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본공수 시즈쿠이시 공중충돌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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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日空機雫石衝突事故
(全日空58便・航空自衛隊 訓練機)
All Nippon Airways (ANA) Flight 58
(All Nippon Airways Flight 58 / JASDF 92-7932)
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발생일
1971년 7월 30일
유형
공중 충돌, 조종사 과실 (자위대 측)
발생 위치
일본 이와테현 이와테군 시즈쿠이시상공
탑승 인원
승객: 155명
승무원: 7명
자위관: 1명
사망자
탑승객 • 승무원 162명 전원 사망 (피해사고기 측)
생존자
자위관 1명 전원 생존 (가해사고기 측)
기종
Boeing 727-281
F-86F 쿗코(旭光)
항공사
전일본공수
항공자위대
기체 등록번호
JA8329[1]
92-7932
출발지
치토세 공항
도착지
도쿄 국제공항

1. 사건 개요
2. 사고 후
3. 여담
4. 유사 사고


파일:g34sw.png
파일:92-7932.png
사고 3개월 전, 구마모토 공항에서 촬영된 JA8329
사고 5일 전, 마쓰시마 기지(松島基地)에서 찍힌 92-7932



휴먼버그대학교에서 사고 당시를 재현한 애니메이션

사고 조사 보고서(1)

사고 조사 보고서(2)


1. 사건 개요[편집]


일본에서 1971년 7월 30일에 발생한 항공사고이다.

일본 이와테현 이와테군 시즈쿠이시초[2] 상공을 비행 중이던 전일본공수(당시 全日空 현. ANA) 58편 여객기와 훈련중인 항공자위대 제1항공단 마츠시마파견대(第1航空団松島派遣隊)[3] 소속 훈련생 이치카와 요시미(市川良美 당시 22세) 2등공조가 조종하는 전투기가 서로 비행 중에 접촉하여[4], 양 쪽 모두 추락했다. 자위대 항공기의 자위관(파일럿)은 탈출에 성공하였으나[5], 기체에 손상을 입은 여객기[6]는 수직낙하 하는 동안 음속의 벽(sonic barrier)을 돌파했다. 이로인해 고도 15000피트(약 5000m)에서 엄청난 굉음[7]을 내면서 공중 분해되어, 승무원 7명[8]을 포함하여 탑승객 162명 전원이 희생되었다.[9]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떨어지는 ANA 58편 파편들 중 일부인 랜딩기어 부품이 마을 민가 지붕을 뚫고 들어가면서[10] 안에 있는 81세 여성을 덮쳐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히 직격은 면했다. 이후 14년 뒤인 1985년 8월 12일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가 발생하기 전까지 일본 내 최대의 희생자를 낸 항공 사고이다.

당시 한국 언론들도 이 사건을 보도했다.조선일보, 매일경제, 경향신문, 동아일보.

그리고, ANA는 이 사건 이후로 현재까지 51년 동안 단 한 번도 사망사고를 내지 않았다.[11]


2. 사고 후[편집]


사고 직후인 1971년 8월 7일, 정부 중앙교통안전대책회의는 다음의 내용을 정하는 "항공안전긴급대책요강"을 발표하였다.

  • 자위대 훈련공역과 항공로를 완전분리할 것.
  • 훈련공역은 방위청 장관과 운수대신(현. 국토교통대신)이 협의하여 공시할 것.
  • 영내를 비행하는 모든 항공기에 관제를 받을 것을 의무하는 특별관제공역을 확충할 것.

1975년 6월 24일에는 개정항공법이 참의원에서 가결되어 같은 해 10월부터 시행되었다. 이 개정항공법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명기되었다.

  • 항공관제공역에서의 곡예비행과 훈련비행의 원칙적 금지, 항공 주변 공역에서의 통과비행 금지와 속도제한, 특정 공역의 고도변경 금지와 속도제한 등 운항 룰의 엄격화
  • 이상 접근 방지를 위한 감시 등 안전의무와 이상 접근 발생시의 보고의무
  • 트랜스포터와 플라이트 레코더 등의 안전운항에 필요한 장치의 장착의무[12]
  • 이들 규칙은 그동안 적용되지 않았던 자위대기에도 적용한다.

1991년 6월에는 일본 전역을 커버할 수 있는 레이더 관제 시스템이 개발되어, 1대가 고장을 일으켜도 다른 레이더로 백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 공중 충돌 방지 장치(TCAS)가 개발되어, 일본 국내를 비행하는 최대이륙중량 5700kg을 넘거나 탑승정원 19명 이상의 터빈기는 이 장치의 장착이 항공법으로 의무화되었다.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마스하라 케이키치(増原惠吉) 당시 방위청 장관(현 방위대신)이 사임하였다. 항공막료장이었던 우에다 야스히로도 사임하였다.

교관 쿠마 타모츠(隈 太茂津 くま・たもつ 당시 31세) 1등공위 (一等空尉, 우리 군 대위계급 상당)와 훈련생 이치카와 요시미 2등공조 (二等空曹, 우리 군 중사계급 상당[13])는 사건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4] 구속기소 되었고, 일본 항공법 위반 및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1심에서 교관은 금고 4년, 훈련생은 2년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심과 상고를 거쳐 훈련생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교관은 집행유예로 감형되었을 뿐 유죄판결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실형을 선고받은 전 교관은 국가공무원법 규정에 따라 파면 되었고, 전 교관은 재심청구를 포기하고 파일럿직으로 복귀하지 않았다[15]. 또 훈련생은 최고재판 판결 후, 전투기가 아닌 구조기의 파일럿으로 일하여 2003년 10월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인명구조활동에 종사했다.

여객기가 추락한 현장은 "위령의 숲(慰霊の森)"[16]으로 정비되어 2003년까지 매년 위령제가 개최되었다. 현재에도 지역 주민이나 ANA 사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ch 등에선 심령 스팟으로 취급되는 중.

당시 여객기의 부품은 2007년 1월 19일부터, 다른 인명사상사고로부터 나온 유품이나 자료를 보존 전시하는 "ANA그룹 안전교육센터"(ANAグループ安全教育センター / ASEC ANA Safety Education Center)에 공개돼있다. 센터에서는 사고현장 부근에서 회수한 부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3. 여담[편집]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블랙 잭에 이 사고를 소재로 한 이야기(6화 "눈 내리는 밤 이야기" 雪の夜ばなし)가 있다. 희생자 남매가 돈가방을 치료비로 주면서 어머니의 영혼을 모시고 와서 수술을 부탁하고 블랙 잭은 빈 수술대에서 수술을 한다. 이어 희생자 유령들이 블랙 잭에게 좌석을 준비하였으니 주치의로서 저승으로 함께 떠나자고 본색을 드러내며 강요하자, 블랙 잭은 이를 거절하기 위해 수술비로 받은 돈가방에 담긴 돈을 눈보라 속에 던지고 집의 문을 닫았다.


4. 유사 사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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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전방 동체에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 로고를 칠했다.[2] 현재의 아키타 신칸센타자와코선 시즈쿠이시역 인근[3] 사고난지 3년 후인 1973년 8월 24일에 폐지 및 해체되었다. 현재는 1976년 10월 1일에 신설된 제21비행대가 전투기 비행훈련을 담당하고 있다.[4] 그 당시 시즈쿠이시 정 상공에는 마츠시마(제4항공단)가 정해 놓은 전투기 비행훈련공역과 민항기가 주로 이용하는 직선 방향으로 된 제트루트 J11L(ジェットルートJ11L) 라는 항공로와 겹쳐진 교차점이 있었다. 미야기현 히가시마쓰시마시에 위치한 마츠시마 기지에서 출발한 두 전투기(교관기 • 훈련기)가 비행훈련하는 도중 훈련공역에서 이탈하는 것을 잊은 채로 홋카이도에서 도쿄까지 남하하고 있는 젠닛쿠 58편 여객기(그때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한 채로 평소대로 비행하는 상태였다)가 있는 제트루트 J11L가 만나는 교차점 쪽에 들어갔다. 그로인해 눈깜짝할 사이에 교관기를 뒤따라 가는 전투기(훈련기)가 여객기에 접근하고 말았다. 전투기는 얼른 기수를 각도 60°로 틀어 올려서 기동회피를 실시하였지만 너무나 가까운 거리인 탓에 기동회피를 실패하여, 전투기 오른쪽 주익 날개 뿌리 근처에 여객기 T 꼬리날개(수평 꼬리날개) 안정판 왼쪽 끝부분 쪽에 마치 여객기가 전투기를 확 끌고 가는 듯한 모습으로 접촉했다(접촉했을 당시 속도는 여객기 900km/h • 전투기 840km/h였다).[5] 그후 충돌로 인해 파손되어 오른쪽 날개(주익)를 잃은 전투기는 사고 발생 지점(훈련공역과 제트루트 J11L의 교차점) 근처 논밭에 추락했다.[6] 앞서 언급했듯이 충돌로 인해 파손되어 T 꼬리날개 왼쪽 안정판과 승강타를 잃은 상태였다.[7] 이 굉음이 모리오카시내에 있는 병원 옥상에서까지 들렸을 정도였다! 즉, 시내 중심가까지 들렸던 것이다.[8] 기장 카와니시 사부로(川西三郎 당시 41세), 부기장 츠지 카즈히코(辻 和彦 당시 27세), 미국인 항공 기관사 돈 미카엘 카펜터(ドン・ミカエル・カーペンター Don Michael Carpenter 당시 30세), CA 타카하시 마사코(高橋雅子 당시 22세) • 스기 요코(杉 洋子 당시 24세) • 사사메 하루요(笹目晴代 당시 23세) • 시모오카 카즈코(下岡和子 당시 23세)[9] 목격자들 증언에 의하면 승객들이 여객기 파편과 함께 수많은 콩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봤다고 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떨어지는 사람들의 그림자였다고 한다. 파편과 떨어진 사람들은 시즈쿠이시역에서 동쪽 2km ~ 3.5km, 남쪽 3.5km ~ 5km 범위 내 마을 민가 4채와 논밭 • 야산에 처참한 모습으로 흩어진 상태였다.[10] 일본 주택 대부분은 삼나무로 만든 목조주택이라서 이 정도 높이(지상에서 고도 약 5000m)에서 낙하하면 쇳덩어리의 무게로 인해 집이 반파되는 것은 당연지사.[11] 단, 전일본공수 61편 납치 사건에 의해 사망한 기장은 제외. 엄밀히 말해 항공사고가 아닌 살인으로 인한 사망자이기 때문.[12] 그 당시 젠닛쿠(ANA) 58편은 장착되어 있지 않았다.[13] 자세한 이유는 항공학생 참조.[14] 일본 자위대는 기본적으로 군인이 아니라 방위직렬 공무원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군법이 없으며, 사건 사고는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경찰과 민간 법원이 담당한다. 헌병 역할을 하는 경무과가 있으나 감찰기관에만 그칠 뿐이다.[15] 나중에 세탁소 겸 신발 수선점을 차렸다. 2005년 8월 향년 65세 노환으로 사망.[16] 2020년(레이와 2년 令和2年) 5월 1일 "모리노시즈쿠 공원(森のしずく公園)"으로 개칭되었다. 명칭을 바꾸는 이유는 후술한대로 심령스팟이라는 엉뚱한 이미지 때문에 사고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있고, 더 나아가 사고 현장의 그 동네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뜻을 알리기 위해 명칭을 바꾸게 되었다. 명칭 안에 있는 '시즈쿠(しずく)'라는 것은 사고 현장이였던 지명이 시즈쿠이시 정(雫石町 しずくいしちょう)과 사고로 잃은 희생자들의 유족 눈물 방울(涙しずく)이라는 중의적 뜻이 담겨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