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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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정주영
(1969~1987)


제2대
정세영
(1987~1996)


제3대
정몽구
(1996~2000)


제4대
정몽헌
(1998~2003)


제5대
현정은
(2003~ )







前 HDC그룹 명예 회장
정세영
鄭世永|Chung Se-yung


파일:정세영 회장.jpg

출생
1928년 8월 6일
강원도 통천군
사망
2005년 5월 21일 (향년 76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하동 정씨 (河東 鄭氏)
직업
기업인
학력
보성고등학교 (졸업 / ?회)
고려대학교 (정치학 / 학사)
마이애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석사)
부모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
형제자매
정주영, 정인영, 정순영
누나 정희영
남동생 정신영, 정상영
배우자
박영자
자녀
장녀 정숙영
장남 정몽규
차녀 정유경
별명
포니 정
경력
현대자동차 사장 (1967~1986)
현대그룹 제2대 회장 (1987~1994)
현대자동차 회장 (1987~1994)
현대산업개발 명예 회장(1999~2005)

1. 개요
2. 생애
2.2. 사망
2.3. 불법 분묘 조성
3.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기업인. 현대그룹 초대 회장 정주영의 넷째 동생이다. 현대그룹현대자동차 회장, HDC그룹 명예 회장을 역임했다.

별명은 포니으로 현대자동차의 설립과 성장의 주역이다.


2. 생애[편집]


1928년 8월 6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1]마을에서 태어나 보성고등학교(서울)(39회)와 1953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하였다.

6.25 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복무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영어 실력이 좋은 편이다.[2]

1957년 현대건설에 입사하였다.[3] 1965년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였다[4].


2.1. 현대자동차[편집]


1967년 정주영 회장은 현대자동차를 설립한 후 동생 정세영에게 사장을 맡겼다.

1968년 첫 자동차 코티나를 생산했다. 코티나는 대한민국 도로여건에 맞지 않아 악평을 받았다.

1974년 한국 최초의 국산 모델 현대 포니를 생산했다. 1976년 포니를 에콰도르에 최초의 국산 자동차로 수출하였다. 현대자동차는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고유 자동차 모델을 개발, 출시하는 사례로 기록되었다. 이 때부터 '포니 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수고 때문인지 탈모가 눈에 띄게 진행되었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현대그룹 회장 겸 현대자동차 회장을 지냈다. 정주영 회장이 정계에 진출함에 따라 그룹 회장직에 오른 것이다. 92년 대선 결과가 나온 후 형 정주영 명예 회장을 대신해 당시 당선인 신분이던 김영삼을 찾아가 용서를 청한 것도 정세영 회장이었다.[5]

1996년 아들 정몽규에게 현대자동차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현대자동차 명예 회장직을 맡았다. 하지만 정주영 입장에서 그룹의 간판인 현대자동차를 자식이 아닌 동생에게 줄 이유가 없었다.[6] 그래서 정세영은 현대자동차의 덩치가 너무 커지면 오히려 자신에게 경영권이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기아를 인수하지 않으려고도 했다.

그러나 1998년 12월 정몽구가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취임하고 정세영의 아들 정몽규는 부회장으로 밀려났다. 정세영은 처음에는 우호 지분을 모아 주주총회에서 정몽구 측 인사들의 이사 선임을 저지하는 등 현대자동차 경영권을 놓고 싸우려 했다.#

그러자 정주영이 직접 불러 "야. 몽구가 우리 집안의 장자인데 몽구에게 자동차를 넘겨주는 게 뭐가 잘못됐어?"라고 말하자 싸움을 포기하였다. 정세영은 "형님이 현대산업개발을 주신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한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정세영 회장도 결국 전문경영인에 불과했다" 라고 평했다.

1999년 3월 5일 기자회견을 열어 정몽구의 현대산업개발 지분과 정세영-정몽규 부자의 현대자동차 지분을 맞바꾸기로 했다고 발표한 뒤 32년 만에 자동차 업계를 떠났다.

파일:정세영 정몽규 기자회견.jpg
당시 정세영-정몽규 부자의 현대자동차 퇴진 기자회견때의 모습.[7]


파일:external/www.donga.com/n175ff5.jpg

이임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
위의 사진은 훗날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부분이기도 한데, 정세영 회장은 현대자동차 회장 이임식에서 회사 사가(社歌)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억울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큰 형인 정주영 회장은 기업인으로서는 냉혹했지만 형으로서는 좋은 형이었는지 이후 정주영 회장에 대해 여전히 '존경하는 분'이라고 했다. 실제로 정주영 회장의 장례식에서 가장 크게 대성통곡했던 사람이 정세영 회장이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사업적인 부분에서는 냉엄한 보스였지만 기업 외적인 부분, 특히 가족 중에서도 동생들을 많이 챙겼다고 한다. 당시 여론도 '동생이 애써 키워 놓은 회사를 어떻게 아들한테 넘겨주냐' 라면서 정세영에게 동정적인 여론이 있었다.

정세영은 고령에 인터뷰를 할 때도 포니가 시범 운행에서 처음 산길을 올라갔을 때를 이야기하면서 아이처럼 신나했다. 현대자동차의 개인 주주 중에서는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30년간 사실상 독자적으로 현대자동차를 경영해 왔기 때문에 정세영이 현대자동차를 조카에게 넘기지 않고 버텼다면 현대그룹은 한바탕 홍역을 치렀을 판이었다. 그 다음해인 2000년 세칭 '왕자의 난'이라 불린, 정몽구-정몽헌 사이의 그룹 경영권 다툼이 벌어졌다. 2001년에 정주영이 별세한 것을 고려한다면 그룹이 공중분해될 수도 있었다.


2.2. 사망[편집]


파일:정몽규 회장과 정몽구 회장.png
이후 현대산업개발 명예 회장으로 있다가 폐렴 증세로 서울아산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가 2005년 5월에 별세했다.[8]

그가 타계한 2005년 아들 정몽규 및 지인들이 그의 별명을 딴 '포니정 재단'을 설립했다. 정몽규가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주로 국내외 장학 사업, 사회 각 부문의 혁신가들을 선정, 시상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2008년에는 강남 삼성동의 현대아이파크 타워 1층에 포니정 홀이라는 강당을 마련, 연주회나 세미나를 열고 있다.


2.3. 불법 분묘 조성[편집]


그의 사망 이후 아들 정몽규가 양평군 그린벨트 상수원 보호구역 내에 불법 분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2023년 현재까지 양평군청, 경찰, 검찰, 법원의 이장 시정명령, 행정명령을 깡그리 무시고 벌금만 납부한 채 지금까지 버티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3. 기타[편집]


대머리이다. 탈모는 현대가의 유전이다. 그의 형제들이 풍성한데 정세영만 이례적으로 대머리라는 주장이 서술되어 있지만 잘못된 주장이다. 정주영 일가를 조금만 살펴봐도 탈모가 유전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정주영의 친형제 중에서 정세영 뿐만 아니라 정순영도 탈모가 있으며, 정상영도 다소 탈모가 진행되었다. 정주영도 80년대 후반부터 머리숱이 많이 빠지기 시작했고, 타계하기 직전에 갑자기 탈모가 상당히 진행되어 정수리가 훤해졌다. 2000년 왕자의 난 당시 탈모가 상당히 진행된 정주영 손자 세대에서도 정의선 등이 30대의 젊은 나이에 벌써 탈모가 진행되고 있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4. 가족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범현대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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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주영의 호 아산은 이 마을 이름에서 따 왔다.[2] 정세영회장의 영어 인터뷰. 영상은 당시 포니의 개발수장으로 영국에서 '모셔 온' 조지 턴블의 다큐멘터리이다.[3] 앞서 언급했듯 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한 인연 때문에 미8군이 의뢰하는 공사를 현대건설이 쉽게 다 따낼 수 있었다고 한다.[4] 이 공사 현장에 신입사원 이명박이 파견나갔다.[5] 당시 정세영 회장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빌어야 했다. [6] 현대정공의 자동차산업 진출은 이런 분위기를 보여준 일화라고 볼 수 있겠다. 정주영 역시 동생이 수십년을 키워온 현대자동차를 아들에게 넘기고 싶어했고 현대정공의 자동차 산업 진출을 도왔다는 후문이었다.[7] 정세영은 애써 표정을 유지했지만 정몽규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8] 조카인 정몽구 회장이 숙부인 그의 빈소를 찾았을 때 정몽규 회장과의 어색한 분위기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