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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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용하.jpg
성명장용하(張龍河)
생몰1900년 4월 22일 ~ 1978년 9월 15일
출생지강원도 원주군
사망지서울특별시
매장지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장용하는 1900년 4월 22일 강원도 원주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로 상경해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했다. 그러다가 3학년이던 1919년 3월 7일, 그는 중앙학교 학생 서정기, 이춘봉(李春鳳)과 함께 관훙동에 사는 이기찬(李基燦)의 집에서 “조선은 독립할 수 있으니 일동은 분기하라”는 내용의 격문 20여 매를 복사해서 3월 7일에서 3월 8일까지 서울 내의 각 집에 배포했다. 그리고 3월 15일에는 이봉순(李鳳舜)·이춘봉과 함께 이기찬의 집에서 <조선 민족은 자신을 가져라>라는 제목의 문서 20여 매를 등사하여 배포했고, 28일에는 이춘봉과 함께 이기찬의 집에서 <조선 독립신문 제16호>라는 제목으로 조선 독립의 날이 가까워졌으니 자유독립을 위하여 용왕매진(勇往邁進) 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300여 매 인쇄하여 배포했다.

4월 1일, 그는 서정기의 집에서 <반도의 목탁 제1호> 100여 매를 인쇄하여 배포했으며, 12일에도 역시 서정기의 집에서 <반도의 목탁 제2호> 100매를 인쇄했으며, 13일에도 서정기, 이춘봉, 염형우 등과 함께 <8면에서 관찰한 조선의 참상>이라는 제목으로 일제 식민통치 아래 조선인의 참상과 억압을 폭로하는 내용의 8매짜리 문서 20여 부를 등사하여 배포했다. 4월 22일에는 <반도의 목탁 제3호> 100매를 인쇄 및 배포했으며, 25일에는 <반도의 목탁 특별호>라는 제목으로 서양인들이 조선인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유인물 70여 매를 등사하여 배포했다.

그러나 이 일이 경찰에 발각되면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1919년 9월 22일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배재학교 교사와 교장을 역임하는 등 육영사업에 헌신했으며, 1978년 9월 15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장용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자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