr_ljqcu9lUFc1qblccto1_400.jpg

짐은 1943년 12월 8일, 미국 플로리다주의 멜번에서 훈장을 받은 해군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6] 짐이 4살일 때, 사막에서 인디언들이 사고를 당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이는 훗날 그의 노래, , 인터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어즈의 생존 멤버들이 쓴 책 <도어즈>에 실린 그의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짐은 그 죽어가던 인디언들의 이야기를 자주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짐은 한국 나이로 초, 중학생 시절부터 비트 세대의 문학에 심취하며,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인상적인 모습을 흉내내기도 하였다. 또한 말다툼을 벌이면서 용돈을 끊겠다고 엄포 놓는 어머니 클라라를 양껏 비웃으며 그녀를 넘어뜨리게 만들고 볼펜으로 어머니 팔에 낙서하는 상당한 기행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편 짐의 아버지는 엄격한 군대식 규율을 가정교육에도 그대로 적용시켰다. 특히 짐의 아버지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후에야 인정했다)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겠다는 아들의 편지에 '4년간 학비를 대준 것, 짐이 어릴 때 피아노 레슨도 거부했고, 캐롤도 부른 적이 없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밴드는 돈이 안 된다는 것.' 이러한 이유로 엄청나게 반대했다. 짐은 이에 그 시점부터 아버지와의 모든 연락을 끊고,[7] 도어즈 활동 당시 자신의 프로필에서는 Family Info : Dead라고 써버렸다.

그는 16살 때부터 프리드리히 니체아르튀르 랭보의 작품, 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 같은 고전, 심지어는 오노레 드 발자크장 콕토,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율리시스 같이 시대를 가리지 않는 문학들까지 섭렵하며 갖가지 글귀를 써내려나가던 조숙한 학생이였다. 이 메모들은 훗날 도어즈의 가사에 깨알같이, 두고두고, 요긴하게 쓰이며 시집[8]으로 출판되기도 한다. 짐의 영어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걔는 책을 엄청 많이 읽긴 읽는데, 국회도서관에서 듣도 보도 못한 16~17세기의 악마숭배 관련 책들을 읽더라."란다.[9]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학생 시절 그는 공동아파트에 얹혀 살았는데, 라디오에서 엘비스의 노래만 나오면 볼륨을 최대로 올리는 바람에 결국 쫓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아파트에서는 쫓겨났을 지언정, 짐은 노래를 배운 적도 없음에도 (심지어 악보조차 읽지 못했다!) 엘비스에게 영향을 받은 독특한 창법을 갖게 된다.

짐은 세인트피터즈버그 대학, 플로리다 주립대학을 거쳐 3번째로 UCLA 영화학과에 들어갔고, 이 곳에서 도어즈 결성의 주 축이 되는 레이 만자렉을 만났다.

파일:external/4.bp.blogspot.com/mugshot.jpg
짐의 머그샷. 1963년 9월 28일 찍은 사진이다. 19살 때 축구경기 중 난동을 피워 체포되기도 했다.


2.2. 도어즈 결성[편집]


파일:external/drop.ndtv.com/jim-manzarek.jpg

짐은 영화를 매우 좋아했지만, 그가 UCLA에서 만든 첫 작품은 지루했다. 그래서 동기들에게는 야유를, 교수에게는 D학점을 받았다. 짐은 UCLA에서 레이 만자렉과 만나게 되는데, 레이는 클래식 피아노를 치다가 재즈블루스쪽으로 전향한 키보디스트였다. 역시 블루스를 좋아하던 짐은 레이와 함께 음악 취향, 영화 취향을 공유하고 우정을 나누었다. 참고로 이때 짐 모리슨은 훗날 영화감독으로 유명해지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하길종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하길종 감독은 그런 반항아는 본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UCLA 영화학과를 졸업한[10] 짐이 보헤미안 라이프를 즐기던 1965년 여름, 베니스 해변에서 짐과 레이는 다시 마주치게 된다. 락 콘서트의 노래를 쓰고 있던 레이는 짐에게 "한 곡 뽑아보라"고 하는데, 짐은 "노래 잘 못한다"고 수줍어하면서 자신이 가사를 쓴 <Moonlight Drive>를 불러주었다.

Let's swim to the moon, uh huh
Let's climb through the tide
Penetrate the evenin' that the
City sleeps to hide
(후략)

레이는 락 음악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이러한 짐의 시적인 가사에 뿅 반해서 당장 락 밴드를 만들자고 제안했는데, 짐은 이름까지 미리 골라놓았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의 시구절 중 하나인

If the doors of perception were cleansed,

everything would appear to man as it is: Infinite

에서 따온 The Doors였다.
(참고로 지각의 문을 청소하는 세제는 LSD였다.)


2.3. 전성기[편집]


도어즈는 처음에 '위스키 어 고고[11]'라는 바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여기서 만난 아일랜드인 선배 싱어인 밴 모리슨은 자신과 성씨가 같은 짐 모리슨에게 무대매너, 반항적이고 위협적이게 보이는 법, 간주 나가는 동안 즉석에서 시 읊는 법 등을 전수해주었다. 그러나 도어즈는 <The End>라는 근친상간의 가사가 담긴 곡을 부르다가 바에서 잘린다. 하지만 이미 음반 계약 기회가 들어왔던 그들에게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는 게 함정.

도어즈의 첫 앨범 The Doors(1967)에 수록된 <Light My Fire>가 3분짜리로 편곡되어 큰 히트를 친 후[12] 도어즈는 승승장구하게 된다. 처음에는 관중들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노래가 끝나면 뒤돌아서있던 수줍은 리드 싱어 짐은 이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으며,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서 자신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굳히게 된다. 많은 소녀팬들을 열광시켰던 그의 가죽바지도 이미지 메이킹 중 하나였다.

뉴욕에 건너간 도어즈비틀즈, 롤링 스톤즈가 거쳐갔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게 된다. 그런데 에드 설리번이 <Light My Fire>의 가사 중 'Girl, We couldn't get much higher'가 마약으로 인한 황홀경을 암시한다고 하여 수정을 요구하였다. 짐은 'better'로 수정하겠다고 했지만, 1절에서는 긴장해서 그걸 까먹은 듯 'higher'을 좀 얼버무리더니 2절에서는 아예 작정한 듯이 'Higher!!!!' 질러버린다. 외부링크된 유튜브 영상의 2분 15초 경을 보시라. Light My Fire 라이브 영상

이러한 짐 모리슨의 행동에 화가 난 설리반은 라이브 후에 도어즈 멤버들과 악수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프로듀서는 도어즈에게 '너네 다시는 에드 설리반 쇼에 나오지 말아라'라는 뜻을 전했다고.

어찌 되었건 간에 도어즈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2집 <Strange Days>(1967)를 냈을 무렵엔 이미 미국에서 인기 최고의 락 밴드가 되어있었다. 같은 해, 사진가 조엘 브로드스키(Joel Brodsky)는 'The Young Lion'이라는 제목 하에 짐의 흑백사진을 찍었는데, 이는 짐 모리슨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사진이 되어 컴필레이션 앨범, 책, 기념품 등에서 사골처럼 우려먹는다.

3집 <Waiting for the Sun>(1968)은 이전의 강렬했던 음악에서 조금 더 부드러운 음악을 추구하며 역시나 차트 1위를 석권했다. 그러나...

2.4. 쇠퇴[편집]


He did all those thing that I suppose were originally sexual things but as he got fatter and dirtier and more screwed up, they became bizarre. So it was really sickening to watch.

내가 예전에 짐 모리슨이 섹시했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다 뚱뚱해지거나 더러워지면서 엉망이되고 기괴해졌어요. 그래서 짐의 공연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죠.

로버트 플랜트


파일:external/31.media.tumblr.com/tumblr_mr8suyfU3Z1sydva2o1_400.jpg

4집 <Soft Parade>의 녹음 무렵부터, 짐은 약에 쩔었거나 술에 만취한 상태로 스튜디오에 출첵하기 시작한다. 공연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였다. 짐이 공연에 늦게 나오면 나머지 멤버들은 인스트러멘털만 연주하거나, 혹은 레이 만자렉이 노래를 해서 인내심 없는 관객들을 달래곤 했다.

짐의 태도와 함께 외모도 크게 변했다. 날씬했던 짐은 1969년 들어서 살찌고, 수염도 덥수룩하게 기르고, 옷도 대충대충 입기 시작했다. 항상 고수하던 벨트+가죽바지 대신 후줄근한 티셔츠에 청바지 등을 걸쳤다.

그런데 문제는 1969년 3월 1일, 전미 투어의 첫 번째 도시인 마이애미 공연에서 터진다.

짐은 여자친구인 패멀라 커슨과 싸우느라 비행기를 놓쳐서 공연에 늦게 도착했다. 관객들은 성난 상태였는데, 짐은 술에 취해서 외롭다느니, 사랑이 필요하다느니 주절거리다가, 너흰 바보이자 노예일 뿐이라고 욕을 퍼붓는다. 그리고 도어즈의 기타리스트던 로비 크리거 앞에 무릎을 꿇고 구강성교를 흉내 내거나[13], 옷을 벗는 등 온갖 기행을 다한다. 4곡도 제대로 연주 못한 이 공연을 계기로 짐은 풍기문란죄·성기노출죄로 고소당하고,[14] 관중들과의 관계 역시 틀어졌다. 고소로 인하여 도어즈의 모든 투어 일정이 취소되고, 짐은 6개월의 징역을 받은 뒤 보석으로 풀려났다. 지난 2010년, 짐 모리슨의 성기노출죄는 사면되었다.연합뉴스 기사

카운터컬처가 점점 제압 당하고 사회 분위기는 보수적으로 변해가면서, 관중들은 더이상 짐을 '시대의 반항아'로 떠받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미친놈'이나 구경거리쯤으로 여기게 되었다. 관중들은 이제 짐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짐의 미친 짓을 구경하기 위하여 공연을 예매했다. 이러한 관객들의 태도에 점차적으로 지쳐가기 시작한 짐은 스스로의 모습을 더 잘 알고서는, 이후의 공연에서는 열정적으로 노래를 하는데만 집중하였다.


2.5. 사망[편집]


짐은 5집 Morrison Hotel(1970)과 6집 L.A. Woman(1971)을 녹음한 후, 1971년 도어즈를 탈퇴한다. 그리고 여자친구 패멀라 커슨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은둔했다. 이 커플은 파리를 걸으며 건축물 등을 감상했다.

파일:external/under-overground.com/jim_morrison_pamela_courson2.jpg
1971년 6월 28일, 여자친구 파멜라와 함께 파리에서 거주할 때 찍힌 사진.
허나 이 사진을 찍은 후, 불과 5일 만인 7월 3일에 짐 모리슨은 사망한다.

이 시기의 짐은 수염도 깎고 살도 조금씩 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고생+체중증가+수염자국의 크리티컬 3콤보로 심각하게 역변했기에, 짐이 혼자 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셔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정말로 시에 전념하려고 애썼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그가 평소 존경하던 시인들과 작가들처럼 그는 사후에도 계속 읽힐 수 있는 글을 남김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했다.

그러던 1971년 7월 3일, 짐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패멀라는 누군가를 부르려고 했지만, 짐은 목욕을 하면 좀 나아질 거라며 목욕을 했다. 그리고 짐은 "팸, 너 거기 있어?(Pam, are you still there?)"이라는 말을 남기고서 욕조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의 나이 불과 27세였다. 프랑스 당국에서 부검을 실시하지 않았기에 그의 정확한 사인에 대하여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나, 헤로인 과다복용이 가장 유력한 설이다. 또한 안타깝게도, 그의 여자친구 패멀라 커슨도 3년 후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짐과 같은 나이인 27세에 사망한다. 짐은 파리, 파멜라는 로스 앤젤레스에서 죽었기에 짐 옆에 묻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비석에 패멀라 수전 모리슨[15]으로 쓰였다.[16]

여담인데 그가 죽고 2달도 안돼 그 해, 85살이던 할아버지 폴 레이먼드 모리슨도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 캐롤라인 후버 모리슨은 1984년에 93살까지 장수한 뒤 사망했고 어머니 클라라는 2005년에 82살, 아버지 조지 스티븐은 2008년에 89살로 세상을 떠나 요절한 그와 달리 오래 살았다.


3. 여담[편집]


  • 자유롭고 반항적인 이미지 때문에 가려진 사실이지만 상당한 인텔리다. 어찌보면 괴짜 타입의 천재라고 볼 수도 있는데, 상기한 그의 평전 번역판에 따르면, 짐 모리슨은 조지워싱턴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평균 성적 88.32점을 큰 어려움 없이 유지했고, 우등생 명단에 2번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독특한 기질로 인한 여러가지 기행을 거듭하고, 심지어 UCLA 영상영화학에서 D학점을 받는 등의 일이 있었지만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다. 다만 워낙 자유분방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성격 탓에 대학을 여러번 옮기는 등 방황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 『반역의 시인, 랭보와 짐 모리슨』이란 책을 보면 짐 모리슨의 대학 교수가 그의 논문에 대해 인상 깊었다고 평하는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짐 모리슨은 기본적으로 학문에 열정이 매우 깊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 여러 기록과 증언에서 드러난다. 그의 시와 가사 역시 고전 문학이나 역사,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따온 상징들이 많다. 애초에 짐은 중학생 나이에 이미 율리시스 등의 어려운 문학들을 탐독했던 사람이다.


  • 의외로 음악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 있었다. 1970년대 들어서는 인터뷰에서 여러 음악가들에 대해 평가를 했는데, 프랭크 시나트라, 페기 리,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음악가들을 최근에 굉장히 많이 듣고 있다고 답했다. 또 레드 제플린 같은 록 밴드들은 너무 과격해서 50년대나 40년대의 로큰롤, 재즈, 스탠더드 팝이 더 좋다고 평가했다. 또 동양과 아프리카의 민속 음악, 클래식 음악도 즐겨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클래식이나 재즈와 같은 요소들을 사이키델릭 록에 도입했던 핑크 플로이드의 공연을 보고 엄청나게 마음에 들어하며 가장 좋아하는 록밴드를 핑크 플로이드라고 하기도 했다.
    • 사실 당시의 사이키델릭 록은 퍼즈 톤 등 새로운 사운드에 대한 실험에 몰두하던 경향이 있었는데, 도어즈는 그런 유행을 무작정 따르기보단 블루스, 재즈 등 고전적인 대중음악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음악을 고수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일수도 있다.

  • 만약 그가 사망하지 않았더라도, 당시 사이키델릭 록의 열풍이 식은지 오래되어 가고 있었던 까닭에 도어즈로 활동했더라도 음악 성향에서의 변화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1970년 인터뷰에서 밝힌 점들을 감안하면 소울이나 재즈, 로큰롤, 스탠더드 팝 방향으로 조금 더 음악 성향이 보수적으로 변하거나, 아니면 핑크 플로이드와 같이 프로그레시브한 성향으로 변했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4. 관련 영상[편집]



4.1. 영화 《도어즈(The Doors)》[편집]




1991년에 개봉한 짐 모리슨의 전기 영화로, 올리버 스톤 감독, 발 킬머 주연의 영화이다. 짐 모리슨의 재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듯하나(심지어 발 킬머가 노래도 불렀다.), 도어즈 멤버들과 팬 사이에서는 평판이 영 좋지 않은 듯하다. 평은 그럭저럭 받았으나, 흥행은 별로 성공하지 못해 제작비 3200만 달러로 만들어 북미 흥행 3400만 달러에 그쳤다. 극장이라 수익을 나누면 손해를 본 셈이다.

한국에서 극중 여러 장면이 검열에 걸려 2년동안 수입금지 당했다가 1993년 4월에서야 도어스 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서울관객은 6만 1천명으로 역시 한국에서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파일:external/www.dvdbeaver.com/large%20the%20doors%20%20blu-ray6.jpg
실눈 뜨고 보면 비슷하다.


4.2. 다큐멘터리 《이상했던 시절(When You're Strange)》[편집]


파일:external/4.bp.blogspot.com/when_youre_strange-poster.jpg

2010년에 개봉한 도어스의 다큐멘터리로, 조니 뎁이 내레이션을 맡았다. 제목은 2집 Strange Days에 수록된 <People are strange>의 가사 중 한 구절에서 따온 것. 짐이 찍은 영화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영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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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는 Mr. Mojo Risin'으로도 불린다.[2] 짐은 시에서 무궁한 가능성을 발견하려 했고, 그만큼 시문학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철학적인 영감들과 여백과 빽빽함을 아우르는 사색들로 채워진 그의 시구들은 종종 도어스의 곡에 가사로 들어가기도 했다.[3] 1970년에 사망한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와 함께 3J로 불린다. 세 천재들은 모두 만 2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4] 랭보, 프레데리크 쇼팽, 오스카 와일드, 에디트 피아프 등이 묻힌 파리의 묘지. 프랑스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묘하게도 프랑스는 짐의 생애에 있어 마지막 기착지가 되었는데 그는 생을 마감하기 전 이곳을 관광하였다. 많은 명사들이 잠들어 있지만, 특히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랭보를 만나려고 했던 까닭이다.[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Jim-Morrison_Pere_Lachaise_2.jpg 짐 모리슨의 묘지[6] 짐의 아버지 스티브 모리슨(Steve Morrison)은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 엘리트였다. 짐이 성장하면서는 해군 대령으로까지 진급하였다. 훗날 짐이 도어스로 자리를 잡고 밴드의 명곡인 'Light My Fire'로 승승장구할 때, 스티브는 47세라는 나이에 해군 제독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이 대목이 짐 모리슨의 평전 번역판 『짐 모리슨, 라이트 마이 파이어』(제리 홉킨스 & 대니 슈거맨 저, 김경진 역, 을유문화사, 2020)에서는 "짐은 몰랐지만, 〈Light My Fire〉가 1위를 하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나이 마흔일곱에 가장 젊은 미 해군 제독이 됨으로써 자신의 차트 정상에 올랐다"(216쪽)로 재치 있게 쓰여 있다.[7] 여동생과 남동생하고는 간간히 연락을 했다고 한다.[8] <The Lord And The Creatures>, 짐이 쓴 산문시의 형태는 랭보에게 영향을 받았다.[9] 평전 번역판에는 정확히 이렇게 쓰여 있다. "짐은 정말 많이, 아마도 학급의 어떤 학생보다 많이 읽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가 읽는 모든 게 참 별나서, 저는 다른 선생님을 의회 도서관에 보내 짐의 보고서에 있는 책들이 진짜 존재하는지 확인했어요. 그게 16~17세기 악마 연구에 대한 영어 책들이어서 짐이 지어낸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죠.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것들은 실제로 있었고, 저는 짐이 쓴 리포트를 보고 그가 오직 의회 도서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그 책들을 읽었다는 걸 확신했습니다."(54쪽)[10]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짐이 UCLA를 졸업하였는데, 반항의식의 일부로 졸업식 참석을 거부하고 편지에 동봉된 졸업증명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항목 3.2에 언급된 다큐멘터리에서는 짐이 졸업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이사 갔다고 딸랑 한 마디, 5초 나온다. 질적으로 전자가 더 풍부하므로 전자를 차용하였다.[11] 여러 유명 락밴드들을 배출한 LA 지역의 유서깊은 클럽이다. 만자렉이 도어즈로 데뷔하기 전에 찍은 단편 영화에도 등장한다.[12] 사실 맨 처음 밀었던 싱글, <Break on Through(To the Other Side)>는 반응이 미적지근(106위)했기 때문에 프로듀서가 재빨리 카드를 바꿔친 것이다.[13] 드러머 존 덴스모어의 회고에 따르면 그건 구강성교를 흉내 낸것이 아니라 기타연주를 하는 로비 크리거의 현란한 손가락 움직임에 경의를 표하는 제스츄어 였다고 한다.[14] 짐 모리슨이 실제로 공연에서 성기를 노출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성기를 노출한 사진이나 영상은 남아있지 않다.[15] Pamela Susan Morrison 1946.12.22.~1974.4.25.[16] 아이러니하게도 패멀라의 아버지도 짐의 아버지처럼 미 해군 출신이였다. 그리고 짐과 패멀라 사후 유산 문제 때문에 짐의 부모와 함께 법정 다툼까지 갔다. 하지만 두 집안 모두 지쳐서 1979년에 서로 재산 분배 합의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