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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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정주영
(1969~1987)


제2대
정세영
(1987~1996)


제3대
정몽구
(1996~2000)


제4대
정몽헌
(1998~2003)


제5대
현정은
(2003~ )








현대그룹 제4대 회장
정몽헌
鄭夢憲|Chung Mong-hun


파일:정몽헌.jpg

출생
1948년 9월 14일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망
2003년 8월 4일 (향년 55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 사옥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하동 정씨 (河東 鄭氏)
직업
기업인
학력
보성고등학교 (졸업 / ?회)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 /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 석사)
페어레이 디킨슨 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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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정주영, 어머니 변중석
형제자매
정몽필, 정몽구, 정몽근, 정몽우
누나 정경희
남동생 정몽준, 정몽윤, 정몽일
여동생 정정인, 정정임
배우자
현정은
자녀
장녀 정지이
차녀 정영이(1984년 출생)
장남 정영선(1985년 출생)
신체
175cm, 70kg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생애
4. 이야깃거리
5. 관련 링크



1. 개요[편집]


대한민국기업인. 현대그룹의 제4대 회장,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1948년에 정주영의 5남으로 대한민국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등학교,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졸업 당시 수석이었다. 원래는 문학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정주영의 뜻에 따라 이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미국 페어레이디킨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각각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 현정은과 결혼했다.

1981년 현대상선 대표이사, 1992년 현대전자 대표이사를 지냈다. 아버지의 정치자금 문제로 이 시기에 검찰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98년 현대그룹 해외담당 회장이 되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대북사업을 수행하였다. 2000년 둘째 형 정몽구와의 왕자의 난 이후 현대그룹 해외담당 회장직은 사퇴하고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 회장을 지냈다.

2003년 불법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해서 검찰의 조사를 받다가 그 해 8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 사옥에서 투신자살하였다. 한때는 여러 의문점들 때문에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경찰 조사 결과 자살로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장례식 당시 북한조선중앙통신에서 조전을 보냈으며, 북한 강원도 금강산관광지구에서 분향소가 열리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 아내 현정은현대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3.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범현대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이야깃거리[편집]


  • 유난히 축빠가 많은 현대가(家)에서[1] 동생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과 함께 야빠였다.[2] 현대 유니콘스도 정몽헌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던 덕에[3] 팀 성적이 매우 좋았었다.[4] 당장 해태 이후 KBO 역사상 두 번째로 왕조 소리를 들었던 팀이 바로 현대 유니콘스다. 하지만 그의 사망 이후 구단주를 잃은 현대 유니콘스는 비참한 말로를 겪고 만다. 구단의 모기업인 하이닉스반도체의 경영난이 심해지면서 하이닉스와 범현대가 형제 기업들의 구단 운영 지원이 끊어졌고[5] 서울특별시 연고지 입성을 위해 기존 서울 연고 구단에 줬어야 할 연고지 이전 비용 54억원을 모기업 하이닉스(舊 현대전자)가 가로챘으며[6] 26년간 적립해 온 KBO의 야구발전기금마저도 홀라당 써버리는 난리통 끝에 결국 해체되었다.
  • 재계 인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책보기 좋아하고 공부하기 좋아하는 범생이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상당한 학구파였던 모양인지 독서 뿐만 아니라 토론하고 회의하는 것도 즐겨했다고. 이 때문에 못배운게 평생의 한이었던 왕회장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었다고 한다.[8]
  • 언론에서 비춰진 것과 다르게 정몽구 등 다른 형제와 왕자의 난 이후에도 사망 직전까지 사적 교류는 했다고 한다. 종종 정몽구의 자택에 찾아가기도 했으며, 정몽구는 검찰에 정몽헌의 선처를 구하고 다녔다고 한다. 사업가로써는 피 말리는 소유권 분쟁을 하던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가족으로써는 형제애를 놓지 않은 셈. 정몽헌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상주 역할을 맡아야 할 정몽헌의 외아들인 정영선은 아직 고등학생으로 어렸기 때문에 정몽구가 대신해 동생의 장례를 주도했다.
  • 생전 바로 아랫동생이던 정몽준과는 같은 방을 쓰며 상당히 친했었다고 한다. 정몽준은 정주영의 정부인 변중석 여사의 소생은 아니었지만, 변 여사가 차별없이 아이들을 기른 것도 있어서인지 이복형제라도 서로 잘 지낸듯. 그러나 왕자의 난 땐 서로 사이가 어색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몽준이 현정은과 그 자녀들과의 관계회복을 시도하는 모습도 비췄기에 어느정도 앙금은 해소 된 듯.
  • 한땐 정몽헌 또한 변중석 여사의 소생이 아니고 정몽구정몽근, 정몽우 까지만 변 여사의 소생이라는 루머도 돌긴 했으나아이고 왕회장요.., 실제 사석에선 정몽구 회장이 정몽헌 회장을 "우리 막내"라고 칭했다는 일화 등에서 정몽헌 회장까지는 변 여사의 소생으로 본다. 실제로 정몽헌이 살이 찌거나 정몽구가 살이 빠지면 외형상 상당히 닮았다. 이미지의 차이가 루머가 된 케이스. 덤으로, '같은 소생의 자녀이면서 저렇게 싸울 수 있을까?' 하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생각이 만들어 낸 이미지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부자간에도 살육이 오갔던 수 양제나 부자간의 권력 갈등이 나타났던 견훤과 그 아들, 김일성김정일을 보면 동복이라도 충분히 싸울 순 있다. 일반 가정에서도 같은 배에서 나오고도 다 커서 재산 문제로 엄청 싸워대는 경우가 부지기수니... 하여튼 그놈의 돈과 권력이 문제다.
  • 2000년대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배우 김갑수가 정몽헌 회장을 모티브로 한 천사국 역을 맡았는데 짧은 출연이었음에도[9] 김갑수의 연기력 덕분인지 존재감을 남겨 이후 김갑수는 현대아산 측의 초청으로 정몽헌 회장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 현대엘리베이터 이천공장 안에 있는 테스트타워인 현대아산타워 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정몽헌 R&D센터가 있다.


5. 관련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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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로 아랫동생인 정몽준대한축구협회 회장과 국제축구연맹 부회장을 지낸 축구계 거물이고 사촌동생인 정몽규사촌형에 이어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됐을 정도로 현대가는 축구와 인연이 깊다. 아버지 정주영현대중공업 사내 축구대회에 직접 출전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지만 원래 씨름을 제일 좋아했고 농구배구에도 관심이 많아서 현대 남자 농구단현대 여자 배구단 창단에도 관여하는 등 스포츠 전 종목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아울러 대한체육회 회장을 맡으면서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도 공을 쌓았다. 다만 유니콘스 야구단이 창단될 시절에는 기력이 쇠하기 시작한 인생 말년이었다.[2] 정몽윤 회장은 범현대가 기업들이 현대 유니콘스에 대한 지원을 하나둘씩 끊었을 때도 헬멧, 유니폼, 그리고 홈 구장에 현대해상 브랜드 광고를 집행하는 방식을 통해 유니콘스 구단을 끝까지 지원했으며, 현대 해체 후 키움 히어로즈(당시에는 우리 히어로즈)로 재창단된 뒤에도 2015년까지 하이카 브랜드를 통해 현대해상이 꾸준히 스폰서를 맡아왔던 이유도 바로 정몽윤 회장 덕분이다. 그러나 이장석의 전횡이 드러나고 스폰서들의 지원비도 빼돌려 쓴 게 알려진 뒤로는 히어로즈에서 손을 뗐고, 2017년부터는 같은 범 현대가인 KIA 타이거즈를 통해 현대해상 브랜드 광고를 집행하고 있다. 이와 별개로 대한야구협회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2004년까지는 사내 사회인 야구팀 1루수로 직접 뛸 정도로 야구에 대한 사랑이 엄청나다. 한국실업야구팀이었던 현대해상 야구단이 실업야구리그가 해체되기 직전까지 운영한 것도 정몽윤의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3] 인천고를 막 졸업한 대형 유격수 박진만해태 타이거즈 지명을 받았던 연세대학교 출신 내야수(당시 포지션) 박재홍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거액이 동원됐다. 두 사람에게 쥐어준 신인 계약금 총액만 해도 7억 1000만 원인데 박진만에게 지불한 신인 계약금 2억 8000만 원은 당시 고졸 야수 역대 최고 대우 수준이었다. 물론 이 당시 현대그룹의 재력이 삼성그룹과 대등했을 정도로 빵빵하기도 했지만, 야구단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투자가 이뤄질 리 없었다.[4] 구단이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려다 실패해서 수원을 임시 연고지로 삼은 2000년부터는 비인기 구단으로 전락하고 만다.[5] 적어도 2005년까지는 십시일반 형태로 현대자동차, 현대백화점범현대가 형제 기업들이 조금씩 지원해줬지만, 2006년부터는 지원을 아예 끊어버렸다. 더 심각한 것은 정몽헌의 부인인 현정은이 2005년을 끝으로 아예 구단 운영 지원을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생전에 남편이 열렬한 야구팬이었고, 남편이 유니콘스 구단 운영에 열정을 바쳤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당한 아이러니다.[6] 2000년 창단한 SK 와이번스가 인천 연고권을 취득하는 조건으로 현대 유니콘스에 54억원을 줬고 현대는 그 54억원을 반으로 쪼개 서울 연고권 분할에 대한 권리 보상 목적으로 LG와 두산에 주기로 했으나, 하이닉스가 이 돈을 가로채면서 서울 연고 입성에 실패하고 만다. 결국 이 때문에 유니콘스 구단은 사실상 무연고 취급받으며 2003년부터 구단이 해체될 때까지 연고지 출신 1차 지명 신인을 뽑지 못하게 된다. 더군다나 현대 유니콘스의 최대주주인 하이닉스는 사명을 바꾼 2001년 이후 해체될 때까지 6년간 지원금을 한 푼도 주지 않고 구단이 해체될 때까지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했다. 이 덕분에 현대 시절부터 응원해온 히어로즈 올드팬들 사이에서는 현재까지 하이닉스와 현정은 회장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나쁜 편이다.[7] 현대가의 장남이자 정몽헌의 큰 형인 정몽필은 1982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다.[8] 여담으로 정몽헌과 정반대였던 인물이 정몽헌의 둘째형이자 사실상 장남[7]이었던 정몽구였는데 고등학교 때 럭비부 선수로 뛸 만큼 운동을 좋아했었고 대학도 공대를 선택할 정도로 마초적인 스타일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왕회장이 밖으로만 싸돌아다닌다며 탐탁치 않아해서 장남인 정몽필이 사망하기 전까지 정몽구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난이..[9] 장년기 이후의 이야기가 담긴 2부가 조기 종영되면서 길게 출연하지는 못했다. 1회와 2회에 나온 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