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스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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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주니어스 스티니 주니어
George Junius Stinney Jr.

파일:george-stiney.jpg

출생
1929년 10월 21일
사망
1944년 6월 16일 (향년 14세)[1][2]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출생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파인우드
신체
157cm, 43kg
부모
에임 스티니, 조지 스티니 시니어
형제
캐서린 스티니

1. 개요
2. 사건
3. 체포와 재판
4. 집행
5. 이후
6.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지 스티니는 미국에서 1944년에 백인 여아 두 명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만 14세의 나이에 전기의자형에 처해진 흑인 소년.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이후 인종차별, 빈민차별로 빚어진 사법살인의 피해자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대표적인 인종차별이자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대표되는 빈민차별에 의한 졸속재판 및 누명 씌우기에 의한 사법살인의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으며 훗날 사형된 자의 누명이 벗겨지더라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는 사형제도의 최대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오늘날, 각 국들이 사형제도를 폐지, 반대하거나 시행하지 않고 있음에 있어 조지 스티니 누명 사건은 양심수, 누명 등 여러 문제를 포함해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보여지고 있다.


2. 사건[편집]


[3]
1944년 3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알콜루에서 각각 11세, 7세인 백인 여자 아이의 시신 2구가 발견되었다. 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꽃놀이를 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는데 전날 밤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자 부모에 의해 실종 신고가 되어 있던 상태였고 경찰의 수색으로 시신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소녀들은 얼굴 및 두개골이 둔기로 손상된 흔적이 있었으며 성폭행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흔적도 발견되어 시간 가능성도 있을까 조사했지만 부검 결과 두 구의 시체에서 성폭행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3. 체포와 재판[편집]


경찰은 사건의 용의자로 경찰의 수색 작업을 도와줬던[4] 14세 흑인 남자 조지 스티니를 체포했다. 경찰에 의하면 체포 후 스티니 본인이 범행을 자백했다고 한다. 형 존(John)도 동생과 동시에 체포되었지만 형은 얼마 안 있어 석방되었다.

지역 보안관은 "조지 스티니가 15인치(약 38cm) 크기의 둔기를 숨겨둔 곳을 알려줬다"고 했지만 스티니가 스스로 인정한 증거물은 없었으며 경찰이 자신을 오래 굶긴 후 먹을 것으로 허위자백을 유도했다고 한다. 스티니는 체포 후 81일 동안 수감되었으며 재판 후 딱 1회를 제외하면 부모님을 만날 기회조차 없었다. 스티니의 여동생은 범행 시각에 스티니가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묵살당했다.

스티니의 평소 학교에서의 행적이 알려지며 더욱 불리해졌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자주 싸움에 휘말렸으며 스티니의 교사는 스티니가 한 백인 여학생을 살해협박한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스티니의 체포 이후 스티니의 아버지는 체포되었고 가족들은 살던 곳에서 쫓겨났다.

재판은 속기록 없이 2시간 반 가량 진행되었다. 스티니의 변호인은 스티니에게 증인 신문은 커녕 증인을 불러들이지도 않았고 스티니에게는 자기변호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5]10분밖에 안 되는 심의 끝에 유죄로 결론지었고 재판관은 전기의자형을 언도했다.

스티니의 가족들은 나이를 감안해 감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 집행[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0px-Electric_Chair_at_Sing_Sing-noborder.jpg

  • 당시 모습을 재연한 영화 Carolina Skeletons의 한 장면[6]
이 영화에서는 스티니가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마지막 할 말이 없냐는 판사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집행 직전에 한 경관이 묻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고 한다.

1944년 6월 16일 전기의자형이 집행되었는데 어린 그의 체구가 작아 성경을 받쳐서 앉아야 했다.[7] 그리고 스티니는 아무런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스티니의 사형은 아직까지도 미국 역사상 최연소 사형 집행으로 알려져 있다.[8]



5. 이후[편집]


2004년에 한 지역 사학자에 의해 재조사가 시작되었고 2013년 10월 25일부터 몇 명의 변호사와 함께 재심 청구가 추진되어 1년 뒤인 2014년 12월 16일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특히 한 백인 남성이 임종 직전에 자신이 이 사건의 범인이라고 고해했다는 죽은 남성의 가족들의 증언이 있었다는 말이 돌았지만 스티니의 변호사들과 살인 피해자의 유족들은 이 이야기는 입증되지 않은 소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1940년대에 발생한 사건임에도 왜 80년이 가까이 되도록 범인의 이름이 대중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지역 역사학자 조지 프리어슨(George Frierson)의 연구에 의하면 이 아동 살인마는 아주 유명한 거물 백인 가문(well-known, prominent white family) 출신, 즉 지역 토호 가문 출신이었고 심지어 범인과 같은 가문 출신의 검시관과 배심원이 앞장서서 조지 스티니에게 죄를 덮어 씌우는 작업을 주도했다고 한다. (@ The False Conviction and Unjust Execution of George Stinney)[9]

하지만 피해자 유족들은 원심번복에 대해 '14세 아이를 사형시킨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조지 스티니가 유죄라는 믿음은 변치 않는다'고 밝혔다. 아무 죄도 없는 14살짜리 소년에게 살인 누명을 씌워 사형시켜 버린 야만스럽고 잔혹한데다 비극적인 사건이기에 피해자 유가족들도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 취하는 방어기제였던 것이다. 물론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는 죄 없는 조지 스티니를 두 번 죽이는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못해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태도다. 억울하게 처형당한 조지 스티니의 유족들 역시 자신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하루아침에 어린 자식을 잃은 피해자인데, 그들의 입장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가족을 잃은 자신들의 슬픔과 무고한 소년을 죽여버린 자신들의 죄책감만 우선시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10] 다만 한 피해자의 조카딸은 스티니가 유죄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스티니의 재판이 불공정했고 부당하게 사형을 당했다는 것은 인정했고 추가적으로 스티니와 그의 유족들이 불쌍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사건의 진범으로 가장 유력하게 지목되는 인물은 목재 회사를 운영하던 백인 부유층의 아들이었던 조지 버크 주니어(George Burke Jr., 1921~1947)인데 사실 오래전부터 스티니가 살던 마을에서는 조지 버크 주니어가 사건의 진범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참고로 조지 버크 주니어는 이전에도 바람둥이로 소문이 나 있던 데다 절도 전과도 있는 평판이 안 좋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조지 버크 주니어의 아버지인 조지 버크 시니어(George Burke Sr.)[11]는 이전에 스티니의 어머니에게 부적절한 접근을 한 적도 있었던 데다 시신이 발견된 침례교회 뒤편 지역의 소유주였고 소녀들의 시신을 발견한 수색대의 조직원이었으며 심지어 본인이 직접 검시관 배심원단의 주임으로서 스티니의 구속을 촉구하면서 대배심원도 맡기도 했다고 한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여아 2명을 잔혹하게 살해하고도 가문의 힘으로 이 죄를 14세밖에 안 된 무고한 소년에게 뒤집어씌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이 희대의 악한은 하늘이 무심치 않아 천벌을 받은것인지 결코 오래오래 잘먹고 잘살지는 못했다. 사건 3년 뒤에 만성 신장질환 합병증으로 26세의 나이에 요절했다고 한다.

물론 이 사건은 현재도 사형 폐지론자들이 주요 근거로 내세우는 사건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른 형벌은 누군가가 누명을 쓰더라도 시간이 지나서 재조사가 시작되면 어렵지만 일단 어떻게라도 되돌리고 피해자에게 배상할 수 있는 반면[12] 누명을 쓴 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형은 일단 집행되고 나면 누명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한다는 게 원천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13] 그리고 알게 모르게 미국에는 아직 인종차별백인 우월주의가 상당히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것이 현재진행형임을 아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6. 매체에서[편집]


  • 1991년 영화 Carolina Skeletons
  • 2018년 영화 83 Days
  • 2021년 영화 캔디맨[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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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4년에 백인 여아 두 명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음.[2] 전기의자형[3] 휴먼버그 대학교 채널에서 존 스테이시라는 이름으로 각색되었다.[4] 칭찬받아야 마땅할 좋은 일을 한 소년이 오히려 범인으로 몰린 것이다. 훗날 한국에서 벌어진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과 유사하다. 도주하는 범인을 본 목격자로 경찰에 제보를 해 주는 좋은 일을 한 소년이 오히려 범인으로 몰린 것이다. 이유는 뻔하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없는 집안이었으니까. 그나마 이 사건에서 누명을 쓴 소년은 미성년자라는 점이 감안되어 징역 10년이 선고되었지만.[5] 당시 미국에서는 흑인은 읽고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배심원으로 선정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6] 흔히 이 영화의 특정 장면이 컬러 복원한 스티니의 사형 장면이라면서 인터넷에 떠돌아다닌다. 당연하지만 조지 스티니의 실제 사형 장면은 녹화된 적도 찍힌 적도 없다.[7] 조지 스티니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8] 엄밀히 말하면 미국에서 최연소로 사형당한 사람은 조지가 아니다. 이미 1786년지적장애를 가진 12살 아메리카 원주민 소녀 해나가 코네티컷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 둘 다 결백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공통점도 있다.[9] 실제로 1995년에 스티니의 여동생이 상술한 증언을 남긴 당시까지 살아 있던 스티니의 선생님과 연락해 가며 확인한 결과 누군가가 돈을 주고 스티니의 선생님에게 허위 증언을 강요한 것이었다고 한다.[10] 심지어 한 피해자의 조카는 1990년대 초에 당시 사건에 참여한 경찰관에게 "그 소년이 당신의 숙모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11] 여담으로 스티니의 아버지는 버크의 목재 회사에서 근무했으며 스티니의 어머니는 버크 가문의 하녀로 일한 적이 있다.[12] 미국의 경우 이러한 사례가 발생할 시 국가배상으로 보상금이 주어진다. 다만 그 금액은 주마다 다르며 최고액은 연간 5만 달러를 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수천억에 달하는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정도로 많이 주지는 않고 특히 무고한 징역살이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는 주도 있다. 물론 이 사안은 미국에서도 논란이 많기에 현재 모든 주가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법안이 재조정에 들어갔으며 그 금액 또한 증가하는 추세다. 가장 많은 증가폭을 보인 주는 텍사스주로, 법안이 통과될 시 주 정부 차원에서 최대 8만 달러까지 보상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13] 실제로 영국적도 기니처럼 사법살인에 대한 비난 여론 때문에 아예 사형제가 폐지된 나라도 있다. 전자는 1950년에 티모시 에반스(Timothy Evans, 1924~1950)라는 무고한 남성을 부실한 조사로 아내와 어린 딸을 살해한 범인으로 만들고 사형시켰으나 3년 후에 진범이 밝혀지면서 사형제에 대한 인식이 악화되어 1965년에 사형제를 폐지했고 후자는 2010년에 베냉에 있던 망명자 4명을 납치하고는 고문을 통한 자백으로 대통령 암살 미수 혐의를 뒤집어씌워 형 확정 1시간 만에 모조리 총살형시킨 게 국제적으로 맹비난을 받자 2014년을 마지막으로 사형을 집행하지 않다가 2022년에 아예 사형제를 폐지했다.[14] 쿠키 영상에서 그림자 놀이로 나오며 캔디맨 중 1체가 되어 버린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