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모트

덤프버전 :

존 윌모트
John Wilmot


파일:John_Wilmot.jpg

본명
존 윌모트, 로체스터 제2백작
John Wilmot, 2nd Earl of Rochester
출생
1647년 4월 1일
영국 잉글랜드 옥스퍼드셔 디칠리
사망
1680년 7월 26일 (향년 33세)
영국 잉글랜드 옥스퍼드셔 우드스톡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이름 (관계)
학력
초등학교 (졸업 · 중퇴)
중학교 (졸업 · 중퇴)
고등학교 (졸업 · 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 · 학과2[복수전공] / 재학 · 학사 · 중퇴)
종교
종교
직업
시인
소속
소속
서명
파일:빈 가로 이미지.svg

1. 개요
2. 탄생과 성장 배경
2.1. 찰스 2세의 신임을 받다
2.2. 타락과 방종, 그리고 죽음
3. 기타



1. 개요[편집]


영국의 시인.

2. 탄생과 성장 배경[편집]


윌모트는 1647년 잉글랜드 옥스퍼드셔에서 제1대 로체스터 백작 헨리 윌모트와 그의 부인 앤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아버지는 자작이었으며 찰스 1세의 신하였으나 올리버 크롬웰이 정권을 잡음에 따라 찰스 1세가 처형되고 그의 세자 찰스 2세가 도피 생활을 할 당시 그를 보호하며[1] 크롬웰 가문이 몰락하고 그가 잉글랜드에 돌아와 왕이 되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백작으로 승급되었고 동시에 로체스터를 영지로 받았다. 몇 년 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윌모트는 작위를 이어받았으며 동시에 찰스 2세의 무한한 신임을 받았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의 아들이었으므로 이러한 대우는 당연했다.

크롬웰은 정권을 잡고 호국경이 되어 잉글랜드를 더없이 엄격한 청교도 사회로 만들려 했고 당연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반발했다. 그러나 크롬웰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크롬웰이 죽고 그의 아들이 호국경 작위를 이어받았을 때에는 크롬웰에게서 백성들의 민심이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이 틈을 타서 조국을 떠나 있던 찰스 2세는 헨리 윌모트의 비호 아래 군대를 이끌고 크롬웰의 군대를 차례차례 격파하여 마침내 런던에 입성하였고 마침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크롬웰 치하의 잉글랜드와 대조되게, 당시 찰스 2세가 도피해 있던[2] 프랑스는 루이 14세 치하로, 바로크 문화가 꽃을 피우고 프랑스 사회는 자유분방하여 그곳에 살던 찰스 2세는 자연스레 그러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찰스 2세는 왕이 되자마자 이미 죽은 크롬웰의 시신을 파헤쳐 그의 머리를 매달았으며, 찰스 1세의 사형을 언도했던 재판관들과 찰스 1세를 배신하고 크롬웰의 편에 선 그의 중신 등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자들을 반역죄로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등 철저히 복수했고, 경직되어 있던 사회 분위기에서 이전의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로 돌아가려 애썼다. 곧 그의 노력으로 잉글랜드 사회는 자유분방해졌으며 자연스레 크롬웰에 큰 불만을 품고 있던 백성들은 찰스 2세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후 잉글랜드 사회는 찰스 2세의 즉위 이래 점차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당시 귀족들은 그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최소 1명 이상의 정부(情婦)를 두고 있었으며[3] 각종 문학과 연극의 소재가 성(性)과 관련된 내용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4] 윌모트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윌모트는 어릴 때 귀한 집의 자제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윌모트의 어머니 앤은 독실한 청교도 귀족 중 하나였던 세인트존(St. John) 가문 출신으로 청교도의 특성 상 검소하고 엄격한 생활을 고수했고 자식 교육에 열정이 대단했으며 고로 윌모트의 어린 시절은 전술한 대로 유복할지언정 자유롭지는 못했다.

윌모트는 옥스퍼드 대학 산하의 워덤 칼리지에 진학했는데,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그가 대학에 재학 중일 때 성적 가치관이 확립되었다고 한다. 당시 자유분방한 사회 분위기는 대학가도 피해가기 힘들었는데, 찰스 2세의 집권 당시 옥스퍼드 대학의 성적 문란함에 대해 당시의 반 남색주의자 정치인 더들리 라이더는 그의 저서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생끼리의 남색(sodomy)은 흔한 일이다...[5]

옥스퍼드 대학에 잘생긴 남성을 보내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윌모트는 대학 진학 후 여러 방법의 자위행위를 습득해 즐겨 했다고 한다.[6]

2.1. 찰스 2세의 신임을 받다[편집]


윌모트의 아버지 헨리가 사망하면서 찰스 2세는 윌모트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챙기곤 했다. 윌모트가 대학을 졸업하고 학위를 취득하자 찰스 2세는 축하의 의미로 윌모트 가문에 거액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으며 졸업 기념으로 윌모트를 프랑스이탈리아로 여행을 보내 주었다.

찰스 2세의 신임을 받은 윌모트는 이후로 승승장구하여 해군에서 복무하던 와중에 여러 전공을 세웠기에, 찰스 2세는 더욱 흡족해했다. 곧 찰스 2세는 짝이 없는 윌모트를 위해 중매를 하여 엘리자베스 말레트(Elizabeth Malet)라는 여성과 짝지어주었다. 그녀는 이후 로체스터 백작 작위를 승계하게 되는 찰스(Charles)와 딸 두 명[7]을 더 낳았다.

윌모트는 찰스 2세의 더없이 깊은 신임을 받으면서 찰스 2세를 바로 옆에서 보좌하며 그의 수발을 들고 그의 옆에서 잠을 잘 수 있는 현달한 직위까지 올라섰다. 윌모트도 찰스 2세의 호의에 대해 보상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자신이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연극배우인 넬 그윈(Nell Gwyn)이라는 여성을 찰스 2세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찰스 2세는 그녀를 보자마자 한 눈에 반해 이후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냈고 마침내는 그녀를 애인으로 삼았다. 상부상조

2.2. 타락과 방종, 그리고 죽음[편집]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는 윌모트였는데 결혼 이후 점점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그는 찰스 2세의 많은 신임을 받은 나머지, 찰스 2세와 마치 친한 아저씨 대하듯이 스스럼없이 대했다. 그런데 그렇게 대하기만 하면 다행인데, 항시 독한 술을 퍼마셔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고, 상스러운 욕과 음란한 말이 입에서 떠나가는 날이 없었으며, 술에 만취한 상태로 왕궁에 들어오기 일쑤였고 찰스 2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기어린 말투로 중얼중얼 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와중에 사고를 치는 일도 수없이 많았는데, 한번은 그가 찰스 2세의 바로 앞에서 나이든 궁정의 한 중신의 뺨을 때리고 욕을 하는 바람에 신하들의 항의로 일단 왕궁 출금 조치를 받았으나 찰스 2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곧 그를 사면시켰다.[8]

윌모트는 평소에 연극에 무척 관심이 많았는데, 그가 쓴 시만 하더라도 수십 편에 달하고 희곡도 능수능란하게 썼을 정도로 문학 쪽으로 예술적 감각이 꽤나 뛰어났다. 아래 항목에서 그의 작품 몇 가지를 소개할 것이다. 그는 엘리자베스 배리라는 여성 연극배우를 육성하며 후원했는데, 결국에는 그녀는 윌모트의 애인이 되었다.[9]

윌모트는 찰스 2세의 애인인 바버라 파머[10]를 아래와 같이 비꼬았고 이것이 윌모트가 찰스 2세의 신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시를 지을 당시 찰스 2세는 바바라에 한창 빠져 있었으므로, 바바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윌모트가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11]

The pattern of virtue, Her Grace of Cleveland,

Has swallowed more pricks than the ocean has sand;

But by rubbing and scrubbing so wide does it grow,

It is fit for just nothing but Signior Dildo.

미덕의 본보기이신 클리블랜드 공작부인께서는 바다가 품고 있는 모래알의 개수보다도 더 많은 성기를 품으셨지.

그러나 너무 넓어질 때 까지 비비고 문지르셔서, 그것에는 오직 딜도 씨(Signior Dildo)만이 꼭 들어맞는다네.

<Signior Dildo> - John Wilmot

위 사건도 모자라, 1673년 윌모트는 대형 사고를 터뜨리고 말았다. 크리스마스의 분위기에 들뜬 나머지 대놓고 찰스 2세의 무능함과 사치, 성적 문란함을 비꼬는 아래와 같은 시를 그에게 보내버린 것이다. 윌모트의 시를 받아 본 찰스 2세는 순간적으로 노하여 윌모트를 런던에서 즉시 추방해버렸다. 다음은 그 시의 일부이다.

In th' isle of Britain, long since famous grown

For breeding the best cunts in Christendom,

There reigns, and oh! long may he reign and thrive,

The easiest King and best-bred man alive.

Him no ambition moves to get renown

Like the French fool, that wanders up and down

Starving his people, hazarding his crown.

Peace is his aim, his gentleness is such,

And love he loves, for he loves fucking much.

영국의 국왕, 그는 기독교 왕국에서 최고의 창녀[12]

들을 기르는 데 능수능란한 것으로 오랫동안 유명했지.

그렇게 (그의 왕국을) 다스리면, 아! 길이길이 다스리고 (그의 왕국이) 번영할 수 있겠지.

그의 백성들을 굶기며 왕위를 위태롭게 만드는 프랑스의 돌대가리[13]

처럼 명성을 드날릴 수 있는 야망은 없네.

그는 평화를 추구하고, 아주 온화하지만, 그는 섹스를 너무도, 너무도 사랑한다네.

-<A Satyr on Charles II> – John Wilmot

이 시로 인해 추방된 윌모트는 채 세 달도 안 되어 찰스 2세의 명에 의해 다시 궁정으로 복귀했다. 이후로도 윌모트는 찰스 2세의 심기를 충분히 거스를 만한 사고를 여러 번 쳤으나 그때마다 찰스 2세는 형식적으로 벌을 주었을 뿐 곧 그를 사면시켜 주곤 했다. 그러나 윌모트가 찰스 2세로부터 완전히 신임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술에 취한 윌모트가 밤에 성 근처에서 사람 몇 명과 함께 돌아다니다가 말다툼이 발생해 윌모트가 홧김에 칼을 휘두르며 객기를 벌였고, 결국 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 윌모트가 휘두르는 칼에 찔려 숨지고 말았다. 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본 윌모트는 그 자리에서 도주했고 영영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에서 돌팔이 의사로 행세하고 다녔다. 그는 이미 반 폐인이 된 상태라 사람들은 그가 윌모트 백작인지 전혀 몰랐고 그냥 정신이 나간 돌팔이 의사로만 여겼다. 그가 의사로 행세하고 다녔던 이유가 가관인데, 그는 불임이나 성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것을 치료해 주겠노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이는 겉치레일 뿐이었고 사실 그는 여성들에게 접근하여 성관계를 나누고자 하는 음흉한 본새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14]

그렇게 삶을 근근이 이어나가던 윌모트는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는 그의 어머니, 몇 명의 옛 친구들이 동행했다. 사실 대부분의 지인들이 그의 행동에 질린 채 떠나간 상태였다. 그는 사망할 당시 임질, 매독 등 각종 성병을 달고 있어 온 몸이 망가진 상태였으며 알코올 중독 증세까지 있어 윌모트는 더없이 고통스럽게 죽었다. 죽은 뒤 고향인 옥스퍼드셔에 묻혔다.

그가 사망한 뒤 찰스 2세는 그의 부고를 듣고 슬픔에 잠겼다. 곧이어 윌모트의 지난날의 과오들을 용서하고 그의 유일한 아들인 찰스 윌모트에게 작위를 잇게 했다.

3. 기타[편집]


그의 죽음 이후 그의 행적들과 수많은 작품들은 끊임없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구설수에 올랐다.

윌모트는 2004년 영화 리버틴(The Libertine)에서 재조명된 적이 있다. 조니 뎁이 윌모트(극중에서는 로체스터 백작)로 분하여 주연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7 05:36:08에 나무위키 존 윌모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복수전공] [1] 크롬웰 군대의 공격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그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다.[2] 찰스 2세의 어머니가 프랑스 왕 루이 13세의 누이이므로 프랑스 왕실은 찰스 2세의 외가이다. 그러므로 루이 14세와 오를레앙 공 필리프는 찰스 2세의 고종 사촌.[3] 찰스 2세만 해서 수십 명의 정부를 두어 모범을 보였으니(...) 귀족들이 따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4] 원래 찰스 2세의 통치 이전까지는 여성이 연극배우로 활동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는 남성 배우와 여성 배우가 같이 활동하면 문란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이유였다. 그러나 남성 배우끼리 활동하는 과정에서 그보다 더한 문란함이 발생하는 경우가 빈번해져, 찰스 2세는 이러한 규정을 폐지하고 여성이 연극배우로 활동할 수 있게 허락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여성 배우가 이름을 드날렸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마거릿 휴즈(Margaret Hughes)가 있다.[5] 당시 옥스퍼드 대학은 남성만이 다닐 수 있었고, 대학 기숙사에서는 한 침대에 두 명 이상이 잤으므로.(...)[6] 당시에는 자위행위가 엄격히 금기시되었다. 그나마 찰스 2세의 시대라서 어느 정도는 묵인되었을 것이다.[7] 참고로 이 딸들 중 한 명은 샌드위치 백작가에 시집가는데 이 딸의 손자(윌모트의 진외증손)가 4대 샌드위치 백작 존 몬태규다.[8] 윌모트의 이러한 행동은 왕실 모독죄로 사형까지도 처해질 수 있는 중대한 죄였다.[9] 찰스 2세의 시대에는 활동하는 여성 연극배우가 그녀를 후원해주는 귀족이나 부유 계층 남성의 애인이 되는게 하나의 트렌드였다.[10] 원래 성은 빌리어스였으며 파머 성을 가진 클리블랜드 공작부인이었다. 넬 그윈과 더불어 찰스 2세가 가장 총애하던 애인들 중 한 명. 평범한 연극배우에 불과해 출신이 미천했던 그윈과는 달리 집안이 좋아 찰스 2세가 더더욱 총애했다. 사실 그녀의 할아버지가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도 등장한 바 있는, 제1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인데, 찰스 2세의 할아버지 제임스 1세의 총신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조지 빌리어스는 당시 굉장한 미남이었고, 이 덕분에 어릴 때 제임스 1세의 눈에 들어 죽을 때 까지 그의 신임을 독차지했다. 제임스 1세가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고 추측되는 이유이다.[11] 이러한 윌모트의 풍자는 일반적인 신하라면 처형까지도 처해질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으나 찰스 2세와 윌모트의 아버지와의 인연이 워낙 강했던지라 왕궁의 출입을 왕의 재가가 있을 때 까지 무기한 금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12] ‘Cunt’는 ‘여성의 성기’를 이르는 말이지만, 창녀를 저속하게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13] 찰스 2세의 사촌 루이 14세를 일컫는다. 실제로도 암군 중의 한 명.[14] 일설에는 아예 여성으로 분장하여 여성들의 의심 없이 쉽게 접근해 관계를 가졌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