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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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상훈 · 2 김영빈 · 3 이지솔 · 5 이웅희 · 8 한국영 (C) · 9 야고
11 갈레고 · 13 강지훈 · 14 김대우 (VC) · 15 이재원 · 16 박기현 · 17 유인수 · 18 이정협 · 19 조진혁 · 20 윤석영 (VC)
21 김우석 · 24 김진호 · 26 조현태 · 28 김주형 · 29 홍석환 · 30 이동진 · 31 이광연 · 32 고민석 · 33 이승원
35 박상혁 · 36 이지우 · 37 김현규 · 38 김기환 · 39 최성민 · 41 조민규 · 42 권석주 · 43 김해승 · 44 전현병 · 45 이강한
46 홍성무 · 63 가브리엘 · 66 류광현 · 73 윤일록 · 74 강투지 · 88 황문기 · 93 웰링턴 · # 카미야 유타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윤정환 ·
수석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정경호 ·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정열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최재수
골키퍼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권찬수 ·
전력 강화실장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영증 ·
스카우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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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증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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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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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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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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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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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김호곤
(1975~1978)

조영증
(1979~1981)


홍성호
(1981)


조영증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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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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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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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 1977 · 1978 · 1979 · 1980 ·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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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 1986


조영증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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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gwon FC

파일:external/imgnews.naver.com/PYH2010091707620008701_P2.jpg

이름
조영증
趙榮增 | Jo Yeong-Jeoung
출생
1954년 8월 18일 (69세)
경기도 파주군
신체
183cm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직업
축구 선수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축구행정가
학력
중앙대학교 (1973~1976)
소속
선수
제일은행 축구단 (1977~1980)
해군 축구단 (1978~1979 / 군 복무)
포틀랜드 팀버스 (1981~1982)
시카고 스팅 (1983)
럭키금성 황소 (1984~1987)
코치
럭키금성 황소 (1987~1990)
현대 호랑이 (1991~1993)
감독
LG 치타스 (1994~1996)
대한민국 U-20 대표팀 (1998~2000)
대한민국 U-17 대표팀 (2000)
기타
국제축구연맹 (2002~2005 / 기술 위원)
강원 FC (2023~ / 전력 강화실장)
국가대표
102경기 1골 (대한민국 / 1975~1986)

1. 개요
2. 선수 생활
2.1. 클럽
2.1.1. 1984년 6경기 연속골
2.1.2. 85 우승, 86 준우승, 그러나 공헌하지 못하다
2.2. 국가대표
2.3.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4. 행정 및 스태프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지도자 및 행정가. 현재 강원 FC 전력 강화실장을 맡고 있다.

7, 80년대에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센터백이며 두 차례의 아시안 게임 우승 (1978, 1986)에 공헌하였다. 역대 우리나라 수비수 중 가장 꾸준하게 기량을 유지한 선수이기도 하다. 대한축구협회 베스트 11에 6회 선정되었고 1977년 대한축구협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이후 북미 리그에서 3년동안 활약하며 두 차례 올스타에 선정되었다.[1] 말년에 K리그가 창설되자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국내로 복귀해서도 K리그 베스트 11에 두 차례 선정되었고 1986년 월드컵과 1986년 아시안 게임 멤버로 활약하였다. 역대 우리나라 A매치 출전 수 순위에서 11위에 기록된 선수이다.


2. 선수 생활[편집]



2.1. 클럽[편집]


1977년, 실업 축구단이었던 제일 은행에서 자신의 성인 축구 경력을 시작하였다. 1978년, 해병대에 입대해 군복무를 마쳤다. 1980년 제일은행에 복귀하여 활동하다가 1981년 미국 북미 축구 리그의 포틀랜드 팀버스로 옮겨,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였다. 1982년 포틀랜드 팀버스가 재정 문제로 해체되자 시카고 스팅으로 이적하여 활약하였고, 1984년 K리그 창설 2년째를 맞아 프로팀 창단을 준비하고 있던 럭키금성 황소에 입단하여, 1985년 K리그 우승과 1986년 K리그 준우승 등에 공헌하였다. 1987시즌이 끝난 뒤 은퇴하였다.


2.1.1. 1984년 6경기 연속골[편집]


신생팀답게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이 많아 전력이 약했던 럭키금성에서 믿을 만한 스타 선수는 조영증 뿐이었다. 급기야 박세학 감독은 수비수였던 그에게 최전방 공격수까지 시켰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탄탄한 피지컬과 기본기를 만든 조영증은 최전방 포스트 플레이에도 능했다. 조영증은 전문 공격수가 아니었기에 드리블이나 개인기는 부족했지만 슈팅에 집중하여 공격수로도 좋은 활약을 했다. 이때 6경기 연속골을 성공시키는 등 84시즌 28경기에 나서 9골 4도움을 올려 특급 활약을 펼쳤다.

조영증의 6경기 연속골 기록은 10년동안 지속되었다. 1994년 윤상철이 6경기 연속골 타이 기록을 만들었고, 1995년에는 황선홍이 8경기 연속골을 터뜨리며 조영증의 11년 묵은 기록을 깼다.
사실 84년 조영증이 기록을 세웠던 당시에는 이 기록이 큰 관심을 받지 못 했다. 조영증이 득점 행진을 벌였던 기간이 정확하게 1984 LA 올림픽 기간과 겹쳤기 때문이다. 이후 윤상철, 황선홍이 조영증의 기록에 도전할 때서야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다만 그런 생각은 들었다. 수비수인 내가 6경기 연속골을 넣었는데, 이 기록이 한참 유지될 동안 전문 공격수들의 분발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연속골을 기록하는 게 어려운 것이기도 할테고. 이제 K리그도 30주년을 넘어선 만큼 황선홍의 8경기 연속골을 넘는 더 좋은 선수와 기록이 나왔으면 좋겠다." - 조영증

- 배진경 기자, K리그 레전드 6경기 연속골, 수비수의 변신은 무죄



2.1.2. 85 우승, 86 준우승, 그러나 공헌하지 못하다[편집]


파괴력있는 전문 스트라이커의 필요성을 절감한 럭키금성은 태국 출신의 공격수 피아퐁을 영입하였다. 피아퐁이 영입되면서 조영증은 다시 수비수로 내려갈 수 있었지만 럭키금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돼 장기 합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팀은 피아퐁을 앞세워 창단 2년만에 첫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 준우승을 달성했지만 팀의 간판스타였던 조영증은 각각 5경기, 10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 했다.


2.2. 국가대표[편집]


1970-80년대의 대한민국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1980년, 1984년 AFC 아시안컵과 1986년 FIFA 월드컵 등의 많은 대회에서 뛰었고, A매치 109경기에서 1골을 넣었다.


2.3. 플레이 스타일[편집]


빠른 속도와 뛰어난 체력을 가지진 않았지만 상황을 잘 예측했기 때문에 판단력, 위치선정, 전술이해도 면에서 우수한 능력을 갖추었다. 그리고 동아시아 선수 답지 않게 좋은 피지컬을 가졌기에 몸싸움, 태클에도 능했고 공중볼에도 탁월해서 북미 리그로 이적했을 때도 리그 올스타에 뽑히는 등 쉽게 적응했다. 또한, 당시 한국 수비수로서는 보기 드물게 수비지역에서의 볼배급이 가능한 선수였다.[2]


3. 지도자[편집]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박창선호

조영증호

박성화호(U-20)
LG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조영증은 6년간의 코치 생활을 마치고 94년 친정팀 LG 치타스의 지휘봉을 잡아 그해 컵대회 준우승을 이끌었지만 LG는 만년 하위권을 유지했다. 96 시즌을 마치고 계약만료를 눈 앞에 두고 사표를 제출해 LG를 떠났다.

AFC 예선을 치른 박창선 감독의 뒤를 이어 1999년 U-20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부임했으나, 1승 2패로 조별리그 탈락을 했으며 그로부터 1년 뒤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동국김은중이 이 대회에서 활약으로 축구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1994년부터 고향 파주시에 조영증 축구 교실을 창단해 운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배출 선수로는 이승모가 있다.

4. 행정 및 스태프[편집]


1999년 U-20 월드컵 이후로 서서히 현장보다는 행정에 관심을 가졌고, 99년 축구협회 기술분과위원과 청소년 대표팀 단장을 역임하며 그 시작을 알렸다.

이후 2002년 AFC 공식 지도자 강사로 선임됐고, FIFA 기술위원, KFA 기술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행정가로 국내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한국 축구의 허브라고 불리는 파주 NFC 센터장을 맡았으며 연맹의 경기, 심판, 기술위원장을 차례로 역임하기도 했다.

2011년 KFA 기술교육국장 재임 중, AFC 공로상을 받으며 아시아 축구계를 대표하는 행정가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2021년 프로축구연맹 기술위원장을 박태하에게 물려주고 자신의 이름을 딴 'JFC 재능기부 프로그램'을 설립해 축구 유망주와 다문화 가정 출신 선수 등에게 무료로 맞춤형 지도를 제공하는 사회공헌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022년 프랑스 명문구단인 파리생제르맹 아카데미 코리아 고문(Adviser)으로 '제2의 메시와 음바페와 같은 한국 축구 유망주 발굴을 위해 활동했다.

2023년 강원 FC 전력강화실장으로 부임하였다. 강원 대표이사인 김병지와는 현대 호랑이 시절, 감독인 최용수와는 안양 시절 사제의 연을 맺은 바 있는데 강원에서 재회했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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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NASL은 시즌 베스트 11을 1, 2군으로 나눠 선정했으며 조영증은 1982년 1군, 1983년 2군에 선정되었다.[2] 다만 빌드업 능력이라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고, 비교적 킥이 괜찮은 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