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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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宗宅
2. 송나라의 위인 宗澤


1. 宗宅[편집]


종가(宗家)의 가족들이 대대로 사는 을 가리키는 말.


2. 송나라의 위인 宗澤[편집]


1059 - 1128

북송 말과 남송 초기에 활약한 송나라의 관리, 명장. 자는 여림(汝霖),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091년에 진사로 급제한 뒤 여러 주현의 관리를 역임하였다가 자주(磁州)에서 관리를 역임하던 중에 정강의 변이 일어나자 당시 송흠종의 명으로 하북으로 파견되었던 강왕(훗날의 송고종)을 만류하여 머물게 해 그가 새로 조정을 세우고 강남에서 재건하게 되는 단초를 마련하였고, 그 후 재상 이강의 추천으로 동경(개봉)유수 겸 개봉윤에 임명되어 의군을 편성해 장강을 넘어 쳐들어온 금군을 수차례 요격한다.

그 후 악비를 통제(統制)로 삼고 폐허가 된 개봉에 입성하여 치안을 다지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하북에 남아있던 저항세력과 연계하여 금나라 군대를 상대하기로 하였다. 이 때 남송 조정은 그저 금나라를 두려워하기만 하여 남으로 도망가던 중이었고 반대로 금나라는 협정 위반을 빌미로 승세를 타고 남하하여 이내 개봉 일대에 다시 금나라 대군이 육박해 왔는데, 개봉의 모든 이들이 황망하여 두려워하는 가운데 홀로 태연한 안색이었다. 그는 개봉의 사람들에게 평상시처럼 장사를 하거나 연극 공연을 하게 하는 등 태연한 모습을 보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금군이 놀라고 의심해 개봉을 바로 치지 못하게 된다. 그러자 종택은 장사 수천을 몰래 금나라 군대의 후방에 배치해 퇴로를 막은 뒤 출성해 양쪽에서 들이쳐 금나라 군대를 대파한다. 이 일로 송나라 사람들은 종택을 '종 할아버지'(宗爷爷)라고 칭송하였고, 심지어 금나라도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 후 송고종에게 20여 차례에 걸쳐 개봉으로 환도하고 하북에 아직 남아있는 저항세력과 연계하면 중원을 수복할 수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으나, 이미 남송 조정은 현상유지를 택하고 있었다. 이에 분개한 종택은 등창이 도져 병석에 누웠고, 그 후 병석에서 "강을 건너라!"(過河! 過河!)를 연달아 외치고는 숨을 거두었으니 이에 개봉의 장졸과 백성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통곡하였다고 한다.

후대의 장수인 악비와 한세충의 명성에 가려져 한동안 상대적으로 비중을 받지 못하였으나 20세기 말에 들어 동북공정을 비롯한 중국 정부의 역사 재평가 움직임 속에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소설가 다나카 요시키창룡전에서 그의 고사를 언급하면서 제갈량과 함께 '한 장수의 죽음에 전군이 통곡한 단 둘뿐인 사례 중 하나'라고 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