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설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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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진설문답 서문
4.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陣說問答. 조선 초기의 문신인 변계량(1369~1430)이 여말선초 시기에 활약했던 병법가들의 진법서적에 대해 평론한 병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후인본이 소장되어 있다.


2. 내용[편집]


조선 건국 초기의 문신인 변계량이 진도지법이 간행된 1421년(세종 3년) 경에 저술한 병서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까지 활약했던 우리나라 병법가들의 병법이론에 대해 문답 형식으로 평론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많은 전쟁을 겪어왔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전쟁이론을 책으로 내어 타인에게 알리는 것에는 매우 무심하였다. 조선 이전 신라고려시대, 약 1,500여년 동안에 간행된 한국의 군사서적이라고는 무오병법화령도, 김해병서와 이제현의 진법 단 네 종류 뿐이다. 기록 누락을 감안하더라도 조선 건국 이전까지의 우리나라는 병법서적에 한해서는 고유의 이론서를 만들지 못하고 단지 중국의 저술을 답습할 뿐이었다.

그러다 조선 초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군사서적이 출간되었는데 진설문답도 그 중 하나이다. 진설문답은 일종의 논문에 가까운 병서로, 1400년대 초 당시 진법에 얽힌 논쟁들을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다룬 것이 특징이다. 이제현(1287~1367)과 정도전(1342~1398), 하륜(1347~1416) 등 고려말 조선초의 다양한 병법가들의 병서와 병법이론을 비평한다.

진설문답에서 변계량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해명한 부분은 이른바 후충선출치적(後衝先出致敵) 논쟁이다. 적과 조우할 경우 전방에 위치한 부대는 현 위치에서 대기하고 후방에 위치한 부대가 앞으로 이동, 전방 부대를 초월해서 적을 공격하라는 지침이 과연 옳은 것인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조선 초기 전술적 수준의 군대 운용에 대한 토론 내용이 담긴 저술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조선 초기 군사사상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1421년 경에 만들어진 한국의 병서로, 1300~1400년대 한국의 주요 병법이론과 그 비평론에 대해 연구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3. 진설문답 서문[편집]


진을 치는 법에 대한 문답[陣說問答] 서문 변계량(卞季良)

어떤 사람이 신(臣)에게 묻기를,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ㆍ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ㆍ호정(浩亭 하륜〈河崙〉)등 여러 선생이 찬술(撰述)한 진법(陣法)이 요사이 찬술한 진법과는 다름이 있는데, 그 상세한 것이 어떤 것인가.” 하기에, 신은 말하기를, “삼봉이 찬술한 것은 대개 진을 익히는 줄거리만을 말한 것인데, 그 상세한 것에 대해서는 미처 말하지 않았고, 또 호정이 찬술한 것은 지금 진법과 간간이 같지 않은 것이 있으나, 대의는 모두 익재의 말을 기술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또 말하기를, “삼봉의 이른바, ‘전형(前衡)이 움직이지 않고, 후충(後衝)이 먼저 나와서 적을 오게 한다.’ 는 말은 논의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르게 여기는 이가 많고, 또 익재와 호정이 찬술한 것에는 그런 말이 없는데, 그대가 홀로 이 말을 좇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진법이 황제(黃帝)에서부터 나와 주(周) 나라에 와서 완비되었는데, 이 진법은 그 본의(本意)를 연구해 보면, 나무랄 수 없는 것이다. 고인의 이른바, ‘주나라 법이 번거롭되 대단히 곡진하다.’ 한 것은 옳은 말이다. 삼봉이 이른바, ‘전형이 중추(中軸)가 되어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은 수병(守兵)이 되고, 후충이 먼저 나가 적을 오게 하는 것은 정병(正兵)이 되며, 우익ㆍ좌익에 있는 군사가 측면에서 돌격하는 것은 기병(奇兵)이다.’ 한 것은, 스스로 굳게 하는 계책이 매우 주밀하여, 고인들의 진법에 대한 그 본의를 얻은 것같으니, 다른 사람의 말은 이에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또, “삼봉이 찬술한 것은 스스로 굳게 하는 데는 좋지마는, 병가(兵家)의 법은 뒤를 염려하므로, 주의가 깊어야 하는 것인데, 만약 이 말대로 하면 적이 그뒤를 타고 들어오면 어떻게 대응하려 하는가. 또 우리 나라의 땅이 평평한 곳은 적고 험한 곳이 많으니, 적을 만났을 때 비록 후충으로 하여금 먼저 나가게 하려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비록 또 평평한 땅에 진을 치고 있다 하더라도 백만 군사가 각각 나뉘어 진을 쳤는데, 전형과 후충이 서로 떨어짐이 매우 격조하니, 적이 우리에게 대어들 때 반드시 후충이 먼저 나갈 것을 기다린다면 너무 늦지 않겠는가. 논의하는 사람들의 말이 그른 것은 아닌데, 그대가 삼봉의 의견을 좇는 것은 무엇을 상고해 보고 반드시 그렇다고 하는가.” 하고 묻기에, 신은, “후충이 먼저 나와 적을 오게 한다고 하는 것은, 적이 앞에 왔을 때를 두고 말한 것이니, 이것은 일면의 전법이다. 만약에 적이 앞에 와 있고 또 그 뒤를 타고 들어오면, 이것은 적을 전후면으로 받는 경우이니 진실로 그 법이 따로 있고, 또 3면ㆍ4면에 적을 받는 경우에 있어서는, 역시 여기에 따른 그 법이 각각 있으니, 어찌 전후면에서만 적을 받는 그런 법을 가지고 전법을 논의하리오. 더욱이 유격대의 말과 군사가 사방으로 출동하여 저 적을 망보고 있는 것이, 혹 1백리에도 나가 있고, 2백리에도 나가 있으니, 여기에 어찌 적이 뒤를 타고 들어옴을 모르고 후충이 먼저 나갈 리가 있겠는가. 또 유격대가 이미 적을 망보고 있으면, 전후위(前後衛)가 비록 격조하다 하더라도 후충이 나와 치지 못할 염려가 있겠는가. 설사 갑자기 적을 만났다 하더라도 그 접촉되는 곳이 앞이 되는 법이 있지 않은가. 험한 땅에 이르러서는 또 이에 응변하는 술로 각각 그 진법이 있으니, 산(山)ㆍ택(澤)ㆍ조(鳥)ㆍ운(雲)의 진과 곡전(谷戰)ㆍ수전(水戰) 등의 법이 곧 이것이다. 또 오행(五行)의 상생(相生)ㆍ상극(相克)의 법을 써서 논하면, 왼쪽은 청룡(靑龍)이요, 오른쪽은 백호(白虎)이며, 앞은 주작(朱雀)이요, 뒤는 현무(玄武)이니, 이것은 천하ㆍ고금에 있어서 똑같다. 저 적이 만약에 예진(銳陣)으로써 앞에 돌진해 오면, 우리는 곡진(曲陣)으로써 이에 충돌할 것인즉, 이것은 역시 물로써 불을 이기는 법에 합당하다. 후충이 먼저 나간다는 말은 오진 본법(五陣本法)에서 나온 것이니, 고인이 진법을 세운 것은 결코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후충이 먼저 나가는 것은 그 스스로를 굳게 하는 데 주밀함을 취했다고 하는 말은 그럴듯하지마는, 물로써 불을 이긴다는 말은 오행설(五行說)의 괴이하고 황당한 말에 구애된 것이니, 그대는 맹자(孟子)의 이른바,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보다 못하다.’는 말과 당태종(唐太宗)의 이른바, ‘구기(拘忌 음양오행설)는 일의 마땅함을 잃는다.’고 한 말을 알지 못하는가.” 하기에, 신이, “어찌 말을 이렇게 쉽게 하는가. 대개 법을 논의하든지 일을 논의하든지 간에 마땅히 사람은 한편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오행에 꼭 이착(泥着)되어도 옳지 않지마는, 오행을 무시해버리는 것도 역시 옳지 않은 일이다. 천하의 일들이 어찌 오행 밖에서 나오는 것이 있는가. 지금 진법 한 가지를 말하더라도, 좌ㆍ우ㆍ전ㆍ후ㆍ중이 오행의 위치가 아니며, 청ㆍ황ㆍ적ㆍ백ㆍ흑이 오행의 빛깔이 아니며, 곡ㆍ직ㆍ예(銳)ㆍ원(圓)ㆍ방(方)이 오행의 형태가 아닌가. 저들이 직진(直陣)으로써 하면 우리는 방진(方陣)으로써 대응하며, 적이 예진(銳陣)으로써 하면 우리는 곡진(曲陣)으로써 대응할 것이니, 병서에 이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하나뿐만이 아니다. 대개 이것은 오행의 상생ㆍ상극의 이치를 취한 것이니, 무시할 수 있겠는가. 한(漢) 나라 사람 중에 병서를 논한 이가 대개 1백 82가(家)나 되는데, 이것을 다시 53가로 정해서 4종으로 나누었으니, 4종은 권모(權謀)ㆍ형세(形勢)ㆍ음양(陰陽)ㆍ기교(技巧)이거늘, 음양에 있어서는 16가를 취하였다. 그러니 어찌 음양이 의미가 없다고 하겠는가. 맹자와 당 태종이 한 말은 대개 그때의 사정으로 말미암아 한 말이다. 맹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만이 중한 줄 알고, 인화(人和)의 귀함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취해서 그 경중을 나눈 것이니, 이것은 마치 공자(孔子)가 병(兵)ㆍ식(食)ㆍ신(信) 세 가지를 말하면서, 먼저 병을 버리라고 한 말과 같은 것이다. 기실은 인심의 화목함을 얻고 지리의 험준함을 지키며, 좋은 천시를 만나야 천하에 당적할 이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 태종의 말은, 대개 모든 장수들이 음양 구기(陰陽拘忌)를 너무 써서, 일의 마땅함을 잃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당 태종이, ‘음양 술수를 무시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물었을 때, 이정(李靖)이 대답하기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였고, 또 병법에 대해서 가장 심오한 것을 진술하여, ‘도(道)와 천지와 장법(將法)이다.’ 하여, 당태종은 그렇게 여겼다. 여기의 이른바 천지라는 것은 천시와 지리(地利)를 말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또 묻기를, “그대는 이미 후충이 먼저 나간다는 말을 좇고, 또 접촉하는 곳이 앞이 된다고 말을 하였는데, 이것은 익재와 호정이 찬술한 것을 겸해서 말한 것같으니, 어찌 말이 일정하지 않고 절충하는 바가 없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후충이 먼저 나간다는 것은 적을 대응하는 상도(常道)이고, 접촉하는 곳이 앞이 된다는 것은 갑자기 적을 만났을 때의 임기응변이다. 다만 상도만을 지킬 줄 아고 임기응변하는 도략에 어둡다든지, 아니면 응변하는 것에만 힘쓰고 고인의 진법에 대한 본의를 살피지 않으면, 이것은 두 가지가 모두 옳지 않으니, 종합하여 말하는 그것이야말로 절충해서 말한 것이다. 무엇이 일정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하였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삼봉의 말을 취해서, 고인의 진법에 대한 그 본뜻을 얻었다고 하였으나, 그 글에, ‘휘(麾 작은 기와 같은 것)의 색이 다섯 가지요, 기(旗)도 역시 다섯 가지가 있다.’ 하였고, 지금 찬술한 진법에도 그 말을 진술하였는데, 그대는 도리어 이것을 취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기를 지휘하는 데만 사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물으므로, 신은 이에 대하여, “기와 휘의 제도는 대동소이하며, 모두 지휘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오위(五衛)에 그 방위의 색이 각각 있고, 기위(旗衛)가 또 각각 오소(五所)가 있는데, 소(所)에는 또 각각 기가 있다. 이렇게 기가 많아서 삼군(三軍)의 눈을 현란하게 하는데, 여기에 또 각각 휘가 있어서 그 빛깔이 같으면 크게 번란하여 반드시 기를 휘로 오인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익재와 호정이 찬술한 것은 삼군이 기를 잘 보고 아는 데 편리하기 때문에, 이것은 바꿀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가 또, “익재와 삼봉과 호정은 전후ㆍ좌우에 다 군(軍)이라고 일컬었고, 지금 찬술한 진법에는 군을 고쳐서 익(翼)이라 하였는데, 그대는 이 둘을 모두 취하지 아니하고 위(衛)라고 바꾸었으니, 이것에 대해서는 또 설명이 있는가.” 하기에, 신은, “그것은 깊은 뜻이 없다. 세 선생이 논한 바는, 옛 진법에 대한 글을 근거로 한 것이요, 지금 찬술한 진법은 대개 중국의 오군(五軍)의 호칭을 피한 것이니, 이것을 좇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또 ‘익’이란 글자의 뜻은 본래 새에서 취한 것이니, 다만 좌우에만은 일컬을 수 있으나 전후와 중앙에는 일컫기가 미안하므로, 익을 바꾸어서 ‘위’라고 한 것이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또 묻기를, “삼진(三陣)의 법이 어떤 때는 좌군과 전군으로 한 진을 만들어 좌에 있게 하고, 혹은 우군과 후군으로 한 진을 만들어 우에 있게 하며, 어떤 때는 좌군과 후군으로 한 진을 만들어 좌에 있게 하고, 혹은 우군과 전군으로 한 진을 만들어 우에 있게 하였는데, 그대는 좌와 전을 한 진으로 한다는 말을 취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기에, 신은, “병진(兵陣)하는 법은 반드시 오른쪽으로 도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직행을 하면 오른쪽은 앞으로 나아가고 왼쪽은 뒤로 물러간다. 삼진에 있어서는 앞은 왼쪽으로 물러가고, 뒤는 오른쪽으로 나아가니, 그 이치는 마찬가지다. 진을 돌릴 때나 적을 만날 때나 모두 오른쪽으로 돌리는 법이니, 이 법을 문란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진을 치고 적을 대응하는 법이 이것뿐인가.” 하고 묻기에, 신은, “삼군의 군중으로 하여금 눈으로는 기(旗)의 빛깔을 익히 보고, 귀로는 금(金)ㆍ고(鼓)ㆍ각(角)의 소리를 익히 들으며, 손으로는 기계(器械)의 사용을 익히 하고, 발로는 빨리 가고 천천히 가는 절차를 익히 하며, 마음으로는 형벌의 해(害)와 상사(賞賜)의 이(利), 교열(敎閱)의 법을 알게 하는 것이 범례이니, 이렇게 한 뒤라야 지리를 따라 형을 변하게 하여 진을 튼튼히 할 수 있고, 기미를 따라 적을 응하여 싸움에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인즉, 어찌 일정한 법만을 고집하겠는가.” 하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그는 이어서 묻기를, “군진(軍陣)의 일을 공자는 배우지 못하였다 하였고, 맹자는 큰 죄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기에, 신은 답하기를, “이것은 역시 공자와 맹자가 격분하여 말한 것이다. 위령공(衛靈公)은 무도한 임금인데, 성인을 보고 진치는 법을 물은 것은 호전(好戰)하는 뜻을 나타낸 것인즉, 이에 공자가 배우지 못했다 하고, 그 자리를 떠나가 버렸으며, 맹자 때는 마침 천하가 바야흐로 전쟁하는 일에 급급하여, 성(城)의 쟁탈과 땅의 쟁탈로 사람을 죽여 들에 가득 차게 하였으니, 생민의 도탄이 극심했다. 그래서 맹자가 싸움을 잘하는 자는 상형(上刑 극형)을 받아야 한다 하고, 진을 잘 치는 것은 대죄(大罪)라 하였거늘, 이것은 대개 당시를 구원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배우는 이가 성현의 말씀에 대하여 응당 허심탄회하게 그 뜻을 살펴야지, 그 한 마디 말을 가지고 그대로 정론이라고는 할 수 없느니라. 사마법(司馬法)에 말하기를, ‘천하가 비록 편안하나 싸움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고, 싸움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한다.’ 하였고, 호씨(胡氏)는 말하기를, ‘병사(兵事)는 좋아해서는 안 된다. 병사를 좋아하면 반드시 스스로 자기를 불사르는 재앙을 면하지 못하고, 또 병사를 미워해서도 안된다. 병사를 미워하면 반드시 남의 병사의 화를 받을 것이다.’ 하였다. 이런 말들의 그 뜻이 한편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또 억양 경중의 분간이 있도다. 그리고 ‘너의 군사를 잘 다스리라.’ 하는 말은,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고한 말이요, ‘육사(六師)를 널리 베풀어 놓아라.’ 하는 말은 소공(召公)이 강왕(康王)에게 경계한 말이니, 주공의 큰 훈계를 가지고 공자와 맹자의 격언(格言)을 참고하며, 겸해서 사마법과 호씨의 말을 상고하면, 고인의 논병(論兵)한 뜻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臣) 계량(季良)은 이에 진설(陣說)을 짓고, 또 진법에 대하여 취사선택의 이의를 논변한 것을 써서 전하에게 올리오니, 원하옵건대, 잘 보시고 채택하소서.



4.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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