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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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이후
5. 기타
6. 야인시대
6.1. 발단
6.2. 전개
6.4. 기타
7.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벌어진 정치테러 사건. 1957년 5월 25일에 야당 국민주권옹호 투쟁위원회가 자유당의 독재를 규탄하기 위해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시국강연회를 열었다가 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 동대문파 정치깡패들의 테러로 집회가 파탄난 사건이다.


2. 배경[편집]


이승만 정권은 발췌 개헌부터 시작하여 사사오입 개헌, 각종 관권선거와 야당 탄압을 감행하면서 야당과 국민의 공분을 샀다. 1958년에 있을 제4대 민의원 선거[1]를 대비한 선거법 개악에 민주당 등 야당이 반대하자 1957년 5월 3일 원내 다수당이던 자유당이 총퇴장을 하여 국회가 폐회되어 버렸다.

이에 야당 의원들은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를 구성했고 '중대 시기는 왔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자유당이 선거법 개악을 강행하려고 하고 있고 이를 막지 못하면 국민의 주권도 참정권도 사라질 것이니 투쟁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성명서에서는 '최저의 요구가 관철되지 못할 경우'에 의원 자리를 물러나겠다는 결의를 넣었고 모든 의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준비했다. 또 이들은 5월 25일 장충단공원에서 자유당을 규탄하는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3. 전개[편집]


제1공화국과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지쳐 있었던 서울시민 20만명은 이 시국강연회를 듣기 위해 참석하였다. 오후 3시에 민관식 의원의 사회로 시작했고 전진한 의원이 처음으로 강연했다. 이후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이자 대권주자인 조병옥의 연설 순서가 되자 청년들의 야유가 터져나왔다. 조병옥이 무슨 짓들이냐, 할 말이 있으면 올라와서 말하라고 소리치자 조직폭력배 5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단상에 난입했다.

주최 측이 마이크와 앰프를 보호하려고 하자 괴한이 의자와 돌맹이를 던졌고 주최 측의 경호 담당이었던 김두한이 그들을 저지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앰프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이 광경을 촬영하던 카메라맨도 폭행을 당했다. 결국 강연회는 4시 반 경에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경찰은 나타나지도 않았으며 조직폭력배들이 사라진 후에야 중부경찰서장이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은 강연회를 중단,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격분한 조병옥은 "민주주의를 저버리는 날, 이 나라는 세계에서 고립되고 말 것이다."라고 소리쳤고 뒤에 연설할 예정이었던 장택상은 "여러분이 보신 이러한 사실이 바로 독재다"라고 외쳤다.


4. 이후[편집]


1957년 5월 26일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는 이 정치테러를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6월 8일 제25회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집회방해행위를 경찰이 방치한 이유, 이 사건이 경찰의 배후조종 또는 묵인하에 저질러진 것인지의 여부, 폭도들에 대한 수사가 지연되는 이유 등에 대하여 이호 법무부 장관과 이익흥 내무부 장관에게 집중적으로 추궁하였다. 그러나 야당의 장택상 의원이 질의 도중 이승만 대통령을 식민지 대통령이라고 지칭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여당이 징계동의를 발의하여 야당 의원 전원이 퇴장한 채 표결을 강행하는 등 파동이 있었다.

이후 깡패들을 데리고 직접 현장에 난입했던 행동대장 유지광만이 가벼운 처벌을 받았고 이들의 윗선, 그러니까 이정재, 조열승, 임화수 등 동대문파 상층부와 권력의 비호 의혹에 대해선 전혀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동대문파 정치깡패들은 자유당의 비호 아래 계속 날뛰다가 4.18 고대생 습격 사건으로 여론의 역풍을 맞았고 결국 모조리 박살났다.


5. 기타[편집]


  • 이 사건은 그동안 자유당의 독재에 시달렸다가 핍박받는 야당의 모습을 본 국민에게 자유당이 민심을 잃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때문에 '깡패'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으나 이전부터 '깡패'는 불량배나 폭력배를 지칭하는 말로 널리 쓰었다.

  • 사건의 상징성으로 인해 매체에서는 가담자 및 자유당 관계자들이 사건 직후 난처해지거나[2] 사건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걸로[3]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는 당시의 상황이 그리 부정적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언론이야 매번 자유당을 성토하니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었고, 사건 이후 화랑동지회 측에서는 밀가루 15만 포를 얻게 되어 재정적 상황이 좋아져 조직이 활성화 되었다는 증언도 있었으며, 사건에 연루된 자유당 관계자들도 불이익은 커녕 당내 입지가 탄탄해졌고[4], 가담자들 역시 유지광 외에는 아무도 처벌 받지 않았으니[5], 당장에는 부정적으로 인식할 이유가 없다고 봐야 할 듯.

  • 뉴스위크는 이 사건을 취재하고 한국인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설사 안다고 해도 이룰 수 없으리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 4.19 혁명이 일어났다.


6. 야인시대[편집]





드라마 야인시대 2부의 중요 에피소드 중 하나다.


6.1. 발단[편집]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측에서 100만 의 기탁금 납부, 500명 이상의 추천인을 골자로 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하였고 이에 야당 측에서는 입후보 조건을 까다롭게 하여 선거를 여당에게 유리하게 하려는 정치공작으로 판단하여 반발하였다.[6]

이에 김두한, 조병옥, 유진산을 비롯한 야당인사들이 장충단에서 30만 명[7] 규모의 대규모 집회를 열려고 하자 이기붕은 이정재에게 집회를 막아야 한다고 하고 이정재는 다시 유지광에게 집회를 방해하라고 지령을 내린다.

동대문파의 집회 방해 움직임을 감지한 김두한은 처음에는 사람들을 모아서 집회를 지켜내려고 하지만[8] 정부와 자유당의 비호 아래 정치 테러를 일삼는 동대문파를 상대로 대적하기는 어려울 것을 직감하고 오히려 동대문파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방치한다. 대신 최동열을 비롯한 기자들을 불러서 테러 현장을 보도하게 한다.

동대문파의 화랑영화사[9] 식구들은 집회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민주당 청년당원 숙소를 찾아가 이곳에 있었던 김두한을 습격한다.[10] 독사는 김두한에게 한 몇 개월 쉬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김두한은 몇 개월은 너무 기니까 '자네들을' 며칠 쉬게 만들어 주겠다고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독사의 부하들이 김두한을 린치하려고 시도했지만 비록 국회의원 직으로 인해 조직을 청산했지만 '조선 제일의 주먹'이었다는 김두한의 실력은 어디가지 않았고 망치, 권상사, 고바우 등은 덤벼들자마자 발차기 한두 방만에 나가떨어져 버린다. 부하들이 죄다 나가떨어지고 마지막에 독사가 단검을 들고 덤벼들지만 김두한은 독사를 손쉽게 제압해버렸고 독사 역시 주먹질 한방에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이후 유지광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다면서 면박을 준다.


6.2. 전개[편집]


집회 당일 동대문파에서는 유지광의 지휘 아래[11] 1,000명에 이르는 주먹패를 동원[12]했으며 연설 이전에는 권상사가 앰프와 스피커가 폭발하도록 폭발물을 설치하면서 손을 써 두었다. 이 와중에 고바우는 장충단집회의 경호를 맡아야 할 김두한과 민주당 청년당원들이 뒷짐만 지고 있는데다 제대로 보이지 않자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유지광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낙화유수는 동대문의 세력에 눌려 경호를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유지광은 민주당 측에서 속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아래 동태를 계속 살피게 했다. 한편 김두한은 이전에 예측한 것과 같이 동대문 측 인원들이 1,000명도 더 되는 인원이 동원되었다는 것과 자신들은 200명도 채 안 되기 때문에 상대가 안 된다는 내용의 보고를 듣고 전날에 말한 바와 같이 막는 척만 할 것과 흥분해서 날뛰면 안 된다고 지시한다.

이윽고 유진산의 연설이 끝나고 조병옥이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지광은 부하들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주자 도꾸야마와 독사, 고바우가 욕설이 담긴 야유를 보낸 직후에 군중인 척 하던 동대문파 졸개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야당 정치인들을 향한 야유를 시작했다. 이에 유진산과 조병옥을 비롯한 민주당 측 정치인들과 관중은 술렁이기 시작했으며, 청년당원들은 민주당의 정치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호 테세를 갖춘다. 그러자 권상사는 미리 설치해둔 폭발물을 터뜨릴 수 있는 장치의 버튼을 눌러 엠프를 비롯한 여러 장비를 폭파했으며 그것을 신호로 동대문패의 조직원들은 본격적으로 집회를 방해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연막탄을 던지고 돌팔매와 폭력으로 야당 사람들을 마구 짓밟았으며, 강연을 들으러 온 시민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면서 집회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된다. 한편 동대문파 조직원들이 저지르는 폭력과 직면하게 된 민주당 청년당원들은 엠프 폭발 이후 한데 모여 조병옥과 유진산과 같은 당의 고위 정치인들을 보호하고 동대문파 조직원들을 제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기자들은 이 상황을 보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경비차 출동한 경찰은 폭발의 충격에서 벗어난 조병옥이 저들을 체포하라고 여러번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수수방관만 한다.

결국 조병옥은 머리에 돌을 맞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다가 유진산과 김두한의 권유에 의해 반강제로 피신하고, 최동열 기자는 사진을 찍다가 권상사에게 마운트까지 당한다. 이때 유지광은 동대문패 체포를 부르짖던 조병옥이 발견하고 나서 깡패들의 괴수로 지목하는 바람에 기자들의 이목이 집중되어버렸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에 의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핍박받는 야당에 대한 동정론이 일어나 여론이 자유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게 된다. 언론보도로 이 사건을 접한 이승만에게 곽영주는 애국청년들이 야당의 거짓선동에 분노하여 일어난 사건이라고 거짓 보고를 하였지만 이승만은 자신들과 뜻이 다르다고 하여 폭력을 쓰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라며 철저히 수사하도록 명령한다.[13][14] 하지만 이런 대통령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곽영주는 관계 장관들을 불러 자유당을 위해 일하다 생긴 일이니 적당히 하라며 압력을 행사하여 각지에서 투서가 난무하고 야당 대표이자 현직 국회의원인 조병옥이 친히 증인으로 출두하여 고발한 유지광이 조사 2일만에 풀려나는 지경에 이른다.

언론에서는 검찰이 대충 조사했다면서 여론이 더욱 악화되었고 이승만은 봐주기식 수사에 다시금 대노하여 사건을 철저히 재조사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이렇게 되자 곽영주도 차마 나서지 못하게 되어 집회 방해 사건의 행동대장이었던 유지광은 마침내 구속되어, 집회 방해 사건은 일단락 된다.


6.3. 나비 효과[편집]


그런데 집회방해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생각치도 못하게 주먹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된다.

동대문파가 자유당의 돌격대로서 정치테러와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자유당의 비호아래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이에 명동파에서는 하부 조직 중 상당수가 동대문파로 이탈하여 세력이 축소되고 있어 위기감이 팽배해 있던 상황이었다.

동대문파가 주먹계를 사실상 평정하면서 유일한 대항마였던 명동파는 집회방해 사건으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던 동대문파를 습격해 주먹계를 통일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화룡이 이정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조직원 이탈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면서 선전포고를 했고 이정재는 조직 관리를 못한 이화룡의 탓이라며 일축해서 전면전에 나서게 된다.

안그래도 집회 방해사 건으로 시끄러운 마당에 명동파와의 전면전까지 앞둔 동대문파는 오히려 이 사건을 하나로 묶어 명동파를 싹쓸이 하는데 이용한다. 어차피 국민 여론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고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강력한 수사를 촉구한 만큼 이정재가 구속을 피할 길이 없던 유지광을 이용해 도전해 오는 명동파를 껴안고 자폭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명동파가 습격해오자 유지광이 전면에 나서 맞상대를 하고 몰려있던 기자들이 패싸움을 찍게 하였다. 그와 동시에 패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이정재가 고향 후배이자 경무대경찰서장인[15] 곽영주에게 이 사실을 언질하였다. 이에 곽영주는 경찰부대를 두 조직이 패싸움을 하고 있는 도중에 출동시켜서 명동파와 유지광만 잡아가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 계획은 보기 좋게 성공하여 유지광과에 대결에서도 이기고 동대문파의 구역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것 처럼 보이던 명동파는 보스인 이화룡, 부보스인 정팔, 주요 간부인 오상사와 맨발의 대장과 달마를 포함한 대다수 조직원들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16] 그리고 패싸움터 주변에 있던 최동열을 포함한 여러 기자들이 취재한 것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됨으로서 명동파가 일말의 동정을 받을 여지조차 없에버리고 만다. 이로써 자신들을 방해할 수 있는 상대가 없어진 동대문파는 한국의 주먹계를 통일하게 된다. 그리고 유지광은 불과 8개월만 감옥에서 호화롭게 살다가 나온 반면, 명동파는 전원이 징역 수 년 이상의 중형을 받고 감옥에서 좋지 않은 대접을 받으면서 살다가[17] 1960년대 초중반이 되어서야 출소할 수 있었다.

자세한 것은 충정로 도끼 사건 문서를 참조.


6.4. 기타[편집]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지고 감옥에 투옥된 유지광이지만 자유당과 연줄이 있는지라 감옥 안에서도 호화로운 수감생활을 한다.[18]

장기적으로 보면 새옹지마전화위복 그 자체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파장이 춤을 춘다.

동대문파의 시점에서 보면 집회 방해가 성공해서 좋아하다가 대대적인 언론 보도로 타격을 받다가 이 사건을 빌미로 명동파를 일소하여 주먹계를 평정 했지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정재를 낙마시키기기 위해 이 사건을 빌미로 동대문파를 잡아들인다.

명동파로 보면 집회방해 사건으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검찰수사까지 받아 시끄러운 동대문파를 일거에 소탕하여 주먹계를 평정 하려다가, 오히려 경찰에 체포되어 버린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혁명재판으로 깡패들을 잡아들이지만, 이때 감옥에 있던 덕분에 재판을 면하게 된다.

이정재는 자유당에 대한 시각이 크게 바뀌는 계기가 된다. 여론이 악화되자 이기붕이 직접 전화를 걸어 아랫사람들은 소모품[19]에 불과하니 유지광을 검찰에 보내라고 종용한다. 애초에 어느 정도 비지니스 관계였긴 하지만 이 발언으로 이정재는[20] 자유당의 냉정함과 이기붕의 인간성에 크게 실망하게 되고 자유당에게 마음이 떠나게 된다. 실제로 나중에 이천시에 출마한 자신을 후보 사퇴시키기 위해[21] 그동안 자유당을 위해 불철주야 견마지로를 다 바치던 동대문파를 줄줄이 잡아들이고 이걸로 협박하는걸 보고는 완전히 마음이 떠나게 된다.

정치적 사건과 폭력배들의 사건에서 한발짝 뒤에서 관망하는 경우가 많았던 최동열이 사건 자체에 휘말리는 드문 경우로, 유지광이 출소할 때도 그에게 전혀 꿀리지 않고 한 마디 쏘아붙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이외엔 보안법 파동 때[22] 국회 내부에서 다른 기자들과 함께 취재하다가 경관들에게 얻어맞는 장면이 조금 나온다. 그 이전에 유진산, 조병옥 등 야당의원들도 맞는 장면이 나온다.


7. 참고문헌[편집]


  • 이형, 조병옥과 이기붕 제1공화국 정치사의 재조명, 삼일서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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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췌개헌으로 양원제가 도입되었지만 정작 발췌개헌을 감행한 자유당의 반대로 상원격인 참의원은 제1공화국 내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2] 대체로 언론의 대서특필에 의해 전전긍긍하는 걸로 묘사된다.[3] 야인시대 곽영주의 경우 자유당 몰락의 불길한 서곡이 될 거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4] 당시 집회 방해를 사주한 자유당원은 이 사건으로 서울시당 선전부장에서 중앙당 선전부장으로 승진한다.[5] 본 사건에 대한 (화랑동지회 관점에서의) 부정적이거나 회의론적인 입장은, 유지광의 자서전 '대명'을 기반으로 한 매체들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는 유지광이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유일한 인물이란 걸 감안해야 한다.[6] 실제 사건이 벌이지고 나서 1년 뒤에 치른 선거 결과 자유당은 전체 의석(233석) 중 127석을 차지해 과반을 얻기는 했지만 서울에서는 단 1석을 빼고 야당에 뺐겼다.[7] 당시 서울의 인구가 116만 명이었다.즉, 서울 인구의 ¼이 모이는 대규모 집회였던 셈이다. 작중 임화수와 곽영주의 술자리에서 이영숙이 서울 인구의 ⅓이 모인다고 하자 임화수가 ¼이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곽영주가 나서서 모이는 사람이 30만이면 그 주변인에게도 영향을 끼처 더 많은 사람이 야당에게 동조하게될 것이라며 두려워 했다.[8] 동대문파는 이미 명동파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주먹계를 평정한 상황이라 주먹패를 동원하기 쉬웠고 자유당의 비호아래 자금력까지 상당했다. 그에 비해 김두한은 정치에 입문하면서 조직활동을 청산해서 동원할만한 세력이 없었고 야당인지라 자금력이 미약해서 세력을 모으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9] 유지광을 비롯해 도꾸야마, 독사, 낙화유수, 고바우, 권상사, 망치가 모인 패거리.[10] 독사가 국회에서 김두한이 이정재에게 졌으니 해볼만 하다면서 김두한을 먼저 치자는 의견을 내자 도꾸야마는 여태까지 김두한이 국회의원 신분 때문에 참은거지 그게 말이 되느냐고 반대했지만 다른 간부들 모두 독사에 동조해서 실행한다.[11] 다만 집회 당일에 나온 동대문파 측 인원 가운데서는 유지광보다 서열이 높은 조열승과 이석재도 있었다. 하지만 이 두 명은 휘하 주먹패들을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실제 동대문 측 총책임자는 유지광이 되었던 것.[12] 실제 사건 당시 동원된 동대문패 인원이 각목을 든 50명이란 것을 고려하면 과장되었는데, 사실 본 드라마에서 이런 식으로 수치는 어마무시한데 실제 장면은 그에 못 미치게 초라하게 나오는 게 한두번이 아니다(...).[13] 야인시대에서 이승만은 의외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높게 그려지며 자신이나 자유당에 손해가 되더라도 민주주의 정신에 해가 되면 바르게 처리하는 경우가 나온다. 예로 113회 대구 개표저지사건 당시 이승만이 직접 나서 개표지연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장면의 부통령 당선을 공언함으로써 이기붕은 낙선하게 된다.[14] 공교롭게도 이승만도 젊은 시절 독립협회에서 활동할 때 정치깡패의 폭력 난입에 당한 경험이 있다. 황국협회의 길영수, 홍종우가 2천 명에 달하는 보부상을 거느리고 만민공동회를 습격할 때 이승만이 이들의 폭력행위에 보다못해 길영수를 직접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15] 1950년대에는 대통령경호실이 없었다.[16] 이때 경찰이 유지광을 체포할 때는 정중한 어조로 체포를 요청했으며 일체의 강압적인 행동이 없었다. 명동파를 체포하라고 명령하는 경찰 간부는 명동파에게 반말을 쓰는데다가 억지로 끌고 가는 것도 모자라 명동파의 억울한 항의가 섞인 말조차 씹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유지광은 어차피 자신의 구속을 피할수 없었기 때문에 자길 체포하는 경찰에 협조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명동파는 유리했던 상황이 한 순간에 뒤집어졌다는 것에 대한 인지부조화와 암수를 쓴 동대문파에 대한 원망 등의 부정적 섞여서 경찰의 체포에 저항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경찰이 이러한 태도를 보인 것 그 자체만으로도 경찰이 정치깡패와 권력에 유착되었다는 걸 확인해 보여준다.[17] 실제로는 서북청년회 출신의 법조인들 덕분에 생각보다 가벼운 형을 살게 되었다.[18] 단성사 저격사건으로 이전에 투옥된 이석재도 비슷한 호화로운 수감생활을 했다. ##(##[19] 소모품 드립은 이정재 이전에 이화룡에게 부탁을 하다가 이화룡이 거절하고 나가면서 "어차피 소모품으로 쓰다 쓰레기통에 버릴 것 아닙니까?"에서 암시된 바 있다.[20] 유지광은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부하이자 동대문파 서열 3위였고 사적으로는 사돈관계라서 서로 존대하는 사이였다.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쉽게 꼬리 자르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21] 이기붕이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당선가능성이 높은 이천시를 탐냈고, 이미 선거활동 중이던 이정재를 후보 등록 전에 압박하여 후보 등록을 못하게한 다음 자신이 자유당 이천시 국회의원 선거 후보로 출마하였다.[22] 일명 2.4파동, 1958년 12월 24일에 민주당의 약진에 당황한 자유당 세력들이 지방자치법과 국가보안법 개정으로 야당의원들의 단상연설 때 할 발언내용까지 규제하려 하자 반발하는 야당의원들을 무술경찰들을 동원해 막고 강제로 보안법을 개정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