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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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북한의 대응
4. 대한민국의 대응
5. 여행의 자유
6. 조선적에 대한 '국적' 논란
7. 미디어에서
8. 조선적 혹은 조선적 출신 인사들
9.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조선적(일본어: 朝鮮籍(ちょうせんせき, 영어: Korean Domicile)은 20세기에 주로 일제강점기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인과 그 후손 중 일부가 갖고 있는 일종의 행정상에서만 존재하는 국적 분류다.

1945년 해방 후 GHQ에 의해 당시 재일 조선인들에게 행정상 편의를 위해 부여된 일본 외국인 등록제도상 적(籍)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 해석으로는 '구 조선호적등재자 및 그 자손(일본국적을 보유하는 이는 제외) 가운데 외국인등록상의 국적표시를 아직 대한민국으로 변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선국적'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적은 현재 존재하는 어느 나라도 대표하지 못하고 있어서 사실상 무국적자의 대접을 받고 있다. 다만 유래를 따지고 보면, 이 조선적은 국적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일본의 특별영주자 증명서에 '조선'이라고 쓰여 있는 것은 국가가 아닌 지역 취급이라고 볼 수 있다.[1]

조선적에서 말하는 '조선'이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라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 제국외지였던 '지명으로서의 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다.[2] 조선적이 처음 탄생했을 때에는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국적이나 다름 없어 상당한 불이익을 받는 조선적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자신의 정체성이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도 않는다고 보아 조선적을 유지하는 경우와, 북한이 옛 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생각하지만 일본북한을 국가로서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일 조선인이 북한 국적을 취득할 수 없어서 북한을 가장 가깝게 대리한다고 생각하는 조선적을 유지하는 경우이다. 다만 후자의 경우 이론적으로는 제3국 공관에서 북한 여권을 취득할 수는 있다고 하며, 무엇보다 조총련에서도 북한 여권을 발급하므로 마음만 먹으면 북한 여권을 얻어 북한으로 가는 것이 가능한 상황이라...

국적자도 무국적자도 아닌 애매한 지위로 인해 일상생활에 불편한 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조선적 보유자 중 상당수는 대한민국에, 일부는 일본에 귀화해서 조선적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친북 성향을 가진 재일 한국인들도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하는 추세다.

발음 탓에 조선족과 혼동되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에도 조선적이 있긴 하다. 일제의 강제징용 때문에 중국으로 끌려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사람, 위안부나 정신대 때문에 중국으로 간 사람들 중에도 국적을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조선적으로 남은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일본 법무성은 대한민국 국적자 수가 조선적을 추월할 무렵인 1970년쯤부터 '한국-조선인'이라고 뭉뚱그려 발표해 왔으나, 45년 만인 2015년말에 조선적 보유자 수를 따로 공개했다. 그 수는 33,939명으로 전년보다 5.1% 감소한 것이다. 한편 한국 국적자는 457,772명이다. 따라서 조선적은 재일 한국인 전체의 7%가 채 안 된다.

참고로 조선적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대만적'[3]이라는 것도 있다. 다만 조선적에 비해서는 미미할 정도로 훨씬 적은 숫자다.

2. 역사[편집]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의 조선인은 국적의 특성상 형식적인 일본인이었다.[4]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기 때문에 국적상 광의의 일본인이었다. 따라서 일제의 무조건 항복 후에도, 일단 조선인은 형식상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대일본제국 헌법일본국 헌법으로 전면 개정되어 시행되는 1947년 5월 3일의 전날인 1947년 5월 2일, 즉 대일본제국 헌법이 시행되는 마지막 날, 최후의 칙령인 '외국인 등록령(外国人登録令(がいこくじんとうろくれい)'이 공포되었다.[5] 그 중 제11조로 "대만인 가운데 내무대신이 정하는 사람과 조선인은 이 칙령의 적용에 대해서는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6]고 정했다. 일본국 헌법 시행 이전, 대일본제국 헌법이 최후로 기능할 수 있는 날이었기에 1947년 5월 2일조선인국적을 강탈당해 무국적자가 되었으며,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은 전원 불법체류자가 되어버렸다. 당시에는 한반도에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없었고, 조선인들이 딱히 이중국적일 리도 없었으므로 일본 국적을 상실해버리면 그냥 무국적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기는 했지만 국제법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며, 소련군정/미군정 시기에 조선인들이 해당 국가의 국적을 부여받았던 것도 아니므로, 결과적으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국제법상으로 조선인들은 전부 무국적자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데 해당 규정을 잘 보면 대만인은 지정한 사람만 국적을 상실하게 되어 있었음을 보면,[7] 이는 엄연히 조선인만을 목표로 한 칙령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947년 5월 2일의 외국인 등록령은, 조선인은 정식으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한 모두 외국인이라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이 규정을 만들 당시만 해도 일본은 장기적으로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귀국하길 바랐거나, 한국(혹은 북한)에게 책임을 지워 귀환시키려는 생각이었겠지만, 이후 상황을 보면 한국은 6.25 전쟁이 막 끝난 최빈국 상태였다보니 이들까지 책임지기를 꺼렸고,[8] 차선의 선택이었던 북송사업은 일본 내에서 조총련의 목소리를 키워주는 결과를 낳는다. 결과적으로 외국인 등록령은 오히려 일본의 동화주의 전제를 크게 방해하여 일본 정부의 골칫거리가 된 것이다. 탄압받는 사람들은 뭉치기 마련이니까.

일제강점기에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는데, 목적은 유학에서부터 막노동까지 매우 다양했다. 일제강점기 초기 토지 조사 사업으로 조선의 수많은 소작농들은 몰락하여 도시로 몰려들었는데, 당시 일제의 공업화 계획이 북부 지방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부 지방에는 일자리가 부족했다. 반면 오사카를 비롯한 내지의 공업 도시들은 한창 성황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도시빈민들이 내지에서 값싼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떠난 것이다. 초기에는 이렇게 자발적으로 건너온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이 징병으로 부족해진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실시한 강제징용으로 건너온 사람들도 대단히 많았고, 숫자는 대략 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의 패전 후 대부분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약 60만 명 가량의 조선인들이 그대로 일본 땅에 남게 되었다. 이들은 상술한 외국인 등록령으로 인해 국적을 잃고, 무국적자 겸 외국인이 되어버렸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공식적으로 '평화조약국적이탈자'로 칭한다. 일본의 패전 후 일본에 진주한 GHQ 당국은 외국인 등록령에 의거해 임시로 '조선적'이라는 행정상 분류를 만들고, 이들을 무국적 외국인으로 등록하게 된다. 이것이 조선적의 시작이다. 또한 제주 4.3 사건6.25 전쟁으로 인해 오히려 많은 수의 피난민이 일본으로 다시 몰리는 일이 빚어졌고, 이들에 대한 처우 문제도 대단히 복잡해졌다.

이렇게 되자 일본 정부는 '자기 나라로 귀국하지 않고, 더군다나 일본으로 귀화할 생각도 없는' 이들을 보호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고, 조선적 소지자들은 확실한 국적을 갖고 있던 다른 외국인들과 달리 공공연한 차별 대우를 받아야 했다. 상술한 내용을 보면 이는 의도된 것이었다. 설사 일본 귀화를 택한다 하더라도, 상술한 외국인 등록령에 따라서 조선적인들은 그냥 외국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일본 귀화를 위해서는 귀화 조건을 달성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일본 국적을 얻기 위한 장벽이 있었다. 전후 일본에서 그게 쉬웠을 리가 없다. 게다가 당시 일본은 대한민국이건 북한이건 정식 외교 관계도 수립하지 않고 있었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불거진 이념 대립과 전쟁 때문에 교포 사회도 분열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이념과 상관없이 조선적 소지자들을 대표하던 양대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연맹'과 '신조선건설동맹'이 있었는데, 1955년을 기점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으로 완전히 갈라져 버렸다. 일부 애국심 강한 사람들은 재일학도의용군으로 6.25 전쟁 때 조국을 돕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냥 안전한 일본에서 자리를 잡았다. 한편 친남한 성향 재일교포 중 상당수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것과 달리 북한은 일본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 국적을 갖길 원하는 조선적 주민들은 그냥 조선적 상태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현재의 남아있는 조선적들은 대부분 조총련계이거나 친북한이며, 조선적 주민이 남한과 북한 어느쪽 편도 아닌 중립적 신념 때문에 무국적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아주 소수 사례이며 조선적이 다 그렇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의 일본 정부는 이들을 '재일 코리안'이라고 칭하고 있으며[9], 이를 줄여 '재일(在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1년에 제정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에 근거해 일본의 국적을 이탈한 자 등의 출입국 관리에 대한 특례법(日本国との平和条約に基づき日本の国籍を離脱した者等の出入国管理に関する特例法)'에 의거해 '특별영주자'라는 재류 자격으로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일본 사회에 있어서 갖은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기본적으로 조선적을 가진 이들에게 일본으로 귀화하거나 남한이나 북한[10]으로의 귀환을 권장하고 있다.

현 시점에서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는 조선적인들은 한반도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서 버티며 일본 사회에도 잘 녹아들지 않고 있다. 얼핏 보면 일본 당국으로서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한 노릇인 것 같아 보이지만, 이들이 국적을 잃어버린 것은 일본 정부가 위의 칙령에 따라 일방적으로 국적을 박탈해놓고 재류자격[11]만 줘버린 데에서 기인하는 문제이다. 우익적 서술이 강하다고 평가되곤 하는 일본어 위키백과의 '평화조약국적이탈자' 문서에서도 조선적의 사례를 들며 지배국에 거주하는 식민지 출신 주민의 경우 대개 중복국적으로 하는데 일본의 조치는 이례적이라고 서술하고 있을 정도.

특히 일본인들과 마찰이 가장 심했던 분야가 교육이었는데,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교육 방침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조선적의 대부분인 조총련 계열 조선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조선학교를 세워 조선어를 교육 언어로 하는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물론 일본은 자국에서의 독립 사회 구축을 막으려 하고, 그 자금은 북한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대부분이다. 일본 정부는 당연히 이를 불법으로 규정했고, 강제로 조선학교들을 폐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48년 4월 24일에 효고현에서 있었던 '한신 교육투쟁'이 있다.

3. 북한의 대응[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법 제2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은 다음과 같다.

1.공화국 창건 이전에 조선의 국적을 소유하였던 조선인과 그의 자녀로서 그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자

2.다른 나라 공민 또는 무국적자로 있다가 합법적 절차로 공화국 국적을 취득한 자


북한과 일본 정부에서는 적십자사 등 비교적 외교 마찰이 적은 경로를 통해 조선적 소지자들의 송환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1959년에 북한 귀국 희망자에 한한다는 조건으로 '귀국선' 을 보내기 시작했다. 귀국선은 1961년까지 북한과 일본을 오가며 약 7만 명 가량을 송환했는데, 이들은 북한의 체제 선전의 목적으로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재일교포 북송 참조.

하지만 많은 수의 귀국자들은 오히려 자본주의 세계에 있었다는 이유로 감시 대상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12] 당시 증언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납치되다시피 갔다고 하고, 조금이라도 체제에 반대하는 발언을 할 경우 수용소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물론 자의에 의한 귀국이라고 해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도시전설적인 소문으로는 먼저 북한에 입국한 이들이 떠나기 전 남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가로로 써서 보내면 뒤따라 건너오고 세로로 써서 보내면 절대로 오지 마라"고 언질을 줬는데 북송 이후 오는 편지마다 온통 세로로 쓰여진 것 뿐이라 남은 이들이 떠나길 기피했다고 한다.[13] 일본에서 북한으로 건너간 조선적들은 무조건 동요계층이다. 이는 북한에서 일본 귀환민을 무조건 동요계층으로 못박아놓은 탓이다. 그나마 이것도 운이 좋은 경우고, 조금이라도 체제에 의심을 품는 행동이 보이면 곧장 적대계층 크리.

70년대까지는 귀국선 운용 외에 총련에 대한 지원도 계속 유지되었고, 이런 까닭에 지금도 남한과 일본 등 '자본주의 진영' 에서는 총련을 친북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조선적 소지자를 위한 조선학교도 북한의 지원금으로 설립되고 운영된다는 이유로, 한동안 민단계 교포들은 조선학교로 자녀들을 입학시키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념 갈등 외에도, 조선학교 출신자들은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일본 공립학교의 입학/편입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있다.

이외에 북한에서는 사회적으로 큰 공을 세운 조선적 인사들에 대해서도 자국인과 동등한 자격을 인정해주고 있는데, 가령 권투선수 홍창수의 경우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따내자 '공훈체육인' 호칭을 수여했다. 이외에도 조선적 음악가나 무용수, 작가 등이 북한에서 열리는 경연대회 등에 참가해 입상하거나,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공훈배우/공훈예술가 혹은 인민배우/인민예술가 등의 호칭을 받는 경우도 있다. 안영학 같은 조선적 축구선수들이 북한 대표팀에서 뛰는 것도 같은 맥락. 물론 90년대 이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보니 저런 립서비스 외에 '실질적'인 혜택은 거의 주지 못하고 있다.

탈북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일본에 있다가 북한으로 건너간 조선적 중 적잖은 수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으며, 특히 일본에서 유년기를 경험한 어린 세대들의 실망감이 컸다고 한다. 복지천국, 지상락원이라고 알았던곳이 설마 헬게이트였을 줄은 몰랐을 테니…


4. 대한민국의 대응[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적 소지자들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 1965년에 한일기본조약을 계기로 양국 간의 관계가 공식 회복되었을 때에도, 협정 과정에서 불거진 수많은 쟁점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적 문제는 일본 정부의 뜻에 맡긴다'는 식으로 공을 돌렸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국적 소지자 혹은 일본 국적 소지자만을 인정하고 조선적 소지자는 그 존재 자체를 무시해 왔다.

그 결과 북한 측에서 교육 사업과 자금 루트 개척 사업을 위해 조선적 소지자에 대해 적잖이 투자를 한 반면, 남한에서는 딱히 일본에서 별도의 사회망을 구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민족교육 분야에는 거의 지원을 하지 않았다. 이건 재미교포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당시의 한국 정부는 국가주의적인 입장이 강해서, 굳이 남의 나라로 간 이민자들에게 자국 정부가 앞장서서 보금자리를 터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마인드였다.[14]

사실 오늘날에도 정책적인 지원이 있는 조선적과 북한이탈주민 등을 제외하면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이주자들[15]에 대한 한국의 정책적인 기조는 방관주의이다. 그들이 한국 국적을 버리고 외국 국적을 취득하든 말든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다. 단지 유일한 특혜로서 존재하는 것은 언제든지 한국 국적을 재취득할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하는 것 뿐이고, 이것도 이주 국가의 모든 자산을 철수하고 모든 외국 국적을 포기하고 만 35세 미만 남성의 경우 병역의무까지 이행해야 국적 회복 기회를 주며, 지원 그딴 거 없다.

반면 북한은 국가주의 이상으로 민족주의 마인드가 강하고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에도 여러가지 이유로 영향력과 교두보를 마련해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1970년대까지는 적잖은 지원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적에 상관없이 조선, 한국 모두 나의 조국이라고 여기는 재일교포들이 꽤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 여권과 북한 여권을 모두 가진 조총련계 축구선수 정대세.[16]

북한은 아직도 민족주의 타령을 하며 형식적으로나마 귀환 시 복지 혜택들을 준다고 홍보하고 일본, 러시아, 미국 각지에 돈을 들여서까지 사회망을 구축하려 하지만 21세기에 와서는 머리에 총 맞지 않는 이상에야 북송을 선택하진 않기에 그냥 형식적으로만 그치는 수준. 사실상 유효한 지원은 1970년대 즈음에 끝났다고 봐야 한다.[17] 어쨌든 조총련과 미국의 몇몇 북한 출신 교포 관련 단체 등 사회망을 구축하려는 시도의 잔재에 해당하는 조직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은 조선적을 실제로는 조총련계로 보아왔는데, 이들 대부분이 조총련계 학교에서 교육받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북한에 우호적이다. 일부 조선적들은 무국적인 이유가 '한국도 북한도 조국이 아니다. 오로지 통일된 조국만이 내게 국적을 부여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의 주장을 그저 친북 성향을 감추기 위한 표면적 구실로 치부하고 있으며 그들도 북한 국적을 얻을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에 얻었을 것이다.[18] 쉽게 말해 현재 남아있는 조선적은 거의 총련 계열이라고 보면 된다.

지금도 일본에서 '민단계'로 분류되는 교포 학교의 숫자는 단 네 곳 뿐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민단계/귀화 교포들은 일본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다행히 민단이 설립한 소수 학교들은 일본에서도 정식 인가 학교로 운영되어 불이익을 받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면서 조선적 소지자들 중에서도 대한민국 국적을 정식으로 취득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다만 이들에게도 강제적인 지문 날인이나 거주권/참정권 제한을 비롯한 뿌리깊은 차별 대우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한일 양국 간의 감정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어쨌든 현재는 조선적 소지자보다 한국 국적을 가진 교포 수가 훨씬 더 많다.

5. 여행의 자유[편집]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은 외국 국적 특별영주자는 '특별영주자 증명서'라는 신분증이 발급된다. 일본에서 일반 영주자는 다른 중장기체재자와 마찬가지로 재류카드를 발급받고 재류자격이 영주자라고 쓰여져 있으며 상시 휴대 의무가 있는데, 특별영주자의 증명서는 일반적인 재류카드와는 달리 상시 휴대 의무가 없다. 단 휴대하고 있는데 경찰 등의 제시 요청을 거부하면 얄짤없다. 일본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관계로 조선적 소지자가 일본 내에서 북한 국적을 획득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19]

특별영주자가 일본에서 출국 시, 한국 여권 소지자는 일본의 재입국 허가[20]와 여행 국가의 비자[21]만 있으면 북한 등 적성국가나 여행금지국가를 제외하고는 문제없이 출국이 가능하다. 하지만 조선적은 해외 출국이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인데, 이들의 신분을 보장해주는 나라가 없다는 이유로 '무국적 난민'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관광비자도 신청하기 힘들다. 게다가 비자를 받고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다른 여행객들보다 훨씬 강도 높은 입국 심사를 받아야 한다.

남북한의 경우에는 그나마 조선적 소지자들의 방문을 원활히 하고자 여러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일단 한국은 조선적 여행객들에게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이 기재된 여행증명서를 발급하고 있다. 일단 조선적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주는 제도이긴 한데, 한국의 단수여권과 마찬가지로 1회용이라 매번 재외공관에 방문하여 재발급받아야 해서 불편하다. 그리고 한국 여권은 아니기 때문에 무비자 국가도 여권만큼 많지는 않은 상황.

2008년 남한의 정권 교체 후 급속히 경색되고 있는 남북 관계 때문에, 조선적 교포의 남한 입국은 예전보다 더 어려워지고 있다. 때문에 주일 한국대사관이나 영사관에서는 조선적 동포들에게 여행 편의나 한국 소재 대학 입학 등을 위해 한국 국적을 인지하여 한국 여권을 취득하길 권하고 있다. 하지만 힘들게 친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교포들로서는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권고라서,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총련에서 북한 여권 발급을 대행해주고 있고, 만경봉호 등의 직항 선박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식 수교국이 아닌 이유로, 일본 정부가 북한 선박의 입출항을 거부하는 사례도 꽤 자주 있다. 설령 입출항이 된다고 해도 선박이나 선원, 탑승자 모두에게 굉장히 까다로운 검문검색이 행해지는 경우가 다반사.

예전에는 대한민국이든 북한이든 상대측 방문 기록이 있으면 입국 허가가 무지하게 어려워졌었는데, 즉 조선적들은 둘 중 하나에 대해 통일 전까지는 밟지 않겠다는 각오로 입국을 선택해야 했다. 2003년 이후 남북관계 개선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뒤, 남이든 북이든 비교적 자유롭게 입국이 가능하게 되었다. 2007년 이후에는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남한 쪽에서 여권을 발급을 안 해준다던가, 아니면 입국 심사하는데 시간을 지체하는 식으로 남한 입국을 제한하더니, 2011년부터는 북한이 입국심사를 까다롭게 해서 북한 입국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6. 조선적에 대한 '국적' 논란[편집]


조선적은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는 이들이 일본에서는 북한 국적을 정식으로 취득할 수 없는 탓에 차선책으로 조선적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다[22] 조선적의 조선이 '북조선'으로 오인할 여지가 크기에 일본에서 조선적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다. 그래서 조선적에 대한 이런저런 논란도 많다.[23]

재일 음악인 양방언도 국적을 대한민국으로 바꾸기 전까지는 여러 매체에서 북한 사람으로 오보된 바 있었고[24], 일본에서도 성우 박로미를 조선적 운운하며 비난하는 혐한들이 있는 등 사정은 마찬가지다. 심지어 북한에서 미사일을 쏜다거나 일본인 납치 문제가 대두된다 싶으면 조선적 교포들은 비난과 멸시의와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다. 사실 조선적 다수를 차지하는 조총련계가 북한에 커넥션이 있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주목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북한의 행태를 신랄하게 까는 사람이라도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매도당하는 억울한 케이스가 있을 수 있다.

법적으로 특별영주자는 부모가 조선적이면 자식도 자연히 조선적이 되지만, 본인의 의사에 따라 한국이나 일본 국적을 정할 권리는 주어진다. 특별영주자의 일본 국적취득은 일반적인 외국인에 비하면 쉬운 편이고[25], 한편으로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도항했다는 것만 증빙할 수 있다면 한국 국적도 쉽게 취득할 수 있다. 때문에 조선적이더라도 정당한 한국/일본 국적을 취득해서 조선적을 벗어나는 경우는 많다. 재일 대중음악인 양방언이나 지휘자 김홍재는 이런 경위로 조선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갈아탔고, 정대세 역시 할아버지가 경북 의성 출신으로 한국 국적이지만 조선적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26]

조선적을 지닌 무국적자라고 꼭 친북 성향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두 개의 조국' 중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한 쪽을 포기해야 한다면서 무국적 상태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아울러 조선적으로 인한 불편이 엄청나지만 일본 국적을 취득하기는 어렵거나 감정적으로 꺼려지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경우도 꽤 많고,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면서 북한에 우호적인 재일교포들도 있다. 이 점은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비례대표에 한정한 재외국민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조선적 교포들이 북한의 지원을 받는 조선학교 출신자라고 해서 북에 가까운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건 오산이다. 정작 혁명역사 같은 세뇌교육을 배우는 본인들도 이 과목에 대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고 이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 이런 과목을 교육시키는 것이 싫어서 조선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남북 어디에도 국적이 없는 이들을 싸잡아 종북주의자 계열로만 분류하는 것도 분명히 공정하지 못한 처사이다.[27] 남북 분단 전에 일본으로 간 사람에게는 대한민국에 대한 정체성만을 요구할 수도 없는 것이고, 종북주의자로서의 조선적 '상당수'와 '전부'는 구분해야 한다.

조선적 소지자들의 과도한 민족주의 성향이 일본 사회에서 이방인 포지션을 자초한다는 비판 여론도 있는데, 조선학교 여학생들이 치마저고리를 교복으로 입고 다니다가 일본 불량학생들에 의해 옷이 찢기거나 더럽혀지는 등의 사건은 한국에도 종종 보도되고 있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이후 조선학교 여학생들의 교복은 일본의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블레이저 계열로 바뀌고 있는 추세다. 일본으로부터 차별받는 입장이 역으로 자신들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생각되며, 극단적인 경우 폭력 조직을 결성해 야쿠자 등과 대립하는 사례도 있다.

다만 요즘은 워낙 세월이 지났기에 1~2세대 부모들은 모르겠지만 그 자녀나 손자 세대(3~4세대 이하)들은 대개 한국 국적이나 일본 국적 둘 중에 하나는 취득한다고 한다. 이론상 북한 국적 취득도 가능하지만 객관적으로 딱히 선택할 만한 메리트가 없다. 물론 진지하게 북한 체제를 아직까지도 추종한다면 소수나마 선택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통계자료는 정확히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세대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다 포기하고 일본인으로 동화되는 경우도 많다고. (경제 성장 및 글로벌화로 옛날처럼 교포 사이에선 매국노 취급, 현지인 사이에선 비국민 취급의 이중고를 겪는 경우도 적어졌다 한다.) 그도 그럴게 지금쯤 한국이나 북한에 연고가 있는 사람은 죽기 직전의 노년층이고 신분상속으로 신규취득하는 사람들은 한국, 북한 모두에 접점이 없고, 일본에서 나서 일본에서 자랐으며 옛날옛적에 할아버지가 거기서 왔다더라 수준이라. 조선학교 등의 프로파간다 단체들이 (남북을 막론하고) 많이 죽은 것도 한몫 한다.

50년 이상 시간이 더 지나고 한국, 북한에 직접연고가 있는 세대가 전부 사멸하면 일부 극성분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자연적으로 일본에 동화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서도 지원정책이 최절정이었던 80~90년대만큼은 관심이 없고, 북한은 형식적인 복지제도는 있으나 다들 알다시피 사실상 없다.

사실 이상할 것도 없는게 더 근래(70년대 이후)에 이주를 시작한 미국 이주자들도 3~4세대쯤 내려가면 한국인으로써의 정체성이 없고 한국어도 모르며 본인은 미국인임을 어필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엔 그 수가 많지 않았지만 아래의 가네시로 가즈키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60년대 그때서부터 "어쨌든 일본으로 터전을 옮기게 되었으니 에라 모르겠고 그냥 눌러 앉자"식의 생각을 지닌 사람들도 있긴 했나 보다.

7. 미디어에서[편집]


1990년대 후반 들어 재일교포 신진 작가나 영화감독들을 중심으로 조선적의 현실을 재조명하는 소설이나 영화가 발표되고 있는 중이다. 카네시로 카즈키의 소설 'Go' 나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의 영화 '박치기', 김명준의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 등인데, 작가나 감독에 따라 부정적인 쪽에서부터 긍정적인 쪽까지 시각이 확실히 갈리는 편.

다만 조선적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상대적으로 극히 최근에 생겨난 풍조로, 그 전까지 재일문단의 다수를 차지하던 문학풍토는 염세적이고 현시창스러운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의 문단내에서도 재일교포문학(조선적을 포함한)은 너무 염세적이라는 표현을 거듭 사용했을 정도. 90년대 후반 3세대 재일교포들이 문단에 진출하면서 이러한 풍토는 많이 가라앉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일본인의 조선적에 대한 차별 의식이나, 조선적 소지자가 일본 사회에서 받는 냉대는 대체로 공통된 주제로 쓰이고 있다. 이보다 훨씬 이전인 1968년에는 일본의 유명 포크 그룹인 '포크 크루세이더즈' 가 북한 노래 '림진강(임진강)' 을 조선학교 학생에게 듣고 감동먹었는지 앨범에 넣으려고 했다가 실패했는데,[28] 이것도 그렇게 큰 관련성은 없지만 조선적에 대한 에피소드로 종종 다루어지곤 한다.

일본 영화 박치기에선 조선학생과 일본 학생들의 갈등 이야기가 나온다.

최양일 감독의 영화 '피와 뼈'는 일본에 체류중인 조선적(& 조총련) 사회의 모습을 상당히 밀도 있게 파헤친다. 여기서 기타노 타케시의 배역인 김준평은 흔히 부정적으로 취급되는 과격파 조선적상의 전형이라 할 수 있고, 반면 주인공인 그의 장남은 상당히 사고가 깨여있는 긍정적 조선적상이라고 할 수 있다.


8. 조선적 혹은 조선적 출신 인사들[편집]



  • 조선적에서 남한 국적으로 전환한 인물
    • 지휘자 김홍재: 현 울산시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 2005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 축구선수 박강조: 2000년 조선적을 가지고 성남 일화 천마에 입단했고, 그해 한국 최초의 재일교포 출신 국가대표가 되면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2012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2022년 현재는 일본 여자 프로축구 팀 INAC 고베 레오네사의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다.
    • 지휘자 박태영: 현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 단장 겸 상임 지휘자. 199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 유학 중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에 거주 중이다.
    • 대중음악인 양방언: 1999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 이왕비 이방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부인
    • 야구선수 겸 해설가 장훈: 대한민국 국적 보유 중. 취득 연도는 불명.
    • 권투선수 홍창수: 전 WBC 슈퍼플라이급 세계챔피언.[29] 2007년 2월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고, 현재는 오사카 코리아타운에서 야키니쿠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 소프라노 가수 전월선

  • 조선적에서 북한 국적으로 전환한 인물
    • 작곡가 강수기: 조선국립교향악단 작곡실장. 1965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작곡가 강청: 전 함경북도예술단 단장. 1964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작곡가 고수영: 영화 및 방송음악단 작곡가. 1959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무용가 고용희: 전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김정일의 넷째 아내이자 김정은의 어머니. 1962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무용가 김목룡: 피바다가극단 안무실장. 1961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지휘자 김병화: 전 조선국립교향악단 수석 지휘자.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화가 김승희: 만수대창작사 소속. 1959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테너 가수 김영길: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작곡가 리춘상: 피바다가극단 작곡가. 1963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작곡가 리한우: 윤이상음악연구소 작곡실장.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건축가 서상호: 평양도시설계사업소 문화보존설계실장.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작곡가 서정건: 영화 및 방송음악단 작곡가.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작곡가 장조일: 은하수관현악단 단장. 1961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정치인 장철: 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 1965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메조소프라노 가수 조청미: 피바다가극단 소속. 1973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첼로 연주자 황종관: 조선국립교향악단 수석 첼리스트. 1960년에 북한으로 이주했다.

  • 조선적에서 일본 국적으로 전환한 인물
    • 소설가 겸 각본가 가네시로 가즈키: 일본 국적 보유 중. 취득 연도는 불명. 다만 본인은 한국과 조선적, 일본 어느 쪽에도 무게를 두지 않고 '코리안 재패니즈' 라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주장하고 있다.
    • 정치인 아라이 쇼케이: 1966년 일본으로 귀화했다.
    • 프로레슬러 역도산

9. 같이보기[편집]



[1] 일본의 재류카드나 특별영주자 증명서를 살펴보면 국적・지역 : XXX 이라고 적혀있다. 예를 들어 国籍・地域 朝鮮 (국적・지역 : 조선)[2] 대만적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존재하는 국적이다.[3] 대만의 경우 조선보다 더 일찍 일본령이 되었었고 그에 따라 일제의 통치 기간이 길었던 데다가, 일제 패망 이후 대만 본성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한 것이 아니라 국부천대로 대만에 들어온 외성인들이 중심이 되어 오랫동안 계엄령 하에서 있었기 때문에 대만일치시기에 대만의 엘리트 계층이었던 사람들 중에서는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고 일본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 패망 이후 중화민국 정권으로부터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으로 살도록 강요 받았고, 평생 배워본 적도, 사용해본 적도 없는 북경어를 쓰도록 강요 받았으며, 한순간에 사회적으로 엘리트 계층에서 사회적 약자 계층으로 몰락했기 때문에 심리적 상실감이 컸고, 고령층이 된 21세기에도 그런 사람들 끼리의 커뮤니티가 아직도 존재한다. 재일동포와는 정반대이면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갖고 일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일본인의 정체성을 갖고 대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4] 물론 출신지의 특성상 한국계 일본인은 아니다.[5] 참고로 외국인 등록령은 영어Edict of Foreigner Registration이다. 당시의 법령에 따라 공포한 것은 쇼와 천황이고 당시의 내각은 제1차 요시다 내각이다. 다만 이 칙령의 내용에 대한 쇼와 천황의 관여는 당시 일본의 정치 상황상 전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6]台湾人(たいわんじんのうち内務大臣(ないむだいじん(さだめる(もの(およ朝鮮人(ちょうせんじんは、この勅令(ちょくれい適用(てきようについては、当分(とうぶん(あいだ、これを外国人(がいこくじんとみなす。」[7] 물론 대만인은 일제 국적이 없어져도, 남북한이 아직 출범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중화민국이 당시에 존재했기 때문에 무국적이 될 일은 없었다.[8] 좌익 문제도 있었다.[9] '한'이 들어간 낱말을 택하면 한국 쪽, '조선'을 택하면 북한 쪽에 기울어진 명칭이 되니 나름대로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하겠다고 '코리안'이라고 부르는 것.[10] 북한은 상호 협의를 거쳐 3년에 걸쳐 원하는 사람들을 북한으로 송환시킨 적이 있었다.[11] 최초에는 '재류 자격과 재류 기간이 정해질 때까지'라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이는 1965년에서야 한일 협정을 통해 '협력재류'로서 정식 자격이 주어지게 되며, 이것이 1991년에 개정된 것이 '특별영주자' 자격이다.[12] 대표적으로 '수용소의 노래'의 저자 강철환 씨의 가족이 여기에 해당된다.[13] 다른 버전으로는 반대로 세로쓰기가 건너오라는 뜻이고 가로쓰기가 오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북송 이후 오는 편지가 죄다 가로쓰기라 남은 이들이 떠나길 기피했다는 버전도 있다.[14] 또 타국에 간 자국민에게 본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동화주의를 추구하는 타국에서는 어그로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15] 독재정권 시기 프랑스/독일 등지로 망명한 사람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태평양을 건넌 미국 이주자 등[16] 어머니가 조총련계여서 아들을 조선학교에 다니게 했는데 아버지는 한국 국적을 취득한 특이한 케이스. 속인주의 원리에 따라 부친의 국적을 물려받았다.[17] 남한에서는 감추었지만, 그때까지는 북한이 복지 인프라도 나았고 남한보다 더 잘 살았기 때문이다.[18] 일본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 북한 국적을 취득할 방법이 없다.[19] 실제로는 총련 본부를 통해서 취득하는 것은 가능하다. 심지어 조선총련 소속의 대한민국 국적자도 북한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다만 일본 정부는 북한 여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출국이나 재입국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20] みなし再入国許可는 2년, 再入国許可는 6년.[21] 실제로는 한국 국적빨로 일본만큼 비자 없어도 된다.[22] 남한을 조국으로 여기는 이들의 경우 남한 국적을 취득하는 데 어떤 장애물도 없다[23] 반면 한국에서는 조선적의 '조선'을 북조선으로 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애당초 북조선이라는 말은 일본에서만 쓰이기 때문.[24] 다만 아버지가 조총련 쪽이었고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는 조선학교를 다녔다고 하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25] 참고로 일본 국적 취득은 세계적으로 까다롭기로 소문났기 때문에 제3세계 국민 중에서는 이걸 부러워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무국적자의 감소를 위한 협약에 따라 대부분 국가에서 부모가 모두 무국적으로 자국에서 출생한자의 국적을 주기 때문에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단지 조선적을 무국적으로도 볼 수 있는 점을 고려한 것.[26] 정대세의 어머니는 실제로 조선적 재일교포이고, 정대세 본인은 조선적이 아닌 한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한국 국적보다는 조선적에 애착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정대세 항목 참조.[27] 다만 북한 여권을 신청한 사람이면 엄연한 북한의 해외공민이긴 하다. 일본 당국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긴 하지만.[28] 총련 측에서 원작자들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하라는 요구를 하자 음반사가 취소했다고 한다. 그룹 멤버들은 누가 작사/작곡했는지도 몰랐던 상황. 이 '림진강'은 위에 언급된 영화 '박치기'에서 줄거리를 풀어가는 주요한 매개체로 등장하기도 한다. (정작 박치기에서는 원곡을 그대로 못넣고 리메이크로 넣었다.) 여하튼 어찌저찌 해서 앨범에 실리게 되었고 1960년대에 청춘기를 보낸 일부 일본인들에게 이 노래는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근데 또 문제가 생겨 이 노래는 방송금지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유는 이 노래를 틀면 민단 회원들이 방송국에 하도 항의를 해 대는 바람에.[29] 당시 조인주를 판정승으로 꺾고 타이틀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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