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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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7년 9월 14일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송평동
사망
1966년 4월 13일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조극환은 1887년 9월 14일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송평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암보통학교 교사로, 1919년 3월 11일 보통학교 학생들과 주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어 며칠간 조사를 받았다. 이 일로 교사 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읍내 유지 정학순(1892)과 함께 만세시위계획을 논의했다.

그는 군서면 서구림리에 사는 박규상, 최한오(崔漢五), 조병식(曺秉植)과 연락을 취하여 영암 장날인 4월 10일 오전 9시를 기하여 읍내와 구림리 두곳에서 일제히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구림리의 문죽정(問竹亭)을 임시 연락본부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하였다.

당시 군서면 면서기인 김재홍(金在洪)·최민섭(崔旻燮) 두 사람은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태극기 50여매, 독립선언서 6백여매, 독립신문 5백여매, 독립가(獨立歌) 1백여매를 등사하여 이를 영암 보통학교 학생인 김봉근(金奉根)·김영언(金永彦)·유인봉(柳寅奉)·이종구(李鍾謳)·이지봉(李枝奉)·천병권(千秉權)·진봉재(陳奉才)·박종련(朴鍾連)·채동팔 등에게 배포토록 하였다.

거사일인 4월 10일 오전 9시경 태극기와 유인물을 손에 든 1천여명의 시위군중이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모이자,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나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 중심가로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결국 체포되었으며, 1919년 6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해 공소했지만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6년 4월 1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조극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8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