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덕
덤프버전 :
분류
}}} ||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시절의 친일 경찰, 대한민국의 헌병, 변호사.
문인 전혜린의 부친이자, 백범 김구 암살 사건 관련자.
2. 생애[편집]
1910년 평안남도 평양군에서 아버지 전병룡(田秉龍)과 어머니 안동 장씨 장병선(張秉善)[4]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5]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931년 경성사범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6] 를 졸업하고 만주의 봉천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3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제11회, 문과갑류)에 입학했다. 1937년 예과 수료 후 법문학부 법학과로 진학해 재학 중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및 사법과 양과에 합격했다.[7]
1940년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에서 일하다가 경시로 전근하여 평안북도청과 경기도청의 경찰부(警察部)에서[8] 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도로와 철도를 통해서 화물을 수송하는 물류 체계를 통제하면서 일본 제국의 총력전을 지원하여,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경찰 부문에 수록되었다.
해방 후, 1946년 미군정에서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 경무부 공안과장, 경찰전문학교 부교장, 경무부 교육국 부국장 등을 지냈다.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자 친일 경찰에 대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 고급장교반에 들어갔다. 졸업 후 중령으로 진급해 헌병 부사령관에 임명됐다. 당시 헌병대는 친일 경찰들의 최대 도피처였다.
1949년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이승만은 신성모와 전봉덕으로부터 보고를 받자마자 수사 책임자인 임시정부 계통의 장흥 헌병사령관을 해임하고 전봉덕을 대령으로 진급시켜 헌병사령관에 임명했다. 전봉덕은 안두희를 보호하면서 사건을 축소하고 배후를 은폐하면서 수사를 마무리했다. 특히 헌병사령관이자 독립군 출신이었던 장흥과는 사이가 매우 나쁜 편으로 알려졌으며 헌병대 내에서도 서로 대립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안두희의 백범 암살을 계기로 안두희를 두고 서로 대립과 신경전을 벌였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한필동 당시 1연대 헌병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백범 암살의 배후는 '전봉덕' (1992년 4월 21일 MBC뉴스데스크)이며 장은산 포병사령관과 함께 백범 암살을 기획했다고 한다.
1950년 예편하고 국무총리비서실장을 지낸 뒤 변호사로 개업해 활동하면서 서울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한국법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가 1998년 사망했다.
슬하에 1남 7녀를 두었으며 장녀가 전혜린이다.
외손자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3. 대중매체에서[편집]
1990년작 MBC 8.15 특집드라마 <반민특위>에선 배우 김웅철이, 1994년 2월 27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선 윤관용이 각각 연기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6 00:23:50에 나무위키 전봉덕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일제강점기 당시 창씨개명으로 썼던 이름은 다나카 호우토쿠(田中鳳德).[2] 경은파 30세.[3] 전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교수.[4] 장세붕(張世鵬)의 딸이다.[5] 아버지 전병룡은 세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 번째 부인인 전주 김씨 김상렴(金相濂)의 딸은 자식 없이 별세했고, 두 번째 부인인 광산 김씨 김병철(金炳哲)의 딸 사이에 이복 형 전봉일(田鳳一)을 두었다. 전봉덕은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 소생이다.[6] 당시 사범학교는 중등교육기관으로, 보통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셈. 1943년 사범교육령 개정으로 본과를 설치하면서 전문학교급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승격된다.[7] 사법시험과 행정고시에 모두 합격한 셈이다.[8] 지금의 지방경찰청(행정안전부 직할의 광역경찰청)과 전혀 다른 직제로서 XX도청 직할의 XX부국이다. 왜냐하면 일본 제국의 경찰관들은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2제국의 경찰행정법을 본받아 내무성 직할의 경보국과 도쿄 시내의 경시청에서 근무하는 중앙경찰 및 도도부현의 민정관청에서 근무하는 지방경찰로 인사체계가 분리되어 있었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민정문관이 XX군수로 승진한 뒤에 XX경찰서장으로 부임하는 순환근무도 흔했다. 당연히 일본 본토의 현청 직제를 모방하여 조선총독부의 13개 도청에서는 도지사의 지휘를 받는 5개의 부국(경찰부, 내무부, 재무부, 농상부, 광공부)이 설치되어 있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의 관료제는 현대 시대의 1급~10급 공무원(국민의 충복)이 아니라 중세 시대의 정1품~종9품 문무관리(국왕의 충복)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