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공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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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ぜんがくきょうとうかいぎ, 젠가쿠쿄-토-카이기)
1. 개요
2. 역사
2.1. 전공투 이전
2.2. 등장
2.3. 전개
2.4. 결말
2.5. 이후
3. 구성 및 성향
4. 특징
5. 미시마 유키오와의 대담
6. 관련 인물
7. 관련 단체
8. 관련 사건
9. 관련 창작물
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連帯を求めて孤立を恐れず

힘 미치지 못해 쓰러짐은 개의치 않으나

力及ばずして倒[1]

れることを辞さないが

힘 다하지 않고 꺾임은 거부한다

力を尽くさずして挫けることを拒否する

도쿄대 야스다 강당 벽에 적힌 글. 일본의 시인이자 평론가 타니가와 간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며 도쿄 야스다 강당 점거농성 당시 강당 벽에 쓰여 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충 해석하자면 "많은 사람과 함께 연대함을 요청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뜻대로 전진할 것을 겁내지 말자." 정도. 개인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중시하고 기성 조직에 의한 통제를 극복하고자 한 조직 원리와 행동 원리를 표현한 문장으로, 전공투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자신에 대한 확신을 동시에 표현한 명문장으로 평가된다.

일본에 있었던 대학생 운동권 단체의 연합 조직. 일명 전공투(젠쿄토. 全共闘. ぜんきょうとう.)

일본반정부 투쟁이 활발하던 1960년대에 일본의 여러 대학교의 단체가 학교별로 모여 구성한 학생운동 조직이다. 각 대학별로 전공투가 구성되어 있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도쿄대학니혼대학의 전공투였다. 동대전공투는 "대학 분쇄"[2] 및 "자기 부정"을 슬로건으로 투쟁했다. 소위 말하는 "실력 투쟁"으로 가두 폭력시위를 벌였고 이전의 학생 시위와는 다르게 과격한 폭력투쟁을 일삼았다. 특정 당파나 정치 집단이 자신들의 정강과 사상을 내세우는 조직운동이라기보다는 대중운동의 성격이 더 크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렇기에 전공투는 각 학교마다 다른 방식을 보이기도 하고, 하나의 방식으로 정형화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60년대 이후의 일본 극좌폭력 운동권을 싸잡아 "전공투"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전공투와 일본 신좌파를 혼동하는 것인데 타당하지 못하다. 전공투는 단일한 조직이나 정파가 아니고 60년대에 생긴 학생운동 조직이다. 각 대학별 전공투들을 통일해 전국전공투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성대회장을 경찰기동대가 덮쳐 간부들이 연행되면서 와해된다. "전학공투회의"의 "전학"이란 "전국학생"(National Students...)의 줄임말이 아니다. 전학이란 "한 학교의 전체 학생" 대부분이 참여했다(All-campus)는 의미다. 한국에서는 80~90년대에 대학생들의 운동권 단체가 사회적인 파장이 매우 컸다.

또 전공투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극좌로 빠진 것도 아니다. 전공투가 좌절된 뒤 적군파 같은 과격노선으로 빠져 인생이 망한 사람들은 전공투 이전부터 신좌파 정파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며 과격파의 삽질 때문에 전공투가 민심을 잃어 실패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비운동권 학생들이 몸을 사려 전공투 대오에서 이탈하며 전공투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운동권들이 취한 자구책이 과격화였다. 선후관계가 정반대인 것이다.

완장을 차거나 총대를 멘 이들은 대학에서 제적당했고 심하면 인생이 망했다. 최초의 전공투였던 일대전공투 의장 아키타 아케히로는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살았고 1994년 전공투백서 편집위원회가 과거의 동지들에게 설문조사를 돌렸을 때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운동에 참여하지 않을 것. 바보 같다", "운동을 떠난 주원인은 생활",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생활" 등 상당히 냉소적인 답변을 했다.

그러다 1968년이 지나가고 자연스럽게 운동에서 이탈한 대부분의 전공투 세대는 이후 단카이 세대가 되어서 고도경제성장의 꿀을 빨았다. 이는 서양의 베이비붐 세대와도 비슷하다. 미국에서도 전학적으로 진행되었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정부의 불통적인 대처로 빡쳐 버린 학생들에 의해 폭력화되면서 운동의 고립이 심화되었다. 래디컬해진 사람들은 학교도 때려치우고 지하조직에 들어가 FBI 수배를 받는 등 인생이 망했지만 어영부영 운동을 그만둔 대부분의 세대는 기득권층이 되어 현재는 신세대들에게 "부머"라는 멸칭으로 불리고 있다.

즉 전공투의 본질은 일본의 68운동[3]이었던 것이다.


2. 역사[편집]



2.1. 전공투 이전[편집]


1960년대 일본은 학생운동이 가장 격렬한 나라 중 하나였고 오히려 노동운동은 1950년대에 강력한 투쟁이 좌절되고 기성사회에서의 합법투쟁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잠잠한 국면을 맞이했다.

1960년대 초반 미일안전보장조약에서 일본의 주권 침해, 평화헌법 위배 등의 문제가 불거져나오면서 지식인/학생 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60년대 초반 일본은 소위 말하는 안보투쟁의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국회에 돌입하던 학생들 중에서 사상자가 나오고 때로는 야쿠자로 추정되는 극우 폭력배들에게 습격을 받기도 하는 등 학생사회의 여론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본 경시청 공안관계자들은 대다수가 일본제국 시절의 고등계 출신이었다. 공안 문서를 참조하자. 이러한 문제점이 정세에 대한 심각한 오판을 초래해서 결국 학생소요를 긁어 부스럼으로 만드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는 해석도 있다.

이런 와중에 일본의 대학 자치기구(학생회) 연합체인 전학련[4]은 안보투쟁의 중심이 되어 활동하게 된다. 이 전학련 세대를 얼추 60년대 초반~중반으로 이야기한다. 전학련은 당시 강력한 조직체가 없었던 학생운동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게 되고 중심부에 사회당 청년/학생 기구, 신좌파 학생기구, 공산주의자동맹 등 여러 인물들이 섞여 있는 순진한(나쁘게 말하면 단순히 투쟁만 일삼는) 학생기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전학련의 구성원 대부분이 어떠한 뚜렷한 지향점을 지녔다기보다는 정치단체 산하의 집합체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사실상 전학련은 일본공산당의 영향력 하에 있었으며 1950년대를 지나면서 공산당에 대한 비판으로 공산주의자동맹이라는 신좌파가 주류가 되었지만 1960년 안보투쟁 이후 지리멸렬한 투쟁을 통해 힘을 잃었다. 결국 1960년대 중반 대부분의 대학 학생 자치회는 민청계(일본공산당 학생계)가 장악했다. 나머지는 사청동 해방파, 공산주의자동맹 등등 여러 계파가 따로 전학련을 조직했다. 사실상 분열된 것. 이러한 흐름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지금도 민청계 전학련을 제외한 집단은 "전학련(OO위원장)"같은 식으로 자신의 계파를 표시한다. 현재는 서로서로 자신들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헤게모니 싸움으로 인해 내부 투쟁이 심했으며 결과적으로 좌익 학생들이 조직을 장악한 뒤 어느 조직보다도 수직적이고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으로 변화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실제로 만화 시마 과장에도 종종 전학련 출신의 권위주의적 상사에게 갈굼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사실 전학련은 일본의 좌파 정당이나 정치단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투쟁 방식도 피켓 시위나 수업 거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별로 효력이 없었다. 결국 전학련의 수직적이고 군사조직적 구조는[5] 학생운동 전반의 심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서구에서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적/탈권위적 가치관의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다. 전공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8년은 전세계적으로 68운동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이 68운동의 영향으로 일본 학생운동권은 새로운 학생 연합체의 생성을 필요로 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긴 것이 바로 전공투다.


2.2. 등장[편집]


1968년 도쿄 국세국(일본 국세청의 도쿄 지국)에 의해 니혼대학에서 22억엔이라는 어마어마한 용도가 불분명한 금액이 발견되었다. 이는 대학 당국의 부정 회계로 인해 축적된 금액이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5월 23일 최초의 시위가 벌어졌는데 통칭 "200미터 데모"라고 불린다.

당시 학교 당국은 물리적 및 비물리적인 방법으로 학생 시위를 탄압했다. 대자보를 뜯어가는 건 기본이고 학생운동에 우익 학생단체나 각 단과대 응원단, 체육회 학생들을 동원하여 폭행을 일삼은 것이다. 일본 대학의 체육회는 학내 체육계 동아리를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학교별 체육회가 활성화되어 있는데 서열이 강하고 강압적이며 군대문화가 뿌리박힌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이었는데 종종 다른 학생회를 구타하는 경우가 있었다. 실제로 1960년대 내내 이러한 체육회계 학생들의 행동이 문제가 된 사례가 적지 않게 있었다.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

이러한 탄압은 196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체육회 학생들로 막을 수 없는 수준으로 학생들의 숫자가 불어났고 결국 학교 당국은 학교 건물 셔터를 내려 버린 뒤 학생들을 위협하여 정문 밖으로 학생들을 몰아내 버린다. 결국 2,000명 가량의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대열을 이루어서 스크럼데모와 프랑스데모[6]를 하게 되었다. 이때는 본부의 응원단 학생들까지 가담(!)하여 대학 직원들과 체육회 학생들을 막는 경비대로 자처하면서 참가했다.

4일 뒤인 27일 니혼대학에서 아키타 아케히로를 의장으로 하는 "니혼대학 전학공투회의"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의 배경에는 당시 상당히 열악했던 니혼대학의 상황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전후 베이비붐으로 인해 학생 수가 급증했고 이러한 상황에 발맞춰 니혼대학은 10년새에 정원을 3배로 늘려 버렸다. 1955년 당시 3만명이었던 정원이 1968년에는 8만명으로 뻥튀기된 것. 그러나 학내 시설이나 교직원 수는 제자리걸음 수준이었고 이에 대해 학생들의 불만이 상당했다고 한다. 결국 프랑스의 68운동 발발 원인과 똑같은 맥락이다.

결국 일대전공투는 학생과 대학 당국의 단체 협상인 "대중단교(대중단체교섭)"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와중에 체육회 학생들이 일본도를 들고 난입했다. 유혈사태를 진압하려 나타난 경찰 기동대가 폭력학생은 놔두고 전공투 학생들만 우루루 패서 잡아가는 사건을 일으켜서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참으로 웃겼던 게 전공투 학생들은 처음에 경찰이 나타나자 "경찰이 폭력배들을 잡으러 왔구나" 하고 박수를 치다가 경찰이 자기들을 때려잡자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법학부, 경제학부, 문리학부, 상학부, 예술학부, 공학부 등이 차례로 바리케이드 봉쇄에 들어갔다. 참고

도쿄대학에서는 의학부에서 인턴제도 폐지와 등록의 제도 설치에 반발하여 분쟁이 일어났는데 학생들은 의학부 전공투를 결성하고 1968년 1월 무기한 스트라이크(학생에 의한 대학 휴업, 농성)를 선언했다. 그런데 1달 뒤 학교 직원들과 실랑이가 벌어지다가 학교 간부 몇 명을 감금한 것이 문제가 되어 17명의 학생들이 제명 처분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이들 중 현장에 없던 학생까지도 억울하게 제명되면서 요주의 학생을 고의로 처분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게 된 것. 그러나 학교 당국은 처분을 취소하지 않았고 상황은 악화되었다. 결국 학생들은 6월에 야스다 강당을 점거했는데 문제는 여기서 대학측이 경찰 기동대를 출동시키는 강경책을 썼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의학부를 넘어서 모든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공분을 사게 되었고 전공투가 각 학부로 확대되고 신좌익 분파가 합류하여 야마모토 요시타카를 의장으로 하는 동대전공투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타 대학에도 바리케이드 봉쇄 및 스트라이크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2.3. 전개[편집]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학생 단체들의 연합체"를 모토로 했기 때문에 최대의 장점은 각 단체간 소통이 원활했다는 것이다. 전학련 시대처럼 중앙회의에서 결정난 것을 불복할 수 없다는 단점도 없었고 얼마든지 이의가 있으면 집회에 참가하여 단체 단위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매력으로 인해 기존 학생운동과 상관없는 독자적인 학생운동 그룹의 학생들도 가담하는 경우가 생겼다. 일본에서 "나도 젊었을 때 학생운동 좀 했었지" 하는 아저씨/할아버지들의 이야기가 대부분 이때의 이야기다. 이로 인해 정치적 스탠스는 한국의 86세대와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일각에서는 전학련/전공투를 전대협/한총련에 비유하기도 한다. 전자가 학생 시대에만 빡세게 운동하고 졸업 후에는 대기업의 요직을 거치거나 기성정당의 정치인으로 거듭났다는 점, 후자는 급진주의적 과격투쟁을 일삼다가 망하게 됐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는 하는데 전공투가 전학련의 수직적 질서나 기존 학생운동의 고루한 습관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나왔다.[7]

또 전공투는 이전의 학생운동의 소극적이고 타협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바리케이드 봉쇄라는 강력한 방식을 도입했다. 본관 건물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해 버리고 강사 및 직원의 출입을 막아버리는 방식을 택한 것. 또한 사상적으로도 "대학분쇄"나 "자기부정"이라는 이야기로 현대 산업사회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사회의 변화에 대한 대안을 고민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때까지 학생은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었고 정치 단체나 정당에서도 학생은 그다지 중요한 계층이 아니라고 평가했는데, 이들이 물리적이든 비물리적이든 직접행동에 나선 것. 전통적인 좌파 사상에 의하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기층민중, 다시 말해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하부 계층인데 학생은 이러한 계층에 속하지 않는다. 잘 봐 줘 봤자 부르주아로 진입을 앞두고 있는 인텔리겐치아인데 이들이 자기 자신의 특권을 버리고 자본주의 재생산의 메카니즘에서 뛰어나오자고 한 것이다.

초기에는 앞서 말했듯 그 특유의 자유로움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 학생 사회에서도 드디어 제대로 된 단체가 나왔다는 평가를 받았고 심지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일본 대학들의 운영진에서도 이제 우리가 이야기를 좀 들을 시점이 온 것 아니냐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심부를 차지하려는 몇몇 단체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인해 점점 한쪽으로 치우친 의제만 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운동 사회에서는 국제연대/협력이 중요한 모토였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 반대라든가 하는 의제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점점 극좌주의적 구호들(사회주의 국가 건설, 무장투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 일본은 극좌부터 극우까지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고 한국보다는 사상에 대한 맹종이 덜 심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논 포리(비정치성향) 학생들이 대거 빠져나가게 되었고 "강력한 투쟁의 중심세력 건설"이라는 모토로 결집을 유도하고 수직적인 구조를 다시 도입하게 되자 논 섹트 학생들까지 빠져나갔고 결국 다시 몇 년 전의 전학련이 되어 버렸다.

전학련 자체는 1960년대 초반 이후 신좌파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약칭 혁공동)의 산하 조직 일본마르크스주의학생동맹이 장악했고 혁공동은 국제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따르고 있었다. 이 중심부를 이루고 있던 파벌이 일명 "중핵파"인데 이들은 사회주의학생동맹(사학동), 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과 함께 "3파 전학련"을 결성했고 1960년대 초반 학생운동의 대부분을 장식했다. 이런 자들이 전공투 성립 이후 전공투운동에 끼어들게 되면서 막장으로 흐르고 결국 도로 전학련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결국 과격파로 불리는 집단만 남은 것. 아니, 그때보다 더 강력한 무장을 통해 더 답이 없게 된다.

전공투가 그 정점에 도달했던 1968~1970년에는 한 번 움직이면 공성전을 벌일 수 있는 단체로 유명했다. 가끔 1960년대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1968년 10월 1일의 국제반전데이에 벌어진 신주쿠 소란사건도 이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국제 반전데이 집회에 전공투를 비롯해 심지어 비 정치적인 학생들까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나 싶어서 나왔다가 시위군중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난 것. 경찰은 이때 시위대에게 심야소란죄를 적용했다. 쉽게 말해 도쿄 중심가가 일시적으로 경찰 계엄령 상태에 돌입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 신주쿠 소란사건 당시 출동한 경찰 기동대원들 중에서 성우로 유명한 와카모토 노리오가 있었다.

한편 신주쿠 고등학교에선 학생 3명이 바리케이드를 세웠는데 이때의 3명 중 한 명이 사카모토 류이치이다.

당시 신주쿠 소란사건의 영상.

앞서 말했듯 전공투의 장점은 각 연합체간의 원활한 소통이었는데 바꿔 말하자면 이게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할 때가 있었다. 바로 확실히 정해진 사령탑이 없다는 것. 이게 유사시에 큰 위기가 닥쳤을때는 오합지졸끼리의 이합집산만을 거듭하는 결과를 낳게 되어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다. 심지어 전공투 내부에서 정확히 어떤 단체인지 파악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아무나 단체를 만들고 대충 이름을 그럴싸하게 지어서 "우리도 전공투 일원"이라고 하면 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영화 박치기!에 나오는 장면 중 주인공들이 아무 대학이나 가서 "우리는 아리랑 해방전선이라고 하는데 투쟁기금이 필요하니까 쇠파이프랑 각목 좀 사줘"라면서 학생운동가들에게 쇠파이프를 파는 장면은 바로 이런 것에 기인한 것이다.

심지어 1968년 이후 전공투 운동방식은 고등학생재수생들까지 퍼져서 고등학교 전공투와 전국재수생공투회의까지 결성되었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오사카부고교생연합이나 반전고교생협의회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공산주의자동맹이나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같은 신좌익 파벌의 고교생 조직이었지 전공투는 아니었다. 당시 고등학교에서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전공투들이 결성되었는데 경우에 따라서 69에 나오는 것 처럼 허무맹랑한 경우도 있었고 고교생 학생 운동의 주축이 되었던 경우도 있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신주쿠 고등학교 재학 시절 신주쿠고교 전공투에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2.4. 결말[편집]


일단은 공동의 목표를 목적으로 한 "공투회의" 였지만 동상이몽 내지는 오월동주라고 부를 만큼 내부 노선 차이가 심했다. 대중집회가 열린다고 해도 각 파벌의 차이 때문에 무슨 그룹은 참여를 안하거나, 심지어 무슨 그룹은 경찰쪽으로 상대 파벌을 유도하는 등 그야말로 개판인 경우가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공투회의 자체가 집단간의 연합체였다 보니 공투회의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싸움이 계속되어 몇몇 학교의 전공투들은 그대로 중핵파혁마르파의 산하단체로 변질되어 버리는 등의 일이 발생했다. 게다가 정말 중요한 순간에 특정 파벌이 이탈하는 경우도 생겼다. 대표적으로 도쿄대 야스다 강당 투쟁 당시 혁마르파중핵파, 사청동해방파 등이 전원옥쇄를 결의할 때 "전력보존"을 이유로 농성장을 이탈해 버렸다. 이들이 줄지어 퇴각할 때 나머지 파벌이 쌍욕을 퍼부은 것은 안 봐도 비디오.

결국 전공투 와해 이후 학생운동에서는 내부투쟁(内ゲバ; 우치게바)[8]을 거듭하면서 학생운동은 점점 세력이 약해졌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다양한 사상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도 엄청 다양하게 공개적/비공개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스탈린주의를 이야기하는 분파, 트로츠키주의 중 직접행동/도시게릴라 전술을 전략으로 삼은 분파(중핵파), 역시 트로츠키주의지만 대중운동 및 사상교양을 주 전략으로 삼은 분파(혁마르파), 아나키스트들(흑색분트), 마오주의자들(일본공산당 내 혁명좌파나 연합적군 일부), 호자주의자들 등등 정말 많은 분파가 있었다.[9] 이러한 다양한 단체들이 사회변혁의 역량을 집중시킬 필요를 느껴서 결집한 움직임이 전공투인데 내부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싸운 것. 그런데 문제는 이들은 범죄조직이 적대 조직 조직원들 습격해서 살해하듯이 실제로 상대 파벌을 납치, 살인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사용된 무기들의 사진. 일본도식칼에 주목. 당시 중핵파에 의해 살해당한 혁마르파 멤버들의 사진.

일부 테러리스트화한 집단은 테러를 주 수단으로 삼아 투쟁하다가 와해되기도 했다. 1971년에는 적위군이라는 공산주의 단체가 자위대 기지에 침투해서 자위대원을 식칼로 살해하는 사건까지 터졌다.

테러리스트화한 집단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적군파로 불리는 일본 연합적군이다. 연합 전 적군파와 혁명좌파(게이힌 안보공투)로 각자 따로 놀 때도 총포점 강도 및 그 엽총을 이용한 무장강도 등 싹수가 노랬으며 연합 이후로는 무단으로 캠프를 이탈한 멤버를 배신자랍시고 살해하거나 총괄이랍시고 애먼 트집 잡아 서로 인민재판하고 죽이는 등 아주 가지가지 했다. 연합적군은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 마지막 연합적군 세력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사라졌다.

종종 이러한 테러리스트화한 집단이나 삼파전학련을 전공투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어서 "전공투는 과격투쟁을 일삼다가 검거되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공투는 연합적군이 검거되기 전에 이미 거의 와해되었다. 전공투는 각 대학의 각 주요당파의 연합체에 일반학생에 다수 참가한 형태로 특정한 사상이나 조직,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경과의 전개, 형태와 평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당시 가두 투쟁을 행했던 삼파전학련이나 그것을 지도했던 공산주의자동맹,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신좌파의 여러 당파와의 관계도 활자화된 기록이 중심이다. 또 삼파전학련과 전공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당사자도 존재한다. 아사리판이 따로 없다.

사실상 1969년 말쯤 되면 전공투는 중핵파, 사학동, 공학동 등 8개의 신좌익 당파가 장악한 "실질적인 당파 공투" 내지는 "캄파니아[10] 조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전공투가 남은 학교는 꽤 있었지만 앞서 말했듯 전공투는 단체간의 연합체였으므로 소멸 시점은 각 전공투마다 차이가 있다. 일단 도쿄대와 니혼대 전공투는 1969년 9월 5일 전국 전공투대회 때 동대 전공투 회장 겸 전국 전공투 의장인 야마모토 요시타카와 일대 전공투 회장 겸 전국 전공투 부의장인 아키타 아케히로가 검거된 이후 급속도로 쇠퇴해서 소멸했다.

게다가 계속되던 대학 내 분쟁에 대한 대책으로 유사시 교육부 명령으로 대학 전체의 업무를 중단시킬 수 있는 "대학 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국회가 통과시켰다. 이렇게 되자 대학 내부의 문제를 내부에서 자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대학 자체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대학 구성원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결국 1969년 9월부터 대부분의 학교에 경찰 기동대가 출동했고 대부분의 바리케이드 봉쇄는 해제되었다.


2.5. 이후[편집]



삼파전학련의 내부 세력간 투쟁이 잘 드러나 있는 영상. 홍위병이 따로 없다.

전공투가 거의 와해 단계를 밟아가던 1970년대에는 주로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투쟁에 공성전을 담당하러 출전하기도 했다. 허나 이 시기에는 거의 다 망해 가는 단계였기 때문에 극히 일부만이 연대했을 뿐 오히려 전학련 세력이나 급진세력(중핵파 등)이 활발하게 연대했다. 애초부터 전공투는 학생 기구였고 학생 스스로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1970년 이후 전공투라고 불릴 만한 조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전공투 자체가 각 정파나 집단의 "공동투쟁 위원회"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실상 더 이상 모여서 할 일이 없었던 것. 1980~90년대의 일본 학생운동은 환경운동/시민운동이 중심이었고 과격한 투쟁은 가뭄에 콩 나듯 보일락 말락 한 수준이다.


해당 영상
참고로 일본 과격파 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게 나리타 투쟁. 국가의 일방적인 토지수용에 따른 지역 농민들과의 분쟁이 시발점이었다. 여기에 삼파전학련/전공투/사회단체/환경단체/반전단체 등이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공성전이 개시되었다.


2008년 일본에서 열린 니혼대학 전공투 회고 사진전 영상
일본에서도 전공투는 역사의 한 페이지,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어 버렸다.

전공투의 이상이 좌절된 이후 이들 전공투 세대가 서브컬쳐 계열을 이끌었다는 분석도 있다. # 전공투 세대가 서브컬쳐에서 은퇴하기 시작한 2000년대부터 서브컬쳐의 우경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의견도 있다.

아베 퇴진 시위를 이끌던 세력도 과거 전공투 세대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전공투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급진좌파[11] 단체들은 전공투 운동이 패배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중핵파, 혁마르파 등이 지금까지 남아서 활동하는 단체들이다.

3. 구성 및 성향[편집]


직접민주주의에 의거해 조직이 운영되며 개개의 주체가 주체적으로 결의하고 책임지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처음에는 대학 내 여건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스케일이 커지면서 개별적 대학분쟁으로 확대되었다. 1960년대 말에는 반정부 투쟁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렇게 중앙의 컨트롤 타워가 없었던 게 전공투의 실패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성향과 노선이 끝없이 분열한다. 이미 대학끼리도 다른 파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내부에서도 분열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대학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시위 목적이 전치되어서 무엇을 위해서 건물을 점거하고 시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건물 점거와 시위가 목적이 되어 버렸다.

당시 전공투는 대학 내부에서 어떠한 정파에 가담하지 않는 비 정치적인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구성된 것부터 공산주의자 동맹(분트)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 중핵파혁마르파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 등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논 섹트 레디컬과 각기 다른 정파가 연합한 공동 투쟁 회의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1년 사이에 국립대학 75개 중 68개교가, 공립대학 34개 중 18개교가, 사립대학 270개 중 79개교가 가담했으며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는 전국 대학의 8할이 전공투에 의해 투쟁 상태에 있었다.


4. 특징[편집]


독특한 시위 모습으로 유명하다. 흔히 한총련의 시위가 과격하다고 말하지만 전공투의 시위와 비교하면 정말 저리가라다. 주로 쇠파이프를 무기로 사용했고 화염병도 사용했다. 모든 구성원이 눈에 띄지 않는 청바지나 간편한 셔츠 차림을 하고 있어서 언뜻 보기엔 제복처럼 보인다. 이는 한국의 8, 90년대 운동권들도 공통된 사항이었다. 가두 투쟁에 쉬운 복장이자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쉬운 복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머리에는 방어를 위해 공사장 헬멧을 착용한다. 더불어서 선글라스와 마스크도 착용한다. 조직적으로 돌격하며 심지어 공성 망치로 저지선을 뚫는다. 이 정도면 거의 전문 시위꾼이다.

사실상 극좌 성향이다. 보수대연합으로 탄생한 집권 자유민주당(일본)은 물론이고 사회주의 정당에서 출발한 제1야당 사회당, 심지어 당강령에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명시한 일본공산당까지 보수 정당으로 규정할 정도였다. 일본공산당 청년조직인 민청은 야스다 강당 점거농성 당시 학생들에게 "점거를 풀라."며 학교 측에 붙기도 했다.

이들을 가리키는 '신좌익'이라는 말도 일공, 즉 구좌익(사회당, 공산당) 세력에 대비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런 경향을 바탕으로 우파, 민청(일본 공산당 학생위원회), 기동대, 언론으로 삼았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1998년 창당한 청년진보당과 그 후신인 사회당이 당시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이 주도한 민주노동당보수정당이라고 공격하면서 어떠한 선거연대나 공동투쟁도 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했던 PD계(평등파)가 더 이상 세력확장을 하지 못하고 조직적으로 입당한 NL 주사파들한테 머릿수에 밀려 사실상 당을 빼앗긴 이유 중 하나는 사회당 같은 범좌파그룹들이 이들을 외면한 것이다. 이들은 노동당으로 존재하고 있다. 사회당의 영향을 받은 전국학생회협의회(약칭:전학협)도 이런 경향이 강해서 매년 범좌파 학생운동의 공동주도로 이루어지던 430투쟁대회가 2개로 쪼개지는 경우도 생겼다.

사실 공산당과 신좌파 간의 대립은 유럽에서도 있었던 경향이다. 이들을 가리키는 '신좌익'이라는 말도 일공, 즉 구좌익(사회당, 공산당) 세력에 대비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런 경향을 바탕으로 우파, 민청(일본 공산당 학생위원회), 기동대, 언론으로 삼았다.

일본의 1960년대 서브컬쳐를 다룬 작품들을 보면 이러한 전공투의 특징에 대한 깨알같은 패러디들이 등장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공투 자체가 자기들만의 이러한 패션 코드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벌별로 바리에이션이 엄청 많다. 예를 들자면, 중핵파는 흰색 헬멧에 '중핵'이라고 적혀 있었으며 중핵파와 대립관계에 있던 혁명적마르크스주의파(줄여서 혁마르파. 일본어로는 카쿠마루(革マル派).)는 붉은 헬멧에 "Z"를 새겼다[12]. 그리고 당시 사회당의 하부조직이었던 "사회주의 청년 동맹"의 분파 "사청동해방파"는 파란 헬멧에 "반제학평(반제국주의 학생평의회)"이라고 적혀 있었다. 심지어 검은 헬멧을 착용한 아나키스트들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어쨌거나 깨알같은 패러디 떡밥이 많이 존재하는 단체다.

각 분파별 헬멧 모양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전공투에서도 극렬 과격파였던 여러 조직들(혁마르파, 중핵파, 적군파 기타 등등)이 테러나 내분 등의 살인 행각 등 아주 거하게 똥을 싸 주신 덕인지 일본 창작물에는 가끔 저런 전공투 패션의 테러리스트가 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특유의 튜닝한 공사장 헬멧을 쓰고 점퍼에 청바지 혹은 작업복 상하의를 걸친 것까지는 같지만 거기에 총기가 추가된 식. 게임 세이기노 히로, SIMPLE 2000 시리즈 중 하나인 THE 일본특수부대 ~흉악범죄 열도 24시~~(THE 日本特殊部隊~凶悪犯罪列島24時~), 그리고 정식 게임은 아니지만 배틀필드 1942의 일본 유명 MOD인 방위대MOD 등.

바더 마인호프와 마찬가지로 하위 분파였던 적군파와 함께 일본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코드이기도 하다. 가장 깊숙히 관련된 감독으로는 적군파와 관련이 있었던 와카마츠 코지가 있다.

플래카드나 피켓 등의 글씨를 굉장히 독특하게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비단 전공투뿐 아니라 전학련 등 당대 일본의 다른 운동권 단체들도 이런 글씨를 선호했다. 보통 '운동권 글자'란 뜻의 '게바지'(ゲバ字)라고 불린다. 한국의 신영복체처럼 진보·좌파를 상징하는 글씨체라고 볼 수 있다.


5. 미시마 유키오와의 대담[편집]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603310896_01.jpg

전공투는 도쿄대학 점거 와중에 미시마 유키오를 초청해 일대 논전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69년 5월 13일 1천여 명의 전공투 학생들이 모인 도쿄대학 교양학부 900번 강의실에서 전공투 측 패널들과 미시마 유키오는 2시간 반 가량 대담을 가졌다. 미시마 유키오가 몇 백 명의 전공투 학생들을 상대로 혼자 설전을 펼쳤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고 실제로 대담에 참여한 것은 전공투 측의 패널 3-4명과 청중 중에서 발언한 몇 명 정도이며 대담집에 실린 전공투 측 발언자는 도합 8명이다. 이 대담의 의의를 확대해석하면 안 되는 것이, 위계나 고정된 조직이 없다는 전공투의 특징 상 이 대담도 논-섹트, 즉 아무 분파에도 속하지 않은 몇 명의 학생들이 거의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내 미시마 유키오를 섭외하고 입소문으로 청중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이 대담에서 패널로 나온 학생들이 어느 정도까지 전공투의 사상을 대표하는지는 비판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안 그래도 사상 분열과 내부 투쟁으로 계파가 천 갈래 만 갈래였던 전공투이다 보니...

극우극좌가 만난 거라 분위기가 험악했다고 짐작할 수 있지만 미시마 본인도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한 선배이기도 하고 서로가 일본의 현체재를 부정한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하면서 묘한 공감대를 보이면서 대체로 유쾌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미시마 본인도 이 대담이 매우 즐거웠다고 대담 후기에서 언급하고 있고 자신이 만든 극우 조직인 다테노카이의 측근에게 "동경대생들이 머리가 좋더라"고 회상했다고 한다.

양쪽은 자아와 육체, 시간과 공간, 천황의 역사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철학역사를 두루 포괄하는 등 진지한 논쟁을 벌였다. 일단 양쪽 모두 기성 체제에 대한 염증과 분노를 공유하고 있었고 기존 체제를 타도하기 위한 폭력의 불가피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토론 내내 각자의 가치를 역설하고 서로를 논파하는데 주력한다. 이 과정에서 상호 간에 회유내지는 야유의 의미가 담긴 말이 많이 오고 갔다. 예컨대 미시마 유키오가 "당신들 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잖아?"라고 운을 띄우자 이에 전공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바리케이드 속으로 들어오면 되잖아?"라고 받아쳤다. 사실 미시마 유키오와 도쿄대 전공투 사이의 가장 큰 갭은 천황제가 아니라 국제주의였다. 당시 절대적인 실존적 행동을 믿는 방식은 미시마 유키오나 전공투 구성원들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미시마는 우익답게 "민족적 자존을 잃어서는 안되고 외세의 영향력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입장이었고 전공투는 국제사회의 혁명적 연대를 믿었다. 결국 미시마 유키오는 "나는 제군의 열정을 믿습니다"라고 나름 덕담(?)을 건내면서도 결국 "지금 제안은 아주 묘한 꼬드김이라 아주 유혹적이지만, 나는 공투(공동투쟁)을 거부합니다."라는 말로 토론을 마무리한다.

이 대담은 TBS 테레비에서 현장을 녹화, 방영했고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현재에도 당시 영상은 남아 있지만 TBS의 저작권 침해 신고로 유튜브에서는 찾기 어렵다. #전공투의 증언으로는 대담집 출판은 미시마가 혼자 결정하고 진행한 일이라고 한다. 이 대담집은 한국에서 <미시마 유키오 對 도쿄대 전공투 1969-2000>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사실 두 권의 책을 합한 것으로, 1969년의 대담집과 1999년에 당시 전공투 측 패널이었던 인물들이 30년만에 다시 모여 이틀간 진행한 토론을 책으로 엮은 것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다소 현학적인 내용이지만 전공투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일독을 추천한다.

1969년의 대담을 읽으면서 유념할 부분은 당시 전공투 운동을 둘러싼 시대상이나 그들의 정신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돕는 르포르타주로서의 의의는 있지만 사상적 가치는 그리 높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 대담이 읽기 난해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참여한 전공투 측 패널들이 20대 초반의, 말하자면 "이데올로기 오타쿠"들이다 보니 이들이 하는 말이 상당히 "오타쿠"스럽다. 예컨대 디시인사이드 구 정사갤이나 야갤에 올라오는 밈으로 도배된 글들을 일반인들이 알아먹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자기들끼리만, 또는 자기 혼자만 아는 개념이나 용어로 말을 할 때도 다들 그러려니 넘어가다 보니 가만 보면 심지어 미시마 유키오도 못 알아듣고 문맥을 놓치는 부분들이 있다. 대화의 지적 수준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난해함을 심오함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 대담이 이루어지고 1년 후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는 자위대 본부를 점거하고 할복으로 자살하는 미시마 사건을 일으켰다. 일각에서는 이 대담에서 이미 미시마의 자결이 예견됐다고 본다. 다음은 미시마가 토론 도중에 했던 발언이다.

내가 행동을 벌일 때는 결국 제군과 똑같이 비합법적으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합법적으로, 결투의 사상으로 사람을 죽이면 살인범이니까, 경찰들한테 잡혀가기 전에 자결이든 뭐든지 해서 죽어버릴겁니다.


<미시마 유키오 對 도쿄대 전공투 1969-2000>에 실린 1999년 토론회에서 30년만에 다시 모인 전직 전공투들이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을 회고하는 대목은 괴이하게도 이들이 미시마의 죽음에 순교자를 대하듯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기다 이들이 일본의 현안을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 전공투가 왜 그렇게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렸는지를 참 잘 이해할 수가 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던 1969년의 대담은 그렇다 쳐도 30년이 지나 이데올로기 시대가 끝나고 일본 버블 경제의 팽창 및 소멸, 장기 불황, 민주주의의 쇠퇴, 급속한 우경화, 역사 왜곡 등등 현안이 산적한 1999년의 시점에서도 현실 인식과 역사 인식에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이를테면 20세기가 몇 달 안 남은 시점에 그것도 우익 인사도 아닌 전직 전공투가 이시와라 간지의 사상에는 여전히 배울 부분이 있다느니, 오족협화에는 대동아공영권과는 구분되는 긍정적 요소가 있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참배 문제, 식민지 시절에 대한 사죄와 배상 문제, 따위는 한 마디도 안 나온다. 1990년대 후반 전세계를 덮친 금융 위기에 대해 논할 때는 공무원이 된 다른 전직 전공투가 그것은 전공투 세대의 잘못이 아니라 10년 쯤 윗세대인 안보 세대의 책임이라고 한사코 강변한다. 그 근거는 8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당시 전공투 세대는 35살 정도로 발언력이 별로 없었고 45세 정도였던 안보 세대야말로 정부와 기업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란다. 왜 하필 80년대 중반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전공투의 추억을 지키기 위해 공무원 논리를 끌어온 셈이다. 전공투의 가장 추악한 기억인 연합적군의 산악 베이스 사건에 대해서도 전형적인 "일부의 잘못" 논리로 비켜간다. 심지어 한 명은 당시 살해당한 사람들과 살인범들을 구분하지도 않고 뭉뚱그려 "그들(연합적군)도 일종의 피해자들"이라고 말한다.

6. 관련 인물[편집]


일본의 예술, 문화 분야에 전공투 출신이거나 다리를 걸쳤던 인물들이 꽤 있는데 전공투 활동을 한 사람들을 제대로 된 회사에서 취업시켜 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예술, 문화 쪽으로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두고 전공투 세대가 80년대, 90년대의 일본 문화의 붐을 이끌었다는 소리가 도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예술은 재능이 중요한데 재능도 없이 들어가서 일해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낼 리가 없다. 문화, 예술계로 들어갔던 전공투 출신 인물 대부분은 별 실적 없이 잊혔으며 아래의 인물들은 재능도 갖추고 있어 살아남은 인물인 것이다.[13][14] 그리고 애초에 자신이 전공투였단 걸 밝히는 게 이미지나 경력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크게 성공해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면 평생 숨기고 산다.

  • 간 나오토: 정확히 전공투는 아니었지만 전공투 시대에 논 섹트 래디컬 그룹의 리더로 활동했다.
  • 사카모토 류이치
  • 사사키 마모루
  • 기타노 다케시: 전공투 운동을 하다가 대학에서 제적되었다. 본인은 친구랑 같이 놀다가 이름이 올라가서 그렇게 된 것이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고 말년의 사상은 좌익과 거리가 있지만 전공투란 게 경력의 흠집이라 변명하는 거라는 소리도 있다.[15]
  • 니이타니 마사미츠: 전공투 운동을 하다가 대학을 중퇴했다.
  • 소다 히로히사: 내분이 싫어서 그만뒀다고 한다.
  • 시오자키 야스히사
  • 야마모토 요시타카
  • 아키타 아케히로
  • 야스히코 요시카즈: 기동전사 건담 디 오리진에서 그의 전공투 시위 선동 경험을 토대로 새벽의 봉기를 묘사했다.
  • 오시이 마모루: 전공투와 같은 세대이며 전공투의 사상에는 동조했으나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전공투의 활동이 끝날 때까지 집에 감금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좌익 사상은 변함없지만[16] 전공투에 대해서는 "그런 짓을 했으니 망해도 할 말이 없다."고 코멘트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 무라카미 류


7. 관련 단체[편집]




8. 관련 사건[편집]




9. 관련 창작물[편집]


  • 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일본 문학 작품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소설에는 이 시기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 영화 도쿄 전쟁 전후 비사
  • 영화 실록 연합적군
  • 영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 작중 등장하는, 인간에 대항한 너구리들의 개발반대투쟁과 그 결말은 전공투 세대 일본 학생운동의 전개와 몰락을 직접적으로 빗대고 있다.
  • 만화 메두사 - 카와구치 카이지 작. 초반에 야스다 강당 투쟁을 모티브로 한 내용, 전공투와 민청(만화에서는 "민개파")의 대립 등이 나온다. 신주쿠 소란사건은 거의 그대로 나온다.
  • 록 밴드 두뇌경찰
  • 소설 남쪽으로 튀어 - 오쿠다 히데오 작. 주인공 우에하라 지로(上原二郞)의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上原一郞)와 어머니 우에하라 사쿠라(上原さくら)[17]가 전직 전공투이며 1권에서는 아버지의 후배격인 아키라 아저씨가 등장한다. 이쪽은 여전히 현역. 친절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웃으면서 주인공을 괴롭히던 일진을 어루만져서 뼈를 부러뜨려버릴 때부터 만만치 않은 사람임을 보여주는데 나중에는 우치게바 작업에도 투입되었다. 우치게바 때는 반대 분파의 간부를 응징하기 위해 섬광탄(!!!)까지 구해다가 까 넣고 돌입해서는 쇠파이프로 발라 버린다. 우치게바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보아 신좌파 조직에서 테러, 게릴라, 우치게바 등의 범죄활동을 도맡아 처리하는 비공식 활동가(非公然活動家)[18]로 추정된다. 근데 이 아저씨 많이 불쌍하다. 지로를 괴롭히는 일진을 응징하는 건 물론 개인적인 일이었지만 섬광탄과 쇠파이프는 자신이 속해있는 분파의 리더가 세력다툼을 위해서 경쟁 분파에 테러를 가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 인랑 - 설정으로는 전공투와는 무관하지만 사실상 도심 게릴라와 경찰 부대의 싸움은 각본을 써 준 오시이 마모루가 기억하는 전공투와 경찰의 대립을 극단적으로 상상한 것에 가깝다. 아예 작중에 등장하는 테러리스트 집단의 이름부터가 전공투 분파를 의미하던 단어인 "섹트"다.
  • 게임 배틀필드 1942의 일본 유명 MOD인 "방위대 MOD(FHDF)" 에서 "침략자" 세력 중 하나로 전공투 내의 과격파 조직들(파벌 이름은 혁마르파, 헬멧은 적군파 및 중핵파)을 오마주한 "붉은 바람(赤い風)" 이라는 조직이 등장한다. 설정상으로는 학생운동조직 내 소수의 울트라 과격파라는데 소수 치고는 엽총은 물론 일본군 무기(그것도 남부 권총에 수류탄)도 모자라서 입수 루트는 또 어떻게 구했는지 군용 기관단총에 저격총까지 밀수해다가 쓴다. (멀티 전용 맵에 숨겨짐) 하긴 이 MOD의 일본은 적화통일된 한반도의 조선인민군이 일본 본토를 레이드 올 정도로 개판이니....
  • 닌자 슬레이어에 등장하는 극좌파 닌자 조직 "잇키 우치코와시"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특히 공사장 헬멧을 뒤집어쓴 닌자 의상은....
  • 영 블랙잭의 마지막화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
  • 하츠노 세이의 하루치카시리즈 2권인 <첫사랑 소믈리에>에서 세리자와 나오코의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인용된다.
  • 막스의 산(マークスの山: 마크스의 산): 1995년 개봉된 다카무라 카오루 원작, 최양일 감독의 영화. 형사 나가이 키이치와 정신과의 오랜 감금환자 및 범인 하기와라 마사토(맨 처음에 언급되므로 스포는 아니다.), 그리고 그의 연상 애인이자 정신과 간호사 나토리 유코가 나오는 사회파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범인은 약 10여년 전에 있었던 전공투의 핵심인물 5명을 천천히 살해하는데 그 5명의 이름의 앞자리를 모으면 MARKS(막스)가 된다. 이 영화에서 전공투는 매우 격렬하고, 파괴적이며, 심지어 MARKS의 어디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전공투 동료를 정신병원에 감금을 시키기까지 한다. 앞에서도 언급된 '우치게바'라는 단어가 영화 내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이 단어를 안다는 것은 본인들의 살인이나 감금을 안다는 의미이며, 또한 현재의 부와 명예를 모두 없애버릴 수 있는 키워드가 되는 지라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다.
  • FA프로 AV 작품들 중 헨리 츠카모토 감독의 작품들(...)
  • 빙과(소설) - 여기서는 학생 운동의 한계 및 그에 의한 희생자의 삶을 파헤치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 기동전사 건담 디 오리진새벽의 봉기
  •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신 OVA '불의 7일간': 전공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특차2과 정비반의 파벌간 이합집산을 전공투 사태에 비유해 아주 코믹하게 그려낸 에피소드.
  • 태양의 엄니 다그람: 타카하시 료스케가 학생운동 쪽에 관심이 생겨 전공투 관계자를 취재해 만든 작품[19]이라고 한다. 다만 전공투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니고 베트남 전쟁, 쿠바 혁명, 전공투를 섞은 작품이다.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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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은 ''가 맞으나 사진에는 ''라고 적혀 있다. 독음은 같다.(뜻도 비슷하다.)[2] 여기서 '대학 분쇄'란 '대학을 없애자'가 아닌 '대학의 불합리한 제도를 없애자' 쪽에 더 가까운 의미이다.[3] 68혁명[4] 전공투가 완전히 와해된 반면 이들은 아직 조직이 살아 있다.[5] 전학련까지만 해도 스탈린주의적인 위계질서 정연한 일국사회주의를 긍정하는 분위기가 많았다.[6] 팔을 넓게 벌리고 손을 맞잡아 도로를 점거하여 행진하는 시위. 1960년대 안보투쟁 당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적은 인원으로 도로 점거를 할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프랑스랑 별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프랑스인들이 도로를 점거하는 시위를 하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당시의 사진 청바지와 캐주얼한 셔츠, 안전모까지 완벽한 전공투 패션이다.[7] 전대협은 전학련처럼 타협적인 방식으로 나아갔고 그 덕분에 보수 정부에서도 시위를 막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총련은 그 전대협의 스탠스가 맘에 안 든다고 태재준 의장을 감옥에 보내 전대협을 해체시키고 한총련을 만들자마자 연세대 사태라는 대형사고를 쳤다. 김대중은 연세대 사태에서 한총련의 해산을 요구했지만 도리어 한총련에게 비난받고 북한의 살해 위협까지 받으면서 이례적으로 안기부가 새정치국민회의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을 정도로 한총련은 초강경했고 김대중은 이때 계기가 되었는지 대통령 당선 이후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지정하여 씨가 마르도록 탄압했다.[8] 우치(內; 내부) + 게바(Gewalt; ゲバ; 싸움)[9] 재수생 분파나 고등학생 아나키스트 분파가 있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10] 캠페인의 러시아어 발음. 사회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조직운동을 의미하며 북한에서도 캠페인 대신 깜파니아라는 단어를 쓴다.[11] 일본에서는 이들을 '신좌파'라고 부른다.[12] 흰 헬멧에 붉은 줄에 Z를 새긴 바리에이션도 존재하는 듯하다.[13] 타카하타 이사오, 미야자키 하야오, 토미노 요시유키 같은 사람들을 전공투 관련자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단순히 사상이 우익과 거리가 있을 뿐이며 전공투의 활동이 한창이었을 때는 이미 업계에 취업해서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딱히 관계가 없다.[14] 특히 애니메이션은 1950년대 전후 출생의 전공투 세대보다는 우주전함 야마토, 기동전사 건담, 시끌별 녀석들을 보고 애니메이션 업계에 들어온 1960년대 출생의 일명 '1세대 오타쿠' 세대가 품질 향상에 더 크게 기여했다.[15] 상당히 폐쇄적이었던 전공투가 아무 상관도 없는 인물의 이름을 올려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16] 일본 정부가 전복되고 도쿄가 불바다가 되는 걸 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 생각은 이후로도 변함 없으며 자신의 작품에 폐허가 많이 나오는 건 도쿄가 불바다가 되는 걸 못 본 아쉬움 때문이라고 한다.[17] 결혼 전 성씨는 호리우치(堀內). 오차노미즈여자대학 졸업. 대학 시절 '오차노미즈여대의 잔 다르크'로 불릴 정도로 학생운동에 열심이었다.[18] 간첩으로 비유하자면 블랙 요원[19] 타카하시 료스케는 전공투와 무관하며 자신의 사상은 어느 쪽에 쏠리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전공투가 왜 저러는가 궁금해서 취재를 해 봤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