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대만 해협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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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1차 대만 해협 위기는 1954년에서 1955년간 있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대만) 간의 충돌 사태를 일컫는다.
2. 상세[편집]
국부천대 이후 미국은 타이완 섬의 국민당 정권을 중국의 유일 정권으로 인정하였으나 대만 해협에서의 충돌 사태 발생 시 불개입 의사를 타진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 발발 이후 대만 해협의 중립화를 주장하며 미합중국 제7함대를 대만 해협에 파견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양쪽 모두의 군사활동을 억제했다.
1953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새로 당선되면서 아이젠하워는 국내 반공주의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장제스를 풀어준다"라는 미명으로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서 철수시켰다.
제7함대의 철수 이후 중화민국은 진먼과 마쭈 섬들에 각각 58,000명과 15,000명 규모의 군을 주둔시키고 요새화를 시작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는 진먼, 마쭈 요새화에 대답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에 대만을 '해방'시킬 것을 명령하고 마쭈 지구에 포격을 시작했다.
이 시기 중화인민공화국의 공격은 미국을 분노하게 했는데 진먼에 있었던 미국의 고문 2명이 중국의 포격으로 사망한 데다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를 출범시킬 마닐라 조약 체결 단 5일 전에 이어났다. 포격은 미국의 봉쇄정책에 대한 도전이었고 미국은 대응에 나섰다.
9월 12일, 미국 합참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건의했지만 아이젠하워는 핵무기의 사용이나 미군 투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그 대신 미국은 중화민국에 대한 보호 의사를 타진하는 방법으로 중화민국과의 방위조약 체결을 선택했는데 그것이 1954년 12월 2일에 합의되고 미국 의회에서는 1955년 2월 9일에 통과된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이다.
아이젠하워가 핵무기 사용에 대한 반대 의사를 내비친 것과 별개로 중국 인민해방군이 다천 군도와 이장산 섬을 1955년 1월에 점거하면서 미국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고조되었는데 이건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1955년 3월에 미국이 핵무기의 사용을 고려하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심화되었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NATO 동맹국들도 우려를 표하던 와중에도 미국 제독 로버트 B. 카니는 아이젠하워가 중공의 군사적 여력을 박살날 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알렸다.
하지만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반둥 회의[2] 에 참석한 저우언라이가 평화공존 5원칙를 발표하면서 미국과의 대립에 대해서도 대화 의사를 밝히고 1955년 8월 제네바에서 합의가 이뤄짐에 따라 위기는 종되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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