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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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북한 국기.svg 평양시의 종교시설

파일:북한 국장.svg
조선카톨릭교협회
장충성당
長忠聖堂
Changchung Cathedral

}}} ||

파일:external/www.minjog21.com/3112_9088_3729.jpg

▲ 장충성당의 모습
설립
1988년 10월
종교
[[가톨릭|

파일:75px-Christian_cross.svg.png 가톨릭
]]
소속
조선카톨릭교협회
주소


장충성당}}} (평양시 선교구역 장충1동)
1. 개요
2. 특징



1. 개요[편집]


북한의 종교시설. 평양시 선교구역 장충1동에 있다.[1]

1988년 건립된 가톨릭 성당. 1934년 선교리 성당이 건축된 자리이나 1949년 김일성 정권이 폭파시킨후 방치 되었다가 1989년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앞두고 급조해서 건축한 현재 북한에 존재하는 유일한 가톨릭 성당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천주교의 입장에 의하여 한국인 신부의 장충성당에서의 미사 집전은 불허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로마 교황청도 북한의 장충성당을 공식적인 성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2. 특징[편집]


1987년 10월 성당 건립위원회가 발족하고, 이듬해 3월 착공에 들어가 동년 10월 250석 규모로 완공된다. 1988년 10월, 교황청의 특사 자격으로 전 천주교 춘천교구 교구장 주교였던 장익(십자가의요한) 신부와 현재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인 정의철(다마소) 신부가 방문하여 성당을 축성하고 미사를 봉헌했다. 공식적으로는 천주교 평양교구 소속으로 교황이 임명한 평양교구장 서리인 정순택 베드로 교구장(대주교)의 감독을 받아야 하지만, 실질적으로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에서 운영하는 어용단체[2]인 조선카톨릭교협회[3]를 내세우나 조선카톨릭협회는 실제 존재하는지도 의문스러운 활동이 저조한 단체이다.

해방 전 일제강점기에는 평양평안도 지역을 관할하는 천주교 평양교구 아래 20여 개소의 본당이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소련군정청과 북한 정부의 탄압으로 1950년 전쟁 직전까지 모두 폐쇄된다. 그 과정에서 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를 포함한 여러 성직자수도자들이 순교했다. 살아남은 성직자들도 모두 남하하여 북한지역에는 한 사람의 성직자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후 평양교구 관할지역은 물론 북한 전 지역에서 가톨릭의 공개 신앙 생활은 사라지고 만다.

북한의 모든 종교는 동구권의 소련 점령군들이 소련의 종교정책을 그대로 시행하여 종교재산 몰수와 종교인 체포, 종교인 가족 성분 분류 등 소련군정과 북한 정부에게 가혹한 탄압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가톨릭이 조직적 차원에서 반공주의적 입장을 취한 종교이며 점도 한 몫을 차지했다. 다른 종교의 경우 과정이야 어떠하건 소련군정과 북한 정부에 협조적인 종교 단체가 등장했지만 가톨릭은 그런 친정부적 종교단체가 일체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북한 종교 중에서 가장 반공적이었다. 이는 천도교나 개신교 등은 그래도 민족주의적 형태를 과시 내지 선전의 도구로 북한에서 이용했으나 천주교는 외국인 바티칸에 종속된 조직이라는 점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4] 어쨌든 천도교나 개신교를 앞세운 어용조직은 1970~1980년대 다시 노동당 통제하에 어용 활동을 재개한 반면 천주교는 특성상 공인받은 사제나 조직이 남아있을리가 없었다.

1980년대 후반 북한 정부는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앞두고 동구권과 남미의 방문객과 기자들이 오는 마당에 그동안 대외적 선전에 종교의 자유를 주장했기 때문에 부랴부랴 천주교를 어용이라도 복구하고 대해서도 제한적으로나마 공개적 활동을 허락한다. 그리고 이미 1980년대 초 교황청과 북한 정부는 비동맹회의에서의 접촉을 시작으로 접촉을 시작했다. 교황청은 북한에 잔존한 천주교인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했지만, 북한에는 공인 천주교 단체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에 따라 1987년 교황청 측은 북한의 공인 개신교 단체인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을 방문하여 북한에 남아있을 천주교인을 찾아달라 의뢰하였고, 조선그리스도교련맹으로부터 5명의 천주교인을 찾았다는 결과를 통보 받았다.

평양교구 관할이지만 실제로는 북한의 공인 천주교인 단체인 조선가톨릭교협회[5]에서 관리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잔류 가톨릭 신자들의 기부금으로 지었다곤 주장하나 북한에 천주교 신자가 남아 있을리가 없었고,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사업의 일환으로 예전 舊선거리 성당 또는 대신리 성당 자리에 공사를 시작하여 1988년 10월 9일 완공되었으며 같은 달 교황청 특사 자격으로 방북한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장익 십자가의 요한 신부와 정의철 다마소 신부에 의해 축성되었다. 1989년 13차 평양 세계 청년축전당시 천주교 신자였던 임수경(이후 불교로 개종한다.)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소속 문규현 신부가 방문했다.

파일:aforeignerpriestinjangchungcatholicchurch.jpg
장충성당을 방문한 외국인 사제

장충성당 초대 신도회장은 박경수 바오로[6]였고 차성근 율리오[7]를 거쳐 2019년 현재 신도회장은 김철웅이다. 상주 사제가 없기 때문에 외국인 사제가 올 때를 제외한 주일에는 성당 신도회장과 부회장의 주관으로 공소예절을 진행한다. 봉수교회, 칠골교회와 마찬가지로 평양 주재 외국인들이 거의 매주 방문한다.

장익 십자가의 요한 신부 등 교황청 파견 인사들과 다시 발견된 천주교인들의 만남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청사 한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만난 5명 중 2명이 1987년 바티칸을 방문하여 고해성사를 하고 미사에 참례한 다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했다. 이 두 명은 부부로 홍도숙 데레사, 박덕수 말구인데 홍도숙은 교황청에서조차 진짜 신자가 맞다고 인정했다.북한의 ‘진짜 신자’ 홍 데레사의 신앙

이후, 얼마 안 되어서 1989년 세계청년학생 축전을 앞두고 남미와 동유럽의 참가자와 기자들이 오는데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선전했음에도 나라 안에 가톨릭 성당 하나 없다는 것이 북한이 봐도 모순되기에 나라망신 당하지 않으려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 여타 종교 조직들을 복구했으며, 1987년 10월 조선천주교인협회 결성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이듬해인 1988년 6월 정식으로 조선천주교인협회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4달 후 장충성당이 완공되었고 교황청에서는 다시 특사를 파견했다.

1989년 6월 6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문규현 바오로 신부가 방북하여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판문점을 통해 돌아오자마자 현장에서 연행되었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 및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문규현 신부의 방문이 한국에서 어떤 평가를 받든지간에, 당시 문규현 신부와 천주교 신자인 임수경의 장충성당 방문은 북한 주민들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개선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일부에서 주장하나 정작 북한에선 임수경의 성당 방문을 취재하지 않았고 당연히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1992년, 중국천주교주교단, 중국천주교애국회 소속 중국인 주교가 방북하여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에게 교리를 교육했다. 의외로 당시 방북한 중국인 주교는 당시 조선천주교인협회 간부들과 장충성당 교인들에게, 중국 정부의 공인 천주교(애국회)에 의존하지 말고 교황청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관계를 개선하라고 권고했다.[8]

1996년부터 2015년 상반기까지 재미동포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매년 빠짐없이 북한을 방문하여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박창득 신부는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뿐 아니라 장충성당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박창득 신부는 1990년대 중반 대북지원 활동을 하면서 북한과 연관을 맺었고 이어 장충성당에서의 미사 집전을 허가받았다. 하지만 박창득 신부는 2015년 9월 미국에서 사망했다.

1998년 4월, 장충성당, 명동성당, 뉴욕 오렌지 한인 성당에서 부활절 미사가 동시에 거행됐고, 5월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최창무 안드레아 당시 주교가 방문하여 민족 화해와 일치를 기원하는 미사를 집전했다.

2013년 11월 8일, 장충성당 설립 25주년 기념 미사를 위한 방북계획이 승인되었다.뉴스

2015년, 장충성당 보수와 남측 사제 파견을 두고 남북이 합의했지만 그 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어 합의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탈북자 중에서도 북한에 살고 있던 시절에 장충성당을 구경갔던 적이 있다고 한다. 장충성당 관련 소식을 조선중앙TV 등 관제 언론매체를 통해 알고 이를 신기해하여 평양 여행을 갔을 때 구경간 것이다. 봉수교회나 장충성당 등 공인 종교단체 소속 종교시설에 외부에는 접근하는게 당연히 가능하다. 왜냐하면 평양 중심가에 있기 때문에 북한에서 존재 자체를 숨기려 하진 않는데 다만 신자가 아닌 외부인이 들어갔다간 보위부에 코렁탕행이다.

한편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인 주성하 기자는 북한내부정보망을 통해 1990년대 김정일 집권 시기에 장충성당 지하가 비밀 공작을 위한 아지트로 사용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어쩌면 1996년 개봉했던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한 장면을 보고 나서 본인도 따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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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 평안남도 평양시 선교동 일원.[2] 북한 내 모든 종교 단체와 해외와 남한의 친북단체, 지하단체들을 관리하는 조직이다.[3] 남한과 달리 조선'카'톨릭협회이다. 설립은 구(舊) 조선천주교인협회 1988년이 시초이며 1999년 개칭.[4] 중국공산당의 시각도 비슷하다. 마오시기엔 바티칸의 지령을 받는 미제의 스파이 취급을 했고 혹독하게 갈려나갔다.[5] 구(舊) 조선천주교인협회[6] 1990년 사망. 장충성당 초기 외부 방문객들에 의하면, 박경수 바오로 회장은 전쟁 전 세대로써 신앙심이 분명하게 밖으로 드러난 인물이었다고 한다.[7] 독신이었고 한때 사제를 희망하기도 했다.[8] '북한의 종교정책과 장충성당의 건립 = (The) Establishment of the Catholic Church at Jang-Chung under the Religious Policy of North Korea,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