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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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창원 정창.jpg
정창원 정창(正倉).
1. 개요
2. 연혁
3. 유물과 가치



1. 개요[편집]


쇼소인(正倉院(しょうそういん, 정창원)은 도다이지(東大寺, 동대사) 북서쪽 약 300m 거리에 있는 일본 황실창고이다. 검은 통나무를 쌓아(귀틀식) 만들어졌으며, 건물 전체가 지면에서 높이 들어올려진 모습이 특이하다. 이는 지면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고대에는 많은 건물들이 이런 식으로 지어졌다. 이렇게 건물을 땅에서 들어올리는 양식을 우리나라에서는 고상식(高床式)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까지는 흔한 형태였다.[1]


2. 연혁[편집]


도다이지의 부속 시설로서 일본 황실의 유물 창고로 쓰였다. 창건연대는 729년에서 749년 사이로 추정된다. 원래 정창원의 정창은 도다이지 외에도 여러 절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도다이지에만 1동 남았다. 긴 건물이기 때문에 북창, 중창, 남창으로 분류한다. 756년 교모 황후는, 남편인 쇼무 덴노 7주기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숟가락을 비롯한 ·거울·무기·목칠공예품·악기 등 애장품 600여 종을 사십구재에 맞춰 헌납하였다고 한다. 그 뒤로도 고묘 황후는 3번에 걸쳐서, 자신과 쇼무 천황과 연관이 있는 물건을 봉헌했다. 이 헌납품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5종류의 「헌납장」이라고 하는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보물은 쇼소인에 보관되어 있다.

오랫동안 도다이지의 관리 하에 있었지만, 지금은 궁내청 정창원관리소가 관할한다. 소장품은 1년에 한번 가을에 나라국립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선별적으로 볼 수 있으며, 건물은 궁내청 관리인의 지도 하에 멀리서 구경할 수 있다. 창고라 해서 작을 것 같지만, 거의 경회루만큼 크다.


3. 유물과 가치[편집]


역사가 굉장히 긴 왕실 유물창고로, 한국삼국시대 시기의 유물들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2018년 정창원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는 9천여 점으로 알려진 정창원 소장품 가운데 백제, 신라, 중국 등 외국산 물품이 5%에 불과하다고 일본 관계자들이 설명했으나, 당시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는 "10년 전에는 6000점이라고 들었는데, 내놓는 수치가 달라져 확신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라고 지적했다. 한반도 국가들에서 유래한 유명한 문물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등등 삼국시대, 남북국시대의 한국과 교류를 하면서 얻은 유물들도 다수 보관중이다. 이외에도 면류관과 관련 의복들이 남아있다고 하며, 이를 백제에서 의복과 제작 기술을 전해준 기록과 결부시켜 백제의 의복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의복을 묘사한 그림은 공개되었지만 유물 자체가 일반에 공개된 적은 없다. 위에 언급된 유물들은 만약 한국에 있었으면 하나하나 국보 지정은 무조건 된다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희소하고 중요한 문화재들이다.

아키히토 덴노의 맏손주인 마코 공주가쿠슈인 초등과 5학년 때 가족과 함께 정창원을 방문했던 일을 초등과 졸업 작문에 쓰기도 했다. 마코 공주는 정창원에서 유물들을 둘러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며, 미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훗날 마코 공주는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를 졸업한 후 영국일본의 대학원에서 미술품 및 박물관학을 공부하였고, 박물관 연구원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정창원 보물들에 대한 한일 공동 심포지엄에 관한 기사. 사진 자료와 내용이 풍부하게 나와있다.

안에 있는 보물들에 대해 연구할 경우, 역사가 12번도 바뀔 수 있다고들 하지만 한국 학자는 물론이고 일본 학자들에게조차 연구를 잘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정창원 유물들에 대한 전문개설서는 1996년 나온 최재석 전 고대교수의 <정창원 소장품과 통일신라>가 유일할 만큼 연구여건이 답보 상태인데, 일본 쪽 연구자들도 평상시엔 수장고에 일절 접근하지 못하기에 답답한 심정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1946년 이래 매년 10월 국립나라박물관에서 한 차례 열리는 소장품 전 외에는 실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다. 2018년 정창원 국제학술심포지엄 당시 사이토 나카에 나라 국립박물관 학예부장도 명확한 유물 내역은 자신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 궁내청과 보수적인 학자들은 고대사의 일본 황실과 연관된 것을 연구하는 데 긍정적이지 않고, 특히 한반도와 관련된 보물은 연구성과를 학계에 공개할 경우 일본에 득이 될 것이 많지 않기에 연구가 폐쇄적이라는 게 중론이다.#

정창원 황실 유물 중에는 느티나무로 만든 가구인 ‘적칠관목주자’가 있었는데 유물 목록 중 '국가진보장'에 '적칠관목주자'가 "백제 의자왕이 내대신(후지와라노 카마타리)에게 하사한다."라고 유래가 적혔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적칠문관목주자'인데 일본 학계는 이 역시 백제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긴다.# 위에 나열된 신라와 백제에서 가져온 물품 목록만 보아도 그 당시 일본에서는 스스로 만들 수 없어 왕실과 귀족들이나 간신히 쓰던 최첨단 문물들이다.

칠지도처럼 백제의 우월한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물품을 공개적으로 연구하다간 일본 사학계의 자존심이 꺾이는 건 물론이고, 당대 국제관계에서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이었는지 밝혀져 한국의 자부심만 높여주므로, 일본 입장에서는 왕실 창고에 이런 진귀한 물건이 있다는 것만 보여주고 학술연구는 아주 가끔씩 일본 학자들에게 허락할 수밖에 없다. 민정문서정창원 신라 숟가락[3] 등 정당한 방식으로 입수해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도 있다. 대한제국 고종의 것으로 여겨지는 두정갑 투구 등 일부 유물들은 일본이 조선 말기에 도굴하여 가져간 고려청자들처럼 침탈 등 불법적 경로로 얻은 보물이란 사실이 연구 결과 공개될 가능성도 있고, 한국 관련 유물을 일부만 조금씩 공개했던 전례 등을 봤을 때 정창원의 보물들에 대한 한국학계의 전면적인 학술 연구가 시행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4]

8~9세기 통일신라의 지방 통치에 관한 중요한 자료인 신라 민정문서[5]가 바로 이 정창원에서 발견되었다. 1933년에 도다이지 정창원 중창 소장의 유물을 정리하다가 손상되었었던 불경화엄경론(華嚴經論)의 책갑을 수리하는 도중 내부의 포심에 덧붙인 종이 중에서 발견되었다. 이 시기의 불경은 긴 비단이며, 그것을 대나무 등으로 만든 책갑이라는 표지로 말아 보관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현대인이 쉽게 그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신라 민정문서는 불경의 포장지로 쓰였던 것.

이를 일본통일신라의 귀중한 문서를 훔쳤다고 오해하면서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기도 하지만 일본은 아주 오랫동안 불경을 한국에서 들여왔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신라인들이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 종이포장지로 덧댄 것이다.[6] 종이를 제품의 포장지로 쓰는 것은 동양에서는 흔한 방법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무래도 종이가 넘쳐나는 것은 아니니 이미 사용하고 난 후의 쓸모없는 종이를 활용하였는데, 이미 쓸모가 없어진 민정문서를 가져다가 재활용했다고 추정한다. 민정문서란 것은 전국의 촌락을 몇 년 주기로 조사하는 것이었고, 당시에는 수천 장씩 널려 있는 흔한 문서였을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한국 동사무소에서 통계 조사한 공문서가 일본으로 흘러가 일본 불경의 포장지로 사용된 것.[7]

다만 지금에 와서는 다른 기록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삼국사절요에 인용된 부분을 제외하면 소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민정문서의 가치가 높아진것이다. 그리고 이 민정문서는 일본 화엄경론의 일부였기 때문에 결국 촬영 후 원 상태로 도로 붙여 두었고, 지금은 사진본으로만 볼 수 있다.

[1]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로부터 목조건물을 들어올린다는 것은 흔하게 할 수 있는 발상이기에 중세 러시아에서도 고상식 가옥이 있었을 정도.[2]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바둑 세트이다. 이 바둑판은 코끼리 문양 등 한반도에서 사용되지 않은 문양이라 중국이나 일본은 중국에서 제작된 바둑판이 백제를 경유해 로 들어왔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바둑판의 재질이 한반도의 소나무로 밝혀져 백제에서 제작된 사실이 확인됐다.[3] 이건 신라에서 수입한 후 포장도 뜯지 않고 지금까지 보관 중인 미사용 숟가락 묶음이다.[4] 한편 같은 궁내청 소속의 서릉부도 보유 도서의 목록을 전부 공개하고 있지 않다는 의혹이 있고, 필사본 화랑세기 떡밥도 여기서 시작되었다.[5] 신라장적(新羅帳籍), 신라 촌락 문서라고도 한다[6] 서양에서 자포니즘을 일으킨 원인이 된 우키요에 민화 역시, 당시 일본의 도자기를 수입해서 유럽에 가져다 팔던 무역선들이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에서 폐지로 버려지는 우키요에 민화 복사본 폐지로 도자기를 감싸 운반해 갔기 때문이다.[7]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오늘날은 이관, 보존절차가 갖춰져 있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이렇게 했다간 공문서 취급 부적정으로 징계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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