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메 싱계 왕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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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 제4대 국왕
지그메 싱계 왕축
འཇིགས་མེད་སེང་གེ་དབང་ཕྱུག
Jigme Singye Wangch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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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55년 11월 11일 (68세)
팀푸 데첸촐링 궁
즉위
1972년 7월 24일
재위기간
제4대 국왕
1972년 7월 24일 ~ 2006년 12월 9일
배우자[1]
도르지 왕모
체림 펨
체링 양모
상아이 초덴
자녀
아들 3명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
딸 2명

1. 개요
2. 갑작스런 즉위
3. 업적
4. 다사다난한 결혼 일화(…)
5. 문제점
6. 기타



1. 개요[편집]


부탄 4대 국왕이다. 1972년 7월 24일 즉위하고 34년 동안 부탄을 통치한 뒤, 2006년 12월 태자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에게 국왕자리를 물려준다.


2. 갑작스런 즉위[편집]


1972년 7월 21일 케냐 나이로비에 국빈으로 방문 중이던 아버지 지그메 도르지 왕축 국왕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왕좌가 비게 되자, 이 당시 17살이던 지그메 싱계 왕축 태자가 급히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현재 부탄 최연소 국왕 즉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 초대 국왕인 우겐 왕축을 제외하고 그의 할아버지아버지는 20대 초중반에 즉위했다.


3. 업적[편집]


현재 전 세계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국민총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를 최초로 고안하고 이를 기준으로 통치를 한 걸로 유명하다.[2] 급속한 경제 성장보다 ‘국민의 행복’이 국정 운영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돼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이른바 행복정책 4대 목표를 설정했다. 환경보호, 문화보존 및 진흥, 균형있는 사회경제적 발전, 좋은 통치가 그것이다. 그는 4대 목표의 실천을 통해 부탄 국민들이 전통과 현대, 물질과 정신이 조화된 균형 있는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도록 유도했다

또한 1980년 교육개혁으로 80%에 달하던 문맹률을 40% 이하로 낮추는데 성공한다. 이때부터 부탄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했다.

1999년에는 그동안 금지해왔던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부탄에서도 도입을 허가했다.[3]

이와 더불어, 지그메 싱계 왕축 국왕은 재위 기간 마지막 10년 동안 왕실의 권력을 축소하는 일에 전념했다. 2001년 국왕의 행정권을 각료위원회에 이양했고, 2004년에는 당시 개정 중이던 헌법을 공개하고 국민 토론을 유도했으며, 2005년 12월에는 향후 3년 안에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은 퇴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예정보다 한참 빠른 2006년 아들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났다.

현재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뒤 가끔씩 왕실, 국가행사에 참여하거나 언론 인터뷰 빼고는 유유자적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


4. 다사다난한 결혼 일화(…)[편집]


부탄 왕축 왕조 혈통 중 유이하게 일부다처제를 실현하였다.[4] 놀라운 건 왕후가 4명이고 이 4명 모두 친자매라는 것(…)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원래 지그메 싱계 왕축은 4자매 중 맏언니만 사랑했고 맏언니와 결혼할 생각이었는데, 맏언니는 "나뿐만 아니라 내 여동생 3명까지 전부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다. 며칠을 설득해도 말을 안 들으니, 결국 국왕이 항복하고 4자매와 한꺼번에 결혼했다고. 참 특이한 집안이다. 다행히 왕후 한 명만 편애하지는 않고 모두 다 사랑해서, 왕후들 간 갈등이나 부부싸움은 별로 없었단다.

현 국왕인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은 지그메 싱계 왕축과 3번째 왕후의 장남이다. 그에게는 배다른 형제 3명과 누나 1명, 그리고 여동생 1명이 있다. 이런 경우 흔히 왕자의 난으로 대표되는 왕권 승계싸움을 생각하기 쉽지만, 상술한 이유로 인해 왕후들의 사이가 모두 좋았기에 나머지 배다른 가족들하고도 사이가 굉장히 좋다. 왕권을 승계받기 직전의 가족회의에서도 만장일치로 다른 형제자매들, 어머니들에게 지지를 받았을 정도.


5. 문제점[편집]


업적이 있으나 실책이 한 가지 있다. 1990년 부탄 최초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한 것. 다만 이것도 무혈 진압이기는 하다. 이때는 네팔계 부탄인들에 대한 탄압, 젊은이들의 민주화 욕구 때문에 터진 시위였으며 실제 이때 인도로 망명하거나 추방당한 부탄 민주화 인사들도 있다. 단 이건 네팔계들이 네팔에서 1990년에 왕권 약화와 비렌드라 네팔 국왕이 국민 요구에 따라 입헌군주제를 선언하며 선거를 도입한 것 때문에, 여기서도 똑같이 요구했기 때문. 이것은 네팔계 부탄인들의 정계 진출과 여러 입지 강화가 목적이었던지라 이 시위를 주도했던 네팔계 부탄인들이 강제로 추방되었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인도로부터 무력을 빌려 부탄에서 강제로 힌두교를 믿는 네팔계의 입지를 넓히려고 시도했었다.[5] 즉 타국의 무력을 빌려 자국의 정부를 뒤집어 엎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도시킴 주는 본래 부탄과 똑같이 티베트 불교를 국교로 하는 티베트계 독립국이었는데, 국가 내부의 네팔계 주민들이 이런 식으로 나라를 스틸해서 인도에 넘겨버린 사례가 있으니, 부탄 왕실 입장에서 경계가 안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인도로서는 여러 면에서 친인도파인 부탄을 뒤엎을 생각은 전혀 없었으므로, 되려 부탄에 "네팔계가 이랬으니 알아서 하라"는 충고만 한 채 그냥 보기만 했다. 이로 인하여 분노한 국왕이 더 많은 네팔계 사람들을 강제로 추방시켰고, 이 여파로 민주화를 갈망한 일부 부탄인들도 억울하게 네팔계들과 한패거리로 몰려 추방당해서 난민신세가 된 적이 있다. 덕분에 전세계에서 비난을 받았지만, 당시 은둔의 왕국을 표방하던 부탄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현재 부탄 정부와 왕실에서는 이 민주화 시위와 이때 발생한 난민에 대해서는 침묵을 유지중이다.


6. 기타[편집]


  • 지그메 싱계 왕축 국왕 재위시절인 1987년대한민국과 수교를 맺었다.

  • 농구를 굉장히 좋아해서, 지금도 농구코트에서 슛 연습을 하는 걸 자주 볼 수 있다고 한다.

파일:Bhutan 10.jpg
파일:Bhutan 100.jpg
  • 부탄 10, 100눌탐 지폐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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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단 결혼 일화 참조[2] 단 처음 꺼낸 것과 연구는 선왕 지그메 도르지 왕축 시절부터 진행해 왔다. 이걸 본격적으로 꺼낸 것.[3] 이전에는 완전금지였고, 그나마 아주 가끔 특별한 일이 있으면 수도 팀푸에다 대형 TV를 설치해서 며칠 동안 해외방송을 시청시켜 줬다. 대표적인 게 1998년 프랑스 월드컵.[4] 맨 처음은 2대 국왕인 지그메 왕축이 기록했다.[5] 부탄티베트 불교 국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