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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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

주역』, 「계사전 하」의 "하늘과 땅의 도는 곧게 보는 것"(天地之道 貞觀者也)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연호중국에서 2번, 일본에서 1번 사용되었다.

1.1. 주요 사건
1.2. 관련 문서


1. 당나라연호[편집]


연호
고조
태종
고종
武德(무덕


永徽(영휘

{{{#ece5b6 '''627. 1. 23. ~ [[650년|{{{#ece5b6
650.}}}]] 2. 6.'''
(23년 15일)}}}
중국 당나라 태종 시기에 사용했던 연호.

고조 이연의 아들이었던 이세민626년 7월 2일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당나라를 장악하고 2개월 후인 9월 4일에 고조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다. 그리고 627년 음력 1월 1일(양력 1월 23일)을 맞아 연호를 무덕(武德)에서 정관(貞觀)으로 개원#3하고 죽을 때까지 사용했다.

태종은 양제의 폭정과 수당 교체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당나라의 제도를 정비하며 태평성대를 열었다. 정관 연간에는 방현령, 두여회, 위징 등 유능한 인재들이 등용되었으며, 군사적인 성과도 달성하였다. 이러한 태종의 치세를 정관지치라고 불렀으며, 태종의 정치는 정관정요라는 책으로도 간행되어 지도자들이 즐겨읽는 책이 되었다.

이 정관 연간에 만들어진 제도들은 이후 1000년이 넘도록 중국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사용하는 등,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연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태종의 업적의 이면에는 적지 않은 오점이 남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관의 치세는 당나라를 설명할 때 꼭 빠지지 않는다.

649년 7월 10일에 태종이 붕어하고, 태종의 3남인 이치가 태종의 뒤를 이어 다음 황제로 즉위한 뒤, 650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7일)에 영휘(永徽)로 연호를 바꾸었다. 태종이 죽을 때까지 정관 연호를 썼던 데에 반해 고종은 연호를 상당히 자주 바꾸었다.

1.1. 주요 사건[편집]



1.2. 관련 문서[편집]



2. 서하연호[편집]


서하 연호
숭종
영안(永安)
(1098년~1110년)

숭종
정관(貞觀)
(1101년~1113년)

숭종
옹녕(雍寧)
(1114년~1118년)
서하의 제4대 황제였던 숭종 이건순 재위기에 사용한 연호로 사용 시기는 1101년부터 1113년까지이며 1114년에 옹녕(雍寧)으로 개원하였다.

3. 일본연호 조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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