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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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미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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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S 로고.svg 가요대상 대상

전영록
하얀 밤에
(1987년)

주현미
신사동 그 사람
(1988년)


현철
봉선화 연정
(1989년)


파일:MBC 로고.svg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수상

전영록
하얀 밤에
(1987년)

주현미
신사동 그 사람
(1988년)


주현미
짝사랑
(1989년)
주현미
신사동 그 사람
(1988년)

주현미
짝사랑
(1989년)


변진섭
희망사항
(1990년)

파일:골든디스크 시상식_로고.png
음반 대상
이문세
<사랑이 지나가면>
(1987년)

주현미
<신사동 그 사람>
(1988년)


변진섭
<너무 늦었잖아요>
(1989년)


주현미
周炫美 | Ju Hyun-mi
[1]

파일:가수주현미.jpg

출생
1961년 11월 5일 (62세)[2]
전라남도 광주시 서석동
(現 광주광역시 동구 서석동)[3]
국적
[[대만|

대만
display: none; display: 대만"
행정구
]]
→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가족
배우자 임동신(1957년생)
아들 임준혁(1991년생)[4], 딸 임수연
조카 달짜
학력
한성화교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약학 / 학사)
종교
가톨릭 (세례명: 소화 데레사)
데뷔
1985년 '비내리는 영동교'[5]
활동기간
1985년 ~ 현재
플랫폼 현황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주현미TV
구독자
21.7 만명 [기준]
조회수 86,488,823회
별명
수도꼭지
SNS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3. 약사 활동
4. 가수 활동
4.1. 1985년 이전
4.5. 2010년대 ~ 유튜브와 함께 맞이한 제2의 전성기
5. 대표곡
6. 평가
7. 일화
8. 음반 활동
9. 방송 활동
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이자 유튜버이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리며 이미자를 잇는 트로트 여왕으로 평가받았다. 2005년 기준으로 KBS 1TV 가요무대 출연 횟수가 가장 많은 가수다.


2. 생애[편집]


한국계 혼혈 화교 2.5세 출신이다.[6] 주현미의 아버지중국 산둥성 모평현에서 태어났지만 4살에 한국으로 이민 와서 자랐으므로 사실상 2세인 것이나 다름없다. 광주광역시 동구 서석동에서 2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중국계 화교들은 당시 북한과 대치 중이며 중국과 수교하지 않은 한국의 정치 및 군사적 상황에 의하여 대만 국적이 되었다. 어머니는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토종 한국인인데 과거의 대한민국은 '부계주의 국적법'을 택하여 아버지한국 국적인 경우에만 자녀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했다.[7]

2018년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에 따르면 주현미의 친할머니 역시 한국인이라고 한다. 친할머니와 어머니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현미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 집안에서부터 이미 한국 문화 방식으로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주현미와 형제들은 처음 화교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그것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남편은 한국 록그룹 비상구(EXIT) 보컬리스트 출신이자 조용필 밴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였던 임동신으로 1987년 발표한 '잃어버린 추억'으로 알려져 있다. 40일간의 미주 공연을 함께 하며 친분을 쌓은 두 사람은 주현미가 28살이었을 때(1988년) 결혼했다. 당시 주현미는 가수 일이나 인기를 모두 포기해도 좋을 만큼 남편을 사랑했으나, 오히려 결혼 후 임동신이 일을 포기하고 아내의 매니지먼트와 프로듀싱 작업을 도왔다. 여자가 결혼하면 모든 일에서 은퇴하고 남편을 내조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에 정말 큰 결심을 했던 것. 그래서 주현미는 가요대상을 수상했을 때 울먹이며 남편에게 가장 먼저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주현미와 임동신의 2018년 인터뷰

두 사람의 아들 임준혁(1991년생)군은 버클리 음대 출신이고, 딸 임수연(1993년생)양은 어머니를 따라 가수로 데뷔했다.

종교는 가톨릭으로 '소화 데레사'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있다. 대만 가수 등려군가톨릭 신자다. 또한 양친이 대만 바깥에 연고를 둔 외성인 집안이라는 것도 주현미와 나름의 공통점이다.

결혼 후에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했으며, 한성화교학교를 다녀서 중국어가 유창하고, 화교 커뮤니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므로, 현재의 주현미는 화교가 아닌 화인이다. 한국에서는 중국계 혈통이 있으면 전부 화교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지만 중화권에서는 아예 다르게 구분한다. 중국 국적이나 대만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해외 이민자가 화교이다. 현지 국적을 가지고 현지 문화에 깊이 동화되어 현지인의 정체성을 가졌으며 중국계 커뮤니티에 별로 참여하지 않는 경우에는 화예이다.[8]


3. 약사 활동[편집]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약사 면허증을 가지고 있다. 딸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길 원한 어머니의 바람이 컸다고 한다. 때문에 엘리트 연예인으로 불렸다. 다만 화교전형 의혹은 있다. 대학 졸업 후 서울 중구 필동에서 '한울약국'을 차려 운영했으나, 수줍음 타는 성격이라 사업 수완이 없었던 데다 원칙을 고수한 탓에 손님이 없어 일찍 가게를 접었다고 한다. 당시는 의약분업이 이뤄지기 전이었는데, 증상과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영양제나 항생제(소위 마이신) 등을 달라는 손님들에게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고 운동, 식이요법 등을 권유하다보니 별난 약사라고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 그래서 처음 데뷔했을 때 별칭이 '약사가수'였다. 당시에는 대학가요제같은 경우가 아니면 대학을 나온 가수도 적어서 대졸자 가수는 '학사가수'라 부르기도 했는데 약사출신이니 특별한 인상을 준 것.


4. 가수 활동[편집]



4.1. 1985년 이전[편집]


주현미는 음악인생은 중앙약대 그룹사운드 진생라딕스(인삼뿌리) 2기1981년 제2회 MBC 강변가요제에서 장려상을 수상하면서부터 대중가수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인 중학교 2학년 때(1975년) 이미 첫 음반을 발매한 적도 있다. 이때 첫 음반은 작곡가 정종택이 맡았었는데, 주현미가 성인이 되어 발매한 앨범도 정종택이 맡았다.

주현미가 대중적으로 처음 알려진 계기는 바로 '쌍쌍파티' 열풍. 약사생활을 하던 주현미는 1984년 무렵에 김준규[9]랑 같이 메들리 앨범 쌍쌍파티를 발매했는데 이것이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80년대부터 한국사회는 경제성장이 가시화되면서 자가용이 대중화되기 시작되었다. 운전하면서 들을 트로트 메들리 음반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많이 팔았는데, 이른바 고속도로 휴게소 음반으로 대히트를 친 효시격인 앨범(카세트테이프)이 바로 '쌍쌍파티'이다.

이 앨범은 같이 듀엣으로 녹음한 게 아니라 따로 따로 녹음한 걸 편집에서 합친 앨범이다. 그러나 잘 편집되어서 그런 기색을 느끼기 어렵다. 주현미가 이 때 정식으로 데뷔한 가수 신분은 아니었지만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쌍쌍파티는 300만장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소위 말하는 길보드 등을 합친 수치고 과장도 들어갈 수 있지만, 어쨌건 길보드 포함해서 100만장 이상 정도는 팔렸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1985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쌍쌍파티로 가요계 전체를 뒤흔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최고의 인기가도를 달렸다고 할 수 있으며, 가수 데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4.2. 1985년 ~ 1987년[편집]


쌍쌍파티의 기세를 바탕으로 주현미는 1985년 1집 앨범 ≪비내리는 영동교≫로 데뷔하게 된다. 쌍쌍파티의 기세를 그대로 이어가며 주현미는 최고 가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85년 5월에 나온 매일경제의 기사에 따르면 5개월간 메들리집을 포함해 9개의 음반을 발표했는데 7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이 역시 길보드 추산이고 과장이 들어갈 수 있는 수치지만 엄청나게 팔았던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주현미는 이 당시 약사생활을 했기 때문에 음반취입만 하고 있을 뿐 방송활동을 하지 않는 얼굴없는 가수였다. 주현미는 입소문과 길거리 리어카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만으로 이 정도의 판매고를 일궈낸 것이다.

동아일보에서도 나훈아 남진 이후 잠잠하던 트롯계가 주현미 단 한 명으로 인해 기지개를 켜서 방송무대에 다시 활발하게 나왔다고 묘사할 정도로 실로 압도적인 기세와 인기였으므로 매체에서 주현미는 85년 가요계를 뒤흔들었다고 평가되었고, 당연히 MBC 10대 가수상에서 여자 신인상, KBS 가요대상에서 여자 신인상을 동시에 무난하게 수상할 것으로 점쳐졌다. 예측 그대로 데뷔와 동시에 주현미는 2대 가수상의 신인상을 거머쥐게 되었다. 경향신문은 5년 연말 가수상 여자부문 논평은 상반기 최대 히트곡 '빙글빙글'에 이어 '유혹하지 말아요'로 연타석 안타를 쳐낸 나미가 단연 앞서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아! 대한민국'과 '도시의 거리'를 히트시킨 정수라에 이어 '아! 옛날이여'로 J에게의 명맥을 그런대로 이은 이선희가 그 뒤에 있다고 평한다. '하늘사탕 잉크처럼'의 이은하와 '그대에게 벗어나고파'의 윤시내도 언급하고 있으며, '사랑의 미로' 최진희와 '영동블루스'의 김연자 김수희 등 트로트 3인방도 변수가 될 것이라고. 이 때 주현미는 신인가수였지만 인천시에서 인천항 갈매기를 인천시가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85년 9월 약국의 문을 닫고 가수생활에 전념하게 된 주현미는 86년에도 1급 가수로의 행보를 이어간다. 비록 약사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톱스타가 되면서 소속사간의 잡음과 금전적인 문제가 엉켜 있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전업 가수로 울면서 후회하네를 발표한 주현미는 비록 84~85 정도의 신드롬급 인기는 아니었지만 톱스타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1986년 상반기는 트로트가 강세였으나 후반기에는 주현미를 제외한 트로트 가수들이 약세에 들어가고 청소년 대상 발라드가 강세였다고 할 만큼 86년 주현미의 인기도는 안정적이었다. 그를 반영하듯 1986년에는 여러 상을 수상했다.

  • MBC 십대가수 : 구창모, 김범용, 윤수일, 전영록, 조용필, 나미, 이선희, 정수라, 주현미, 최진희. 남녀 신인 김승진, 유미리. 신인그룹 높은 음자리. 최고 인기가요 조용필의 허공. 특별상 황금심.
  • KBS 가요대상 여자 부문 후보 : 후보로는 나미, 윤시내, 이선희, 이은하, 정수라, 주현미, 최진희가 선정되었고 난 너에게의 정수라가 가져가며 2연패를 달성했다.
  • 골든디스크 : 조용필, 구창모, 이광조, 이문세, 김수희, 민해경, 이선희, 최진희, 주현미, 들국화 선정. 남녀 신인상 김승진, 김완선.

86년 주한 외국인들을 상대로 조사한 주한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노래 탑 7중 7위에 꼽히기도 했다. 1위 나미 빙글빙글, 2위 김범룡 바람바람바람, 3위 라나에로스포 사랑해, 4위 김원중 바위섬, 5위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 6위 해바라기 모두가 사랑이예요, 7위 주현미 비내리는 영동교.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주현미는 87년부터 지금의 남편과 열애를 시작했다. 당시 공개적으로 연애 사실을 밝혔던 주현미는 88년 2월에 화촉을 올리게 되는데, 결혼까지 이어지는 연애 때문인지 TV 방송이나 무대 활동은 바쁘게 하였으나 87년에 새로운 음반을 발표하는 일은 없었다. 기존의 곡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역주행 곡이 있긴 하였으나 MBC 10대 가수에 선정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높은 인기를 바탕으로 KBS 가요대상 후보에는 선정되었다. 그녀 자체의 인기는 여전히 절정이었다는 것은 87년의 설문조사에서 증명된다. 신곡 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87년 연말 시행된 갤럽조사에서 주현미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여가수에 18.1%로 1위를 차지하며 차점자인 이선희의 8%를 2배 이상 따돌리는 결과를 보여줬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가요에서도 주현미의 비내리는 영동교가 1위를 차지했고, 다음이 조용필의 허공이었다. 뿐만 아니라 9위도 주현미의 눈물의 블루스가 차지하는 등 87년 주현미의 인기는 여전히 전성시대를 달리고 있었다.

해외동포들이 KBS 라디오 방송곡에 보내는 신청곡 집계도 주현미가 가장 많았고 다음이 조용필, 정수라, 나훈아, 이미자, 최진희, 패티김 순이었다. KBS 라디오 방송국의 또다른 조사에 의하면 30, 40대 주부들의 1픽으로 주현미의 눈물의 블루스가 꼽혔다. 그리고 조용필의 허공, 최성수의 애수,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벗님들의 사랑의 슬픔이 뒤를 이었다. 신혼 여성들에게는 해바라기의 내 마음의 보석상자, 최성수의 남남,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 벗님들의 사랑의 슬픔,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순이었다. 미혼여성들에게는 벗님들의 사랑의 슬픔,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최성수의 애수, 김연숙의 그날, 해바라기의 내 마음의 보석상자 순이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주현미는 7명밖에 되지 않는 1억원대 계약금 가수의 한 명이었고, 밤무대 출연료도 정수라, 민해경, 전영록, 구창모, 조영남, 김연자, 김완선 등과 더불어 3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1위는 나훈아였으며, 그 다음이 이미자와 조용필이 비슷한 급으로 대우받았다. 4위 그룹은 최성수, 최진희, 나미, 김수철, 김범용, 윤수일, 이은하, 윤시내였다. 5위 그룹은 삼태기, 숙자매, 장미화, 홍수철, 방미, 현숙, 최헌, 김학래, 남궁옥분이었다. 특히 주현미와 윤시내가 많은 공연량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4.3. 1988년 ~ 2000년[편집]


88년 주현미는 신사동 그 사람으로 돌아와 결혼 이후 성공적인 복귀행보를 밟는다. 신문기사의 평가로는 88년 기성가수들이 부진하고 신인가수들이 돋보였다는데 주현미는 가요 프로그램 1위도 무난히 차지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 신문에서는 한편으로 올림픽, 불안한 국내정세 등으로 88년의 가요계가 전반적으로 많이 흔들렸다고도 평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 때도 가요계가 부진했듯이 88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도 리스피아르조사연구소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여가수 선호도 1위를 차지하고, 전국 DJ친목회의 조사에서도 가장 인기 있었던 여가수 트로트곡으로 신사동 그 사람이 뽑히는 등 1위 행보를 밟아나갔다. 결국 연말 시상식에서 KBS, MBC 양대 방송사의 가요대상과 최고인기가수상을 둘 다 휩쓸었다. 골든디스크상까지 가져가며 올림픽 때문에 흔들리던 88년 가요계에서도 정상의 자리를 확고히 지켰다.

이렇게 보면 84년 쌍쌍파티 이후 사실상 90년대 초반까지는 국내 여자 가수는 주현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때만해도 한물 갔다고 생각했던 트로트를 남녀노소 대중화로 이끈 장본인이다. 1988년에는 신사동 그 사람의 대 히트에 힘입어 MBC, KBS 연말 가요대상을 동시에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1989년 짝사랑,


1990년 잠깐만으로 MBC 연말 가요 대상을 3년 연속 제패하기도 했다. 연말 가요제 참고.




아래는 주현미 젊은 시절의 LD판 영상



화교 출신이라 차별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주현미가 상을 타면 왜 외국 가수에게 국내 가수상을 주냐고 비아냥대는 기자도 있었다고. 그래서인지 비슷하게 차별받던 흑인 혼혈인 인순이와 동질감을 느껴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초중고를 모두 화교 학교를 다녔던지라 중국어도 잘 하며[10] 방송에서 중국어 노래도 곧잘 부른다.

참고로 경상남도 진주시의 시외버스 업체인 부산교통의 안내방송에 주현미 노래의 일부분이 BGM으로 나온다고 한다. 주로 "어제같은 이별"과 "비 내리는 영동교"가 나온다.


4.4. 2000년대[편집]


이후 1993년부터 1997년까지 공백기를 지냈다. 이후 2000년에 러브레터, 2003년에 '정말 좋았네'로 다시 한 번 트로트 여왕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꾸준한 인기를 이어갔다. 이후 2009년에는 소녀시대서현과 같이 짜라자짜로 활동했다.


4.5. 2010년대 ~ 유튜브와 함께 맞이한 제2의 전성기[편집]


2009년 이후로 큰 활동 없이 지내다 2014년 데뷔 30주년 기념 앨범을 발매하며 전국투어 콘서트를 진행했다.[11]


당시 데뷔 30주년 기념 서울 세종문화회관 콘서트 MBC 중계영상.

이후 방송출연보단 콘서트, 디너쇼 위주로 활동하다 2018년 유튜브 채널 주현미TV를 시작해 매주 영상을 올리며 옛 전통가요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고있다. 이후에도 유튜브 채널의 조회수 2천만에 구독자 10만을 달성했다. 그리고, 2020년 11월 25일에 실버박스 언박싱을 하였다.

2019년 이후 미스터트롯의 준결승 레전드로 출연하였다.


당시 축하공연 영상.

이후 주현미 본인 역시 가수 인생 제2의 전성기를 맞으며 트롯신이 떴다, 트롯전국체전 등 여러 프로그램에 고정출연했다.

2020년 데뷔 35주년 기념 앨범을 발매했다.[12]

2021년 주현미 재즈 프로젝트를 시작해 다양한 장르를 도전하는 가수로 평가받고 있다.

2024년 데뷔 40주년을 맞을 예정이다.


5. 대표곡[편집]




비 내리는 영동교 (1985) (1989년 12월 31일, KBS 가요톱10)[13]



울면서 후회하네 (1985) (1986년 12월 30일, 1986년 KBS 가요대상)



눈물의 부르스 (1986) (1987년 12월 30일, 1987년 KBS 가요대상)



신사동 그 사람 (1988) (1988년 6월 9일, 제24회 서울올림픽 100일전 축제)[14]



비에 젖은 터미널 (1988) (1988년 12월 30일, 1988년 KBS 가요대상)[15]



짝사랑 (1989) (1989년 12월 30일, 1989년 KBS 가요대상)[16]



잠깐만 (1990) (1990년 12월 29일, 1990년 KBS 가요대상)[17]



추억으로 가는 당신 (1991) (1991년 12월 30일, 1991년 KBS 가요대상)



또 만났네요 (1992) (1992년 12월 30일, 1992년 KBS 가요대상)[18]


6. 평가[편집]


1984년 쌍쌍파티로 데뷔 이후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두하면서 가요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기까지 최고의 자리를 지킨 여가수라고 할 수 있다.[19] 전술된 신문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1980년대는 트로트계의 쇠퇴기였으나, 주현미의 등장 이후 다시 트로트가 힘을 받아 인기 기간을 좀 더 끌게 되었으니 가요계 흐름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20] 약사가수를 병행하던 시절 얼굴 없는 가수 생활을 했음에도 이견 없이 신인상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처럼 순수하게 실력으로 지상파 연말 가요대상 전관왕, 2연패를 달성하고 누적 3회를 수상했다. 음반 판매량, 히트곡 수, 노래 실력, 자기 관리 등 여러 면에서 트로트 여제 중 한명이라 해도 흠 잡을 곳이 없다.

곡의 스타일과 창법도 기존의 트로트와 상당히 차별화된다. 본인의 포부도 그랬고 어려서 이미 음반을 발매해 본 것이나 밴드 보컬로 음악을 시작했기에 데뷔 시기부터 이미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있었다. 당시 트로트 여가수 중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수많은 화려한 기교와 더불어 맑은 음색을 바탕으로, 거기에 약사 출신이라는 지적인 이미지까지 더해 기존의 텁텁하고 처연함 일색의 트로트와는 여러모로 차별화된 점이 많았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무리없이 공략하며 스타로 군림할 수 있었다.

다만 트로트 창법 특성상, 역대 보컬리스트를 논할 땐 발라드나 알앤비 위주, 소위 디바 스타일의 가수보다 언급되는 일이 적다. 사실 90년대 초반까지의 전성기가 지나간 이후 주현미는 나름대로 여러 장르와의 협업도 꾀해 가고 기존 노래도 열심히 부르는 등 활발하고 꾸준한 활동을 지속해 오긴 했으나 이렇다할 새로운 족적을 남기지는 못하며 대중의 시선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그리고 발라드 대중화와 서태지와 아이들의 쇼킹한 데뷔 이후 트로트의 쇠퇴가 두드러졌던 것, 주현미가 전성기 당시 남녀노소에게 고른 지지를 받았지만 높은 인기에 비하면 강렬한 팬덤형 가수는 아니였기에 히트곡이 없어지자 자연히 주목도 빠르게 사라진 것, 후대의 평가도 대표적으로 김완선이나 이선희와 같은 당시 청소년 팬덤형 위주의 가수들에게 쏠리는 것 등도 원인 중 하나이다. 또 나가수 등 여러 경연프로그램에서 증명되었듯이 가창력 평가는 감정선을 강하게 건드리는 발라드나 알앤비 디바 스타일에 이목이 쏠리는 것 등에 원인이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매량이나 설문조사, 시상식 등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볼 때 한국가요를 대표하는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며 80년대 초중반까지 석권한 이은하의 뒤를 이어 80년대 중반부터 가요계를 지배한 여제였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2020년 3월 4일부터 그 해 12월 말까지 방송했던 '트롯신이 떴다'에서 정용화의 발라드곡을 부른 뒤 청중장년들도 놀라워했다. 트롯뿐만 아닌 발라드, 팝송 등 여러 장르를 오가며 소화하는 가창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일화[편집]


  • 일각에서 주현미에 대한 우스갯소리로 떠도는 일화로는 주현미가 처음 해외를 나가는데 가수 조용필이 농담으로 "비행기를 탈 때는 꼭 약사면허증을 보여줘야 된다"라고 말했는데 주현미가 공항에서 출국하면서 정말로 약사면허증을 보여줬다는 일화가 있다. 국내에서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시기는 1989년 이후이므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행기 탑승법을 몰랐다.
  • 데뷔 초에는 숏컷이였다. 가요무대에서 진주에서 온 사연이 적힌 편지를 읽고 1986년 후반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 노래의 파트가 끝날 때마다 눈웃음을 짓는 것도 무대 포인트 중의 하나였다.
  • 본래 작가도 지망했다고 한다. 안정적인 생활을 바란 어머니의 약사 권유는 가수활동에 대한 만류뿐 아니라 작가활동에 대한 만류도 있었다고.
  • 전업 가수임에도 의외로 연기 이력이 있다. 대한민국 시트콤의 조상격인 아하 복동네에 출연했다.
  • 약사와 가수 생활을 병행하던 시절 약사 일을 아침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했고 남는 시간 음반 취입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 때 체중이 엄청나게 빠졌다고.
  • 1980년대 초반 기준으로 1억원의 빚이 있었다. 승용차가 100만원하던 데다가 당시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이 정확히 1억원이던 시대에 그 정도의 빚이 있었다는 건 충격이 아닐 수 없었지만 워낙 인기있는 가수이다 보니 비교적 빠르게 빚을 다 갚았다. 사실 1년에 364일을 공연했다고 할 만큼 무시무시한 속도로 돈을 벌었으니 그 정도의 빚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에이즈 루머였다. 에이즈는 지금도 인식이 좋지 않은 질병이고, 완치하기는 거의 힘들어도 의학의 발전 덕분에 약 먹고 관리를 잘 하면 증상 발현이나 전염력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일종의 만성 질환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 병 걸리면 무조건 사망하는 악질 전염병이라는 인식 + 동성애자들이 변태적 성행위를 해서 걸리는 질병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박혀있던 시절이라 이 때문에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안티가 생겨나기도 했다. 걸리지도 않은 질병에 걸렸다는 허위사실인 데다가 그 병이 역대 최악의 전염병이다 보니 마음고생이 정말 엄청났다고 한다. 2019년 이후까지 아무 일 없이 잘 살아가고 있으므로 이 루머는 당연히 거짓이다.
  • 전성기 시절에는 1년 내내 딱 1일만 빼고 휴일 없이 방송과 지역 행사를 모두 수행한 적도 있었다. 참고로 그 하루는 현충일이라고 한다. 현충일에는 유흥업소들이 자체적으로 휴업하는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 의외로, 하현우와 친분이 꽤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아들이 국카스텐을 추천한 이후, 그들의 매력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같이 공연을 한 적도 있고, 리더인 하현우는 따로 주현미의 집에 놀러간 적도 있다고 한다. 한번 밥을 차려줬는데, 정작 하현우는 놀러올때마다 본인 먹을 걸 따로 싸왔다고 한다...
  • 2019년 3월 23일부터 방영하는 드라마이자 본인이 OST도 참여한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에서 중국 화장품 회사 회장 역으로 카메오 출연을 했다. 연기가 아주 자연스러워 호평을 받으면서 실검 1위를 차지했다.
  • 2019년 7월 7일에는 KBS 전국노래자랑에 4년 만에 출연하여 신곡 '여정'을 열창해 많은 사람들의 앵콜외침과 호응이 매우 뜨거웠다.
  • 1985년 데뷔했으므로 2024년 현재 데뷔 만 39년차다.
  • 환갑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엄청난 동안이며 미인이다. 어지간한 50대보다 젊어보일 지경... 유튜브를 보면 안다. 키도 165cm로 그 당시 가수치고 나름 큰 키였고, 지금도 전성기 시절 몸매도 유지하고 있다.
  • 이주일과는 분야도 성향도 아주 딴판이었음에도 둘이 방송에서 만나면 아주 좋은 케미를 보여줬었다. '비내리는 영동교'를 이주일이 하나 하나 개사시키는 것을 주현미는 천연덕스럽게 잘 따라하는 등의 무대가 여럿 있었다.[21]
  • 2020년 5월 35주년 기념으로 책을 출간하였다. 제목은'추억으로 가는 당신'이다. 한국가요100년 역사에 주옥같은 명곡들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이 노래를 부르면서 느낀 것 ,생각도 적혀있다.
  • 2022년 기준으로 가요무대 출연횟수 1위다. 이는 2005년 출연횟수 발표 때랑 똑같다.
  • 2020년 4월에는 김미경TV에 출연하여 여러사연과 담소를 나누었다.
  • SBS 트롯신이 떴다에서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가 조미미라고 밝히며, 조미미 덕분에 자신이 가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


8. 음반 활동[편집]


  • 2022년 주현미 재즈 프로젝트 <신사동 그사람>
  • 2022년 주현미 재즈 프로젝트 <바다와 푸른 밤>
  • 2022년 주현미 싱글 <윤중로 연가>
  • 2021년 주현미 재즈 프로젝트
  • 2021년 주현미 재즈 프로젝트 <울면서 후회하네>
  • 2021년 주현미 재즈 프로젝트 <흐린비>
  • 2021년 주현미 재즈 프로젝트 <비내리는 영동교> [22]
  • 2021년 주현미 재즈 프로젝트 [23]
  • 2020년 20집 RART.06 <그 여자 그 남자/천일홍> [24]
  • 2020년 20집 PART.05 <금동아 은동아/바람이 되어>
  • 2020년 20집 PART.04 <길/그대와 차차차>
  • 2020년 20집 PART.03 <돌아오지 마세요/물망초사연>
  • 2020년 20집 PART.02 <세번의 사랑/상심>
  • 2020년 20집 PART.01 <여인의 눈물/ 꽃피는 청계산> : 코로나 19로 인하여 데뷔 35주년 투어 공연이 계속 연기가 되는 상황인지라 1달에 한번씩 6번에 걸쳐 2곡씩 발표한다고 한다. 이후에 노래가 다 발매가 되면 LP판으로 낼 예정이라고 한다.
  • 2019년 KBS2 주말 드라마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 OST <야래향/ 석양에 띄우는 편지>
  • 2018년 싱글 <여정>
  • 2018년 MBC 드라마 부잣집 아들 OST <그대를 불러봅니다>
  • 2015년 주현미 향토가요 <소백산>
  • 2014년 주현미 30th ANNIVERSARY ALBUM <빗속에서/최고의 사랑>
  • 2013년 tvN 꽃보다 할배 OST <2013 대지의 항구>
  • 2011년 주현미의 러브레터 프로젝트 음반 <내일 가면 안되나요/ 여백>
  • 2008년 EP <짜라자짜> with 서현
  • 2008년 조PD 콜라보레이션 "사랑한다"
  • 2006년 17집 <어허라 사랑/ 달아달아>
  • 2003년 16집 <정말 좋았네/ 사랑가>
  • 2000년 15집 <러브레터/ 없었던 일로 해요>
  • 1996년 싱글 <인생유정/ 첫사랑>
  • 1993년 14집 <첫사랑/ 정으로 사는 세상>
  • 1992년 13집 <또 만났네요/ 애인>
  • 1991년 12집 <사랑이야기/ 추억으로 가는 당신>
  • 1990년 11집 <잠깐만/ 단심>
  • 1989년 10집 <짝사랑/ 추억속에서>
  • 1988년 9집 <신사동 그 사람/ 다시 보고 또 보고>
  • 1986년 8집 <내가 왜 웁니까/ 눈물의 부르스>
  • 1986년 7집 <첫 정/ 태평무>
  • 1986년 6집 <빗물이야/ 연인들의 돛단배>
  • 1986년 5집 <탄금대 사연/ 월악산>
  • 1985년 4집 <울면서 후회하네/ 빗물이야>
  • 1985년 3집 <잊어야지/ 때로는 그리움이>
  • 1985년 2집 <님아 가지말아요/ 월미도를 아시나요>
  • 1985년 1집 <비내리는 영동교/ 길면 3년 짧으면 1년>


9. 방송 활동[편집]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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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준중국어로는 Zhōu Xuànměi이나,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기 훨씬 전부터 대만 국적의 음악인으로 활동하여 대만식 표기인 Chou Hsuan mei라는 표현이 많이 쓰인다.[2] 음력 1961년 9월 27일. 링크[3] 1973년 7월 1일 구(區)제 실시.[4] 실제로 짜라자짜를 같이 부른 소녀시대 서현과 동갑이다. 또한 서현의 어머니 역시 주현미와 동갑인 1961년 생이다.[5] 주현미의 데뷔연도는 공식적으로 1985년 '비내리는 영동교'다. 이미 1975년 중학교 2학년때 아버지의 권유로 앨범을 낸적이 있어 1975년을 데뷔년도로 쳐야한다는 얘기도 있고, 1981년 강변가요제로 쳐야한다는 얘기도 있고, 1984년 쌍쌍파티로 쳐야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주현미 본인은 항상 데뷔년도를 1985년 비내리는 영동교로 치기때문.[기준] 2023년 11월 11일[6] 아버지가 화교, 어머니가 토종 한국인이다. 이런 경우에는 이민 2세도 아니고 3세도 아닌 2.5세라고 한다.[7] 이로 인해 미혼모의 자식은 무국적자이며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미등록 인간이 되는 사회 문제가 발생하였다. 1998년 6월 14일생부터는 미혼모의 자녀이거나, 아버지가 외국인이고 어머니한국인이어도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받을 수 있는 부모 양계혈통주의 국적법으로 개정되었다.[8] 배우 하희라도 역시 결혼후에 대만에서 대한민국으로 귀화해 중국계 커뮤니티에 별로 참여하지 않는 화예이다.[9] 남진의 그대여 변치마오를 작곡한 작곡가다.[10] 일요일 밤의 대행진에 게스트로 나왔을 당시 MC 김병조가 "주현미 씨는 화교니까 중국어로 다음 코너를 소개해달라"는 멘트를 한 적이 있다.[11] 이때까진 1984년 쌍쌍파티를 데뷔년도로 친것으로 추정.[12] 원래 계획으론 앨범 발매와 동시에 데뷔 35주년 기념 전국투어 콘서트를 기획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콘서트는 취소되고 앨범만 발매되었다.[13] 1985년 KBS 가요대상 신인상 수상[14] 1988년 MBC 최고 인기 가수상,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했다.[15] 1988년 KBS 가요대상을 수상[16] 1989년 MBC에서는 최고 인기 가수상과 최고 인기 가요상을 수상했다.[17] 1990년 MBC 최고 인기 가요상 수상[18] KBS 가요대상 무대에 올해의 가수상 수상자로서, MBC에 10대 가수로 마지막으로 출연한 해이다. 전성기의 끝이었다고 볼 수 있다.[19] 물론 이전에도 80년대 후반부턴 발라드의 전성기가 오던 시기긴 했다.[20] 물론 최진희, 김연자, 김수희도 장년층은 물론 당시 젊은이들도 알고 자주 듣는 가수들이었지만 아무래도 80년대에 등장한 조용필, 이용, 전영록, 이선희, 김완선, 이지연 등이 젊은세대와는 더 가까웠기 때문에 80년대엔 이미 트로트가 성인가요라는 분류로 묶였다. 그럼에도 트로트라는 장르로 약 7년간 MBC 10대 가수, KBS 올해의 가수로 꼽히며 큰 인기를 누렸던것이 대단한 점.[21] 사실 이주일은 여자 연예인과의 궁합이 매우 좋은 코미디언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각별한 사연이 있던 하춘화와 잘 어울렸었다. 각별한 사연이란 다름 아닌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극장 붕괴사고로 죽을 뻔했던 하춘화를 이주일이 자신의 두개골 함몰이라는 중상을 입고도 극적으로 구조해준 인연으로 생명을 구한 사이다.[22] 재즈 버전으로 리메이크 되어 발매 됐다.[23] 정통재즈 뮤지션 필윤과 콜라보[24] 총 12곡 발매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