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권-이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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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대만 국기.svg 중화권-이란 관계 관련 틀 파일:이란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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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2.2. 중세 초
2.3. 중세
2.4. 근세
2.5. 현대
3. 중국과의 관계
3.1. 이란은 노골적인 친중 국가이다?
3.2. 2010년대
3.3. 2020년대
3.4. 경제 교류
3.5. 대사관
4. 대만과의 관계
5. 관련 기사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중국, 대만이란 사이의 관계를 정리한 문서. 이란은 지리적으로 중화권과 거리가 멀었지만 역사적으로 중국과 관계가 밀접했으며, 문화적으로도 동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중화민국에 이어 대만과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팔레비 왕조는 1971년 8월 17일부로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으며 이란 혁명 이후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권은 중국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2. 역사적 관계[편집]


이란중국은 중세부터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였다. 특히 당나라 때는 "의사가 아프고 페르시아인이 궁하다니"라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양국 간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페르시아와 중국 간의 교류는 육로로도 이루어졌으나 해상 무역과 교류의 규모가 더 컸다고 한다. 중국과 페르시아의 교역망은 굉장히 많이 알려져있는데, 그게 바로 "실크로드"다.

2.1. 고대[편집]


고대 중화문화권은 실크로드 초원길을 통해 중동 지역과 간접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대 춘추시대 사용된 전차는 이란과 인접한 아르메니아에서 생산된 형태가 중국으로 이식된 것이라 한다. 사마천의 사기 대원열전에는 장건의 파르티아, 박트리아와 관련한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는 파르티아를 안식국이라고 칭했으며, 안식국의 불교 승려 안세고는 초기 부파불교를 중국에 전파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박트리아는 대하라고 칭했다.

2.2. 중세 초[편집]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란의 패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페르시아인 상인들이 인도양 해상 무역로를 장악하고 인도를 넘어 중국과도 직접 무역하였다. 수나라당나라중근동중앙아시아로부터 페르시아 문화도 동시에 받아들였다. 페르시아인 상인들은 당나라의 항구도시 광저우취안저우 등에서 활발한 무역 활동을 벌였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건원 초(758)에 대식을 따라 광주(廣州)를 습격하여 창고와 여사(廬舍)를 불태우고, 바다로 도주하였다.

신당서 번역출처


사산 왕조 멸망 이후 이슬람 제국의 통치를 받아 이슬람화되면서 페르시아인들이 개척한 해상 무역로는 이슬람권으로 대부분 계승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한 이후 이슬람화한 페르시아인 해적들이 광저우를 약탈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장안에는 이슬람 사원 외에도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사원도 있었다. 폴로도 당나라 때 받아들였다.

페르시아와 중국 사이의 교류가 상당히 활발했던 관계로 당나라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역사나 지리에 관한 정보 역시 개략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波斯)는 티그리스 강(達遏水) 서쪽에 있으며 (중) 동쪽으로는 토화라 강과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돌궐의 가살부(可薩部)와 인접하며, 서남쪽으로는 모두 바다에 연해 있고, 서북쪽으로는 4천 리 넘게 가면 불름(拂菻)이다. 인구는 수십 만이며 그 선조는 파사닉왕(波斯匿王)으로서 대월지의 별예(別裔)이다. 왕은 그것으로 성을 삼았고 또 국호로 삼았다. 2개의 성이 도읍이고, 대성은 10여 개 있다. 풍속은 오른쪽을 존숭하고 왼쪽을 비하하며, 천지·일월·수화에 제사지낸다. 저녁 때 제사를 드리며 사향으로 소초[蘇]를 어루만진 뒤 수염과 얼굴과 코 및 귀에 바른다. 서역의 여러 오랑캐들은 그 제도를 받아들여 현신[祆]에 제사를 올린다. 절을 할 때면 반드시 다리를 꼰다. 풍속에 의하면 맨발로 다니고 장부는 삭발[祝髮]한다. 옷은 옷깃을 절단하지 않으며 청백색의 건피(巾帔)를 쓰는데 가장자리는 비단으로 만든다. 부녀자는 변발을 해서 뒤에 늘어뜨린다. 전투를 할 때는 코끼리를 타는데, 코끼리 하나에 전사 100명이 붙으며 패배하면 모두 죽인다. 단죄할 때는 문서로써 하지 않고 궁정에서 결정한다. 반란한 사람은 그 혀를 [불에 달군] 쇠로 지져서 상처가 백색이면 무죄로, 흑색이면 유죄로 간주한다. 형벌에는 곤(髡)·감(鉗)·월(刖)·의(劓)가 있고, 가벼운 죄일 경우 수염을 밀거나 혹은 나무를 목에 끼우고 일정한 기간 그렇게 놓아둔다. 겁탈과 도적질한 사람은 늙을 때까지 감금하며, 훔친 자는 은전을 바쳐야 한다. 대저 죽으면 산에다 버리고 한 달 동안 상복을 입은 뒤 벗는다. 기후는 항상 덥고 땅은 평만하다. 경작을 하고 가축을 기를 줄 안다. 독수리가 있어 양도 잡아 먹는다. 좋은 개, 노새, 대로(大驢)가 많으며, 산호가 나오는데 높이가 3척이 넘지 않는다.

신당서 번역출처


페르시아인 상인들이 바닷길로 중국 남부의 해안 도시들을 오고가던 시대, 당나라의 돌궐 동맹군은 서진하여 페르시아와 접촉하기도 했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 왕족 일부가 당나라로 망명 와서 SOS를 쳤다. 당나라는 페르시아 왕자를 진정시키는 차원에서 형식적인 차원에서 실제로 행정력이 닿지 않는 지역에 도독부를 설치해주었다. 참고로 도독부는 도호부보다 급이 낮은 행정 단위이다.[1]

용삭 초(661)에 다시 대식의 침입을 받았다고 호소했는데, 이 때는 천자가 마침 사신을 서역으로 보내 주현을 나누어 두려고 할 때였다. 그래서 질릉성(疾陵城)[2]

을 파사도독부(波斯都督府)로 삼고 곧 비로사를 도독으로 제수하였다. 갑자기 대식에게 멸망하게 되어 비록 나라를 갖지는 못하였지만 함형(咸亨) 연간(670~673)에 그래도 입조하여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배수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처음에 그 아들 니날사(泥()師)를 질자로 삼았었는데 조로(調露) 원년(679)에 배행렴(裴行儉) 에게 조칙을 내려 군대를 이끌고 그를 호송하여 돌려보내 장차 그 나라를 다시 통치하도록 하게 했으나, 길이 멀기 때문에 안서의 쇄엽(碎葉)까지 갔다가 배행렴은 돌아오고, 니날사는 토화라에 객(客)으로 20년간 머무르는 동안 부락민들이 점점 더 흩어져 버렸다. 경룡(景龍) 초(707)에 다시 입조하니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을 제수하였다. 병으로 사망하자 서부(西部)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개원·천보 연간에 사신을 10차례 보내어 마노상(碼碯牀)·화모수무연(火毛繡舞筵)을 헌상하였다.

번역출처


신당서에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한 이후 호람딘 관련해서도 개략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또한 타바리스탄(陀拔斯單)이라는 곳이 있는데 타발살탄(陀拔薩憚)이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삼면이 험한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북쪽으로는 조그만 바다에 면해 있다. [왕의] 거처는 파리성(婆里城)이고 대대로 파사의 동방의 대장(大將)이었다. 파사가 멸망하자 대식에 신하가 될 것을 거부하였다. 천보 5년(746) 왕 홀로한(忽魯汗)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니 귀신왕(歸信王)으로 봉하였다. 그 뒤 8년이 지나서 아들 자회라(自會羅)를 보내 입조하니 우무위원외중랑장(右武衛員外中郎將)에 배수하고, 자포와 금어(金魚)를 하사하고 숙위로 남도록 하였다. 흑의대식(黑衣大食)에 의해 멸망당했다.

신당서 번역출처


신당서 등에 나오는 페르시아 관련 기록과 당대 아랍인이나 페르시아인 무슬림들이 남긴 역사 기록 중 상당수가 일치하는데,[3] 이는 그만큼 양 지역 사이에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뜻한다.

2.3. 중세[편집]


아바스 왕조의 군벌 왕조였던 사만 왕조도 여전히 중국과 교류를 많이 했으며, 정복 왕조 국가들인 요나라서요, 서하, 금나라도 실크로드를 통해 페르시아 문화가 들어오기도 했었다. 한족이 통일한 송나라 때에도 페르시아인들이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당시에는 중국인들과 통혼한 페르시아인 후손들이 한족과 동화되고, 한족들의 상선이 인도양에 직접 진출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주로 수출한 품목은 차, 도자기였는데[4] 송나라의 징더전에서는 중동의 수요의 맞추어 도자기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몽골 제국압바스 왕조남송를 점령한 이후 몽골 제국에서 갈라진 원나라일 칸국 사이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인들은 이른바 색목인에 분류되어 원나라에서 우대받았으며, 일 칸국에서도 중국 출신 기술자들을 수입하여 사치품을 생산하는 국영 공장에 투입하였다. 다만 원나라는 한족을 하대하고 색목인을 우대하는 체계였기 때문에 원나라의 페르시아인들은 한족들보다 지위가 높았던 반면, 일 칸국의 한족들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에도 불구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5]

2.4. 근세[편집]


한족들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건국한 이후 페르시아와 중국간의 교류 규모는 대폭 축소되었다. 명나라는 원나라와 다르게 치세 중반 이후로 쇄국 정책을 펼쳤고,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 근본주의 정책을 취하며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의 사이가 최악이 되었기 때문에 육로 무역 역시 상당부분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사파비 페르시아의 세밀화 및 도자기 제작 기술은 명나라의 영향을 받는 등 문화 교류 자체는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 사파비 제국의 아바스 1세는 중국인 도공 300여 명을 초청해서 이란에서 도자기를 생산하도록 만들었다 한다. 이후 대항해시대 인도양 무역 패권을 무슬림 상인 대신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가 장악하면서 이란 문화권과 청나라와의 교류가 더욱 축소되었다. 다만 중국의 회족들의 경우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력이 적지는 않아서 마드라사에서는 페르시아어에 능통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2.5. 현대[편집]


1920년, 카자르 왕조중화민국과도 외교를 맺었다.

팔레비 왕조 때에는 1942년 중국 국민정부와 수교했고, 1949년 국공내전 이후에도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대만 섬의 중화민국만 인정했었다. 그러나 이란은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했고, 중국과 팔라비 왕조는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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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20px-Hua_Guofeng_with_Shah_Mohammad_Reza_Pahlavi_during_a_state_visit_in_Iran.jpg
팔라비 왕비가 중국을 73년 방문했으며, 화궈펑이 78년 이란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샤가 79년 쫓겨나자 빠르게 혁명정부를 인정했고 양국은 보다 더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3. 중국과의 관계[편집]


현대 이란은 중국과 긴밀한 관계로 이란 혁명 당시 호메이니위구르인들의 봉기를 부추기면서 잠시 사이가 악화되었지만, 호메이니 사후 관계가 급 진전 하였다. 오늘날 기준으로 중국은 현재 외교적으로 고립된 이란의 주요 맹방이다. 이란군은 일부 중국제 무기를 운용하고 있고 서구권 무기를 역설계한다든지 무기 체계에서 비슷한 점도 많다.

현재 중국과 이란은 반미감정을 가진 나라들이라는 공통점들이 있으며, 그래서인지 긴밀한 외교를 가지기도 했다. 또한 이 두 나라는 겹치는 점이 굉장히 많다. 역사가 오래되었고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독재 국가인 데다가 주변국들의 인식이 굉장히 좋지 않으며, 인권 탄압도 엄청나게 심하다.[6] 또 사형을 굉장히 잘 집행하는 나라이며, 결정적으로 두 나라 다 반미를 넘어서 미에 가까울 정도로 미국을 매우 싫어한다.[7]

3.1. 이란은 노골적인 친중 국가이다?[편집]


다만 그렇다고 이란을 무조건적인 친중 국가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정작 이란 내 중국인들은 이란인들이 자꾸 자신들보고 너 한국에서 왔냐 혹은 너 일본에서 왔냐라고 물어보는 경우가 많아서 힘들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출처 이란이 노골적인 수준의 친중 국가라면, 이를테면 친일국가 브라질에서 동양인을 다 일본인이라고 하는 것 비슷하게 자국 내 동양인들을 다 중국인이라고 물어봐야 정상이겠지만 정작 인민일보에서 취재한 바에 따르면 이란 내 중국인들은 자꾸 이란인들이 자신들을 한국인이나 일본인으로 봐서 힘들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 소프트 파워의 입지가 한국과 일본에 비해 크게 뒤쳐지는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란 뿐만 아니라 러시아나 다른 중동 국가들도 정부 차원에서는 중국과 가깝지만 민간 차원에선(특히 한류나 일본 문화를 자주 접하는 젊은세대) 한국과 일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로 상황이 심각해지다보니 반중 감정도 동시에 늘어나고 있다. 이란 보건부 대변인이 중국의 코로나 확진자 통계에 의혹을 제기할 정도로 내부적으로 갈등이 있는 편이다.

호메이니가 집권한 1980년대에 이란 정부가 중국의 위구르 문제를 건드려서 두 나라의 사이가 나빠진 적이 있었으며, 이 외에도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 등이 은퇴 이후 2009년 우루무치 유혈사태에 관련하여 중국의 위구르 인권 탄압을 비공개 석상에서 비판한 바 있다.#[8] 위구르 인권 문제 관련해서도 이란은 중국 외에는 우방이 별로 없는 상황에, 위구르 독립운동 지지가 자국 내 소수민족 독립 문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켰다.[9]

3.2. 2010년대[편집]


2016년 9월 11일에는 중국과 아바단 정유 단지를 만드는데 합의했다. # 2016년 11월 14일에는 중국과 이란이 군사, 방위협력을 증진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

그리고 이란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지만, 중국측은 이란과의 밀월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고, 중국의 철도회사는 이란측과 5,700억원규모의 협약을 체결했다. # 그리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합의를 탈퇴하겠다고 밝히자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

2018년에 미국이 이란 제재를 다시 시작하자 중국측은 이란의 원유생산지를 인수했고 중국의 영향력이 러시아와 함께 커지기 시작했다. # # 거기에다 이란의 가스전까지도 인수했다. #

2019년 1월 7일에 인도를 방문한 이란의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은 이란의 전통적 우방인 중국, 러시아, 인도와 경제 협력을 강조했다. #

2019년 5월 10일에 중국측은 미국의 제재를 우려해서 이란산 원유수입을 중단시켰다. #

2019년 5월 17일에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이란의 외교장관과 만나 회담을 가졌다. # 그리고 중국은 이란의 석유산업에 2,800억 달러를 투자할 예정이다. # 그러나 미국의 경제제재로 2019년 10월 6일 중국의 국영석유회사인 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공사(CNPC)가 이란에서 철수했다. #

이란군은 중국, 러시아와 함께 12월 27일부터 나흘간 합동해양훈련 '해양 안보 벨트'를 호르무즈 해협에서 실시한다고 밝혔다. #

3.3. 2020년대[편집]


2020년초부터 미국과 이란 간의 긴장이 높아지자 중국은 이란행 항공편 운항을 취소하고 이란 내 중국인들의 철수도 추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 # 그리고 이란 사태와 관련해 중국 네티즌들은 이란을 지지했다. #

2020년부터 이란에서 코로나가 확산되는 가운데, 중국은 이란내 중국인들의 철수를 위해 전세기를 띄운다고 밝혔다. #

그러나 코로나가 계속해서 유행하고 중국과의 관계가 약간 흐트러지고 있는데 이란 보건부가 중국의 확진자 수 통계에 의혹 제기했다가 황급히 진화했다. #1 #2

중국은 미국의 이란 추가 제재를 반대했다. #

2021년에 중국, 러시아, 이란은 2월 중순에 인도양에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

이란측이 제재를 받고 있음에도 중국측은 이란으로부터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

중국측이 북한, 러시아에 이어 이란과도 협력을 강화할려고 있다. # 3월 27일에 이란과 중국이 25년간 정치·경제·무역분야 협력을 약속하는 장기 협정을 체결하자 이란내의 여론이 나뉘어졌다. #1 #2

중국-이란 정상회담이 개최돼 시진핑 주석은 양국간 전략적 소통 강화에 나서기로 했다. #

2022년 12월 시진핑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고 무함마드 빈 살만과 친교 관계를 다지고 이어 아랍권 국가 정상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중동 지역의 맹주 자리를 두고 사우디와 경쟁해 온 이란의 위기의식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

12월 12일, 중국-걸프 협력위원회에서 있었던 공동성명에서 이란의 영유권 문제가 거론되자 이란 측이 반발했다. #

12월 15일, 중국이 이란의 영토 문제를 건드리자 이에 뿔난 이란에서 '대만 독립'을 지지하는 보도가 나왔다.#

2023년 2월 12일, 중국 측이 라이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

2월 14일, 라이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고 양국은 미국을 견제하는 등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 중국 측은 러시아, 이란과 공조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재자도 맡을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



3.4. 경제 교류[편집]


양국간의 경제교류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활발해지고 있다. 중국 기업들의 이란 진출이 늘어나고 있고 전술했다시피 중국은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란 핵합의에서 미국이 탈퇴한 이후에 서방 기업들과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서 대거 빠져나갈 때에도 중국 기업들은 이란에 많이 진출했다. 미국의 제재 이후에도 이란은 중국과의 경제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

3.5. 대사관[편집]


테헤란에 주 이란 중국 대사관, 베이징에 주 중국 이란 대사관이 위치해 있다.

4. 대만과의 관계[편집]


1920년 중화민국 시기부터 이란의 카자르 왕조와 외교를 맺었다. 그리고 1934년 팔라비 왕조 때에도 외교관계가 유지되었으며,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후 대만으로 망명해 이주한 후에도 관계는 유지되었으며 중국공산당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1958년 팔라비 2세는 대만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1년 8월 17일 단교했고, 1979년 이란 혁명 이후에도 이란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표부도 없지만 그럼에도 두 나라 간의 석유 무역, 상호 교류 등은 유지되고 있다.

5. 관련 기사[편집]



6. 관련 문서[편집]


[1] 당나라가 고구려 영토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려 시도하고 좀 더 작은 백제와 신라 영토에 각각 웅진도독부와 계림도독부를 설치하려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2] 오늘날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대.[3] 비교하자면 페르시아 샤한샤들 관련해서는 이런저런 오류가 있으나, 광저우나 양저우 등 당나라의 항구에서 일어난 학살이나 해적행위 관련해서는 양측 기록이 일치한다.[4] 비단은 중세 당시 이미 중근동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되고 있었다.[5] 여담으로 몽골 제국에서는 남송 출신 한족과 금나라 출신 한족을 차별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중앙아시아 출신 무슬림들이 페르시아 출신 광저우, 취안저우 무슬림들보다 우대를 받았다. 몽골 제국에서 취안저우 회족들의 특권을 축소하자 원말 무슬림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다 진압되는 상황도 발생했다.[6] 다른 점이 있다면 이란은 무신론을 박해하지만, 중국은 국가 무신론 입장에서 종교를 박해한다.[7] 그러면서도 북한이나 시리아처럼 완전히 고립되거나 최빈국 수준은 아니며 일반 국민들은 어느정도 생활수준도 갖추어져 있고 서구권처럼 인터넷도 하고 할거 다한다는 점도 비슷하다[8] 중국의 위구르 인권 탄압에 적극 동조한 중동 국가는 이란이 아니라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정권 치하의 사우디아라비아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튀르키예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성지순례를 온 위구르인 망명자들을 뜬금없이 납치해서 중국으로 강제 송환하고, 아예 대놓고 중국발 가짜뉴스를 살포하거나 신장 재교육 캠프를 노골적으로 옹호한 바 있다.[9] 이쪽 주판 두드리는 계산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란 자신들이 철천지 원수로 여기는 아랍 수니파 왕정들이 중국 돈이 달달해서 정신 못 차리고 있으니 이 기회에 알사우드 왕가가 '이슬람의 수호자' 운운하고 다니는 걸 폭로시킬 정치적 이득이 중국과 잘 지내서 얻을 경제적 이득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동반자 나라들이랑 반미 포지션은 비슷해도 막상 내부 계산은 전혀 안 맞으니 중국의 패권 도전이 난항을 겪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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