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 모레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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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 모레스네
독일어: Neutral-Moresnet
네덜란드어: Neutraal Moresnet
프랑스어: Moresnet Neutre
파일:Flag_of_Moresnet.svg.png
중립 모레스네의 기(旗)[1]
파일:Neutral Moresnet.png
중립 모레스네의 영역,(하늘색),
수도
켈미스(Kelmis)
존속 기간
1816.06.26 ~ 1919.06.28
인구
약 3천명
영토
3.5 km²
공용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법정화폐
프랑스 프랑
통용화폐
프랑스 프랑, 프로이센(독일제국) 마르크
네덜란드 길더, 벨기에 프랑

1. 개요
2. 개국
3. 역사
4. 멸망과정
5. 후일담



1. 개요[편집]


1816년 당시 빈 회의에서 네덜란드와 프로이센의 국경 문제로 생겨난 국가


2. 개국[편집]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빈 체제가 들어서며 국경을 다시 긋게 된 네덜란드프로이센 사이에 문제가 생겼었는데, 바로 모레스네 지방의 영유권 다툼이었다. 모레스네 지방에 아연 광산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두 나라 모두 이 지역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1816년, 절충안으로 서쪽 지방은 네덜란드 왕국(주황색+노랑색)이 다스리고, 동쪽의 노이모레스네는 프로이센 왕국(초록색)이 다스리기로 했다. 중간의 3.5 km² 면적의 파랑색 켈미스(Kelmis) 마을과 아연 광산은 두 나라가 합동으로 정부를 세워서 중립지역화 하였다.

처음에는 네덜란드 베흐비에와 프로이센의 오이펜에서 파견된 관료가 주민 중 시장을 뽑아 통치했었으나, 1830년에 벨기에(노랑색)가 네덜란드(주황색)로부터 독립하면서 중립 모레스네의 관할권도 벨기에 측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점으로라도 중립 모레스네와 닿아 있었고 명목상으로는 영향력 행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3. 역사[편집]


  • 주민들은 1815년만 해도 256명 수준이었지만, 아연광산의 일자리를 찾아 인접국에서 이주해온 통에 1858년에는 2572명이 되었다. 이 중 852명은 벨기에인, 807명은 프로이센인, 204명은 네덜란드인, 14명은 기타 국적이었지만, 나머지 695명은 원래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자손인 중립인이었다. 중립인은 무국적으로, 외국에 갔을 경우 어느 정부의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인구는 1914년에는 4668명까지 늘었다.

  • 우편제도는 지금의 안도라와 같이 프로이센과 벨기에가 공유하는 형태였으며, 지역 내 학교는 5개가 있었고 추가로 프로이센령의 노이모레스네에 있는 1개의 학교에도 주민의 자녀는 진학이 가능하였다.

  • 1848년 독자적인 지역화폐로서 동전이 나왔으나 공적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 1859년, 시장과 10명의 시의원으로 이뤄진 의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의회는 자문권 정도의 영향력밖에 없었으며, 주민들은 선거권이 없었고, 행정법원도 없어 사실상 독립성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자체 법이 없이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 민법전에 따라 관할국에서 파견된 법관이 판결하는 식이었다.

  • 국가예산액은 1세기 동안 고정되어 있어 납부해야 할 세금액이 낮았고, 관세가 없어 물가도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 중립 모레스네 주민들은 병역이 면제된다는 이점이 있었는데, 1854년 벨기에 측에서 자국민이 중립 모레스네로 이주하는 경우 병역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은 1874년부터 시작했으며, 결국 초기 주민을 제외한 이주자에게는 본래의 국적의 병역의무가 적용되게 되었다.

4. 멸망과정[편집]


결국 1885년에 아연 광산이 고갈되자, 벨기에와 독일제국의 정치권에서는 중립 모레스네의 존치에 논란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반발하는 주민들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제시했다.

의사로서 1863년에 이주해온 베츨라르 출신의 독일계 주민 빌헬름 몰리(Wilhelm Molly)는 1886년에 독자적인 중립 모레스네만의 우정산업 시스템 구축과 더불어 우표사업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벨기에의 개입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03년 8월경, 벨기에에서 카지노가 금지되자, 중립 모레스네에 카지노를 설립해 관광객을 유치하려 했다.[2] 그러나 오히려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가, "도박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중립 모레스네를 벨기에에 넘길 수도 있다." 라고 위협하자 카지노는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기에 시작한 양조산업은 그럭저럭 간섭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1908년에 드레스덴에서 개최된 제3회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에서, 빌헬름 몰리가 중립 모레스네를 에스페란토 뜻으로 친구의 땅이란 의미인 아미케요(Amikejo)로 바꿔 부르고 에스페란토 행진곡을 국가로 삼아 세계 에스페란토 커뮤니티의 수도로 삼자고 선언하였다. 이는 중립 모레스네 외부의 호응뿐만 아니라 주민 일부에서도 에스페란토를 배우고 운동에 참여하는 등의 호응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그래서 현재 켈미스 주민들에게 에스페란토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1900년 이후 독일제국은 중립 모레스네에 깊이 간섭하며 전기, 전화선을 끊어버리는 등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냈고, 인구 만명도 안되는 작은 마을이 독립을 유지하기에는 힘도 시간도 부족했다.

1914년 8월 4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제국의 벨기에 침공 과정에서 중립 모레스네는 자연스럽게 독일에 점령당했고, 1915년 합병되었다.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의 점령지로서 독일제국에서 해방되었으나, 1919년 6월 28일에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하여 오이펜-말메디 지역과 함께 벨기에 영토로 합병되어 중립 모레스네는 사라지게 된다.

5. 후일담[편집]


  • 1920년 켈미스는 노이모레스네와 합병하여 하나의 행정단위가 되었다. 나치가 점령했을 당시 오이펜-말메디 지역과 같이 관리했기 때문인지, 후일 벨기에 독일어 공동체가 결성되었을 때 이 지역도 포함되었다.

  • 현재는 특별히 분리주의 같은 것은 없고, 켈미스에 남아있는 중립 모레스네 박물관에서 과거의 유산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중립 모레스네-독일-네덜란드-벨기에가 사합점으로 국경을 맞대었던 발서르베르흐(Vaalserberg, '발스산') 정상은, 오늘날에는 모레스네가 빠진 삼합점 국경으로 관광지가 되었다. 해당 지역의 명물로는 세 나라의 국기가 꽂힌 삼합점 비석과, 미로가 있다.

[1] 이 배색은 현 켈미스 시의 깃발과 문장에서도 볼 수 있다.[2] 지역주민은 이용하지 못했고, 입장인원도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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