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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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성만 열사.jpg

趙城晩
1964년 12월 13일[1] ~ 1988년 5월 15일 (향년 23세)

1. 개요
2. 생애
3. 비판과 반론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이자 열사. 본관은 김제(金堤)[2], 세례명은 요셉.

2. 생애[편집]


1964년 12월 13일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 용암리에서 아버지 조찬배(趙燦培, 1937. 5. 5 ~ )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복성(金福成, 1940. 2. 5 ~ )[3] 사이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인지라, 어린시절 그는 가톨릭 신부가 되기를 꿈꿨다고 한다.

전주해성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년 재수하여 1984년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화학과(84학번)으로 입학했고, 1985년 카투사로 군에 입대를 하였고 전역한 뒤,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교육관 건물 옥상에서 확성기로 남북 공동올림픽 개최, 양심수 석방,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고 할복 후 투신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그가 숨진 이후 가톨릭계에서 매년 5월 15일마다 조성만의 추모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3. 비판과 반론[편집]


그의 죽음이 안타깝다는 것과 별개로, 그가 투신 직전 주장했던 남북 공동올림픽 개최, 양심수 석방, 주한미군 철수가 정당한 것인지는 의문일 수 있다.

1988년 당시 남북은 21세기와 같은 평화적 분위기가 아니라 교류도 거의 없었다. 설령 교류를 했다 하더라도 7.4 남북 공동 성명 등 양측 지도부의 이익을 위해 잠깐 만난 정도일 뿐 남북간에는 아직 팽팽한 대립관계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다는 점 역시 반미적, 비현실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열사의 주장은 65년에 태어나 88년에 사망한 열사의 시대에서 운동가로서 할 수 있는 요구라고 볼 여지가 많다. 우선 양심수 석방은 당시 군사정권이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억울하게 수감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고 하여도 지극히 정당한 요구일 것이다.

남북 공동올림픽 개최는 시기상 비현실적이지만, 열사의 뜻이었던 남북 간 스포츠 이벤트를 통한 평화와 교류의 요구는 열사의 사망 3년 뒤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이 성사됨으로서 실현되었다. 남북단일팀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실현되었고 그 취지 역시 사회적 지지를 받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열사의 정신 자체를 오류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주한미군 철수는 많은 갑론을박과 논란을 낳는 주장이지만, 이러한 제반 사정을 생각할 수 있다. 5.18 민주화운동에서의 학살에서 미국은 적극적으로 한국 정부에게 학살 중단을 요구하기보다는 사실상 학살을 용인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운동권에서는 미국에 대한 인식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4][5] 그렇기 때문에, 호남 지역에서 성장하여 만15세에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았을 열사가 미국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애초에 사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운동가가 마냥 현실적인 것에 치중할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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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1월 10일.[2] 삼교파(三橋派) 24세 곤(坤)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4촌 형제들은 항렬자를 써서 작명했다.[3] 김용필(金龍必)의 딸이다.[4]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가 도덕주의 기조 아래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여론은 5.18 전까지는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5] 이러한 사건은 다른 지역 운동권에 비해 호남 운동권에서의 독특한 정서를 유발하였고, 이 정서는 반미자주를 내걸은 NL 사조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