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제주도의 진상품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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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대동법
4. 2차 창작



1. 개요[편집]


조선시대 제주도민들이 진상품 때문에 겪은 고난을 정리한 문서이다.


2. 상세[편집]


제주도의 고난을 불러온 원인은 운송, 보존, 채집 기술이 낙후된 전근대 시대의 한계가 가장 크고, 제주도에 할당된 공물이 다른 지역에서 대체가 불가능한 제주도만의 산물이었다는 점이 두 번째다.

조선 이전에도 백제, 통일신라, 고려에 특산물을 바치긴 했지만 이 때 제주도는 속국 내지는 자치가 행해지던 곳이고 한국사 왕조에 비정기적으로 조공해 복속을 표하는 정도였다. 그러다 조선 초기에 제주도를 직할령으로 편입하면서 정기적으로 공납을 본토에 보내게 되었다.

조선시대 제주도의 중요 진상품들은 대표적으로 (馬), 감귤, 전복, 흑우, 흑돼지, 참돔, 사슴, 은갈치, 표고버섯, 당근 등이 있었다. 물론, 왕이 없어진 지금도 제주도의 대표적인 특산품이기도 하다.


2.1. (馬)[편집]


제주도에서 말 사육은 몽골군의 점령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온화한 기후라서 말을 키우기에 좋은데다 섬이라 목장에 들어와 말을 해치는 호랑이늑대가 살지 않아서 목장을 차리기에 이상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제주 중산간 지역은 초원의 면적이 그다지 넓지 않고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일부러 초원으로 만든 것이다.[1] 이후 조선 왕조에서는 더욱 더 엄격하게 제주도의 말 생산을 관리했다. 심지어는 고려최영원명교체기 당시 제주도에서 반기를 든 몽골 출신 목동들의 조랑말 부대를 격파했다. 이 것이 목호의 난이다.

세종대왕 때 제주도를 10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말 목장을 설치해 말을 기르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기른 말들은 제주 목사가 직접 관리 감독해서 임금이 탈 말(어승마)로 분류한 뒤 한양까지 배로 운반시켰다. 문제는 말을 키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먹기는 엄청나게 처먹지[2], 곡식도 먹여야지,[3] 엄청나게 예민하지, 성깔은 또 엄청 더럽지, 뻑하면 다치지, 풀어뒀다가 데리러 가면 멀리서도 주인을 귀신같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재빠르게 죽어라 도망갈 정도로 똑똑하다.[4]

말을 관리하는 일을 맡은 제주도민들은 행여나 말이 탈이 나서 진상품이 되지 못하거나 죽어버릴 경우에는 자비로 새 말을 채워넣어야 했다. 말 한 마리 값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5] 제주도민들 사이에는 말 한 마리 잘못되면 을 팔아야 된다고 할 정도로 고역은 심각했다.

전국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말을 생산했다고는 하지만 요구량은 항상 그보다 많아서 종마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일부러 말의 한 쪽 눈을 멀게 해서 진상 대상에서 빼낸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연산군 시절에는 연산군이 말고기가 정력에 좋다면서 말고기 상납을 지나치게 요구해서 등골이 휠 정도였다고 한다.


2.2. 감귤[편집]


감귤도 제주도에서만 나는 귀한 특산품이라[6] 왕실의 집중적인 요구 품목이었다. 어느 정도로 귀했냐면 귤이 진상되면 황감제(黃柑製)라 해서 성균관에서 특별 과거시험을 볼 정도로 귀했다. 냉장고가 없었던데다가 얼음을 이용한 냉빙선을 이용한다 해도 한계가 분명했고, 또한 운반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던지라 제주도에서 올려보내도 대다수 썩어버리기가 일쑤였다.[7] #

그래서 제주도민들은 댓잎을 까는 등 어떻게든 하나라도 건져내보려고 애를 써야 했고, 양을 맞추기 위해서는 정해진 양보다 더 많이 올려보내야 정해진 양을 건질 수 있었다. 감귤 또한 제주 목사가 직접 관리했다. 그래서, 항상 귤을 더 보내라고 난리였지만 귤나무는 약하고 예민한 편이며 농부들이 직접 접붙이기로 관리하면서 증식하기 때문에 기르기가 매우 힘들다.

나중에는 삼정의 문란이 일어나며 수탈이 도가 지나치게 심해지자 버티다 못한 제주도민들이 일부러 좋은 귤나무 품종을 죽이기까지 해서 일제시대 직전에는 귤 과수원이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이후 제주도에 다시 귤 농사를 도입한 것은 우장춘의 공로


2.3. 전복[편집]


제주에서 진상하는 전복의 수량이 많은 데다, 관리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또한 몇 배가 된다. 포작들은 그 일을 견디다 못해 도망가고, 익사하는 자가 열에 일곱, 여덟이다.

남사록[8]

전복은 중기까진 포작들이 전담하다 포작들의 수가 즐어들면서 해녀들에게 넘어가기 시작한다. 특성상 할당량을 맞추기 위해서는 여러 번 바다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포작, 즉 남자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해산물을 채취[9]하는 물질을 했지만, 독신가정이라는 개념이 없던 조선시대에 혼인기피 대상으로 찍혀 결혼 못하고 늙어갈 정도로 기피대상이었고 농사, 낚시, 말 키우기, 사냥 등등 매우 고된 노동들이 함께 따라왔기 때문에 결혼 못해 대를 잇지 못한 포작의 수가 자연히 줄고, 다수가 육지로 달아나 유민이 되면서 남은 해녀들에게 부담이 전가되었다. 남자인 포작은 육체적으로 강인하니 육지로 달아나면 농사를 짓든, 물질을 하든, 하다못해 도적질을 해서라도 먹고 살 수 있으니 도망이라는 선택지가 유효했지만 육체적으로 약한 여자들은 전근대에 요구되는 엄청난 노동력을 감당할 수 없으니 바다에 묶여 도망도 못 갔다.

미역 같은 해조류는 가을에 자라기 시작해 초여름에 바위에서 떨어져나가 죽어버리니 채취하려면 늦어도 초봄까진 채취를 마쳐야 한다. 즉, 제일 추울 때 물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 원래 전복은 포작이라 하여 남자가 채취하고, 여자들은 해조류를 채취했는데 포작의 감소로 해녀에게 부담이 전가되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저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일일이 전복을 다듬어서 말리는 작업도 해야 했다. 또한, 해녀들은 기녀 취급을 받아 양반과 관리들의 수청도 들어야 했다. 세종 시대에 제주 목사를 지낸 기건은 해녀들이 이런 고생을 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그 뒤로는 전복을 입에 대지 않았을 정도였다.


2.4. (흑우)[편집]


흑우는 한반도 전역에서 볼 수 있었던 소였지만, 일제강점기일본이 흑우는 일본 소, 황우는 조선 소라는 인식을 심어서 농민들이 사육을 기피하다 지금은 극소수만이 남아있다. 하지만 일단 제주 흑우가 특히 맛이 좋았다고 해서 제주도에서 주로 진상했다.

흑우 고기는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용으로 올려졌는데 다른 곳도 아닌 종묘대제에 쓰이는 물품인 만큼 대체가 불가능했다. 정조 8년에 제주에 기근이 들자 다른 진상품을 미루되 흑우, 말, 감귤은 계속 진상하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도의 진상품 중에서도 특히 귀하고 손이 많이 가는 물건에 속하던 흑우, 말, 감귤을 계속 진상하라고 하면서 다른 진상품은 미뤄도 좋다고 허용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지만, 돌려 말하면 저 세 품목은 아무리 봐주려고 해도 봐줄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품목이었다는 의미이다. 말은 국방력을 지탱하는 핵심 전략물자이고 흑우 고기와 감귤은 종묘대제와 빈객접대에 사용하여 왕실의 권위를 보이기 위해 필요한 물자이기에 제주도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면제해 줄 수 없었다는 것. 사실 제주도의 진상품 고난이 격심했던 이유 자체가 제주도의 실제 생산력에 맞춰 공납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필요한 양을 정해놓고 어떻게든 알아서 그 양을 맞추라고 강요당했기 때문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인 셈.


2.5. 사슴[편집]


사슴 또한 녹용, 사슴 가죽, 꼬리 등 수요가 많아 한 번에 수 십 마리씩 일 년에 수 백 마리를 사냥해야 했다. 한라산은 눈이 많이 내리고 늦게 녹는지라 사냥이 가능한 시기가 농번기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고된 노동이나 다름없는 농사를 지으면서 사냥까지 하려면 아주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한라산의 사슴은 결국 19세기 무렵에 멸종한다.[10] 한라산 정상의 호수 이름이 백록담(白鹿潭, 흰 사슴 못)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역설적인 대목이다. 현재는 제주도에는 노루가, 한반도에는 고라니가 사슴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2.6. 표고버섯[편집]


표고버섯[11]도 제주도 특산품이었다. 할당량이 꽤 많아 왕실에 진상되는 표고의 절반 이상이 제주산이었다 하는데 한라산은 현대에 들어서 등산로 정비를 하였음에도 조난 혹은 추락 사고가 꽤나 흔한 곳이다. 안개 때문에 헤매다 절벽에서 추락이 전형적인 패턴. 현대에도 이 모양인데 과거에는?


3. 대동법[편집]


공납의 폐해가 심각해서 그걸 대체하기 위해 대동법을 만들었으나, 제주도는 대동법 시행 예외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사실 제주도는 특성상 이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대동미를 낼 수가 없었거니와 제주도 특산물이 다른 지역에선 제대로 얻어지는 물건이 아니라서 제주도민들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공납에 허리가 휘어야 했다. 다른 지역은 세제가 전세에 통합되는 경향을 보였는데 제주는 반대로 지세가 공납에 통합되는 경향을 보였다.

다만 '지세가 공납에 통합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지역에서는 구할 수 없는 특산물이 많이 나오는데 비해 쌀은 거의 나지 않는 제주도의 특성상 대동법을 적용하지 않은 것 자체는 효율적인 정책일 수 있다. 전형적인 전근대의 조세정책에 따라 접근해 보면 말, 감귤, 전복, 흑우, 사슴, 표고버섯등 귀한 특산물을 진상하도록 하는 대신 다른 세금을 면제해 주면 된다. 이 경우 해당 특산품을 생산하는 작인들에게 모든 조세부담이 전가되므로, 대신 다른 농민들이 이 작인들을 부양하도록 하면 되는 것. 특히 화폐경제의 형성과 발전이 느리고 쌀과 포목이 주된 교환수단(=조세)로 활용되던 조선시대의 특성상 어설프게 대동법을 적용할 경우 제주도에서 나지 않는 쌀을 육지에서 사다가 올려보내면 다시 중앙에서 그 쌀로 제주도의 특산품을 구입하는 비효율적인 과정에서 납세자들의 부담이 크게 증가할 위험까지 있었던 것.

다만 문제는, 대동법이냐 공납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일단 제주도에 부과된 진상품 할당량 자체가 제주도의 생산력으로 감당하기 너무나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고, 전근대 왕조국가 특성상 뚜렷히 해결할 방법도 의지도 없었다는 것이다. 명색이 왕조 국가에서 왕실 공납을 받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 국왕의 어선, 궁중의 제향, 빈객, 사여는 모두 중앙 정치와 밀접히 연관된 사안이라 줄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공납을 위한 물건을 만들고 관리하고 바치는데도 허리가 휘는데 험한 제주도의 환경 때문에 생활도 힘들었던지라, 말 그대로 고난의 섬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뭄이 자주 드는 지역이라 그 때마다 인구가 줄고 유민이 발생했는데 공물은 줄지 않아서 다시 유민이 증가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오죽하면 제주에서만 나는 제주조릿대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면 그걸 먹으며 버텨왔을 정도.

조선 중기 이후 제주인들이 육지로 달아나 유민이 되는 사례가 증가하자, 조정에서는 인조 7년(1629년)부터 순조 25년(1825년)까지 약 200년(정확히는 196년)동안 출륙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제주 사람들은 ‘테우’와 같은 뗏목을 어업에 사용해야 했다.

제주도의 거상 김만덕이 소원으로 서울금강산에 가보고 싶다고 한 것도 이 출륙 금지령 때문으로, 마찬가지로 김만덕은 무려 500섬의 쌀을 내놓을 정도로 재산이 많았지만 앞서 보았듯 순조 25년까지 제주도 사람들은 외부로 나갈 수 없었고 이는 영조 초~순조 초 시대의 제주도 사람인 김만덕에게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4. 2차 창작[편집]


장금이의 꿈 제주도 에피소드에서 관리가 착취를 저질러 해녀들이 끌려가 강제 노역을 하는 바람에 장금이가 전복 캐러 갔다가 익사할 뻔 했다.

퓨전 판타지 소설 크레이지 프리스트의 주인공인 꾹쇠의 과거 파트에서 어릴적 만난 거지가 제주 방언을 쓴다.[12] 그런데 꾹쇠가 거지를 만난 곳은 강원도 깊은 산골이었다. 어째서 강원도까지 올라온 건지 물어볼 엄두도 안 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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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세계 초원 지역마다 연초에 초원에 불을 놓아 오래된 풀을 태워 새싹이 나도록 하는 풍습이 있는데 제주에선 '방애'라고 불렀다. 현재는 들불 축제라고 관광 상품으로 잘 써먹고 있다. 처음 축제가 계획될 단계에서 인근 주민들은 다들 부정적이었는데 고작 그거 조금 태워서 볼 게 뭐 있다고?라는게 그 이유. 참고로 목장으로도 못 쓰기 때문에 버려져 가시덤불이 우거진 땅이 곶자왈이다.[2] 풀 자체가 소화흡수율이 떨어지는데 반추동물과 달리 말은 위가 1개여서 엄청나게 먹고 싼다.[3] 단순히 말을 기르기만 할거라면 초목으로도 감당가능한 수준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승용마, 군마에겐 곡물급여가 거의 필수라고 할 수 있다. 탄수화물의 막대한 소화흡수율과 열량으로 군마, 사역마의 극심한 체력소모를 보완하는 것. 그래서 군마에게는 가급적 곡물을 주되, 날곡식을 주기보다 여유가 된다면 삶아서 주거나 죽으로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제주도는 농사 짓는 난이도가 미션 임파서블 수준이니 사람 먹을 곡식도 모자란 곳이었다. 나중에 천하의 농학자 우장춘도 곡식을 포기하고 유채를 도입했다.[4] 실제로 말은 지능이 매우 높은 편이다. 말의 지능지수는 70~80이상 정도인데, 대략 원숭이돌고래 급으로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정도로 똑똑하다.[5] 말 한 마리 값은 지금도 최소 차 한 대 값은 나간다.[6] 물론 세종 시기 만들어진 온실이 있었지만 체계적이지 않고 연료비도 많이 들었다.[7] 귤은 실수로 껍질에 손톱으로 찔린 자국만 내도 그 부분부터 썩을 수 있다. 그나마 현대에는 냉장보관 같은 걸 하니 좀 오래가는데 그런 것도 없었던 과거엔...[8] 병자호란 당시 과 싸우자는 주장(척화)을 펼친 인물로 유명한 김상헌이 쓴 책이다.[9] 머구리라고 한다.[10] 한라산 사슴만 해를 입은 건 아니다. 본토의 백두산사슴과 대륙사슴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섬에 갇혀 있는 제주도 사슴보다 개체수 보전에 유리했음에도 서식지 파괴와 남획에 16세기부터 급격히 개체수가 줄기 시작해 전국적으로 우역이 유행한 17세기 후반에는 이미 극소수만 남았다.[11] 제주어로 '초기'라고 한다. 한라산 중턱에 '초기왓'(표고밭)들이 있는데 지금도 조선시대와 동일한 방식으로 표고버섯의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예전에는 재배보다는 채취를 더 많이했을 것이다.[12] 이때 꾹쇠는 부모를 죽게 한 양반가와 농민들을 찾아내 죽일만큼 죽이고 도피생활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