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릴 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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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릴 시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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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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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2 · 2003-04
파일:Coupe de France 2021 logo.png

2000-01 · 2002-03 · 2006-07
파일:883px-수페르리가_엘라다_로고.svg.png

2000-01 · 2002-03
베스트팀






AJ 오세르
Association de la Jeunesse Auxerroise

파일:Djibril Cissé.jpg

이름
지브릴 시세
Djibril Cissé

본명
지브릴 아룬 시세
Djibril Aruun Cissé
출생
1981년 8월 12일 (42세)
프랑스 아를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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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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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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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디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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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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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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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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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4cm / 체중 78kg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코치
소속
유스
AC 아를레스 아비뇽 (1989~1996)
님 올랭피크 (1996)
AJ 오세르 (1996~1998)
선수
AJ 오세르 (1998~2004)
리버풀 FC (2004~2007)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2007~2009)
선덜랜드 AFC (2008~2009 / 임대)
파나티나이코스 FC (2009~2011)
SS 라치오 (2011~2012)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2012~2013)
알 가라파 SC (2013 / 임대)
PFC 쿠반 크라스노다르 (2013)
SC 바스티아 (2014~2015)
JS 상피에루에즈 (2015)
이브동 스포르 FC (2017~2018)
AC 비첸자 1902 (2018~2019)
파나티나이코스 시카고 (2021)
지도자
AJ 오세르 (2023~ / 공격 코치)
국가대표
41경기 9골 (프랑스 / 2002~2011)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지도자 경력
5. 사생활
6. 여담



1. 개요[편집]


프랑스 국적의 전 축구선수. 빠른 속도와 감각적인 슛으로 유명했다. 이름의 유래는 가브리엘아랍어식 음인 지브릴.

2. 클럽 경력[편집]


코트디부아르 출신 축구선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8살이던 1989년 부터 AC 아를 아비뇽 유스팀을 시작으로 나임스 올림픽 유스팀, AJ 옥세르 유스팀을 거쳐 1998년에 AJ 옥세르에 정식 입단한다. 2001/02 시즌엔 22골, 2003/04 시즌엔 26골을 기록하며 리그앙에서 2번 득점왕을 차지했다. 자국내에서 지금의 음바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며 2004년 프리미어리그 리버풀 FC에 입단하기까지 리그 통산 128경기 70골을 기록하였다.

리버풀에선 시세를 잡기위해 당시까지 리버풀 역대 최대 이적료인 1,450만 파운드를 쏟아부었다.[1] 그러나 2004/05 시즌 초반 블랙번 로버스와의 경기중 악의적인 태클로 왼쪽 다리뼈가 골절되어 당시 영상 제대로된 활약을 하지 못했으며 2시즌동안 13골 밖에 넣지 못했다. 리버풀에서는 이스탄불의 기적때 승부차기의 2번키거로 나서 골을 성공시키기도 했고, 2005/06 FA컵 결승전에서는 환상적인 발리슛으로 만회골을 넣는 등 금액에 비해서는 모자라긴 해도 적재적소에 활약하였다.

2006년 6월 7일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전반 11분 정즈태클에 오른쪽 다리뼈가 절단났으며 당시 영상 이 이후로 국가대표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2] 사실상 리버풀에서 방출당했으며 마르세유로 임대보내졌다.

큰 부상을 잘 견뎌내고 2007/08 시즌에 800만 유로로 마르세유로 이적하여 리그 통산 48경기 24골을 기록하며 녹슬지 않은 득점 감각을 보여줬다. 2008년 선더랜드 AFC로 임대되어 다시 프리미어리그에 왔지만 35경기 10골의 다소 애매한 기록으로 선더랜드에 완전 이적하지 못하고 마르세유로 다시 돌아왔다.

2009년 파나티나이코스와 이적료 800만 유로, 연봉 250만 유로로 4년 계약을 했다. 다시 포텐을 터트린 시세는 2009/10 시즌 23골, 2010/11 시즌 20골을 기록하여 두 시즌 연속 수페르리가 엘라다 득점왕을 차지하며 클래스를 증명했다. 이 결과로 남아공 월드컵에 프랑스 국가대표로 다시 승선할 수 있었다.[3] 하지만 그리스에서 극심한 인종차별[4]에 염증을 느낀 시세는 구단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이적을 요청하였고 결국 2011년 SS 라치오에 580만 유로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라치오에서 리그에서는 18경기 1골을 포함해 모든 경기를 다 합쳐도 27경기 5골이라는 말도 안되는 성적[5]을 보여 겨울 이적 시장에서 400만 유로로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에 팔렸다.

2011/12 시즌에 2년 반 계약으로 입단한 시세는 마크 휴즈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8경기 6골을 기록해 팀을 강등위기에서 구해내며 QPR 팬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6]

2012/13 시즌 들어 급격한 폼 하락[7]으로 8경기째 골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캐피탈 원 컵 32강 레딩 FC전에서 후반 25분 강력한 중거리슛으로 시즌 첫 골을 기록했지만 팀은 2:3으로 역전패하였다.

드디어 11월 4일 레딩과의 0승 더비에서 9경기 출전 만에 시즌 첫골을 넣으며 무승부에 도움을 주었다.

눈물나는 전반기를 보내며 사실상 방출아닌 방출로 결국 카타르의 알 가라파로 임대 이적되었다.

카타르의 스타스 리그로 임대가서 2경기만에 데뷔골을 터트리며 녹슬지 않은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프리미어 리그와 수준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골은 골.

2014년 1월, 겨울 이적시장을 통해 SC 바스티아와 18개월 계약을 맺고 자국무대에 복귀했다. 그리고 2015년 10월 눈물의 은퇴식과 함께 그라운드를 떠났다. 몸이 더 이상 따라주지 않는 것을 느꼈다고 했는데, 2015년 프랑스 레위나옹 리가의 장피에루에즈를 거쳐 2017년부터 2018년까지는 스위스의 구단 이베르돈에서 스트라이커로 뛰었다.

2018년 8월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세리에 D 소속의 AC 비첸자 1902와 계약을 맺었다. 2012년 라치오를 떠난 이후 6년 만에 시세가 이탈리아 무대로 돌아왔다. 시즌이 끝나고 은퇴를 선언했다.

2020년 5월 시세는 자신의 리그앙 통산 골이 96골을 기록중인데, 100골을 기록하기 위해 현역 복귀할 의사가 있으며, 무보수로 뛸 수도 있다고 했다.

이후 2021년 미국 4부리그 파나티나이코스 시카고에 입단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2002년 5월 18일 친선경기 벨기에전에서 후반 3분 다비드 트레제게와 교체되며 A매치에 데뷔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2023년 7월 3일, AJ 오세르의 공격 코치로 임명되었다.#


5. 사생활[편집]


  • 패션 센스가 매우 뛰어나고 전신에 문신을 새겨넣었다. 독특한 헤어스타일에 모발과 수염은 염색으로 자주 색이 바뀐다.

  • 2004년 리버풀로 이적해 영국으로 왔을 때 체셔주 프로드셤 마을에 있는 저택을 200만 파운드에 구입했다. 그리고 프로드셤의 영주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얼마 뒤 인근 여러 개의 집을 샀으며, 체셔주 산림 사냥꾼들이 그의 땅에서 사냥을 하는 것을 막았다. 대략 9에이커[8]의 면적인데 과거 4세기부터 이곳의 영주는 사냥을 허가해주는 전통을 시세는 불허한 것. 그래서 언론으로부터 끈질기게 공세를 당했으며 축구에 전념하기 힘들었다.

  • 2005년 6월 18일 주드 리틀러와 결혼하였다. 결혼식은 북웨일스 보델루이단성에서 200명 넘는 하객과 숀 라이트 필립스, 루이 사아, 실뱅 윌토르 등 유명한 축구 선수들을 초대해서 진행되었으며 리버풀을 상징하는 붉은 턱시도를 입었다. 사진만 보면 딸의 결혼을 축하하는 아버지같은데... 1975년생인 그녀는 1994년도에 낳은 아들 리암이 있었으며, 81년생인 시세는 2001년도에 딸 로나를 낳았었다. 2005년 결혼 후 2006년 카시우스 클레이, 2008년 프린스 코비, 2010년 말리 잭슨을 낳았다. 그런고로 2012년 만 31세인 시세에게 만 18세의 아들이 있는 것이다.

  • 2005년 15살 소년을 때려 경찰에게 주의받고, 2006년에는 임신한 부인을 때려 역시 경찰에게 주의받았다. 2009년 뉴캐슬에 있는 클럽 바깥에서 여자를 때려 경찰에 잡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 2007년 4월 일렉트로 하우스풍의 음악을 선곡하여 수록한 앨범을 와그람 뮤직에서 발매했다. 제목은 MUSIC AND ME: THE DJ INSIDE ME...DJIBRIL CISSE

  • 마르세유로 막 이적한 2007년엔 영화 택시 4에 카메오로 출연하였다. 프랑스 리그앙 복귀 경기에서 경기장까지 가기위해 주인공의 택시를 불러서 경기장에 도착한다. 주인공들은 경기장 한가운데에 택시를 주차해놓고 시세가 킥오프하자마자 골을 넣는 광경을 보고있다가 심판의 제지에 차를 뺀다.

  • 2010년 7월 4일 비스트 윤두준 트위터로 지브릴 시세와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일본에서 쇼핑하던 중 우연히 시세를 만났는데 손동운의 주선으로 멤버들과 사진을 찍었다는 것. 윤두준으로서는 프랑스 축구스타를 만나서 매우 떨렸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단체 투샷


  • 2012년 10월 9일 영국 데일리 메일은 "6살 연상인 부인 주드와 결혼 7년만인 2012년 이혼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몇 개월 전부터 별거에 들어갔으며 그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2012/13 시즌 들어 골가뭄을 겪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을 듯 하다. 대체적으로 부인을 비난하고 있다. 2014년 둘은 결국 이혼하였다.

  • 2012년 11월 17일 사우스햄튼과의 12라운드 경기에서 패한 뒤, 트위터에 '시세는 형편 없다'라는 글이 올라오자 시세가 '훈련장으로 와라, 얼굴 맞대고 말해봐라'라며 훈련장 주소까지 첨부해 글을 썼다. 팬들의 비난이 커지자 글을 삭제했고 '위기에서 벗어날 것을 약속한다'는 글을 올렸다. 구단 관계자는 시세가 훈련에 참여하지 않을 거라고 전했다. 사실 이건 시세만의 잘못이 아닐 정도로 당시 QPR은 역대급 개막장 팀이었다. 공격수한테 제대로 된 패스 하나가 날라온 적 없이 대충 크로스 올리고 롱패스 때리면 공격수들이 알아서 볼간수하면서 드리블해서 어떻게든 우겨넣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 코트디부아르 출신 부모를 둔 무슬림이었으나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6. 여담[편집]


[1] 이 기록은 2007년 페르난도 토레스를 영입하며 갱신된다.[2] 6월 19일 독일 월드컵 G조에서 대한민국프랑스의 경기가 있었기 때문에 몇몇 개념 없는 대한민국 팬들은 8년 전의 일을 까맣게 잊고 그의 부상에 기뻐하기도 하였다. 그 전까지 그는 티에리 앙리와 투톱이었다. 최종 엔트리에 등록되었으나 이 부상으로 인해 시드니 고부가 대신 등록되었다.[3] 시세의 23골이 나오기 전까지 6년동안 리그 득점왕 중 20골을 넘긴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2008/09 시즌은 14골로 공동 1위. 2009/10 시즌은 3명이 공동 2위로 11골.[4] 시세가 공을 잡으면 원숭이 울음소리와 흉내를 내고 모형 바나나를 흔들어댔으며, 급기야 올림피아코스 팬들에게 공격당하기도 하였다.[5] 다만 라치오 시절의 부진의 경우에는 그나마 참작을 둘 수는 있기는 했던 게 시세의 빠른 스피드만 믿고 스트라이커인 시세를 윙어로 돌린 라치오의 전술도 문제였긴 했다. 이때의 라치오는 원톱 전술을 썼던 데다가 주전 스트라이커가 라치오 이적 뒤 회춘모드가 발동된 미로슬라프 클로제였다보니 스트라이커 자리에서 뛸 수가 없기는 했었다.[6] 그래서 그런지 2012/13 시즌 폼이 하락한 시세지만 공만 잡아도 팬들은 환호성을 날린다.[7] 클럽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기복이 굉장히 심한 선수다.[8] 36422㎡, 11018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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