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

덤프버전 :



1. 개요
2. 특징
2.1. 조차지와의 차이점
2.2. 외국인 거류지와의 차이점
2.3. 조선의 조계와의 차이점
3. 종류
3.1. 전관조계
3.2. 공동조계
4. 운영
5. 역사
6. 평가
7. 한국의 조계 설치 사례
8. 여담
9. 매체에서의 등장
10.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조계(租界, Concessions in China)는 특히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졌던 조차의 한 형태, 그러한 형태의 조약에 따라 설정・임대된 지역을 말한다.

19세기 후반 영국, 미국, 일본 등 8개국이 중국을 침략하는 근거지로 삼았던 난징, 상하이 등의 개항 도시에 설치한 외국인 거주지이다. 아편전쟁 이후 불평등 조약에 따라 처음 설치되었다. 중국 뿐만 아니라 조선만주국, 근대화 이전 일본에도 존재했다.

조계에서는 외국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하였으며, 한 때 28개소에 이르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폐지되었다.


2. 특징[편집]



2.1. 조차지와의 차이점[편집]


본래 영어 어휘 '컨세션(concession)'은 조차(租借)를 뜻하는 것으로, 조계는 조차지의 특수한 형태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구별되는 성격이 있다.

  • 조계는 중국 내에만 존재한다.
  • 조계는 보통 도시의 일부분같이 좁은 구역에만 설정한다.
  • 조계는 조약 체결시 영구 임대로 설정하며, 해당 토지의 지주와 중국 정부에게 토지 임대료를 낼 필요가 없다.
  • 조계는 치외법권을 인정받지만 그 대상은 외국인에 한하며, 중국인은 중국 정부가 법적으로 관리한다.
  • 조계는 군사용 목적이나 군사기지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계의 치외법권은 조계 내의 중국인이나 기타 거주자에게도 제멋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에 조계 안에서 발생한 모든 법적 문제는 해당 조계를 다스리는 국가의 법률대로 처리했다. 그리고 공공연히 군사용 목적이나 군사기지로 조계를 활용하기도 했다.


2.2. 외국인 거류지와의 차이점[편집]


외국인집단으로 거주한다는 점에서 외국인 거류지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많이 다르다.

  • 외국인 거류지는 세계 각국에 존재하지만, 조계는 중국 내에만 존재한다.
  • 외국인 거류지는 대부분 현지 국가의 법적 통치를 받지만, 조계는 치외법권을 인정받는다.
  • 외국인 거류지는 현지 국가가 임의로 이동, 변경, 제거가 가능하지만, 조계는 불가능하다.

물론 외국인 거류지도 현지 국가가 힘이 약하고, 거류지에 있는 외국인이 강대국 소속이 많다면 조계 비슷하게 변하는 사례가 있다. 일례로 일본의 경우 에도 시대의 외국인 거주지는 말 그대로 외국인의 거주와 이동을 제한하는 목적으로 인공섬 같은 곳에 설치되었으며, 거류지의 외국인에 대해서도 에도 막부가 통제할 수 있었지만, 쿠로후네 사건 이후 일본이 열강들과 불평등조약을 맺으면서 외국인 거류지는 제멋대로 치외법권을 남용하면서 한동안 사실상 조계처럼 운영되었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일본이 강대국으로 성장해서 열강들과 다시 평등조약을 맺은 후 부터다.


2.3. 조선의 조계와의 차이점[편집]


조선의 경우에도 강화도 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면서 열강들이 개항장에 조계를 만들었다. 가령 현재 인천과 부산의 차이나타운은 당시 청국 조계지의 흔적이다. 그러나 중국에 존재했던 조계와는 다른 특성이 많다.

  • 명칭이 통일되지 않고 조계, 조차지, 외국인 거류지 등을 혼용했다.
  • 일본의 조계가 매우 많았으며, 나머지 열강의 조계는 숫자, 면적, 위력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 일본이 조선의 내정을 많이 간섭한 관계로 조계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도 일본인과 관련되었다면 일본 법률로 심판하려고 했으며, 성과도 있었다.

결국 조선의 조계는 시작부터 일본이 주도한 면이 크며, 최초의 조선 내 조계도 일본이 주도한 공동조계였다. 청일전쟁러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조선을 차지할 권리를 열강들이 신속하게 인정했으므로 일본외의 타국 조계는 거의 성장하지 않고 오히려 퇴보하였다. 그리고 을사조약 이후에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면서 조계는 더욱 축소되었으며, 경술국치 이후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므로 더 이상 별개의 조계를 둘 필요가 없어 1914년 모든 조계를 폐지한다. 이후에도 차이나타운같은 외국인 거류지는 남았으나 철저하게 일본 제국의 법률 하에 있는 주거지에 불과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조선의 조계는 중국의 조계처럼 특수하게 인식하지 않고, 그냥 일본군 교두보나 일본 점령지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종류[편집]



3.1. 전관조계[편집]


専管租界. 1개 국가가 전적으로 관리하는 조계를 말한다.

일반적인 조계는 전관조계다. 원래는 전관조계만 있었으므로 그냥 조계라고 불렸으나, 공동조계의 탄생으로 인해 구분을 할 필요가 있어서 그 후에는 전관조계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3.2. 공동조계[편집]


共同租界. 여러 국가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조계를 말한다.

공동조계가 탄생한 이유는 조계 자체가 너무 작고 거류민 숫자도 적어서 각 조계마다 공무원을 대거 파견해서 관리하기에는 비효율이 많은데다가, 범죄가 발생했는데 범인이 다른 조계로 튀어버릴 경우에는 체포는 커녕 추적하는 것 자체도 다른 조계를 관리하는 국가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등 비능률적이라는 문제가 터졌기 때문이다.

보통 공동조계를 만들 때에는 각국의 조계를 합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처음부터 공동조계를 설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공동조계의 관리는 각 국가가 협의해서 공동조계 관리위원회같은 것을 만들어서 운영, 유지한다.


4. 운영[편집]


조계는 크기에 따라서 운영방식이 나누어진다.

  • 작은 조계 - 영사가 행정을 담당한다.
  • 큰 조계 - 자치행정조직을 결성한 후, 본국의 허가를 얻어서 조계 내의 주민으로부터 세금을 걷어서 행정을 실시하는 자금으로 사용했다. 공동조계의 경우는 위쪽을 보면 된다.

조계는 보통 도시의 일부분, 그 중에서도 중심가나 교통의 요지 등에 설치되므로 몇 군데에 검문소는 있지만 조계의 경계선 대부분이 일반 도로라서 맘만 먹으면 조계 안과 밖을 통행할 수 있다. 그리고 조계는 보통 다른 국가의 조계와 인접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다수라 한 조계에서 다른 조계로 넘어가기도 수월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다가 조계를 관리하는 치안 요원에게 걸리면 피곤한 일을 겪게 되지만, 이런 일은 흉악범죄를 저질러서 수배중이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게 흔하지는 않다. 그래서 치안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5. 역사[편집]




1845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에서의 조계 역사 변천사

청나라아편전쟁에서 패전한 후 열강들은 중국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조약으로 열린 개항장에 조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계는 앞서 설명했듯이 치외법권을 누리면서 대표적으로는 '상하이 공공 조계'와 톈진 조계들이 있었다. 이들은 중국 내부에서 각 열강들의 거점으로 작동했으며, 홍콩이나 마카오같은 조차지와 함께 중국 역사의 치욕 중 하나로 남았다.

이렇게 성장하던 조계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일단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등이 동맹국으로서 협상국과 대립하자, 중국에 흑심이 가득한 일본이 협상국의 기치 아래 중국 내의 동맹국 조차지와 조계를 공격해서 점령했다. 이 때문에 동맹국에 참여했던 국가들의 조차지와 조계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한 후에는 아예 소멸하거나 크게 축소되거나, 열강이 운영하는 공동조계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쇠퇴한다.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에는 중국인의 민족의식이 높아지고, 열강중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와 중화민국간의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조계는 일종의 정체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천진 러시아 조계(1924년), 구강(九江) 영국 조계(1927년), 천진 벨기에 조계(1931년)처럼 북양정부/국민정부에 반환되는 조계도 생겨났다.

이렇게 되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의 관계가 파탄하자, 일본 조계 중 일본군이 점령하거나 영향을 줄 수 있는 곳의 조계는 주변 지역까지 일본에게 떨어지면서 어차피 모두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므로 존재 가치를 상실했으며, 그렇지 않은 나머지 지역의 일본 조계는 중국군이 점령하거나 적어도 치외법권을 활용하지 못하도록 격리시켰으므로 역시 조계로서의 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열강들의 조계는 살아남았으나, 이것도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이 추축국추축군으로 확실하게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연합국과 전쟁에 돌입함으로서 상당수가 붕괴된다. 일단 일본군 점령지 내부의 연합국 소속의 조계는 일본군이 강제로 점령했으며, 중립국 소속의 조계라도 무늬만 조계일 뿐, 일본군이 제멋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곳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한동안 일본군의 점령지가 계속 늘어나면서 조계의 파괴는 일본군의 손에서 가속화했다. 그나마 같은 추축국인 이탈리아 왕국조계는 온전했고 이탈리아의 권리가 인정되었으나 이탈리아가 항복한 직후 바로 일본군이 쳐들어가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접수했다.

이리하여 태평양 전쟁 기간중에 조계는 사실상 빈사상태에 빠졌으며, 형식상으로만 남았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으로 중화민국이 연합국에 참여하자 연합국은 공식적으로 중화민국과의 조약을 개정해 자국 조계를 폐지했으며, 일본이 가지고 있었던 조계도 패전으로 소멸한다. 1947년 이탈리아가 연합국들과 맺은 강화조약으로 천진의 이탈리아 조계를 중화민국에 반환함[1]을 마지막으로, 조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홍콩마카오는 살아남았지만 이들은 조차지였으며, 20세기 막바지에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반환됨으로서 그 수명을 다한다.


6. 평가[편집]


중국 입장에서는 제국주의에게 당한 치욕 그 자체였다. 불평등조약으로 인해 열강들이 반강제적으로 주요 도시의 노른자위 같은 곳에 조계를 설치했고, 그곳에서 치외법권을 누려왔다. 대부분의 조계는 중국에 대한 경제적인 침탈목적을 가졌으며, 일본 조계같은 경우에는 스파이 활동 및 중국 침략의 교두보로서의 역할까지 했다. 그래왔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의 손길이 닫지 않는 그곳이 손톱 아래에 박힌 가시같은 존재였다.


7. 한국의 조계 설치 사례[편집]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에 의해 1876년 부산, 1880년 원산에 이어 1883년 인천이 개항했으며 소위 '개항장'이 조성되었다. 이후 인천, 부산, 마산 등지에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조계가 설치된 적이 있다.

그중 인천 개항장이 제일 알려져 있다. 개항장 청국과 일본지계를 에워싼 자유공원과 송학동 일대에 우리나라와 미국·영국·청국·일본·독일 대표 사이에 체결된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에 따라 송학동·송월동·만석동 일대에 14만 평 규모로 형성되었다.



8. 여담[편집]


앞서 언급했듯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른 조계로 튀어버리면 체포는 커녕 추적하기도 어려워진다.[2] 이 점을 악용해서 조직폭력배가 창궐했으며, 일종의 무법지대화 되어 조계의 치안상태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이점은 현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망명 정부가 활용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자리잡을 수 있었고, 한때 자유 프랑스광둥성의 프랑스 조계를 다스릴 수가 있었다. 물론 그들을 상대하는 일본 제국은 코 앞에 있는데 직접 손을 댈 수 없었으며, 이 점을 이용해서 이봉창 의사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루쉰 역시 상하이 조계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며 활동했다.


9.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조계가 매체에서 등장할 때는 보통 상하이에 설치된 상하이 조계가 엄청난 빈도로 등장한다. 영화로는 정무문, 태양의 제국이 유명하다.

카이저라이히에서는 각국의 조계, 조차지, 거류지 등을 모아 공사관 도시라는 이름의 하나의 정부를 구성하며 등장한다. 1925년 영국이 생디칼리슴 혁명으로 붕괴할 때 국민당에서 홍콩 탈환을 시도하자 홍콩을 비롯한 영국의 조차지들은 독일 제국의 보호를 요청하게 된다. 동아시아에서 독일의 영향력이 증가하자 독일과 경쟁관계에 있는 일본 제국에서도 이권 확보를 위해 주둔군을 늘리며 양국의 갈등 수위가 높아진다. 1926년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자 프랑스 코뮌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 일본의 지원을 받는 봉천 군벌을 모두 경계했던 독일은 직예 군벌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그 결과 국민당은 해외로 망명을 떠났고 봉천은 산해관 너머로 다시 갇히게 된다. 중국의 최강자가 된 우페이푸는 독일의 요구에 따라 청나라를 복벽하나 추가적인 조계의 요구는 거부한다. 독일은 대신 직예의 또다른 실력자인 쑨촨팡에게 접근해 조계를 요구하고 대중의 평판이나 민족주의 따위 신경쓰지 않는 쑨촨팡은 광저우 등 남부의 해안 도시들을 독일에 팔아버린다. 쑨촨팡이 관리해야할 남부 조계 근처의 치안은 원래도 좋지 않았지만 1928년 4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국내외의 관심이 북쪽의 전장으로 향하며 더욱 악화된다. 결국 외국인들이 다수 탑승한 열차가 통째로 납치당하자 상하이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인질 구출을 명목으로 상부의 지시 없이 단독으로 상하이를 침공하며 독일과 동맹 관계인 쑨촨팡 군과 교전을 일으킨다. 독일과 일본의 두 강대국의 전면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사안이었기에 외교관들이 숨가쁘게 뛰어다니던 차에 미국에서 양국을 중재하며 휴전에 들어간다. 미국은 조계 문제를 모든 열강들이 모여서 결정하자고 요청했고 상하이에서의 회담 결과 중국에 이권을 가지는 모든 국가가 조계를 공동으로 관리하는 '공사관 도시'가 탄생한다. 공사관 도시 근처에서는 중국군의 무장이 전면 금지되었고 결과적으로 사실상 공사관 도시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상하이, 홍콩, 톈진까지 내로라하는 대도시들이 독일, 일본, 미국 등 해외 열강의 이득을 위한 곳이 되었고 청방이 대놓고 날뛰는 등 치안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면서 중국, 특히 남중국의 민족의식은 더 높아지게 된다.


10. 같이보기[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7 00:16:04에 나무위키 조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형식상. 실질적으로는 1943년, 살로 공화국왕징웨이 정권에게 반환했다.[2]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이화룡시라소니스테이크를 썰어먹는 장면에서, 이화룡이 시라소니 한테 이런거 첨 먹어보냐고 묻자 시라소니가 "상하이의 불란서 조계지에서 숨어있었을 때 많이 먹었다"고 한 장면이 있다. 그런데 시라소니가 숨어있었다고 한게 이걸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