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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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투준비
4. 전투
4.1. 상륙 직후 (7.21~22)
4.2. 내륙으로의 공세 (7.23~8.10)
5. 결과
6. 전훈
7. 기타



1. 개요[편집]


The Second Battle of Guam

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4년 7월 21일에서 8월 10일간에 걸쳐 진행된 미군의 괌 탈환전.

8월 10일은 미 해군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정식으로 전투종료를 선언한 날이며, 11일부터는 게릴라 소탕전으로 전환되었다. 게릴라 소탕전은 종전시까지 계속되었고, 전후에도 투항공작이 계속되었다.


2. 배경[편집]


1941년 12월 제1차 괌 전투 이후 괌은 다이큐도(大弓島, 대궁도)로 개명당한 채 일본의 통치하에 놓이고 있었다. 1944년, 대본영은 괌을 포함한 마리아나 제도 전역을 절대국방권으로 선포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절대사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으로선 괌과 북마리아나 제도가 무너지면 필리핀은 물론 일본 본토까지 그대로 미군의 진격로가 활짝 열린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어떻게든 사수하고자 했고, 또 중국에서 규슈로 날아오는 미국의 신형 폭격기가 마리아나 제도에 배치될 경우, 열도 전역 특히 수도 도쿄가 그 사정권에 들어간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미국 역시 같은 이유에서 마리아나 제도를 어떻게든 공략하고자 했다. 필리핀을 탈환하자는 맥아더 루트나, 대만을 거쳐 중국 본토로 진공하자는 해군 루트나, 극소수 일본 본토 직접공격론이나 한결같이 마리아나 제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마리아나 제도의 여러 섬들은 서태평양상에서 군사작전을 위한 최적의 위치에 있었고, 섬의 규모도 대규모 기지 건설에 적합하였으며 B-29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곳이었다.

마리아나 제도 중에서도 괌은 특별한 정치적 상징성이 있었다. 괌은 미국이 잃어버린 영토 즉 실지였다. 1943년의 알류샨 열도 전역에서 키스가, 애투 섬을 탈환한 이후 미군은 추가적으로 개전 이전의 영토를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괌은 미군에게 있어 전쟁 이전의 영토를 되찾는다는 매우 귀중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마리아나 제도 전역에 대한 공략은 Operation Forager로 명명되었으며, 제일 먼저 사이판 전투가 발발하였다. 가라판은 일본령 남양군도에서 2번째로 큰 도시였고[1] 마리아나 제도 가운데에 위치해 있어서 제일 먼저 공격받은 것이다.

그리고 미군은 7월 21일 괌 탈환전을 개시한다.[2]


3. 전투준비[편집]


일본 육군은 마리아나 제도 방어를 위해 31군을 편성하고, 만주의 관동군이나 중국전선의 병력을 차출하여 급히 배치하였다. 그중에서도 괌의 수비를 맡은 부대는 관동군 29사단인데 29사단은 예하 3개 연대 중 50연대를 티니안으로, 사단 사령부와 나머지 2개 연대(18, 38연대)를 괌에 배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괌으로 향하던 수송선 1척이 미군 잠수함에게 사냥당하여 18연대는 연대장 포함 병력의 절반과 모든 중장비를 상륙도 하기 전에 잃어버린다.

그밖에 1사단, 11사단도 각각 3개 보병대대, 1개 포병대대, 1개 공병중대씩을 보내어 48독립혼성여단, 10독립혼성연대를 구성하였고 그밖에 제1전차사단은 예하 부대들을 마리아나 제도 각 섬들에 분산배치하여 괌에는 9연대 1중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다른 사단의 전차부대와 합쳐서 치하 10대와 그보다 못한 하고 30여대를 기갑전력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밖에 예전부터 주둔해온 괌 수비대 병력이나 직할 대공부대, 비행장 및 진지공사를 위한 해군 설영대(시설대) 병력 등 무려 2만여 명에 육박하는 병력이 있었으나 누가 일본군 아니랄까봐 지휘체계가 통일되지 않고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등등 해서 수비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미군은 제3상륙군단 산하 3해병사단, 1임시해병여단, 77보병사단이 지상군의 핵심을 맡았다. 이중 3해병사단은 부갠빌 전투를 겪어 한 차례의 실전경험이 있었고, 1임시해병여단은 3개월 전에 임시여단본부와 4해병연대와 22해병연대, 해병헌병중대, 해병통신중대, 해병포병대대, 해군53시설대대로 임시편성한 급조된 부대였지만, 4해병연대는 5개월 전에 기존 1~4해병레이더스 대대로 새로 편성된 정예 중에 최정예 부대였고,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 22해병연대도 마샬 제도에서 6일 간의 전투를 통한 한 차례 실전경험이 있었다. 다만 77보병사단은 개전 이후 창설되어 본토에서 2년여동안 훈련만 하고 첫 실전 투입이었다.

본격적인 괌 탈환의 준비는 6월부터 시작되었다. 사이판 전투의 전조로 시작된 6월 19일 필리핀 해 해전에서 미 해군은 일본 해군 연합함대를 격멸하고 일본의 항모함재기나 마리아나 제도의 육상발진기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칠면조 사냥에 나서며 해당 지역에서의 제공권,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했다. 이후 사이판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미 해군은 전함과 항공기를 꾸준히 투입하여 상륙준비 포/폭격을 1달여에 걸쳐 실시했다.

한편, 미군은 상륙준비 포격 중 제1차 괌 전투 당시 항복을 거부하고 게릴라전을 수행 중이던 조지 레이 트위드(George Ray Tweed) 중사와 통신연결에 성공, 그를 구출해낸다.


4. 전투[편집]



4.1. 상륙 직후 (7.21~22)[편집]


미군은 해병 3사단을 주공으로 하여 괌의 수도 아가나 서쪽에 위치한 서해안의 아산(Asan) 해변에, 제1해병여단은 역시 섬의 서해안이지만 남쪽에 있는 아갓(Agat) 만으로 각각 상륙하였다. 양 상륙지에서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바탕으로 순조롭게 상륙, 진격했다. 해병 3사단 아산 해변에서 남진하고, 아갓 만의 1해병여단이 북진하여 합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예비병력인 육군 77사단은 아갓 만 근처 바다에서 대기하면서 전투 진행 상황을 지켜보면서 휘하 연대전투단을 아갓 만에 상륙시켜 1해병여단의 교두보 확보와 북진을 도울 예정이었다. 일본군도 해안에 다수의 야포와 기관총을 배치하고 강력히 저항하여 미군에 출혈을 강요했으나 화력과 병력의 열세를 이겨내지 못했다.

특히 아갓 만은 일본군이 미군 주력이 상륙해올 곳으로 예상하고 화력과 병력을 집중배치했는데도 상륙 당일에 제대로 털렸다. 상륙 몇 시간만에 해안방어부대들이 괴멸했고, 이 날 밤부터 다음 날인 22일 새벽까지 이 지역 방어부대였던 일본군 38연대장이 직접 지휘한 야습을 감행하였으나 반자이 어택을 수없이 경험해본 미군은 이미 야습을 예상하고 방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래도 상륙 당일이라 방어선의 미완성된 부분 등으로 소수 일본군이 침투에는 성공했으나 결과는 뭐 전멸.(...) 오히려 귀중한 전차들까지 야습에 투입했다가 셔먼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털렸다.

아산 해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은 전선의 모든 병력을 긁어모아 총공세를 개시, 상륙 초기라 병력이 부족한 미군을 몰아붙이는 듯 했으나 함포, 함재기, 야포, 기관총이라는 압도적인 화력지원과 급히 추가상륙한 예비부대의 증원으로 그야말로 학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겨우 패주했다.


4.2. 내륙으로의 공세 (7.23~8.10)[편집]


미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22일 하루동안 일본군의 추가방어선을 돌파하고 사단포병 등 중화기를 대거 양륙했으며 예비인 육군 77사단까지 23일에 상륙을 시작했다. 7월 24일에는 양 교두보의 병력이 연결되었고, 괌 섬의 서해안 중남부에 위치한 오르테 반도를 봉쇄하기에 이른다. 오르테 반도에는 일본 해군 중심으로 2천여 명의 병력이 있었고, 이들은 늘 그렇듯 25일 밤에서 26일 새벽에 반자이 어택을 가했으나 당연히 실패했고, 같은 시기에 일본군이 후방 병력까지 긁어모아 아삿 교두보에서도 역시 반자이 어택을 했으나 병력만 잃고 실패, 장교진 대부분을 잃고 이후 장기 소모전으로 전술을 변경한다.

해병 1여단은 26일부터 오르테 반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오르테 반도는 비교적 고지에 있어서 방어에 용이하고, 항구(아프라 항)이 있어 물자 하역이 용이하며 아갓 및 아삿 두 교두보를 감제할 수 있어 전술적으로 중요했을 뿐더러, 제1차 괌 전투때까지 괌 주둔 해병대의 기지가 있었기에 해병대로서는 기필코 탈환해야 한다는 상징성까지 있었다. 미군은 작전 계획에 의거, 아프라 항과 일본군 비행장[3]이 건설되어 있어 강력한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오르테 반도에 정면으로 진입하기보단 아갓 만과 아산 해변에 우회 상륙한 후 재빨리 교두보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오르테 반도를 탈환할 계획이었다. 허를 찔린 일본군은 오르테 반도로 들어오는 입구에 벙커와 참호, 기관총, 철조망으로 구성된 방어망을 형성하여 미군의 공세를 지연시켰으나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방어선에 막힌 해병대는 전차를 불러와서 벙커 하나하나, 기관총 진지 하나하나 모조리 때려부수며 천천히 진격했다. 결국 오르테 반도는 7월 29일 탈환되었고 같은 날 오르테 반도 국기게양식에는 전선의 주요 지휘관은 물론 미 해군대장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까지 참석하여 그 상징성을 더했다.

7월 30일까지 오르테 반도를 포함함 섬 남부를 점령한 미군은 31일부터 섬 북부로 공세를 단행했다. 7월 31일, 수도 아가나를 점령했고, 8월 2일에는 77사단이 괌 중부에서 북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도시 바리가다(Barrigada)를 함락시켰다. 일본군은 상륙 초기 쓸데없는 야습으로 병력을 죄다 소진(...)하는 바람에 미군의 본격적인 내륙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특히 바리가다를 점령할 때 실전 경험이 부족했던 77사단은 매복하고 있다가 발각된 일본군 전차 한대가 전선을 이리저리 헤집다가 무사히 퇴각하는 것을 허용하는 등 여러 실수를 저지르면서 그 날 하루에 120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서 우왕좌왕했으나, 이미 주력 방어군이 분쇄당한 일본군은 이런 기회를 살려 반격을 가하기는 커녕 바리가다에서 저항을 더 지속하지도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8월 7일에는 섬 최북단에서 10km정도밖에 안떨어진 이고(Yigo)까지 빼앗겼다. 이때부터는 사이판 전투 종료 후 사이판 기지에 전개한 육군항공대 B-25 폭격기까지 항공지원에 나섰다.

8월 10일, 태평양함대사령관 니미츠 제독이 괌을 방문으로, 정식으로 괌 탈환 및 괌 전투의 종료를 선언했다. 다만, 수뇌부 중심의 일본군 최후의 잔당들은 북부 산 일부의 동굴진지에서 11일 아침까지 저항하다 전멸했다. 여기서 31군 사령관 오바타 히데요시 중장 등이 전사했다. 그 이전 사이판 전투에서 31군 참모장 및 사령부 참모들이 대거 전사 내지 할복했기 때문에 31군은 사령부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31군 작전지역이 마리아나와 캐롤라인 제도 동부였고, 이후 31군 작전지역에는 미군과의 대규모 상륙전이 없었으므로 나머지 반수 정도가 온존한 채로 종전을 맞게 되기는 했다. 작전 지휘가 이유라고는 해도 31군이나 제1항모기동부대 등이 아직 조직이 충분히 남아있었는데도 오바타나 나구모같은 사령관들이 전투직전 사지로 굴러들어갔다 죽었다는데서 마리아나 전역에서 일본군의 다급함과 무모함이 크게 드러났다고 하겠다.


5. 결과[편집]


미군은 전사 3,000여 명, 부상 7,122명의 피해를 입은 반면 일본군은 18,327명이 전사하고 1,250명이 포로로 잡혔다. 사실상 수비대 전원의 전멸, 옥쇄로 태평양 전쟁 내내 보여준 섬 전투들과 일맥상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이판 전투에 이은 괌 전투의 승리로 절대국방권의 붕괴는 명백해졌고, 미국필리핀 진공 및 일본 본토 공습 준비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은 마리아나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었고, 이후 니미츠 제독과 주요 참모들을 포함한 미 해군의 태평양전쟁 지휘부는 하와이에서 괌으로 이전하게 된다. 괌은 대일전의 기지로서 일본과 필리핀으로 향하는 모든 전력의 집결지가 되었으며 대규모 기지와 항구, 비행장이 들어섰다.

일단 일본 본토 공습 측면에서 괌은 사이판보다 남쪽으로 200km 거리에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일본 본토로부터 200km 더 멀리 있었다는 것으로 사이판에서 출격하는 것에 비해 B-29의 폭탄 탑재량이나 작전반경에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B-29의 사기적인 항속거리와 탑재량으로 이를 만회하기에 충분했고, 일본 본토 공습의 Main Base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배경 부분에서 상술했듯 미국의 잃어버린 실지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컸다. 일개 경비대 주둔지에 불과한 오르테 반도 해병대 막사의 국기게양식에 미 제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이 직접 참가한 것이나,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직접 섬을 방문해 전투종료를 선언할 정도로 괌 전투의 정치적 위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 해안에 상륙하면서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퍼포먼스만은 못했지만 말이다.


6. 전훈[편집]


괌 전투를 통해 미군은 일본군의 지긋지긋한 야습, 반자이 어택에 대한 완벽한 대처능력을 보여주었다. 상륙 당일서부터 전투 중반부까지 일본군은 병력의 여유가 될때마다 곳곳에서 대대적인 야습을 감행했으나 일선 지휘관들은 보나마나 야습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대비를 철저히 해놓았고 그럴 때마다 일본군의 병력은 녹아났다. 사실상 반자이 어택에 종지부를 찍은 전투. 일본군도 그 사실을 깨달아서인지 펠렐리우 전투에서부터는 반자이 어택을 하지 않고 미군에 막대한 희생을 강요했다.

전투 후반부에는 일본군의 견고한 동굴 및 요새진지를 공략하는데 애를 먹었으나, 본격적으로 전차를 운용하기 시작하면서 벙커던 동굴진지던 그냥 다 때려부쉈다. 1942년 필리핀 전투때 M3을 격파하는데도 엄청난 애를 먹었던 일본군이건만 그 이후로 대전차전 능력은 발전하질 못했고, 미군은 M4 셔먼을 끌고 왔다. 농담 아니라 일본군은 셔먼을 상대할 방법을 도저히 찾지 못했고, 그나마 있는 전차들을 투입해봤으나 셔먼에게 상처 하나 주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같은 시기 유럽전선에선 셔먼이 티거와 판터에게 터져나간걸 생각하면... 괌 전투 기간동안 미군의 전차 손실은 한 자리 수에 그쳤고, 그나마 전차전이 아닌 지형적 유리를 점한, 매복한 야포의 집중포격 덕분이었다.


7. 기타[편집]


  • 8월 10일을 기해 정식으로 전투는 종료, 괌의 점령이 선언되었으나 이후로도 항복을 거부한 일본 육해군 패잔병들이 섬 곳곳에 흩어져서 게릴라전에 나섰고, 이들에 대한 소탕은 종전때까지 계속되었다. 말이 게릴라전이지 대개는 식량이 하나도 없는 정글내 생존 투쟁이라, 어떤 일본 육군 병사는 미 해병부대에 숨어들어 아시아계 해병대원으로 위장해 며칠동안 식당에서 밥도 타먹으며 버티다 들켜 포로가 되기도 했고, 또 어떤 병사는 부대 식당 조리실을 뒤지다 취사병에게 프라이팬으로 두들겨맞고 쫓겨나기도 했다. 심지어 야외 영화관람중이던 해군건설대대원들 뒤에서 같이 영화를 관람하다 들킨 것 같으니 줄행랑을 치기도 하는 등 여러 웃픈 해프닝을 남겼다. 먹을 것을 찾아다니던 패잔병 한 명이 니미츠 제독의 관저까지 들어왔다 경비병한테 걸려서 총알세례를 받고 달아나는 일까지 벌어지자 사령관에 대한 암살 시도를 우려한 니미츠 제독의 참모들은 종전시까지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괌 섬의 마지막 일본군은 요코이 쇼이치(橫井庄一) 육군 오장으로 38보병연대 소속이었다. 다만 이 사람은 비슷한 경우였던 필리핀의 오노다 히로 육군 보병소위[4]와 달리 싸우기는 무섭고 그렇다고 항복하자니 미군이 죽일까봐[5] 혼자 동굴 속에서 짱박히며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1972년 1월 24일, 낚시를 하러 강가로 내려왔다가 민간인들에게 발견되어 같은 해 2월 귀국했다.

  • 당시 일본군이 쓰던 괌 섬 중부의 아가노 비행장은 미군이 접수해서 확대한 다음 B-29의 발진기지로 이용했다. 전후에는 괌의 민간공항으로 재활용되어 안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으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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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장 큰 곳이자 수도는 팔라우의 코로르인데 팔라우 제도 역시 9월에 미군의 공격을 받는다.[2] 참고로 티니언 섬 상륙은 3일 뒤인 7월 24일, 펠렐리우 전투는 9월 15일, 앙가우르 전투는 9월 17일에 각각 진행되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한 것이다.[3] 이 비행장은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다. 위성 사진에서도 활주로의 흔적을 볼 수 있고, 지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4] 적극적으로 게릴라전에 나섰고 항복도 그냥 하지 않고 이미 전역해서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상관이 급히 필리핀으로 가서 항복명령을 하는 생쇼를 하는 끝에야 항복했다. 사실 게릴라전이라곤 하지만 그가 죽인 사람들은 미군도 필리핀군경도 아닌 그냥 일반 민간인들.[5] 일본군은 사병들에게도 항복하면 귀축영미에게 학살당한다며 세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