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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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춘서
鄭春瑞, 鄭春西

출생
1885년 2월 2일
충청도 청주목 북강내일면 신안리
(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신안리)
사망
1911년 6월 20일
경성형무소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정춘서는 1885년 2월 2일 충청도 청주목 북강내일면 신안리(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신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4월 한봉수와 의기투합하여 의병을 모집했고, 4월 중에 의병 9명과 함께 무기를 휴대하고 청주군 각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했다.

1907년 음력 5월 10일 괴산군 서면 사치에서 쌍안경으로 살피던 한봉수는 일본 수비대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며 통과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즉시 정춘서에게 저들을 저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정춘서는 동료 9명과 함께 일제 사격을 가하여 일본 병사 2명을 사살하고, 군용총 2정, 총검 2자루, 탄약함 2개, 수통 1개, 탄약 10발을 확보하였다.

이후 청주군 북강내이면 화죽리에 거주하는 박내천(朴來舛)이라는 자가 일제 경찰에게 제보해 의병에게 피해를 입히자, 1907년 8월 15일 박내천을 체포한 뒤 서면 사치에서 사살했다. 1907년 10월 동리에서 김덕보(金德甫)·이주사(李主事)로부터 군자금 50원을 모금하였다.

1907년 11월 8일 한봉수와 결별하고 단독으로 의병대를 구성한 그는 12월 동료 이종칠(李鍾七)외 1명과 총 2정으로 무장하고 16일에 청주군 북강 외이면 양청리에 소재한 유주사(柳主事)집에서 44원 10전을 군자금으로 모금하였으며 계속해서 목천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10년 한봉수가 의병대를 떠나 서울로 피신하자, 그는 남아있는 부대원들을 수습한 뒤 의병 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청주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전투, 군자금 조달, 우편물 탈취, 군수물 조달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인근의 진천과 목천 일대에서도 활약했다.

그러나 1910년 10월 군자금을 조달하던 중 수비대에게 체포되었고, 공주지법 청주지부에서 강도 및 살인 혐의로 교수형 판결을 받았다. 이에 그는 공소하면서, "나는 의병 활동을 했으니, 의병 활동이 죄가 된다면 내란죄로 처리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1911년 5월 9일 경성 공소원은 "원심은 강도, 살인률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내란죄로 처리해달라는 논지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라고 기각하며 원심대로 교수형을 확정했다. 그 후 1911년 6월 20일 경성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춘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8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