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프 조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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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르 원수의 사진
이름
조제프 자크 세제르 조프르
(Joseph Jacques Césaire Joffre)
출새
1852년 1월 12일
사망
1931년 1월 3일 (78세)
계급
프랑스군 원수(Maréchal de France)
장례식
1931년 1월 7일

1. 개요
2. 1차 대전 이전
3. 초반의 실패
4. 마른 전투: 방어의 성공
5. 마른 전투 이후
6. 말년
7. 기타



1. 개요[편집]


19세기 말 ~ 20세기 초 프랑스의 군인.

제1차 세계대전 초 서부전선에서 독일의 속전속결 시도를 저지하고, 제1차 마른 전투에서 성공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여 '마른의 승리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후 베르됭 전투에서는 대놓고 공세가 있을 것이라는 낌새와 첩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등한시하였다. 결국 이 판단 실책으로 인해 비교적 잘 막을 수 있었던 싸움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현장지휘권을 박탈당하고 사임했다.

그래도 마른 전투의 공이 있었기에 명예직 원수로 임명되었다.[1]

2. 1차 대전 이전[편집]


에콜 폴리테니크를 졸업한 뒤 파리 공략(1870~71)에 소위로 참전했고, 그후 인도차이나·서(西)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 등지에서 복무했다. 1905년 사단장으로 승진한 그는 1911년에 참모본부장으로 임명되었고, 3년 후 1차대전이 일어나자 총사령관이 되었다.


3. 초반의 실패[편집]


조프르는 프랑스-­독일 국경을 넘어 쳐들어가는 대규모 침공 작전을 세웠고, 프랑스 육군은 이 작전에 따라 1914년에 독일을 공격했지만 그 결과는 비참하게 끝났다. 독일군 주력부대가 벨기에를 통해 우회하는 바람에 조프르를 비롯한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오히려 적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연합군은 측면에서 포위당할 위기에 빠졌으며 파리도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상태였다.


4. 마른 전투: 방어의 성공[편집]


프랑스군은 초기에 실패를 겪었지만 아직 전역에서 지진 않았고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여럿 있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과 달리 효과적인 지휘통제 체계와 최초의 손실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은 지휘관이 있었다. 독일군의 통신체계가 붕괴된 반면, 프랑스군의 통신체계는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게 정보를 전달했다. 조프르는 급속한 상황 변화를 바라보았고 여러 번 자신의 주요 지휘관들과 회동했다. 프랑스군은 병력 배치를 위한 완벽하고 신뢰할 수 있는 철도망도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1871년의 패배 이후 철도망을 상당히 개선했고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한쪽 국경에서 다른 쪽 국경으로 용이하게 이동시킬 여러 철도선을 새로 만들었다. 1914년에 프랑스군은 우익에서 좌익으로 병력과 장비를 수송하면서 조프르의 위협대처 능력을 크게 개선시켰다.

조프르가 독일군의 전략을 느리게 파악하고 적의 주공 지역도 늦게 파악했지만, 그는 독일군의 의도를 이해한 후 신중하게 프랑스군의 작전상 배치를 재조정했다. 프랑스에게는 운 좋게도 몰트케의 전략은 조프르가 빠르게 병력을 재배치하고 서쪽에서 독일 제1군과 제2군의 바로 앞에 병력을 수송하게 허용해 주었다. 8월 24일에 조프르는 제1군과 제2군이 우익에서 위치를 고수하라고 명령했고, 제3, 4, 5군과 벨기에군은 남쪽으로 후퇴시켰다. 조프르는 독일군을 솜 강에서 베르됭에 이르는 선에 고착시키려 했다. 조프르는 좌익을 강화하려고 새로 편성된 2개 야전군을 집결시켰다.

조프르는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왼쪽 측면에 공격을 강화할 것이라고 확신하여 병력을 그쪽으로 돌리고, 독일군의 포위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제6군을 창설하여 직접 지휘를 맡았다. 가장 어려운 이 시기에 그의 뛰어난 자질이 드러났다. 그의 침착하고 강인한 성격과 용기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파리 북쪽으로 조여들고 있는 막강한 독일군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으면서, 독일군이 파리에 바싹 접근할 때까지 후퇴를 계속했다. 이와 동시에 현실을 인정하고 동쪽에 있던 병력을 대대적으로 서쪽으로 옮겨 병력을 확보했다. 이 당시에 파리에 있던 차량이란 차량은 모두 동원해서 병사들을 이동시켰다고. [2] 새로운 제6군이 미셸 J. 모누리(Michel J. Maunoury)의 지휘 아래 파리 일대에 집결했고, 제9군은 페르디낭 포슈(Ferdinant Foch)의 지휘 아래 후퇴하는 제4군과 제5군 뒤에 위치해 두 야전군 사이에 나타난 틈을 막았다.

다른 변화도 프랑스군의 효율을 높였다. 조프르는 전술을 고려하며 야전군 사령관들에게 보병이 반드시 포병의 공격준비사격 이후에 공격하라고 알렸고, 대규모 공격을 금지했다. 이건 30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배운 전술적 지혜였다. 조프르는 제3군과 제5군 사령관을 비롯한 지휘 구조도 바꾸었다. 수십 명의 여단장 및 사단장들도 면직당했다. 이런 조치는 가끔 불공정하기도 했지만, 냉철하고 자신감 넘치는 투사인 루이 프랑셰 데스프리(Louis Franchet d'Espèrey)가 지휘 구조에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평시에는 훌륭했지만 실전에서는 좋지 못했던 장교들이 좌천당했다.

조프르가 좌익을 강화할 동안, 독일군의 작전계획에도 변화가 생겼다. 핵심적인 계획수정은 독일 제1군 사령관인 알렉산더 폰 클루크(Alexander von Kluck)가 자신의 병력을 파리 동쪽 끝으로 이동시킨 것이었다. 클루크는 파리 서쪽 끝으로 진출해 파리를 포위하기보다는 동쪽을 택했다. 슐리펜의 거대한 바퀴가 계속 돌자, 클루크의 결정은 독일군의 좌익을 파리에서 오는 공격에 노출시켰고 독일군의 작전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8월 2일에 프랑스 정부는 조제프 갈리에니(Joseph Galieni) 장군에게 파리 방어 임무를 맡겼다. 모누리의 제6군이 요새화된 파리 시로 들어가서 갈리에니의 지휘를 받으면서, 파리 방어 병력은 서서히 증가했고 예비군과 식민지 부대들도 파리로 들어왔다. 프랑스군은 초기에 파리를 방어하려 했지만, 제6군의 규모가 증가했고, 독일군의 우익이 채널 해협을 통해 계속 노출되자,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기회가 왔다.

9월 4일에 갈리에니는 항공기 여러 대를 보내 파리 북쪽과 서쪽을 정찰하게 하였다. 조종사들이 돌아와 갈리에니에게 클루크의 제1군 소속 4개 군단이 마른 강을 파리 북동쪽에서 도하하고 있고 1개 군단이 독일군 우익 전체를 방어하려 남았다고 보고했다. 그 날 프랑셰 데스프리가 영국군 병력과 조우했다. 데스프리는 영국군의 좌익을 파리에 있는 병력으로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영국군을 공세에 가담시켰다.

조프르는 그날 저녁 늦게 데스프리에게 영국군과 만난 결과를 보고받았고 갈리에니와 취약해진 독일군 측방으로 빠르게 반격을 개시하려고 열띤 대화를 전화로 나누었다. 갈리에니가 여기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프르는 9월 6일 아침에 반격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몰트케는 룩셈부르크에 있는 사령부에서 클루크가 운명적인 결정을 내린지 하루 뒤인 9월 4일에 제1군의 우익, 즉 독일군 전선 전체의 우익이 파리에 있는 프랑스 제6군의 공격에 노출되었다는 상황을 알았다. 몰트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우익의 제1군과 제2군의 진격을 중지키셨다. 몰트케는 우익의 제1군과 제2군이 승리를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하자 제3, 4, 5군에게 중앙에서 계속 공격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좌익에서는 남쪽으로 공격을 하라고 명령했다. 제1군과 제2군은 파리 바로 앞에서 정지해 독일군의 우익을 방어했다. 클루크의 제1군은 마른 강 북쪽에 있을 뿐만 아니라 노출된 지점을 뒤로 뺐다.

마침내 9월 5일 프랑스군의 왼쪽 측면을 맡고 있던 부대가 파리 바로 밖에서 병력이 훨씬 우세한 독일군을 맞아 싸우기 시작했다. 이에 맞추어 조프르는 9월 6일 연합군의 반격개시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마른에서 벌어진 첫번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부분적으로 물리쳤고, 이로 말미암아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작전은 오랫동안 교착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연합군이 6일에 반격을 개시했을 때, 작전의 성패는 모누리의 제6군과 존 프렌치(John French) 경의 영국원정군, 그리고 데스프리의 제5군에 달려 있었다. 상황은 연합군에 유리했다. 폰 클루크의 야전군은 마른 강 남쪽과 북쪽으로 쪼개져 있었다. 클루크는 몰트케에게서 온 전신을 받고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았지만 그의 선두 부대가 이미 마른 강을 건넜다. 클루크는 전력을 북쪽으로 옮겨 야전군을 파리에서 오는 프랑스군에 대적하게 하려 하다가 제2군과의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그동안 프랑스군의 독일 제2군 우익에 대한 공격은 독일 제1군과 2군 사이에 더 큰 틈을 만들었다.

실마리를 잡은 영국원정군과 프랑스 제5군의 좌익이 이 틈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하며 적의 수색 부대만 상대했다. 연합군 병사들은 독일 제1군과 제2군 사이를 지나간다는 것의 중요성을 모른 채 느리게 이동했다. 8월 9일 아침에 영국군이 샤토티에리(Chateau-Thierry) 근처에서 뫼즈 강을 도하해 뫼즈 강과 독일 제1군과 2군 사이에 교두보를 만들었다. 이러한 성취로 독일의 2개 야전군이 방어를 취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영국군의 선두가 전방으로 갈 동안, 갈리에니는 모누리의 제6군을 증원하려고 애를 썼다. 갈리에니는 택시 600대를 동원해 1개 사단을 파리에서 수송해 왔다. 클루크는 프랑스 제6군을 막아내고 파리로 이동하려 했으나, 독일 제1군이나 제2군 모두 두 야전군 사이의 틈을 메우거나 연합군이 이 틈으로 들어오는데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조프르가 파리에서 독일군 좌익을 공격하려 시도하다 실패했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제1군과 제2군 사이의 틈으로 진격하며 독일군이 후퇴 말고는 방법이 없게 만들었다.

독일군이 파리 인근에서 후퇴하면서 전쟁의 서부전선 개전 전역이 끝났다. 독일군 우익의 다른 야전군들도 후퇴했고 이후 독일군과 연합군 모두 서로의 측방을 우회하려는 "바다를 향한 경주"가 실패하며 영국 해협의 니우포르트(Nieuwpport)부터 남쪽의 누아용(Noyon,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100 km), 동쪽의 베르됭, 그리고 남동쪽의 콜마르(Colmar)까지 이어진 참호선이 형성되었다. 조프르는 프랑스를 길고 잔혹한 전쟁에서 구하지 못했고 전역 초기에 여러 끔찍한 실수를 범하긴 했지만, 그는 결국 독일군의 결정적 승리를 막았다. 결국 프랑스군의 작전수행 능력이 "마른 강의 기적"을 달성하게 한 것이다.[3]


5. 마른 전투 이후[편집]


1914년말에 이르자 서부전선은 수많은 참호가 설치된 철통 같은 방어선으로 굳어졌고, 이 방어선은 1918년까지 유지되었다. 1915년 조프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희생을 치르면서 독일군 진지를 돌파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조프르의 명성은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1916년에 독일군이 베르됭을 침공했을 때 프랑스군이 이에 대비하지 않은 것은 그의 책임이었다.

조프르는 직접지휘권을 박탈당한 뒤 1916년 12월 26일 사임했고, 같은 날 프랑스 육군원수로 임명되었다.


6. 말년[편집]


전쟁 후에도 13년을 더 살았고, 1931년에 타계했다. 그가 죽은 이듬해인 1932년에 2권으로 된 그의 《회고록 Mémoires》이 출판되었다.

여담으로 1922년 식민지였던 조선을 방문하여 창덕궁에서 순종황제를 알현했었다.


7. 기타[편집]


  • 1914년 개전 이후 참호전이 시작되면서 포탄 파편에 머리가 깨지는 병사가 속출했다. 전선에서 철모를 보내달라는 애원이 빗발쳤지만, 조프르는 철모를 보급하기도 전에 이 전쟁은 끝난다면서[4] 그런 데 쓸 쇠가 있으면 포탄을 한발이라도 더 만들겠다고 묵살했다. 보다 못한 아드리앙이라는 일개 보급병의 제안으로 양철로 만든 철모가 보급되었는데, 이것만으로도 머리 부상을 입는 병사가 획기적으로 줄어들자 조프르는 마지못해 철모 생산을 승인했다.

  • 1915년 초, 조프르는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에게 "5월 이전에 우리 땅에서 결판이 날 겁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그 해 봄부터 가을까지 상파뉴와 아르투아 전선에서 수백만의 프랑스 병사들이 아르곤, 와브르, 보주, 보쿠아, 에파르즈, 랭주, 비에유 아르망 등에서 겨우 몇 미터의 땅, 포탄구덩이 하나, 망루 하나를 걸고 며칠에서 몇 주에 걸쳐 공세를 벌여야 했다. 46만 명의 전사자와 132만 명의 부상자, 117만 명의 병자를 대가로 프랑스가 얻은 것은 몇 킬로미터의 숲(이었던 것)과 몇몇 마을(이었던 것)이었다.

  • 조프르는 "전쟁이 끝나면 독일군에 투항했던 비겁자들이 조국에 돌아오는 대로 군법재판에 세우겠다"라고 공언했다. 공격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대나 대대에서 무작위로 선발된 병사들을 처형하는 10분의 1형이 성행했다. 1914년 9월에는 이런 사건도 있었다. 모 지역 전선에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설익은 열매를 주워먹고 장염에 걸린 병사 다섯 명이 후방으로 후퇴하자, 한 장군이 권총으로 그들을 전부 즉결처분해 버렸다. 그러자 지난 2주 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 25kg의 군장을 메고 굶주림 속에 퇴각하던 수만 명의 병사들이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익은 이삭 그늘 앞으로 쓰러져갔다.

  • 1914년 독일군의 대구경 박격포 공격에 폐허가 된 벨기에와 프랑스의 요새를 보고 나서 영원히 요새화의 효과를 믿지 않게 된 조프르는 많은 멀쩡한 요새들을 해체하여 단순히 방어시설이 갖춰진 거점 쯤으로 전락시켰다. 이로 인해 요새에 있던 대포들은 근접방어에 필요한 측면방어용 소구경 포를 포함해 전부 다 야전부대로 보내졌다. 따라서 요새에는 해체가 불가능한 대포 몇 문만 포탑 아래 달랑 남아 있었다. 요새의 수비대는 사라지고 나이 든 (40대 이상) 국토방위병들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상설요새의 역할을 부정한 것은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프랑스군 최고 사령부가 보여준 무분별함의 증거다. 수백만의 병사들이 진흙구덩이 참호에서 뒹굴던 판에 최고사령부가 보여준 이 몰상식함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915년 8월의 일이었고, 다음해 2월 베르됭 전투에서 38만에 달하는 프랑스군이 죽거나 다치게 된다. 2월 25일, 독일군 1개 공병소대가 50명의 국토방위병밖에 없었던 베르됭의 요충지 두오몽 요새를 무혈로 점령하여 돌파구를 뚫자 프랑스 중앙집단군 사령관 드 랑글 드 카라는 베르됭을 포기하고 도망치려 했다. 같은 날, 조프르가 필리프 페탱에게 베르됭 방어의 전권을 위임하지 않았더라면 그 해 여름이 가기 전에 프랑스는 패망했을 것이다.

  • 1915년 12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에 정식으로 임명된 조프르는 독일을 "자근자근 먹어치워 버리겠다"라고 호언장담했다. 2월 초, 베르됭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가해질 것이라는 첩보가 점점 명확해져갔다. 이미 독일군의 공세에 대한 소문이 의회와 대통령궁에서 공공연하게 돌았고 심지어 푸엥카레 대통령이 자신이 직접 베르됭을 시찰해야겠다고 조프르에게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연합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서 여름에 있을 솜 공세 준비에 목매달고 있던 조프르는 "정부가 이런 종류의 허위정보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군대의 규율을 심각하게 뒤흔드는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카스텔노 장군도 1월 중순에 베르됭의 방어진지가 절망적인 상태라는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조프르는 이에 대해서도 "전략적 측면에서 봤을 때 독일이 베르됭을 칠 리가 없다. 이 전쟁은 큰 변화가 있어야만 끝나는데, 베르됭은 변화가 일어날 곳이 아니다."라고 묵살했다. 결국 조프르가 베르됭에서의 공세 가능성을 인정하고 예비대를 파견하기로 한 건 2월 10일이었는데 불과 이틀 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독일군이 총공세를 감행했다.[5]

  • 체격이 후덕하고 얼굴도 통통한 이미지인데 자기관리의 실패를 떠나서 푸짐한 식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던 장군이다. 존 키건의 1차 세계대전사에 따르면 식사 시간에는 군무도 어느정도 놓을 정도로 먹는 것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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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전 당시 프랑스군의 원수는 총 세 명이었으며 나머지 둘은 필리프 페탱페르디낭 포슈다.[2] 독일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라면 강력한 요새지역이었던 베르됭을 포기할 각오까지 했다고 한다. 2차대전 프랑스와 아주 크게 비교되는 선택으로, 2차대전 프랑스군은 정 반대로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해 아르덴-스당쪽으로 보낼 수 있는 병력 중에 일부를 마지노선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3] 출처: Robert A. Doughty, "French Operational Art 1888–1940", in Historical Perspectives of Operational Art (Washington D.C.: Center of Military History, 2005), pp.79-82.[4] 1914년에 한 말.[5] 이상 출처 - "그래픽노블 1차 세계대전" 부록, 프랑스 역사학자 장 피에르 베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