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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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토번의 폭정 하에서 살다
2.2. 사주 봉기
2.3. 하서 수복
2.4. 하서 수비를 강화하다
2.5. 입조 후 서거
3. 사후
4. 평가


1. 개요[편집]


張議潮, 799~872
당나라의 귀의군 절도사로 당대의 장수이자 민족영웅. 이명은 장의조(張義潮)이고, 사주 돈황(지금의 간쑤 성 둔황 시) 사람이다. 851년 토번의 국력이 쇠퇴한 틈을 이용해 하서 지역을 당에 바치고 하황지대를 수복하였으며, 이후 량주를 탈환함으로써 농우도를 완전히 수복하는 데 기여한다.


2. 생애[편집]



2.1. 토번의 폭정 하에서 살다[편집]


당 덕종 정원 15년(799년)에 사주(沙州, 지금의 감숙 성 돈황 시)에서 태어났다.[1][2]

안사의 난을 틈타 토번이 당으로부터 하서 지역을 탈취하였다. 건중 2년(781년), 오랜 시간 동안 토번의 공격을 막아낸 사주도 함락됐다.[3] 하서 사람들은 토번에 유린당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밤낮으로 당나라로 돌아갔다.

그는 토번의 잔학한 통치를 몸소 겪으며 토번에 분노를 느꼈다. 토번 통치 하에서 백성들이 편히 살지 못하는 피폐한 풍경을 보고 봉상청[4]에 대한 존경으로 《봉상청사사표문》[5]을 친필로 베꼈다.

815년에는 우명가를 지어 사주 백성들의 고통을 노래했다.


2.2. 사주 봉기[편집]


토번은 9세기 들어 국력이 쇠퇴하고 내부 동요가 잦았다. 회창 연간(841-846년) 토번은 기근이 계속되어 사람이 굶주리고 죽은 사람이 많았다. 대중 원년(847년), 하동 절도사 왕재가 논공열[6]을 격파했고, 이듬해 봉상절도사(鳳翔節度使) 최공이 원주, 위주, 부주를 차례로 탈환하였다. 이와 같은 군사 승리는 토번 통치에 저항하는 하서 백성들의 투쟁을 크게 고무시켰다. 그 사이 논공열은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과주로 건너가 하서의 선과 곽 등 8주를 약탈했다. 이 행동은 하서 백성들의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불평불만을 바라게 하였다.

때가 무르익자 장의조는 대중 2년(848)에 사주에서 군중을 이끌고 봉기를 일으켜 고된 분전 끝에 토번 수비군을 몰아냈다. 토번군은 패퇴한 뒤 주변에서 병력을 모아 다시 사주를 포위했다. 장의조는 성 안의 병마를 이끌고 출전하여 토번군을 격파하였다. 봉기군은 마침내 사주에서 자리를 잡았다.


2.3. 하서 수복[편집]


사주가 수복되자 장의조는 즉시 사자를 장안으로 보내 승전을 전했다. 량주[7] 등은 토번 수중에 있어 동도가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장의조는 10대의 사자를 보냈고, 오진이 이끄는 한 줄만이 사막을 지나 천덕군에 도착했다. 중대 4년(850년) 정월에야 천덕군 방어사 이비를 통해 그 사정을 보고받고 장안으로 향했다. 당 선종은 장의조 등의 충용과 공훈을 대대적으로 포상하여 그를 사주방어사로 승진시켰다. 이와 함께 장의조는 병부상서를 자칭하여 사주를 근거지로 삼아 과주, 이주, 서주, 감주, 숙주, 난주, 서주, 하주, 민주, 곽주를 수복했다.

대중 5년(851) 8월, 장의조는 두 번째로 장안에 사절단을 보내 형인 장의담과 주의 이명달, 이명진, 압위 오안정 등 29명을 입조시킨 뒤 과, 사 등 11주를 바쳤다. 이로써 양주를 제외한 하서 지역은 당나라로 돌아왔다.

이미 하서회랑의 대다수 주, 현이 장의조의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장안의 행보는 순조로웠다. 11월, 당 조정은 사주에 귀의군을 배치하고 사·감·숙·산선·이·서·하·란·민·곽 11주를 거느리고 장의조를 절도·관내관찰처치 등의 사사로 삼았으며, 가검교 이부상서(李部尙書) 겸 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특진(特進), 남양군 개국공(南陽郡開國公), 식읍 2천 호를 봉하고 300호를 실봉하였다. 장안에 인질로 남아 있던 장의담은 금오위대장군에 임명됐다.

양주를 제외한 하서 지역 탈환과 귀의군의 수립으로 토번군은 패퇴하고 토번군은 양주에 집중되었다.[8]

858년 8월 조카 장회심과 번한병 7천 명을 명해 동정을 시작했다. 3년간의 혈전 끝에 당의종 함통 2년(861)에 양주를 정복하고 조정에 연주했다. 이로써 100여 년 동안 함락됐던 하황 지역[9]을 모두 탈환했다.

함통 4년(863년)에 당나라가 양주절도사를 다시 설치하 치소는 양주로 장의조가 영량주절도사를 겸하였다. 정원 초기의 함락으로 폐지된 양주 군진을 다시 회복시켰다.이에 따라 하서회랑은 원활하게 소통되어 서북과 중원지역의 연계와 중외 경제문화 교류 강화에 적극 기여하였다. 장의조는 하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2.4. 하서 수비를 강화하다[편집]


당 선종, 의종 때 국력이 쇠미해졌고, 이때 당은 하서를 경영할 능력이 없었다. 장의조는 절도·관내관찰·영전지도 등을 겸하여 하서의 군사·행정·재경의 대권을 장악하고, 경운정책을 계속하여 수비를 대폭 강화하여 승리의 성과를 보위하고, 동시에 생산도 발전시켜 하서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장의조는 하서 군민을 이끌며 토번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퇴했다. 하롱 지역에 거주하는 각 소수민족, 동쪽의 당항, 북쪽의 회골매, 서남쪽의 토혼잔부 등이 토번을 신복했다. 한편, 토번의 노부는 "더위에 난리가 날까 두려워 노인들이 주인 없이 모여 부족을 만들고, 감·숙·과·사·하·위·민·곽·첩·탕 사이에 흩어져 토번의 미약자가 되레 의지하게 된다"라며 즐거워했다. 그들은 한데 엉켜 자주 마구 약탈하였는데, 모두 장의조에게 격퇴당했다. 한 번은 토혼이 사주를 노략질하러 온다는 것을 알고 성야보에서 장의조를 알게 되었다. 장의조는 이를 알고 즉시 병력을 이동시켜 자진 출격시켰다. 서동 근처까지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토혼군을 만났다. 토혼군은 교전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쳤다. 장의조는 천여 리를 추격하여 토혼 경내로 들어가 재상 세 사람을 생포하고 그 자리에서 참수한 뒤 백여 명을 포로로 잡고 낙타마와 양 2천 마리를 거두어 대진악을 부르며 개선했다.

사주에서 북쪽으로 천 리 떨어진 이 주의 성서에는 납직현(납직현 신장 하미 서북쪽)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회골매와 토번의 잔당들이 모여 빈번히 이주를 약탈하고 인민을 포로로 잡고 가축을 빼앗아 백성들이 난동을 부렸다.이를 해소하기 위해 10년(856년) 6월에는 갑병을 직접 이끌고 회골매 부족을 공격했다. 병행이 순일을 넘지 않아 납직 부근까지 들어갔다. 불과 오십 리 사이에 살륙을 당했다. 각자 창황은 안마를 버리고 납직성에 뛰어들어 노역을 지켰다. 이번 전투에서 장의조는 낙타와 말 등 만 마리를 수확하고 개선했다.

장의조는 회골매를 물리친 뒤에도 날마다 병사를 훈련시켜 흉계에 대비하였다. 그는 전비를 강화하고 적극적인 방어에 나서 토번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고 하서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하서를 무력으로 보위하는 동시에, 장의조는 또한 적극적으로 다스리고 생산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켜 경제를 회복시키며, 한족의 선진 문화를 대대적으로 전파하여 하서 지역의 풍모를 비교적 크게 변화시켰다. 그는 각 종족의 사람들을 단결시켜 그들의 생활과 생산 활동을 잘 안배하였다.

사주에서 북쪽으로 천 리 떨어진 이 주의 성서에는 납직현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회골매와 토번의 잔당들이 모여 빈번히 이주를 약탈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고 가축을 빼앗아 백성들이 난동을 부렸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856년 6월에는 갑병을 직접 이끌고 회골매 부족을 공격했고 이들을 회유했다. 이번 전투에서 장의조는 낙타와 말 등 만 마리를 수확하고 개선했다.

장의조는 회골매를 물리친 뒤에도 날마다 병사를 훈련시켜 흉계에 대비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는 전비를 강화하고 적극적인 방어에 나서 토번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고 하서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하서를 무력으로 보위하는 동시에, 장의조는 또한 이를 적극적으로 다스리고 생산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켜 경제를 회복시켰으며, 한족의 선진 문화를 대대적으로 전파하여 하서 지역의 풍모를 비교적 크게 변화시켰다. 그는 각 종족의 인민을 단결시켜 그들의 생활과 생산 활동을 잘 안배하였다.

함통 7년(866년) 2월, 장의조는 조정에 출두하여, 민매의 수령 복고준에게 서주·북정·윤대·청진 등을 복속하게 했다. 그해 10월에는 복고준이 논공열과 싸워 토번군을 대파하고, 그를 참살하여 그의 수급을 수도로 전하였다.[10] 토번의 남은 무리들은 진주로 도망가다가 상연심의 습격을 받아 토번은 멸망했다. 서북 지역은 한동안 안정되었다. 함통 7년(866년) 7월, 장의조는 감준산 청매4련, 연경절마 2필, 노비 등을 조정으로 보냈다.


2.5. 입조 후 서거[편집]


장의조 덕분에 하서 지역은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함통 8년(867년) 2월 형 장의담(張義潭)이 사망하자 69세의 나이로 사주를 떠나 장안으로 갔다. 장의조는 입조 후 우신무통군(右神武統軍)에 임명되어 논밭을 하사받고, 선양방(宣陽坊)에 사택을 하사받고 사도로 보직하였다.

입조 후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를 모시고 장의담(張義潭)의 아들 장회심(張會深)을 유후로 삼았다.

그러나 량주를 다시 빼앗기자 수복을 주장하나, 보급상의 문제로 인해 기각당하고 만다.

함통 13년(872년) 8월 장안에서 일흔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태보를 증정받았다.


3. 사후[편집]


장의조 사후 당이 농민 반란으로 정신없게 되자 장회심 대에 사주 지역을 제외한 하서주랑을 회흘에 다시 빼앗기게 되었고, 귀의군 절도사의 영토는 사주 지역 일대로 축소되었다. 그 뒤 장의조가 귀의군 절도사로 있던 사주는 조씨가 다스리게 되었으며 하서회흘과는 긴장 및 친선 관계를 유지했다. 당이 멸망한 후 북송 대까지 존속했지만 이원호서하 황제에 등극한 뒤 귀의군 절도사는 탕구트의 서하에 의해 정복당했다.


4. 평가[편집]


하서 한인 장의조가 사주에서 당나라에 충성하는 군대를 조직했을 때, 하서 토번인의 영향은 더욱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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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대학의 중국 요서하금원사


충신의 단심에 항거하고 곤이의 장역을 꺾었다. 두융이 겪은 서부의 이야기는 한창 때에서 볼 수 있지만, 이릉의 기병은 의로운 여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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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선종


장의조가 이끄는 사주 봉기와 그 전과가 계속 확대되어 하서 지역은 당 왕조의 영역이 되었다.

백 년 만의 이민족들이 다시 관상이 되고 십군 유리는 모두 탕화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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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잉후이 지음. 돈황논집: 대만 학생서국


후대는 장의조를 이렇게 평가했다.

장막 안에 앉아 전략적으로 천리 밖에서 승리를 거두며 사방이 거칠지만 잘 통하고 화해를 구하며, 여덟 명의 내빈은 계단 앞으로 나와 춤을 추었다. 북방에서는 소준의 발굽을 닮아 남토가 혼탁하여 곤강의 백벽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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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이 주필, 천광숭 주필. 중국통사 10 제6권 중고시대 수당시대 하: 상하이 인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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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 씨는 대대로 사주 호족이었다고 한다.[2] 특히 일찌감치 위진시대에 양주에서 장씨 일족이 전량(前凉)을 세웠고 얼마 후, 중원이 남북조시대로 접어들자, 돈황의 장씨 장맹명(張孟明)은 서역에 장씨고창(高昌)을 세운다.[3] 토번의 명재상 상치싱얼이 월아천 전투에서 이기고 사주를 점령했다.[4] 고선지의 부하 장수였고, 탈라스 전투 패배 이후 고선지가 장안으로 가게 되자, 그 후임 안서절도사로서 대발률국을 정복하는 등 안서도호부의 강역을 넓혔고, 그 덕분에 당은 서역에서 영향력이 막강했다.[5] 내용은 안녹산을 경시하면 안된다는 내용이다.[6] 토번 명장 가르친링의 그 가르씨 맞다.[7] 오늘날 간쑤 성 우웨이 시[8] 양주는 북조, 수당 이래의 하서중진(河西重鎭)으로, 당나라 전기에는 토번과 돌궐을 가로지르는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가 있던 곳이다. 토번 통치 시기에는 하서 동부를 관할하는 대군진 주둔지이기도 했다. 만약 양주가 토번의 손에 있었다면 장의조가 제시한 하서 동부와 농우수군 탈환은 공염불이었다. 따라서, 하서와 농우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장의조는 이를 탈환해야 했다.[9] 오늘날 칭하이 성의 칭하이 호 일대. 장의조 사후 다시 빼앗기나 1073년 왕안석의 신법 시기 당시 왕소가 탈환하게 된다. 그러나 왕안석 실각 뒤 구법당이 토번에 하황을 넘겨주고, 이후 휘종 시기 왕후가 이를 수복하게 된다.[10] 논공열은 중국 사서에서는 866년 참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토번 측 기록에서는 당번연합군의 공격으로 인해 848년에 자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