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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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추봉 왕작
助順王 | 조순왕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연인(燕人)
장비 | 張飛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ZhangFei.jpg
시호
환후(桓侯)
작위
신정후(新亭侯) → 서향후(西鄕侯)
최종직위
거기장군(車騎將軍)

(張)

(飛)

익덕(益德)[1]
출생
165년 추정[2]
후한 유주 탁군
(現 허베이성 바오딩시 줘저우시)
사망
221년 6월 (향년 57세)
촉한 익주 파서군 낭중 진영
(現 쓰촨성 난충시 랑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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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하후씨(夏侯氏)[1]
자녀
장남 장포
차남 장소
장녀 경애황후 장씨
차녀 황후 장씨
사돈
유비(劉備)[2]
관직
별부사마(別部司馬)
의도태수(宜都太守) 겸 정로장군(征虜將軍)
정로장군(征虜將軍) 겸 남군태수(南郡太守)
정로장군(征虜將軍) 영 파서태수(領 巴西太守)
우장군(右將軍) 겸 가절(假節) 영 파서태수(領 巴西太守)
거기장군(車騎將軍) 겸 가절(假節) 영 사례교위(領 司隸校尉) (촉한)

중랑장(中郞將) (후한)
시호
무의충현영렬영혜조순왕
(武義忠顯英烈靈惠助順王)


1. 개요
3. 가족 관계
4.1. 연의의 피해자?
4.2. 연의에서의 장비의 지략
5. 평가
6. 기타
8. 관련 항목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이었다.

-

진수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 유비 휘하의 장수. 는 익덕(益德). 유주 탁군 사람.[3]

젊었을 적부터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으며, 주군인 유비를 따라 수십 년간 전쟁터를 전전하며 숱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계한 건국에 이바지했다. 그 기세가 마치 곰과 호랑이처럼 장렬하여 당대의 여러 인물들이 장비를 두려워했고 만인지적이라 불리며 중원에 이름을 크게 떨쳤다.

동시에 유비를 위해서라면 언제나 죽음을 불사하고 가장 위험한 전장으로 달려나가 항상 승리를 쟁취했던 그 끝모를 충성심과 용맹함 덕분에 사후 수백 년간 관장지용으로 칭해지며 후대의 사람들로부터 용력과 지용을 갖춘 호걸로 받들여졌다.

허나 인자하고 덕이 높았던 유비나 교만함은 있었어도 아랫사람들과 우군이라 판단된 자에겐 잘 대우했던 관우, 공명정대했던 조운과 달리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무례하고 기준이 엄격하여 흉악한 일을 초래하기도 하였다.[4]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와 강렬한 이미지로 인해 중국 민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삼국지평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2. 정사 삼국지[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탁주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장비는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하고 서화도 뛰어났다. 청나라 시대의 역대화기록에 따르면 장비는 줘저우인(탁주 사람)으로 미인도를 잘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단, 이는 확증되지 않은 썰임을 명심할 것.[5]

유비가 처음 거병할 때부터 관우와 함께 그를 따르기 시작했는데 기록이 매우 부실하다. 장비의 출신 성분을 두고도 말이 많은데 전부 추측일 뿐 검증된 바가 없다. 확인된 바는 장비는 유비와 같은 동네 출신이라는 정도다. 참고로 《삼국지연의》와 다르게 정사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였다는 기록은 없으나 〈장비전〉에 따르면 장비는 젊어서부터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는데, 관우가 몇 년 연장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고, 〈관우전〉에서는 관우가 자신은 유비와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라고 언급했으니 이들이 매우 굳건한 유대관계로 묶여있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유비는 젊었을 때 고향에서 패거리를 이루고 협객 생활을 했다고 하니 장비는 관우, 그리고 또 다른 고향 친구인 간옹과 함께 유비의 패거리에 포함되어 활동했을 것이다.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가 향리에서 사람의 무리를 모으니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부곡(部曲)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유비는 두 사람과 함께 잠자며 같은 침상을 썼고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시립했고,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니며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2.2. 서주에서[편집]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가 서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원술이 와서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우이현, 회음현에서 이를 막았다.

선주전 주석 《영웅기》에 따르면 유비는 장비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군을 이끌고 회음 석정에서 원술과 싸웠으나 이기고 짐을 되풀이했다. 도겸의 옛 장수인 조표가 하비에 있었는데, 장비가 그를 죽이려 했다. 조표의 무리는 둔영을 견고히 하고 수비하면서 사람을 보내 여포를 불렀다. 여포는 하비를 차지하고 장비는 패주했다.

여포전 주석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가 물과 뭍으로 동쪽으로 내려와 하비 서쪽 40리 되는 곳에 도착했다. 유비의 중랑장 단양 사람 허탐은 밤을 틈타 사마 장광을 여포에게로 보냈다. 그가 말했다.

장익덕(장비)이 하비상 조표와 서로 다투어 익덕이 조표를 죽이니 성중에 대란이 일어 서로 믿지 못합니다. 단양병 천 명이 서쪽 백문성 안에 주둔하고 있는데 장군께서 동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장군의 군사들이 성 서문으로 향하면 단양군이 즉시 성문을 열어 장군을 안으로 들여보낼 것입니다.

이에 여포는 밤중에 진격하여 새벽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날이 밝자 단양병이 성문을 열어 여포의 군사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포는 성문 위에 앉아 보병과 기병으로 불을 놓아 익덕의 군을 대파하고, 유비의 처자식과 군자금, 부곡(部曲), 제장들의 가족을 노획했다. 조표 문서에도 나오지만 도겸의 구장이자 단양병과 연관이 있는 조표가 새로 들어와 서주호족 및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된 유비세력을 꺼리어 서로 갈등이 발생했고, 그 틈에 여포가 어부지리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관우와 함께 유비의 최측근인 장비가 조표와 사이가 나빴다는 건 유비와 조표의 갈등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원술과 한 달 넘게 서로 대치했는데, 여포가 빈틈을 타 하비를 습격했다. 하비의 수장 조표가 배반하고 그 틈에 여포를 맞아들였다. 여포가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자 유비는 군을 돌려 해서에 주둔했다. 이후 유비가 조조를 수행해 여포를 격파하고 함께 허도로 돌아온 뒤 조조가 장비를 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선주전 주석 오역에 따르면 조조가 여러 차례 친근한 자를 은밀히 보내 제장들이 빈객을 맞아 주연을 베푸는 자가 있는지 엿보게 하니, 번번이 이 일로 인해 장수들이 해를 입었다. 유비는 이때 문을 닫아걸고 사람들을 거느리고 순무(蕪菁)를 심고 있었는데, 조조가 사람을 시켜 문 안을 엿보게 했다. 그가 떠난 후, 유비가 장비, 관우에게 말했다.

내가 어찌 채소나 기를 사람이겠느냐? 조조가 필시 의심을 품었으니 더 이상 머물 수 없다.

그날 밤 뒤쪽 울타리를 열어 장비 등과 함께 경기병을 타고 떠나며, 하사받거나 선물 받은 의복을 모두 봉해 남겨두었다. 이에 소패로 가서 군사들을 거두어 합쳤다...라는 기록이 있으나 신빙성은 없다. 이는 《화양국지》에도 나오는 기록인데 배송지는 유비가 서주로 따난건 원술 토벌 때문인데 이런 기록이 말이 되느냐고 신빙성이 없다 하였다.

명제기 주석 헌제전에 따르면 나중에 유비가 소패로 가게 되었는데, 장비도 따라갔다. 장비가 진의록을 만나서 말했다.

그대는 처(두씨)를 빼앗아 간 사람에게 부하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란 말이오? 우리랑 같이 갑시다.

그래서 진의록은 장비를 따라 수백 리를 갔는데, 후회를 하며 되돌아가려고 했고 그래서 장비가 진의록을 죽였다.

유비조조를 배반하고 서주에서 다시 봉기했으나 이내 패배하고 원소, 유표에게 의지했다. 이 과정에서 조조 휘하에 있다가 여남에서 합류한 관우와 달리 장비는 서주에서부터 하북까지 계속 유비를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 하후연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200년, 하후패의 종매(하후씨)가 13살일 때 장비와 결혼했다.


2.3. 형주에서[편집]



2.3.1. 삼고초려[편집]


제갈량전에 따르면 유비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졌다.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

이에 관우, 장비가 불평을 멈추었다. 연의에서는 한층 더 각색해 제갈량이 자기 군략을 박망파에서 확실하게 둘에게 보여주어 불평을 잠재운다.


2.3.2. 장판 전투(장판파)[편집]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로 들어오자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다. 조조가 하루 낮, 하루 밤을 추격하여 당양 장판에 이르렀다. 유비는 조조가 갑작스럽게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처자식을 버린 채 달아났고, 장비로 하여금 20기를 이끌고 뒤를 끊도록 했다. 장비는 물가에 의지한 채 다리를 끊고는 눈을 부릅뜨고 창을 비껴 잡으며 외쳤다.

내가 장익덕이다. 앞으로 나와 생사를 가름하자!

감히 접근하는 적군이 아무도 없었고 이 때문에 마침내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묘사는 상단의 기록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 보다 더 자세한 정황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장비가 다리를 끊은 것이나 조조군을 대치한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오늘날 우리로서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진수는 장비의 용맹과 담력을 강조하기 위해 저 에피소드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이미 적군이 한 번에 우르르 몰려 올 수 있는 상황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장비의 대담함과 용기를 증명한다. 예를 들자면 감녕의 무용을 자랑하는 일화로 1300명의 장사를 거느리고 5000명을 이끄는 관우의 도하를 막은 일이 있는데, 여기에서의 장비도 거의 비슷한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감녕이 1300명으로 5000명(물론 지휘관이 관우이기는 했으나)을 저지한 것에 비하면, 이쪽은 21이라는 정도.

이때 조조군의 정예 기병대 호표기가 5000 vs 21의 상황에서 장비를 두려워 해 공격하지 못했다는 것은 장비가 비범하게 활약하여 전국구급으로 명성을 날려왔기 때문일 터인데, 정사에서 특별히 전해지는 기록은 그가 관우와 함께 만인지적으로 불렸다는 기록 정도이다.

장비전에는 강물에 의지해서 라는 말이 나오는데, 연의에서의 모습이 익숙한 사람들이 '강 반대편으로 건너가서 다리를 없애버린 후, 멀리서 소리치는 장면'쯤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절대 강을 건너가서 다리를 끊었다는 식으로는 해석될 수 없다. 의지한다는 것은 배수진을 의미하며 말 그대로 장비는 강물을 등진 상태로 놓고(의지하고) 다리를 끊은 것이다. 이 장면이 정사에 나오는 것부터가, 진수가 관장지용이라 불리는 장비의 용맹무쌍과 그 활약상을 기록하기 위함이다. 기록의 의도가 그럴진데 강 건너에서 못 넘어오게 만든 다음 소리만 바락바락 지르는 장면이라면 어색하기 짝이 없다.

강 건너편에서 그랬다면 강물을 의지했다는 표현이 아니라 강을 사이에 두었다고 기술해야 자연스럽다. 참고로 여기서의 장비는 조조의 정예기병 5천을 전부 맞닥뜨린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장판파는 매우 혼란스러운 땅이었고, 조조군의 5,000 정예기병과 유비의 패잔병, 그리고 그 난리통에 뒤섞인 수많은 민초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조조의 병사들은 유비를 찾거나, 아직 남은 유비군과 싸우거나, 민가를 약탈하거나 등등 제대로 통제되고 있지 않았다. 즉, 5,000명의 정예기병이 질서정연하게 유비를 쫓고 있던 것이 아니므로, 장비가 상대했던 것은 5,000 기병 전체가 아니다. 아마 유비 쪽으로 추격을 해오던 기병 수백과 맞닥뜨린 후 배수진을 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혼자서 수백의 기병을 맞이하여 사생결단을 내자고 호통을 치는 것 (그것도 퇴로를 스스로 끊은 채) 또한 보통 간담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정사에 기록된 내용이라고 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짜인지 의심 안 하는 게 이상할 정도의 일이지만, 진수가 기록한 것은 그 정도로 놀라운 활약이기 때문이다.

유비가 후미를 맡기기 위해 장비를 보낸 것은 어떤 의미에선 자살 특공 명령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그것을 수행한 인물은 이 내용 없는 지시를 전술로 승화할 수 있는 능력과 개성을 가진 장수였다. 장비는 한 줌 밖에 안되는 휘하 기병들을 이끌고 장판교 다리 앞을 가로막았다. 기습으로 인해 군대가 붕괴하고 지휘관 유비의 도주로 한번 꺾였던 유비군의 기세가 장비에 의해 뻔뻔하게도 그런 적 없었다는 듯이, 오히려 장비의 사자후로 인해 그 정예인 호표기들도 겁을 먹어 감히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더 요란하게 우뚝 선 상황이 된 것이다. 조조는 오환족 같은 이민족 기병도 거느렸고 따라서 이민족 궁기병이 정예인 이들 사이에 섞여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는데도 호표기들은 멀리서 활 한번 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조조는 이 기습으로 철저하게 유비군을 격파한 후였고 유비의 목숨은 어떻게든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조는 유비가 군비가 충실한 강릉으로 갈까봐 식량, 말 먹이를 보충해 줄 치중까지 버리고 급하게 양양으로 갔다가 유비가 지나갔다는 얘기를 듣고는 하루종일 잠도 안 자고 정예기병을 몰아서 단숨에 300여 리나 강행군으로 온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미 급습의 효과까지 끝난 난전상태에서 장비가 아직 현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잔존 유비군이 모여 조조군의 발목을 잡고자 죽기 살기로 덤벼든다면[6] 조조로서도 난감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설령 이 잔존병력까지 격파한다고 해도, 말이고 사람이고 더욱 피로가 누적되고, 보급도 없고, 전투로 상하기까지 한 군대로 유비를 계속 추격하거나 강릉에 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거기에 군대는 자신들에게 암묵적으로 적대감을 품고 있는 10만에 가까운 군중도 수습해야 했다. 추격대, 중군, 치중이 분리된 군대를 이끌고 추격만 계속하다간 아직 형식적인 항복만 받아 조조에게 적대적인 형주 인심이 돌아서면 위험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조군 역시 쉬어갈 필요가 있었기에 조조는 더 이상의 무리는 피하는 쪽을 선택하며 추격을 포기하고 확실하게 유비가 강릉을 장악하는 변수를 없애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

이후 장비는 유비와 제갈량, 조운 등과 수십 기로 달아나, 한진나루로 비스듬히 향하다, 마침 관우의 배와 만나, 면수를 건널 수 있었고, 유표의 장자 강하태수 유기의 무리 만 여명과 조우하여, 더불어 함께 하구에 이르렀다.


2.3.3. 적벽대전[편집]


자치통감》에 따르면 주유유비가 주둔한 곳에서 유비의 위로를 받았는데 건방지게도 바쁘다는 이유로 동맹의 맹주인 유비에게 자기를 보러오라고 통보했다. 이에 관우, 장비가 분노했는지 유비는 동맹으로서 뜻을 보여야 한다며 단신으로 주유를 만나나 오히려 주유의 병력이 3만으로 적은 것을 듣고 실망만 하게 된다.

선주전 주석 《강표전》에 따르면 유비주유를 만나 비록 부끄러움을 느끼고 주유를 남다르게 여기긴 했으나 내심 반드시 조조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서로 어긋나게 뒤에 남아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며 주유에 매이려 하지 않았으니 이를 진퇴의 계책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이미 손성부터가 오나라인들이 자기네 공적을 미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 안 된다고 깠었고, 자치통감에서도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어 진퇴의 계책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아예 빼버렸다.

어쨌거나 장비 역시 관우, 조운 등과 함께 적벽에서 유비의 지휘를 받고 싸웠으며, 삼국지연의와는 달리 정사에서 적벽대전은 유비군의 비중이 큰 전투였기에 상당한 활약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2.3.4. 남군 공방전[편집]


적벽대전 이후 주유군과 유비군은 남군에서 조인군과 대치하는데 여기서 관우와 장비도 종군하였다. 관우가 형북에서 조인을 지원하려는 [[서황, 만총, 악진, 문빙을 막을 때 장비는 주유와 연계하여 활동한다.

주유전 주석 오서에 따르면 유비가 주유에게 말했다.

만약 장익덕이 천 명을 거느리며 경을 따르고, 경이 2천 명을 나눠 나에게 추가해줘 서로 도우며 하수로부터 들어가서 조인의 후미를 끊으면 조인은 내가 들어간 것을 듣고 필시 달아날 것이오.

주유가 2천 명을 그에게 더해줬다.

유비가 강남을 평정한 뒤 장비를 의도태수 정로장군으로 임명하고 신정후에 봉했고, 그 뒤 남군태수로 전임시켰다.

선주전 주석 《헌제춘추》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와 함께 촉을 취하고자 하여 사자를 보내 유비에게 고했다. 유비는 스스로 촉을 도모하고자 했으므로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손권이 이를 듣지 않고 손유를 보내 수군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는 손유군이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너희가 촉을 취하려 하면 나는 응당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산(入山)할 것이니,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

관우를 강릉, 장비를 자귀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잔릉에 주둔했다. 손권이 유비의 뜻을 깨닫고 손유를 불러 돌아오게 했다.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가 서쪽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배들을 대거 보내 여동생을 영접하게 했는데, 손부인이 은밀히 유선을 데리고 오로 돌아가려 하니 조운이 장비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강을 가로막고는 유선을 구해 돌아왔다.


2.4. 익주에서[편집]



2.4.1. 유비의 입촉[편집]


조운전에 따르면 유비가 가맹관에서 환군해 유장을 공격하고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 등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군현들을 평정했다. 유비가 익주로 들어간 뒤 군을 돌려 유장을 공격했고, 장비는 제갈량과 함께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했다. 강주에 이르러 유장의 장수인 파군태수 엄안을 격파하고 산 채로 붙잡았다. 장비가 엄안을 꾸짖으며 말했다.

대군이 당도했는데 어찌 항복하지 않고 감히 맞서 싸웠느냐?

엄안이 대답했다.

경(卿) 등이 무도하게 우리 주를 침탈했으니, 우리 주에는 다만 머리를 잘리는 장군은 있을 뿐 항복하는 장군은 있을 수 없소.

장비가 노하여 끌고 가서 머리를 자르라고 좌우에 명했지만, 엄안은 안색이 변하지 않으며 말했다.

머리를 자르면 자르는 것이지 어찌 화를 내는가!

장비가 이를 장하게 여겨 풀어주고 그를 빈객으로 삼았다. 연의의 일부 판본과 달리 엄안이 앞장 서서 옛 동료들을 설득해 투항시켰다는 언급은 없지만 엄안을 비롯한 항장들로 하여금 앞을 가로막는 유장군을 설득시켜 투항을 이끌어내는 시도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장비가 지나는 곳마다 승리했다는 기록에는 싸우지 않고 온전히 투항을 받아낸 것도 포함했을 수 있다.

장예전에 따르면 장비가 형주로부터 점강현을 지나 촉군으로 들어갔을 때, 유장이 장예에게 병사를 주어 덕양현의 맥하에서 저항하도록 했는데, 군대는 패배하여 성도로 돌아왔다.

장비는 지나는 곳마다 승리하고 성도에서 유비와 만났다. 익주가 평정된 후 제갈량, 법정, 장비와 관우에게 각각 금 5백 근[7], 은 천 근, 전 5천만, 비단 천 필을 하사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각기 차이를 두어 포상했다. 장비를 영(領) 파서태수로 삼았다.

마초전 주석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응당 예(禮)를 보여야지요.

다음 날, 크게 모이며 마초를 청했는데, 관우, 장비가 함께 칼을 쥐고 곧게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보았을 때 관우, 장비를 보지 못했다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니 마침내 다시는 유비의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패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의 자(字)를 부르다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로 유비를 존중하며 섬겼다.

배송지는 당시 관우는 형주에 있었는데 왜 유비, 장비랑 같이 익주에 있냐고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였다. 다만 여기서 임저는 형주 남군 임저현을 말하는 것으로 관우의 관할 구역이었고 마초가 잠시 형주로 왔을 공산은 있다. 거기에 유비는 익양대치 때 형주에 온적이 있었다. 따라서 유비, 관우, 마초가 만났을 가능성도 높고 잠시나마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파서태수로서 조조가 공격한 한중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방어해야 하는 장비가 형주로 갔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진 않다.

유파전 주석 영릉선현전에 따르면 장비는 일찍이 유파가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갔는데, 유파가 그와 말을 하지 않아 장비는 매우 분노했다. 제갈량이 유파에게 말했다.

장비는 비록 무인이지만, 그대를 경모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지금 문무를 결집하여 대사를 정하려고 하십니다. 그대는 비록 고상한 천성을 갖고 있지만, 굽히려는 뜻이 적습니다.

유파는 말했다.

대장부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응당 사해의 영웅들과 교제해야 합니다. 어찌 무사와 함께 말을 하겠습니까?



2.4.2. 한중 공방전[편집]


215년 9월 파군의 7성(七姓)의 이민족왕 박호(朴胡), 종읍후(賨邑侯) 두호(杜濩)가 파군의 이(夷)족, 이민족들을 들어 항복해왔고 이를 황권이 격파했으며 11월 장로가 항복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이때 유비가 유장을 습격해 익주를 차지하고 마침내 파중을 점거했는데 장합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다고 한다. 조조가 대군을 들어 한중을 점령하고 남정에 있을 당시에 장합을 시켜서 보낸 것으므로 그 병력이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12월 조조가 돌아가며 하후연장합을 남겨 한천을 수비하도록 했다.

장합은 별도로 제군(諸軍)을 지휘해 파서와 파동으로 내려가 항복을 받고 그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니, 탕거, 몽두, 탕석으로 진군해 장비와 50여 일간 서로 겨루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장로가 파중으로 달아나 항복했을때 황권두호박호를 격파하였고 이때 위공 조조가 장합에게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하고 3파 지역을 순행하며 그곳의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여 군대를 탕거로 진군시켰다. 유비는 파서태수 장비를 시켜 장합과 서로 대치하게 하였고 50여일이 지나자 장비가 장합을 습격하여 크게 대파하였으며 장합은 남정으로 달아났고 유비도 성도로 돌아갔다.

장비전에 따르면 장비는 정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군을 요격하여 교전했는데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었고 장비가 마침내 장합을 격파했다. 장합은 말을 버린 채 산을 타며 단지 휘하 10여 명과 함께 샛길을 따라 퇴각했고, 장합이 군을 이끌고 남정으로 돌아가니 파(巴) 땅은 안정을 찾았다.

아마도 장비는 우회로를 따라 좁은 길목을 행군하는 장합을 급습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합은 위나라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명장이자 전략가인데[8], 이에 맞서 장비가 멋진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아 앞서 설명되었던 것과 다르게 장비는 단순히 용감한 무부가 아닌 용병에 뛰어났던 사령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탁주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장비가 장합을 격파한 후에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바위를 종이 삼고 전장에서 휘두르는 장팔사모를 붓 삼아 입마명(立馬銘)이라는 시를 새겼다.

삼국지집해 장비전에 따르면 팔몽산은 장비가 장합을 격파한 곳으로 여기에 장비가 친필을 친히 새겼다고 한다.

한나라 장군 장비가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팔몽에서 도적의 수괴인 장합을 격파했으니 이에 말을 멈추고 글을 새기노라.

「漢将軍飛, 率精卒萬人, 大破賊首長合於八蒙, 立馬勒銘.」

이는 대략 장비가 친히 쓴 것으로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명나라 시대의 태평청화에 따르면 쓰촨성 류장현에서 장비가 절벽에 새긴 입마명이 발견됐다.[9]

심흠한(沈欽韓)이 이르길 여지기승(輿地紀勝)[10]에 따르면 팔몽산은 거주(渠州) 유강현(流江縣) 동북 7리에 있는데, 지세가 높고 낮은 게 8곳으로, 물이 이곳을 도는 데 있어, 둘레를 도는 게 1리가 못된다. 항상 연기와 안개가 그 위에 흐릿하게 있기에, 이름 지어졌다. 바로 장비가 장합을 격파한 곳이다. 또한 명승지(名勝志) 비목(碑目)에 있는 유강현제명(流江縣題名)에서 이르길 "한의 장수 장비가 정예병 만 명을 거느리고 도적의 우두머리 장합을 팔몽에서 크게 격파하며, 말을 멈춰 세워 돌에 새겼다", 대략 장비가 친히 쓴 것이다.

조일청(趙一清)이 이르길 방여기요(方輿紀要)[11] 권 68에 선주가 일찍이 파군(巴郡)의 탕거, 선한(宣漢), 한창(漢昌) 3현을 나눠 탕거에 두나, 진나라 때 덜어내 파서에 넣었으니, 광안주(廣安州) 거현이 바로 탕거현이다. 현의 동북 7리에 팔몽산이 있는데, 8개의 봉우리가 높거나 낮게 있고, 그 아래는 10여 리가 평평하고 넓어, 강물이 이곳을 도나, 둘레를 도는 게 1리가 못되며, 항상 연기와 안개가 그 위에 흐릿하게 있다. 산 아래에 돌에 새김이 있어 이르길 "한의 장수 장비가 도적의 우두머리 장합을 팔몽에서 크게 격파하다.", 장비가 몸소 적은 것이다.

양부전에 따르면 유비가 장비와 마초 등을 파견하여 저(沮) 길로부터 나와 하변을 취하도록 하였으므로, 저, 뇌정 등 일곱 부족 1만여 부락이 모반하여 유비에게 호응했다.

조휴전에 따르면 유비가 장수 오란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가 장비를 보내 고산에 주둔케 하여 군의 배후를 끊으려 했다. 의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자 조휴가 말했다.

적이 실제로 길을 끊고자 하면 응당 복병으로 몰래 행군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성세를 과장하니 이는 실제로는 그들이 이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적군이 아직 집결하지 못했을 때 급히 오란을 공격해야 할 것이고 오란이 격파되면 장비는 달아날 것입니다.

조홍이 이를 좇아 진병했고, 오란을 공격해 대파하니 과연 장비는 달아났다.[12]

이후에는 마초와 함께 한중 공방전 때 뭘 했는지 나오지 않지만 유비가 몸소 한중을 얻으러 친정한 전투인 만큼 유비와 합류하여 종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중 공방전 승리 후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장비를 사방장군 중 우장군, 가절로 임명했다.

위연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어 성도로 옮겨서 다스리게 되니 중장(重將)을 얻어 한천을 진수케 해야 했다. 중론은 필시 장비가 될 것이라 하였고 장비 또한 내심 자신했으나, 유비는 위연을 뽑아 독한중 진원장군으로 삼고 한중태수를 겸하게 하니 일군(一軍)이 모두 놀랐다.

다만 이 고사는 유비가 장비 대신 위연을 중용하면서 나이가 많이 든 장비는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유비가 일개 병사에서 출발한 위연을 파격적으로 중용한 것까지는 맞지만 장비가 군무에서 물러났다고 보는데에는 무리가 있다.

이때 장비는 파군 일대를 담당했는데, 파군은 파촉이라는 익주의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익주의 중심부이자 익주 곳곳으로 발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위치였다.[13] 즉, 익주 내부에 일이 터지거나 한중이나 성도 등의 주요 도시가 위태로워질 경우 파의 장비를 중심으로 삼아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는데 유비가 장비의 군재를 신뢰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인선이었다.

실제로 이 내용은 유비가 장비를 너무나도 신뢰했기에 나온 결과로 봐야하는게, 유비는 이전부터 본인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을 최후방 요충지에 두고 본인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움직이는걸 선호했다. 서주에 있을 때는 관우에게 하비성을 맡겼고, 입촉을 할 때에는 형주를 관우에게 맡겼다. 유비가 마지막으로 친정한 이릉대전 때도 가장 신뢰할 만한 제갈량조운에게 파촉 지방을 맡기고 나왔다. 한중공방전이 끝나고 파 지방의 장비를 그대로 유임시킨 것도 같은 이유라고 보는게 타당하다.[14]

여기서 놀라운 점은 유비가 다시 한번 장비에게 중책을 맡겼다는 점이다. 이전에 장비는 조표 등 서주 토호들과 마찰이 생겨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긴 경력이 있고[15], 그 이후부터는 유비가 장비가 아닌 관우에게 후방을 맡기는 중책을 준 건데 그런 관우가 형주라는 지역을 맡아 없어지자 새로운 인물을 들이지 않고 장비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 것. 장비가 입촉할때 엄안을 격파하고 한중공방전에서 장합을 격파한 것에서 유비의 신뢰를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때 유비의 속내도 짐작이 가능한데 총사령관급인 장비를 최전선인 한중에 세운 후 조조와의 일전을 준비하기보다는 익주의 중심인 파군을 지키게 해[16] 점령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익주 지방을 안정시키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221년, 유비가 칭제하고 장비를 거기장군, 영(領) 사례교위로 올리고 서향후로 올려 봉했다.


2.5. 죽음[편집]


파일:장비 1.jpg
낭중 환후사 내의 장비 무덤. 이곳에 몸이 묻혔고, 관우처럼 수급은 따로 충칭 쪽에 묻혀 있다.

당초 장비의 웅장위맹(雄壯威猛)은 관우에 버금갔으므로 위의 모신 정욱 등이 모두 관우와 장비를 칭하길 만인지적이라 했다.

관우는 병졸들은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했지만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 유비가 늘 이것을 경계하여 말했다.

경은 형벌로써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벌써 지나친데 또 매일 장정들을 채찍질 하고는 그들을 좌우에 있게 하니 이것은 화를 초래하는 길이오.

그러나 장비는 이를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선주전에 따르면 221년 6월, 거기장군 장비가 주변인에 의해 해를 입었다.

유비가 오를 정벌할 때 장비는 군사 1만 명을 인솔하여 낭중에서 출발해 강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막 출발하려고 할 때 장비 휘하의 장수 장달, 범강에게 살해 당하고 그 수급을 지닌 채 물길을 타고 내려가 손권에게로 달아났다. 장비 영(營)의 도독이 표를 올려 유비에게 보고했다. 유비는 장비의 도독이 표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서 통탄해하면서 말했다.

아! 장비가 죽었구나.


앞서 유비가 늘 장비에게 형벌이 가혹하니 이를 고치라고 충고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범강과 장달의 살인은 가혹행위로 인한 상관 살해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고대의 군법이란 것은 굉장히 가혹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17] 그래서 범강과 장달이 대체 어떤 실수를 하고 어떤 형벌을 받았기에 하필 이릉대전 직전에 그들이 장비를 살해 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니 현대의 우리에게 있어 이 부분은 상상의 영역이다.

정사에서 이들이 장비를 죽인 이유가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설정을 창작해서, 관우의 죽음에 슬픔에 빠진 장비가 오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조의의 표시로 쓸 흰색 갑옷과 흰색 기를 사흘 안에 준비하라 했는데[18] 부장인 범강과 장달이 이는 불가하니 말미를 더 달라 하자 둘을 흠씬 패고는 말미를 내일[19]까지로 줄이니, 장비가 자기 만 생각하고 일을 그르칠사람이고, 어차피 못하면 둘 다 장비에게 사형당한다 생각하고, 이 둘이 잠 자고 있던 장비를 살해했다고 각색되었다.[20]

장비의 죽음은 유비에게 있어서 이릉대전의 대패의 또다른 커다란 이유이다. 전쟁터에서 평생을 살아온 베테랑 장비가 있고 없고는 유비와 촉군에는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인데 그 장비가 전쟁 직전에 죽었으니, 유비에게는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참고로 장비는 이릉대전 직전에 죽고, 마초는 이릉대전이 펼쳐지는 중, 황충은 형주 공방전 1년 뒤에 세상을 떠나 관장마황조 5명 중 4명이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그 여파가 결코 작지 않았으리라. 유일하게 남은 조운은 강주를 감독하며 후방에 남아있었고, 제갈량은 유비가 원정을 나가면 본진을 총괄하는 역할이라서 결국 유비 혼자서 전선을 모두 집중 지휘하는 상황에 놓였다. 장비라도 살아있었다면 존재만으로도 병력을 2개로 가를수 있으니 육손이 두 무리를 상대해야하니 쉽지 않았을텐데 상대가 유비 하나밖에 없으니 세력이 크든 적든 오히려 상대하기 손쉬웠고, 자기자신의 명성까지 이용하는 심리전과 의병지계에 노련한 장비가 생존해 있었다면 적어도 대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비가 살아 있었다면 이릉대전 발발시 그 휘하에서 실질적으로 병력을 지휘하는 건 거기장군 장비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개전 이후 유비의 움직임을 보면 자신의 본대와는 별도로 군사를 나누어 보낸 일이 잦았는데 장비는 그런 임무에도 적격이었다.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관우와 장비는 무용이 뛰어나며, 몸을 바쳐 세상을 바르게 하고, 주상을 봉대하였으며, 기세는 호랑이처럼 장렬하였다. 주상의 좌우를 지키며, 전쟁터로 번개처럼 달려나가 격투하여 주상의 곤란함을 구하고 대업을 도왔다. 그렇지만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대응함에 있어서는 무례하고, 아울러 흉악한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들의 얕은 생각과 몸을 훼손시키며 나라를 구한 태도를 애도한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후주전에 따르면 260년 가을 9월,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죽고나서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가 내려진 것인데 장비의 시호는 환후(桓侯)라고 했다.

환우기(寰宇記) 86권에 따르면 낭주(阆州) 낭중현에 장비의 무덤이 있는데, 자사(刺史)의 관청에서 동으로 20보(步)에 있고, 높이는 1장(丈) 9척(尺)이다.


3. 가족 관계[편집]



장비의 가족 관계는 상당히 재미있는데 장비의 아내는 하후연의 조카딸인 하후씨라는 기록이 있다. 장비와 하후씨의 결혼에 대한 내용은 하후씨 문서 참조.

장비의 아들은 요절한 장포, 시중을 지낸 장소가 있다. 장비의 손자는 장포의 아들로, 면죽성에서 제갈첨과 함께 등애의 공격에 맞선 가운데 전사한 장준이 있다. 장비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모두 후주 유선의 황후가 되었다. 황실의 외척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위상이 촉한에서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21]


4. 삼국지연의[편집]


나에게 어느 정도 재산이 있으니 고을 안의 용사들을 불러 모아 공과 함께 큰일을 도모해 보는 게 어떻겠소?[22]


삼국지연의에서는 자(字)가 동음의 익덕(翼德)으로 나온다. 이것은 장비의 이름에 '飛(날 비)'가 있기 때문에 이에 어울리고자 '翼(날개 익)'을 대신 사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의미를 고려하면 정사의 자(字)인 익덕(益德)이 맞는다. '덕을 더욱 더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연의에서는 그야말로 8척 장신 호걸에 전형적인 막내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주호 속성이 붙어서 술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선의에서 한 일이 안 좋게 되어 유비를 곤란하게 만드는 등[23], 왠지 말썽꾸러기 막내동생(?) 이미지로, 굵은 사람에겐 굵게 대하고 가는 조무래기들은 하찮게 여기는 호걸다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연의의 첫 장면에서[24] 술을 팔고 돼지를 잡는다고 스스로를 소개하지만[25] 의외로 삼형제 중 돈셔틀 포지션으로 시작한다.[26] 바로 위의 소개문에서도 대대로 탁군에 살면서 논밭도 꽤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비가 의병을 일으킬 돈이 없다고 말하자, 흔쾌히 자기 돈을 쓴 사람도 장비.[27] 그리고 도원결의의 장소를 유비네 복숭아밭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본문에서는 장비네 복숭아밭이다. 모종강의 경우는 이 장면에다가 아예 "결국 돈이 많아야 큰일을 도모하기 쉽다"고 협평을 끄적여놓기도 했다.

연의의 여러 각색 판본 중 하나에 따르면 장비가 돼지고기를 팔고 있었는데 관우가 커다란 항아리를 장비 근처까지 들고 와서 그 항아리 속에 든 고기를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줬다. 장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 상황이다. 옆에서 자기 물건보다 싸게 팔아도 열받는데 아예 공짜로 나눠주고 있다. 관우의 이 행동 때문에 관우와 장비는 싸움이 났다. 이 싸움을 유비가 중재해서 이를 계기로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를 맺었다. 단 이는 여러 판본 중 하나일 뿐이다.[28][29]

싸움에서 여포를 제외하면 천하무적. 여포와 라이벌 구도를 세워 두 번의 결투를 벌였다. 첫번째 삼영전여포에서 여포와 50합 정도를 겨루다[30] 이어 합세한 유비, 관우와 함께 3대 1로 싸워 여포를 패퇴시켰다. 덕분에 여포와 독특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다. 여포에게 호승심 같은 것을 느끼며 싸움에서 도전하려 하지만, 여포의 인성에 대해서는 가루가 되도록 깐다. 삼영전여포에서 여포가 정원, 동탁을 양부로 섬겼기에 삼성가노[31]라는 불명예스런 이명을 지어준다. 이후에도 여포만 만나면 분노를 참지 못하여 유비와 여포 간의 갈등 요소를 여러 번 만들기도 한다.[32]

여포가 서주에 있던 유비에게 투항한 이후로도 계속 장비는 여포 늑대론을 주장하며 끝까지 여포를 미워하는데, 이 때문에 역으로 여포의 장인으로 설정된 조표가 끌어들인 여포가 서주를 뺏는다. 간신히 우여곡절 끝에 소패로 돌아온 유비였지만 다시 장비는 여포가 상인에게 구입한 말을 대량으로 도적질하면서 또 전쟁을 일어나게 한다.

서주에서는 여포와 1:1로 맞짱떠서 밀리는 기색없이 100합을 싸웠는데 연의에서 무신급으로 띄워주는 여포와 이 정도로 대등한 매치를 벌인 건 장비가 유일하다. 게다가 여포가 서주를 기습할 때, 장비의 용맹을 알고 있어서 추격하지 않았다는 서술까지 있다. 반면 조표는 장비에 대한 원한으로 무리하게 추격했다가 취한 와중에도 그를 알아본 장비에 의해 목이 달아난다.

"당치도 않습니다. 제 의제인 장비는 저보다 무용이 뛰어나, 적 장수의 목을 가져오기를 마치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물건 꺼내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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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안량을 베고 온 관우를 치하하자 관우가 한 말.


관우가 조조에게 신세를 지고 있을 때 안량의 목을 벤 직후 조조가 관우의 무예를 찬탄하자 관우는 조조에게 "저는 별것 아닙니다. 제 아우 장비는 적장의 목베기를 주머니 속 물건 꺼내듯이 합니다."라고 말하여 장비의 무서움을 각인시켜준 바가 있다.[33] 이는 고사성어 낭중취물의 유래가 된다. 이에 조조는 "장비란 이름을 옷깃에라도 적어두었다가 가볍게 상대하지 말라."라며 부하들에게 주의를 주었고, 이것은 장판파에서 현실화된다.

조조의 공격을 받아 서주를 빼앗기고 삼형제가 흩어졌을 때 고성에 원래의 주인을 내쫓고 고성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찾아온 관우를 의리를 저버리고 조조를 섬겼으며 자신을 잡으러 왔다고 오해해 죽이려고 한다. 심지어 감부인미부인이 관우가 조조에게 투항한 이유를 설명해주고 손건이 관우를 변호하나 듣지 않는다.

조조의 부하 채양이 오자 장비는 관우에게 북을 세 통[34] 치는 사이에 적장의 목을 베면 오해를 풀겠다고 말한다. 결국 관우는 한 통을 채우기도 전에 채양을 베고, 그제서야 오해를 풀고 관우에게 잘못을 빈다.

연의에서의 장판파 이야기는 좀 더 각색된다. 우선 병사들에게 뒤에서 흙먼지를 일으키게 만든 장비는 장판교에서 서서 조조군을 가로 막는다. 조조의 장수들이 잇따라 도착했지만 동쪽 숲에서 흙먼지가 이는 걸 보고 제갈량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장비는 우레와 같은 큰 소리로 겁을 주고 그 기세에 하후걸이란 장수가 말에서 떨어지니 조조를 비롯한 대군이 밀물 빠지듯 줄행랑을 쳤다.

조선의 경연장에서도 선조가 장판파 대목을 언급했던 걸 가지고 유학자들이 갑론을박하기도 했다. 아무대로 이 장판교 대목은 연의 안에서도 꽤나 임팩트가 크긴 컸나보다.

조운이 아두를 구할 때마다 장비가 나서서 마무리한다. 장판파에서 조운을 쫓던 조조군을 막아낸 것도 장비였고, 손부인이 아두를 동오에 데려갈 때에도 장비가 배를 몰고 온 덕에 조운이 아두를 데리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마초와도 승부를 내지 못한 둘뿐인 캐릭터이기도 하다.[35] 1:1로 하루종일 싸우고도 승부가 나지않아 횃불을 켜놓고 밤중까지 싸운 일화도 있다. 이 일화에서도 끝내 승부를 내지 못하자 이대로라면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승부가 나지 않을 거라 염려한 유비가 제갈량에게 계책을 듣고 마초를 생포하는 것으로 결판난다.

최후 묘사는 정사에서는 단순히 수급을 취하는 것만 나온 반면, 연의에선 관우의 죽음을 애도한다며 3일 내로 휘하 장병들이 쓸 흰색 깃발과 흰 갑옷을 준비하라는 명령의 기간을 늘려줄 것을 요청한 범강, 장달을 오히려 채찍으로 벌하는데,[36]앙심을 품은 두 사람이 장비의 목을 베어 오나라로 도망친다. 향년 55세라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연의에서는 167년생으로 설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정사에선 오에 귀순한 범강과 장달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연의에서는 귀순 후 손권이 유비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돌려보내 둘 다 장포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나온다.


4.1. 연의의 피해자?[편집]


소설적 재미를 위해 인물이나 사건을 각색한 부분이 많은 연의에서도 정사의 묘사와 큰 차이점을 보이는 인물 중 하나다.

정사의 장비는 지용을 겸비한 호걸이다. 힘은 세지만 계책에 서툴고 경솔하고 단순 열혈이며 정이 많은 연의에서의 이미지와는 크게 다르다. 관우와 더불어 만인지적 칭호로 명성이 자자했고 인간흉기이자 용병에 능한 장수로서, 위에서도 손꼽히는 명장 장합이 이끄는 군세를 한중에서 완전히 초토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연의에서는 술에 취해 실수하는 일이 많지만 정사에서는 술에 취해 실수한 기록은 물론이고 애초에 술을 좋아했다는 내용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연의에서는 술에 취해서 조표에게 갑질을 하고 결국 하비성을 빼앗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사에선 조표와 다툰 이유가 나와있지 않다. 또한, 연의에서는 꾀를 쓰는데 서툴다거나 어진 선비를 몰라보고 날뛰는 등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포로로 잡은 적장도 뛰어난 인물이라면 격식을 갖추어 엄중하게 대했다. 연의를 통해 정립된 힘만 센 망나니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37] 게다가 실제 기록 상에는 단순히 범강, 장달에게 살해당했다고 나오고 그 이유조차 상세히 적혀있지 않지만, 연의에서는 장비가 수십만 대군이 쓸 흰색 갑옷과 기를 사흘 안에 장만하라는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고, 당연히 못해내자 죽도록 팬 다음 내일까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사실상 범강과 장달은 상관의 말도 안되는 개억지 갑질에 오직 살고자 선수를 친 셈이다.

하지만 연의의 묘사가 단순히 장비를 깎아내린 것만은 아니다. 정사에서의 장비는 호걸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하는 부분은 의로움을 제외하면 전무하다. 그러나 연의로 인해 구축된 용맹무쌍하면서도 단순하고 순진한 장비의 성품은 서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확실히 연의에서 장비가 벌이는 실책은 독자의 입장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긴 하지만 미워할 마음이 들게 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탐관오리를 매질하거나 형제의 정에 눈물을 쏟는 등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거나 민초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경향이 있다.[38] 개그 캐릭터로서의 일면도 존재해서 제갈량의 초려에서 유비와 나누는 대화는 만담에 버금간다.[39][40]

이는 유비나 여포 등 연의에서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들과도 공통되는 점이다. 연의에서 묘사되는 유비의 무위의 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무능력자로 비쳐질 수 있으나, 연의가 저술될 당시에는 매력적인 인물상으로 생각되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규가 지금 시점에서 보면 노답인 인물이지만 당대 인물들에게는 매력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연의의 묘사 때문에 '힘만 세고 무식한 돌격대장'이라는 이미지가 장비에게 붙어서 이러한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2차 창작물이 다수 생겨났고,[41] 이러한 2차 창작물의 영향 때문에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 장비는 용맹하기는 한데[42] 성미가 급해 트러블을 일으키는 인물로 박혀버렸다.

하지만 이 마저도 결국 현대에 와서 생긴 이미지라는 걸 감안해야한다. 당시 삼국지가 집필되던 당시에 이 소설을 읽었을 독자들의 교육 수준을 생각해보면 장비같은 인물상이 인기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에 와서는 유비가 너무 어리숙하게 그려져서 연의의 피해자 소리를 듣지만 당대에는 이런 어리숙한 유비가 군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단 점과 비슷하다.

장비는 일반 대중의 관점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예컨대 당대 탐관오리들로부터 수탈을 당해오던 민중들 입장에서 독우가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하고 거만하게 굴다가 장비에게 묶여 매를 맞는 장면을 보고 '그래도 나라에서 보낸 공무원인데 저렇게 쓰면 되나. 장비가 잘못했다.'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시대상과 도덕관념이 다르다고는 하나 현대에서도 나라에서 파견한 공무원이 하라는 일은 안하고 시민들 재산을 빼앗고 행패를 부리는 걸 보다 못한 누군가가 그 공무원을 두들겨 패면 누가 그 사람을 탓하겠는가?

비슷하게 여포가 서주를 빼앗은 직후 장비가 여포의 말을 훔치는 장면도 현대의 교육 수준이 높고 상황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사람들 입장에서는 여포가 서주를 뺏은 건 뺏은거고 말을 훔쳤는데 여포가 광분하지 않을리가 없다며 장비의 행동이 경솔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장비는 이 장면에서 오히려 '여포놈은 서주를 뺏었는데 내가 말 몇 마리 뺏은 게 무슨 대수라고 그러슈?'라며 유비에게 따지고 드는 장면은 당대 독자들로 하여금 '그래도 그러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유비보다 훨씬 진정성 있고 이해하기 쉽게 다가온다. 여포는 나쁜 놈이고 먼저 잘못을 했으니 장비가 이 정도 행동을 하는 건 전혀 심하지 않고 그거 가지고 따지고 드는 여포가 나쁘다는 식이다.[43]

당장 장비의 정사상 캐릭터성을 그대로 현대에 옮겨 온다고 하면 대통령에게는 충성하고 유력 정치인이나 학계에 유명한 교수급한테는 주기적으로 편지나 인맥을 동원해 친밀해지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자기 휘하에 있는 하급 장교나 병장 이하급 병사들은 끊임없이 굴리고 사람 이하의 대우를 하며 무시하는 케이스이다. 현대에도 이런 인물상이 좋은 소리를 듣기는 커녕 능력있는 사람에게만 아첨해서 한 자리 해먹으려는 기회주의자라고 욕먹기 딱 좋은데 교육 수준이 훨씬 낮고 기득권에 대한 반감이 훨씬 컸던 과거에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장비가 위와 같은 단순하지만 쾌남 이미지가 있어서 인기를 얻은 것이지 가뜩이나 문무겸비형 장수로 묘사돼서 관우랑 장비랑 이미지가 겹치면 차라리 (독자들이 감정이 입하기 딱 좋은) 아랫사람에게 잘해준 관우나[44] 오직 주군에게 충성하는 이미지만 있는 조운을 좋아하지 뛰어난 사람에게만 잘해주고 아랫 사람을 무시하는 장비를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다. 즉 굳이 따지면 '소설 캐릭터 장비'는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에 비해 (군사적 능력 외에) 다른 능력 면에서는 너프를 당했으나, 인간적인 매력 면에선 버프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위 서술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데, 정사에 기록된 장비의 모습은 상대방 지위를 두고 차별을 하기보다는 인격 내지는 됨됨이를 보고 태도를 달리하는 것에 가깝다. 그가 갈등을 했던 조표는 당시 하비상으로서 장비보다 관직도 높고 입지도 높으면 높았지 아래라고 보기 힘든데도[45]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반면 포로로 잡힌 엄안에게는 예의를 갖춰 대했다. 여기서도 보면 자신에게 패한 엄안을 꾸짖고 목을 베려고 하다가 엄안이 당당한 모습을 보이자 그를 빈객으로 삼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능력과 인품이 뛰어난 인물은 존중하고 본인이 보기에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인물이면 막 대했다는 의미로, 그리 호감형 인물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지만 상대방 직위에 따라 태도가 바뀌는 강약약강 기회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인물이라면 세력 내 입지가 유비를 위협할 정도였던 조표를 노골적으로 적대할 리가 없을 것이다. 사실 '군자를 경애한다'는 면은 당대 인물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장비의 성격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결국 아래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부분이다. 물론 이 점 역시 독자들의 호감을 사긴 무리인 부분이 맞다.

결국 이제와서는 삼국지연의의 피해자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당시에 나관중은 장비를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수준과 당대의 감성에 맞춰 장비라는 인물을 솔직하면서 독자의 답답함을 풀어주고 호쾌한 이미지를 가진 쾌걸로 묘사한 것이다.[46] 결과적으로 집필할 당시에는 작가가 장비를 비하할 의도가 없었는데 시대가 지나고 독자의 수준이 올라가니 비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4.2. 연의에서의 장비의 지략[편집]


다만 연의의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 역시 오해가 될 수 있는 것이, 장비를 단순한 감성 넘치는 협객으로 보는 시선은 연의보다는 그 연의에 의해 파생된 2차 창작에서 보여주는 모습에 가깝다. 애시당초 역사 속의 장비도 지용을 겸비한 호걸인 만큼 그 활약상을 그려내면서 장비의 용병술이 잘 드러난 부분이 생겼고 이로 인해 연의에서도 처음엔 단순무식 캐릭터에서 차츰 성장하여 지략까지 겸비한 완전체로 성장하는 모습을 잘 그려주어 극에 또다른 재미를 부여한다. 제갈량이 장비의 계략을 알아채고 보조해주며 직접적으로 "장비 장군님이 이제 책략도 능히 쓰실줄 아는 지장이 되셨다." 라며 칭찬하기도 한다.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일명 낚시인 것 같다. 심지어는 자신의 대외적인 이미지[47]를 이용해 적장을 낚시하기까지 하니, 심리전에도 상당히 능한 장수라고 할수 있다.[48]

연의에서 장비가 보여준 지략은 다음과 같다.
  • 유비가 조조의 밑에 잠시 의탁했다가 원술과 원소의 합류를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빌려 탈출한 뒤 서주를 점거하고 조조는 유대왕충을 보내 토벌하게 한다. 첫 전투에서 관우가 왕충을 사로잡자 장비는 호승심에 자신도 유대를 잡아보이겠다며 나선다. 물론 유비가 넌 그 성질머리에 사로잡지 않고 죽일게 뻔하니 안된다고 반대하자 각서까지 쓰고 나선다. 그런데 장비가 며칠동안 문자 그대로 개지랄부르스를 춰도[49] 유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장비는 야습을 계획하는 한편, 주정을 하는 척하며 부하 중 한 사람을 트집 잡아[50] 죽도록 패고 야습전에 제사지낼 산제물로 쓴다고 한 후 측근들에게 몰래 명해 풀어주라 한다. 그 병사는 적진에 가서 야습을 알리고 적장도 야습에 대비하는데 장비는 무슨 생각인지 병력을 셋으로 나눠 여러 방향에서 처들어 가게 한다.[51] 드디어 적진에 입성했지만 야습에 대비해 진을 비워서 함정에 걸려서 도주하는 장비를 추격하던 유대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린 장비가 맹공을 퍼붓자 후퇴하는데 이미 진은 장비가 산을 넘어 뒤를 치게 한 부대가 점령한 상태.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유대를 장비가 창대로 후려쳐서 낙마시키고 생포한다. 병사를 때린 것이 고육지계였는지, 아니면 장기말로 이용한 것인지는 언급이 없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짜고친 고스톱, 즉 고육지계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결과 보고를 받은 유비는 이제 장비도 계략을 쓰니 내가 안심이 된다고 기뻐한다.[52]

  • 위의 사건 뒤에 조조가 직접 서주를 정벌하러 오자 먼길을 오느라 지친 틈을 타서 야습을 하자고 제안한다. 이에 유비도 "너 지난번에 유대 잡을 때도 머리 제법 쓰더니만 오늘 계책도 병법에 맞는구나."라고 평가한다. 비록 이 계책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건 계략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갑자기 바람이 불며 조조군의 깃발대을 꺾어버리는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나서 순욱에게 묻자 이건 적이 야습을 할 징조라며 방비하게 한 것이다. 연의 저자도 하늘이 조조를 도왔다는식으로 얘기한다.

  • 장판파에서 병사들에게 빗자루로 땅을 쓸고 말꼬리에도 빗자루를 달아서 수풀뒤에서 먼지를 일으키게 하여 대군이 숨어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장판파에서 사자후를 발하여 하후걸을 말 위에서 떨어트리는 등 조조와 부하들에게 겁을 줘 쫓아버린다. 이때 연의에서는 조조가 과거 관우가 잠시 자신의 휘하에 있을때 했던 자신의 아우 장비는 적장의 수급을 취하는것을 주머니속 물건 꺼내듯한다는 말을 기억하고는 "정말 그럴 놈이로구나!" 라고 질색한다. 막상 그래놓고 후환이 염려된답시고 다리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조조가 다리를 끊은걸 보니 대단한 병력은 있지 않다고 판단해서 말짱 도루묵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둔덕에 마침 관우가 강하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와서 조조의 추격을 쉽게 물리친다. 조조가 다리가 멀쩡하게 유지 될 때만해도 정말 대군이 있는건지 아니면 그저 허장성세(虛張聲勢)[53] 인지를 의심하고 있었으나 장비가 다리를 부숴버린 시점에서 허장성세임을 확신했다. 다만 원작자의 의도대로라면 이 부분은 장비의 지략보다는 용맹을 강조한 대목이다. 정사에서는 허세 없이 막아냈으니 용맹을 강조했고, 연의는 의병계를 썼으니 지략이 강조되었다는 서술을 나무위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연의에서 장비가 단순 고함소리만으로 하후걸을 낙마시키고 조조군을 패닉 상태에 빠지게 했다는 점만 봐도 강조된 것은 오히려 용맹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나중에 유비가 장비를 평가할 때에도 되도 않는 허세를 성공시킨 용맹은 대단했지만 마무리가 2% 부족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 파촉 점령 당시 엄안이 성 안에 틀어박혀 우주방어에 들어가자, 장비는 시일을 끌 수가 없어 샛길 기습을 계획한다. 샛길을 찾느라 공격이 들어오지 않자 의심을 품은 엄안은 장비의 진영으로 첩자를 보냈는데, 이 때 장비는 특유의 성질과 호령으로 첩자들이 듣고 착각에 빠지도록 일부러 계획을 누설한다. 이에 엄안은 역기습을 하기 위해 선봉에 선 장비를 보내고 군량이 있는 행렬의 중간을 공격한다. 그러나 앞서 지나간 장비는 그와 닯은 사람이 연기한 대역이었고, 행렬의 중간에 숨어있던 장비에게 공격을 당해 사로잡힌다. 이에 사로잡힌 엄안이 충의를 내세워 어서 자신을 죽이라면서 장비를 맹 비난하며 혼을 내자, 되려 흥분할줄 알았던 장비는 엄안의 밧줄을 풀어주고 기개와 충심에 탄복했다며 머리숙여 절을 하며 설득하여 결국 엄안을 등용시킨다. 그리고 이 엄안 등용은 신의 한 수가 되어 나머지 관문을 문자 그대로 하이패스로 통과 할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었고[54] 장비가 빠르게 유비를 지원하러 갈수 있었다. 심지어 같이 이동했던 제갈량과 그 외의 장수들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고우영 삼국지에서 이 부분은 병사 한명을 장비와 같은 가짜 수염으로 분장시키고, 가짜 투구와 장팔사모로 변장시켜 이용했다. 이같은 전략으로 매우 빠르게 유비를 구하러 올 수 있었다.[55]

  • 한중 공방전 당시 산 지형을 이용해 장합을 두번이나 크게 패퇴시켰다. 심지어 위나라측도 장합을 믿고 요충지를 맞긴것이여서 규모가 작은것도 아니였고 보험으로 둔 관문에서 뚫린것이라, 장합의 두번의 실패 때문에 한중을 얻을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전공이었다.
    • 장합이 성에 처박혀 안 나오자 뭔 생각을 했는지 몇날 며칠을 술판을 벌이고 논다. 이를 보고 받은 유비는 그 이전에 술로 인해 벌인 실수들을 생각해서[56] 강제소환을 하려고 했지만, 그 작전을 눈치챈 공명은 장비의 계략을 설명하여 유비를 안심시킨 뒤, 좋은 술을 한 수레 실어서 보내되 한 술 더 떠서 "군전공용미주(군중에서 다함께 마시는 고급 술)"라는 깃발까지 달아준다.[57] 장비가 사고를 칠것이라 우려하는 유비에게, 공명은 되려 "장비장군이 머리도 쓰실줄 아시게 된거라며 믿고 맡겨달라"고 한다. 한편. 술이 도착하자 장비는 역시 공명이라면 눈치 채고 도와줄줄 알았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더욱 더 크게 술판을 키운다.[58] 그 꼴을 본 장합은 "저 털보 자식이 날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하며 전군을 동원해 기습 공격을 하지만 술판의 상석에 있던 장비는 허수아비 인형. 그리고 진짜 장비가 술에 전혀 안 취한 채 나타나서 장합을 공격하여 1차전을 승리하고 첫 관문을 접수한다. 즉 장비는 술판으로 함정을 파서 장합을 낚은것. 게다가 병력들도 당연히 술은 마시지 않고 있었다.
    • 장합은 대패한 뒤 성으로 숨어 들어가 두번째 관문에서 농성을 하고 조조의 본대를 기다리지만, 그사이 장비는 주변 백성들을 탐문하여 알아낸 정보를 통해 두번째 관문의 우회로를 알아내 산을 타고 넘어가 기습한다. 이렇게 이어진 2차전에서도 역시나 장합은 대패한다.[59]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여기서 술판을 지나치게 키워서 장비의 병사들이 발가벗은 여자를 구경하느라 장합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장비는 처벌로 병사들을 신나게 두들겨 패고, 이에 열받은 병사들은 이후 장합군을 다시 물리칠 때 일부러 창대로 두들겨 패서 장합군은 전사자보다 부상자가 더 많은 현상이 벌어진다.


5. 평가[편집]


일신의 용맹은 물론이고 군대의 지휘, 전술, 전략 모두 최상급인 용장이다.

하동의 관우 운장, 동군의 장비 익덕은 두 사람 모두 영웅 장사로, 선주의 무장이 되었다.

장비와 관우는 용맹이 삼국의 수위에 섰으니, 만인의 적이라고 칭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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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국지, 유선주지


관우와 더불어 당대에 이미 만인지적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용맹과 무용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을 받았고, 후대에는 아예 관장지용이라는 말로 용맹의 대명사가 되었다. 삼국지 시대에 수많은 걸출한 무장들이 있으나 [60]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무장이었던 것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삼국지에서 기록이 부실한 촉의 장군이었고, 관우에 비해서도 기록이 매우 적은 부분은 아쉬운 점이라고 볼 수 있다.[61]

기록된 것으로도 그의 장수로서의 면모가 충분히 드러나는데, 장판파에서 단기로 조조의 대군과 맞서 용맹을 과시했으며, 유비의 입촉 시절에 형주에서 출발하여 파서를 박살내며 낙성까지 고속도로를 뚫어 기동전에 능한 것을 입증했다. 한중 공방전에서 훗날 제갈량의 진격을 여러번 막아내는 명장 장합을 박살을 내며 한중 방어선을 초토화시켰다. 이는 이후에 조조가 한중을 회복하려 출병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며 작지 않은 공임을 알 수 있다.

수천년의 중국사에서도 장기전에 능한 장수는 드물다. 장비의 주군이자 군사적 재능으로 조조 다음가는 군웅이었던 유비조차도 이릉에서 장기전을 벌이다 대패한 것만 봐도 장비의 군사적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성 공방전에서 온 천하를 진동시킨 관우와 더불어 만인지적이라는 평을 받은 유이한 장수. 연의에서 부각된 면인 무력이 뛰어난 장수의 모습에 더해 유능한 야전사령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62]

주인인 유비가 도망다닐 때도 이미 천하에 이름을 떨친 관우와 더불어 절대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의리, 위연이 자기를 제치고 한중 태수로 임명되었을 때도 불평하지 않는 대인의 그릇까지 겸비한 호걸이었다. 단기로는 항우, 별동대를 지휘하면 하후연, 대군을 이끌면 법정이 되는 식인데, 이게 삼국지연의가 아닌 정사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즉, 사기 캐릭터.

다만 관우에 비해서도 검증된 정사에서의 자료는 더더욱 적은데, 확실한 것은 관우와 더불어 독보적인 당대 제일의 무장으로 칭송받았다는 정도이다. 정사 삼국지에 직접 묘사된 것 이외에도 화려한 군공이 있었을 것으로 추즉되며, 정사에서의 기록들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은 인물.[63]

삼국지연의에서 묘사되는 관우와 장비의 이미지는 관우는 침착하고 장비는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지만, 정사 삼국지에서 보이는 모습은 관우는 열혈, 장비는 냉혈로 연의와는 오히려 정반대다. 관우는 언행이 완전히 일치되고 솔직한 사람이었고 장비는 호걸이지만 유비가 우려할 정도로 차가운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관우는 이름 있는 명사들에게는 오만했지만[64] 병졸에겐 관대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했지만[65]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 장비에겐 못난 사람을 어루만져줄 포용력이 부족했다. 이는 장비의 인생에서 잘 드러난다.[66]

  • 사로잡히고도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 엄안을 존중하여 회유했다.
  • 식자로 유명한 유파와 교류하려다 대놓고 모욕을 받고도 그냥 덮고 넘어갔다.[67]
  • 유비가 자신을 추천하는 중신들의 의견을 뿌리치고 병졸 출신 위연을 한중태수로 삼았을 때도 군말없이 수긍했다.
  • 평소 수하들에게 가혹했고 하필 이릉대전을 앞두고 부하인 범강장달에 의해 살해당한다.

군자는 능력이 뛰어나거나 인품이 고결하여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소인은 둘 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다. 능력과 인품이 모두 평이한 사람이 출세할 확률은 낮으니 장비는 자연스레 부하들에게 가차없는 상관이 되었고, 사대부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소인이 있으면 그들에게는 무례하게 대했다.

장비가 살았다면 이릉대전은 물론이요, 제갈량의 북벌도 그 판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보는 사람들이 많다. 당장 이릉대전 때 그가 살았다면 거기장군, 영 사례교위라는 그의 직책 상 풍습 대신 대도독이 되어 선봉에 섰을 것이다. 또 제갈량의 1차북벌 때 장비가 살아서 마속 대신 가정을 틀어막았다고 생각해보자. 장비가 철저하게 격파한 적 있는 장합이 상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후에 딸인 경애황후가 죽자 유선의 태자를 낳은 후궁이 있는데도 언니의 뒤를 이어 장황후가 황후가 되었다. 장비의 두 딸이 연속으로 황후가 되는데, 조조가 자기 딸 셋을 황후+후궁으로 들인거 생각하면 촉한에서 장비의 존재감은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관우는 촉 땅을 밟은 적도 없으니...그럼에도 장비 일가가 외척으로서 촉한 정계에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68]을 생각하면 촉한이 얼마나 공신+외척이 활개치지 못하는 국가인지 알 수 있다.[69]

정리하자면, 장비는 천하에 위용을 떨친 용장이었으나 장수로서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사람으로서의 포용력이 부족해 결코 덕장이 될 수 없었고, 그것이 본인의 발목을 잡게 된 무장이라 할 수 있다.


6. 기타[편집]


  • 서민에게 친근한 이미지 덕분인지 삼국지연극으로 공연되기 시작하던 송나라, 원나라 시대에는 장비가 주인공이었으며, 현대에도 장비는 중국인들이 매우 좋아하는 삼국지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래서 장비가 관련된 민간 설화나 야사 또한 굉장히 많은 편이다. 호즙주에 관련된 이야기[70]라든가, 적장과 지혜를 겨루기 위해 한 벙어리 문답[71] 등이 유명하다.

  • 장비가 서화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설이 있는데, 명나라 탁이창(卓爾昌)의 <화수원전(畫髓元詮)>과 청나라 <역대화정록(曆代畫征綠)>에서는 장비를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기를 좋아한다고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탁주고루(涿州鼓樓)>의 북벽 상에 쓰인 <여와보천도(女媧補千圖)>와 장비의 고향부근 방수촌 만불각의 벽화에서는 모두 장비의 손재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청나라 때 <역대화기록(歷代畵記綠)>에 보면 장비는 줘저우인으로 미인도를 잘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줘저우에서는 "줘저우 시내 고성(古城)의 성벽이나 이웃마을 팡수(房樹)촌의 만물각(萬佛閣)에 그려진 벽화는 장비의 서화 솜씨를 후대 사람들이 그대로 모방해 그린 것"이라고 한다. 또 장비는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13살 때 이미 춘추를 깨우치고 손자병법에 능했다고 한다. 원나라 오진의 <장익덕사(張益德詞)> 서문에서는 '관후가 풍자하여 말하길 장비는 문예에 더 소질이 있다고 하였다. 문과 무의 운치는 다르지만, 옛사람들은 항상 여유를 두었다. 창을 휘두르는 힘이 손목에 들어가 붓을 휘두르는데 위나라의 종요와 오나라의 황상의 실력도 이보다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1961년 류보경이 편집하고 북경출판사가 충판한 글자 배우기의 부록 <정해 서예명가의 약력과 이력>에서는 '중국서예가들은 문인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무장 중에서도 적지않은 사람들이 있다. 장비와 악비 등이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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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딩(正定)현 조자룡 사당에 있는 장비가 썼다는 비문 '장비입마명'의 탁본.

  • 서화에 능했다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장비의 글이나 그림은 없다. 남북조 양나라 시기의 인물 도홍경의 <도검록(刀劍錄)>에는 신정후 촉대장이라고 도검에 쓴 글이 있다고 한다.[72][73] 명나라 때 쓰여진 <태평청화> 등의 역사서에는 실제로 쓰촨성 류장(流江)현에서 장비가 절벽에 새긴 입마명이 발견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장비입마명(張飛立馬銘)> 또는 <팔몽마애명(八濛摩崖銘)>이라고 부른다. 청나라의 문학가 기효람은 '어찌 누가 글자를 절벽에 새길줄 알았겠는가 거기장군 장비가 직접 쓴 글씨였다.' 라고 하며 장비를 칭찬하였다. 이 서예는 단정하고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러웠으며 호방하고 생동감이 넘쳤으며 힘이 넘치는 필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한편의 우수한 서예 작품 못지 않았다. 다만, 장비입마명은 후대의 위작이라는 논란이 있는 만큼 주의가 요구된다. 입마명은 위작이며 장비는 미남이 아니다라는 글도 중국웹 상에 많이 퍼져있다. 일각에서는 실제 장비의 외모가 출중했다, 당대의 꽃미남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돌고 있는데, 딱히 근거는 없다. 애초에 장비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이 없고, 삼국지에서는 그저 '웅장위맹'하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 사천 요리 중에선 장비가 만들었다는 장비우육이라는 요리도 있다. 다만 실제 장비가 만든거라고 볼 순 없고 후세에 덧붙인 것이다. 또 다른 관련 요리로는 쥔뚠쿼쿠이라고 자기가 쓰던 투구를 솥 대용으로 활용해 만들어먹었다는 전설이 붙은 페이스트리와 흡사한 튀김빵도 있다. 사천에는 취운랑(翠雲廊)이라는 곳도 있는데 고촉도(古蜀道)라는 옛 길에 속하는 검문촉도(劍門蜀道)의 일부구간으로서, 길가에 가로수 모양으로 3백리에 달하는 오래된 측백나무를 심어놓은 길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뜻은 푸른 빛 구름 같은 측백나무 숲길, 이쯤 되겠다. 서로는 재동(梓潼), 북으로는 소화, 남으로는 랑중으로 이어지는 세갈래 길인데, 이 길은 장비가 만든것으로서 장비가 파서태수를 지낼 때 랑중에서 소화에 이르는 구간을 산을 깍아 석판대로를 만들고 길 양편으로 측백나무를 심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측백길은 군대 행군 뿐 아니라 상인들과 백성들도 다니기 편리했다. 그래서 이 길을 장비백(張飛柏)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장비가 타고 다니는 말의 이름은 표월오(豹月烏)라고 한다.

  • 임진왜란 당시의 민간 야사에 의하면 선조는 장비의 환생이며, 전란 중 관우가 도와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만력제는 유비라서 임진록에는 만력제의 꿈에 관우가 나와서 선조가 장비의 환생이라며 파병을 역설하는 장면이 있다. 서민들 사이에서 장비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 명나라 시대의 소부에 따르면 양귀비와 장비가 등장하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들판의 해골을 수습해줬는데 그날 밤 "비요. 비요."라는 말을 듣고 문을 열어주니 양귀비의 혼령이 와서 고맙다면서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이 흑심을 품고 들판의 해골을 수습했는데 다시 그날 밤 "비요, 비요."라는 말을 듣고 문을 열어주니 장비가 나타나서 '내가 시원하게 바람을 쐬면서 누워 있었는데, 왜 함부로 너희 집으로 들여놓은것이냐?'하면서 호통을 쳤고, 흑심을 품었던 사람은 겁을 먹고 다음날 유해를 원래 있던곳에 되돌려 놓았다는 이야기다. 좀더 섹드립성이 강한 이야기로는, 장비가 항문을 들이대라고 요구하는 이야기도 있다. 흥부전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놀부가 박을 타다가 안에서 "비로라" 소리를 듣고 동생 흥부가 양귀비를 첩으로 삼았던 것을 떠올려 양귀비냐고 물었다가 자기는 장비 장군으로 박 안타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해서 꺼내주는 대목으로 나온다. 당연히 꺼내준 뒤에는 놀부를 가지고 공기놀이를 했다.

  • 관제묘에 관우의 좌우를 보좌하는 관평과 주창이 있다면, 장비묘에는 장비의 좌우를 보좌하는 인물로 장포마제가 있다.

  • 청두 유비혜릉에는 장비의 상이 관우, 제갈량의 상과 같이 모셔져 있다.

  • 속담에서는 큰 소리로 몹시 야단스럽게 꾸짖음을 이르는 말로 '장비 호통이라', 상대편이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이쪽에서 상대하지 아니하면 싸움은 일어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로 '장비하고 쌈 안 하면 그만이지', 몹시 급하게 서두르는 일을 이르는 말로 '장비 군령이라'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 민담의 영향을 받아 삼국지평화의 주인공이다. 여포가 장비와 싸우다 겁에 질려 도망가니 말 다 했다. 본격 장비 헌사 소설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장비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민중들을 위해 장비의 활약이 많이 과장되어 있다. 여포에게 포위되자 조조에게 도움을 청하기위해 왕복해서 총 6번이나 여포의 포위망을 뚫질 않나, 장판파에서 고함소리로 장판교를 끊어버리질 않나, 손부인이 아두를 데리고 오나라로 가려할때 장비가 고함을 지르자 손부인이 수치심에 자살을 하질 않나 한마디로 장비가 나서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 망탕산에 들어가 있을 때는 황제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연호가 쾌활이었다. 유비와 재회하자 황제 자리를 유비에게 준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를 하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장비에 대해 일본 학자 이나미 리츠코는 이 작품이 민중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다보니 폭발적인 활력을 가진 장비의 매력에 중점을 두어서 파천황적인 재미가 있다고 얘기했다. 삼국지평화에서 술주정뱅이에 다소 거친 캐릭터상이 이미 완성되지만 민중들이 즐기는 평화에선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유교의 영향으로 주인공의 위치는 유비, 제갈량에게 뺏기면서 거친 이미지만 남았다.


7. 기타 창작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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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항목[편집]




9. 둘러보기[편집]


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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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翼德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이건 모종강의 창작이다. 그런데 모종강본 연의가 널리 읽히자 翼德으로 알려진 것. 당장 위의 그림만 봐도 益이 아니라 翼으로 나와있다. 사실 장비의 자 益德의 益은 강한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잘 날으는 새를 뜻하는 鷁의 통가자로, 춘추 희공 16년 편 중 六鷁退飛(육익퇴비)에서 따온 말이다.[2] 논란이 있는데 '관공연보'에 따르면 유비보다 4살 연하라는 기록이 있고, 연의에서는 향년 55세로 사망한다고 서술되어 167년 생으로 설정되어 있다.[3] 유비, 간옹과 동향이다.[4] 계한보신찬의 내용. 달리 말하면 호탕하고 밑도 끝도 없이 무례한 연의와는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기준이 엄격하다는 말은 사람을 구분함이 명확하다는 것이니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 융통성이 부족한 것일 수 있다.[5] 박봉성 삼국지나 최훈삼국전투기에서는 마치 이게 정설인 것마냥 사실 이랬는데 너희들은 몰랐지?라는 뉘앙스로 묘사를 했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록이 전무해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6] 실제로 나중에 이 잔존 병력들은 특별한 지시도 없는 상황에서 유비가 있는 강하로 집결해 적벽대전에 참전할 정도로 강한 생존력과 충성심을 보인다.[7] 한대의 근으로 계산하면 116.5kg, 2019년 8월 23일 현재의 시세로는 67억원이다.[8] 장합이 제갈량의 1차 북벌을 막은 건 물론 이후에도 제갈량의 북벌을 막는 데 혁혁한 활약을 했다. 연의에서 사마의의 대 제갈량 전공의 1/3 은 사실 장합의 공이다. 연의에서도 제갈량의 페이스에 휘말려 사마의가 제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때, 오히려 장합이 냉철하게 정확한 판단을 하는 경우도 보여준다.[9] 다만 이것은 후세의 위작이라는 논란이 있다.[10] 중국 남송(南宋:1227년경) 말 왕상지(王象之)가 편찬한 지리서. 총 200권.[11]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라고도 불린다. 명말청초의 고조우(顧祖禹)(1631년 ~ 1692년)가 찬술한 역사지리지. 본편 130권.[12] 하변전투는 본대가 오기 전이었던지라 허장성세로 찔러보는 수준으로 애초에 병력이 부족했던 장비 입장에서는 뭘 할 수 있는게 없었다.[13] 파군은 현재 중국의 충칭일대로, 성도(청두)를 중심으로 한 촉 지방과 남군(강릉)을 중심으로 한 형주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이 당시에는 강주라고 불렸다.[14] 이건 유비 뿐만이 아니라 후계자가 장성하지 못한 상태로 군주들이 친정했을 때 했던 행동들이다. 조조의 경우도 친정을 할 때 순욱을 조정에 두고 왔고, 유방의 경우 소하가 관중을 담당하며 유방의 일을 서포트했다.[15] 관우에게 하비성을 맡긴건 그 이후에 조조에게서 서주를 다시 한번 탈취한 후다.[16] 한중 점령 이전에도 장비는 파서 태수로 있었다.[17] 고대까지 갈거없이 명대 병법서인 기효신서만 봐도 지금 기준으론 이게 적이랑 싸우자는 건지 아군끼리 다 죽이자는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참형 규정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가혹한 군법을 셀 수 없이 집행해봤고 집행하는걸 봤을 정도로 평생 전쟁터를 누빈 유비가 장비를 콕 찝어서 지적했을 정도면 장비는 당시 기준으로도 두드러지게 혹독했을 가능성이 높다.[18] 시판되는 삼국지 서적에 따라 창, 칼, 화살 등으로 나오기도 한다.[19] 신삼국에서는 약간 순화(?)해서 장비가 둘을 때리고 난 후 또 술을 마시면서 화를 조금 가라앉히고 조용히 "이틀 더 주겠다.(닷새 안에 준비하라)"라고 하고는 등짝이 걸레가 돼 엎드려 있는 그들에게 느닷없이 술을 권하고, 자기들은 지금 술을 마실 수가 없다고 답하자 알았다면서 자리를 떴다고 묘사되었다.[20] 일부 판본에서는 열심히 만들었지만 반 밖에 못해서 얻어맞고 결심한다.[21] 장비가 생전 마지막으로 승진했던 거기장군은 보통 황실 외척에게 내리는 직책이다.[22] 그야말로 유비네 진영의 시작을 연 대사이다. 모종강본에는 여기에 돈있는 사람은 일을 하기 편하다는 투의 평도 추가되었다[23] 그 일도 대부분 고생하는 형님들을 도와야한다는 나름 의도는 좋은 경우들이다. 단지 이게 장비 본인의 술버릇이라던가 성격, 혹은 주변 상황 때문에 의도하곤 멀어질 뿐이지. 삼고초려 에피소드에서도 세번째로 제갈량을 만나러 가는 유비를 관우까지 뜯어말릴때 자기가 직접 새끼줄로 꽁꽁 묶어 대령하겠다면서 '우리 형님이 누군 줄 알고 건방지게 안나오는거냐.'고 툴툴거리는 것만 봐도 장비가 하는 일이 의도만큼은 좋았던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24] 나관중본과 모종강본 모두.[25] 그래서 중국에서는 장비를 도축업자의 시조로 보는 곳도 있다.[26] 애초에 백정이 정치적으로 천대받던 조선에서도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경우가 많았고, 중국은 도축업자 천대 전통도 없어서 유력 인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당장 같은 시대의 하진이 도축업자 출신이고, 가공 인물이긴 하지만 수호전에서 정도라는 도축업자가 지역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내용이 있다.[27] 다음 장면에서 등장하는 관우는 떠돌이 한량이기에 당연히 돈이 없다. 어느 판본에는 유비도 어머니가 이런 날을 대비해 모은 패물과 전답 등을 기꺼이 내놓고, 탁군에 사는 유씨 종친 네트워크나 스승 노식밑에 구축한 인맥을 동원해 일부라도 보태는 장면이 있지만 장비의 액수보다는 부족하다는 식이다. 실제로 유비가 어렸을 때 유자평을 비롯한 친척 어른들이 공부에 필요한 비용을 보태주기도 했지만 유자평의 아내가 '우리도 먹고 살기 버거운데 걔한테 왜 돈을 줘요?'라고 타박할만큼 넉넉하지는 못했다.[28] 다른 판본인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선 술에 취해 관리를 때려눕히고 깽판을 치던 장비가 관아에 생포되어 그 처분을 논할 때 유비가 나서서 장비를 꺼내주고 그런 유비의 사람 됨됨이에 반한 장비가 먼저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한 뒤 나중에 유비가 소쌍과 장세평의 장사 이권 다툼에 휘말린 관우와 장비의 일기토, 나아가 소쌍과 장세평의 이권 다툼을 중재하면서 세 사람이 인연을 쌓는 것으로 묘사된다.[29] 물론 원본은 황건당의 창궐에 혼란한 나라 상황에서 병사를 모집하는 벽서를 본 유비가 한숨을 쉬자 때마침 옆에 있던 장비가 사내가 한숨을 그리 쉬어 되겠냐면서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본문 위에 있는 자신에게 돈이 많다는 말을 하며 주막에 가 일을 도모할 것을 의논하는데 이때 관우가 홀로 들어와 술을 시킨다. 이에 겉모습이 위풍당당한 관우에 모습에 유비와 장비는 합석을 권하고 이로써 도원의 결의가 완성된다.[30] 모종강본 기준. 가정본에서는 300합을 싸워서 슬슬 열세에 몰렸다고 기록된다.[31] 성 셋 가진 종놈[32] 단, 순욱이 이호경식지계를 폈을 때엔 '조조가 너 죽이라고 연락했다'고 기밀을 누설했고 유비가 이를 인정했으나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여 유비와 여포의 단합을 이끌어내기도 했다.[33] 실제 기령을 전투력 측정기로 삼아서 비교하면, 기령은 관우와 30합을 싸워서 패색을 보이는 정도에 그쳤지만, 장비와 싸울 때에는 10여 합에 목숨을 잃는다.[34] 999번을 치는 것을 뜻한다.[35] 다른 한 명은 허저다.[36] 일부 판본에서는 열심히 만들었지만 절반만이라서 맞는다.[37] 물론, 연의에서도 엄안에게 예를 갖추는 등 영 안나오는 건 아니다.[38] 하지만 유비를 죽이려 한 차주의 죄없는 일가를 몰살한 행위는 예외. 유비도 너무 잔인했다고 비난했다.[39] 제갈량을 두번째로 만나러 갈때 눈보라가 치자 뭔 놈의 눈이 이렇게 휘몰아치냐며 허공에 대고 꽥꽥 소리를 지른다거나 세번째로 만나러 갔을 때 제갈량이 낮잠을 자고 있는 걸 보곤 뚜껑이 열려 "저 새끼 저거 내가 확 불을 싸질러도 안튀어나오고 자빠져 자나 보자!"라며 길길이 날뛰다가 관우에게 제지당하는 장면 등이 나온다. 그 이전에도 황건적 토벌 때 유비가 관군들의 홀대에 열받아서 날뛰는 장비를 몇번 달랬는데 나중에 동탁이 대놓고 모욕을 주며 초소로 향하자 또 투덜대면 유비가 말릴까봐 일부러 입을 꾹다물고 칼을 뽑은 채 동탁을 죽이려고 초소로 들어가려다가 유비에게 제지당하는 장면도 나왔다.[40] 삼국지 판본에 따라 관우나 제갈량 같은 인물들은 경어체의 정중한 말을 쓰는데, 장비는 구어체를 쓰며 속어를 남발하는 등 속된 말로 양아치스러운 말을 사용한다. 예를들면 삼고초려 장면에서 관우는 유비에게 대형(大兄), 형님 등 정중하고 격식있게 말한다면, 장비는 시종일관 꺼꺼(哥哥)거리며 마치 진짜 동생이 형한테 투정을 부리는 것 같다. 국내 삼국지 만화 콘텐츠에도 일부러 장비에게 사투리 속성을 부여해 "성! 성님!" 같은 식으로 투박한 느낌을 부여하기도 한다.[41] 특히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다.[42] 연의 후반과 정사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장비가 병법을 어느정도 쓴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머리가 나쁘다 라는 인식은 줄었다. 유비가 요즘들어서 의외로 칼좀쓰는 인물처럼 그려지는것과 마찬가지. 어차피 여포, 원술, 유선, 유장 등 장비 이상의 돌대가리들이 산재하고 있다.[43] 당시의 대다수의 농민들은 현대로 치면 초등학교 저학년보다 오히려 교육 수준이 낮았다. 요새도 (아이가 삼국지를 읽었다는 가정 하에) 초등학교 저학년에게 서주를 빼앗은 여포에게 말을 빼앗은 장비가 잘못했냐고 물으면 아니오라는 대답이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44] 정사에서 관우는 오만하다는 평이 있지만, 일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감정표현에 솔직하고 겉과속이 동일한 인물에 가깝다. 게다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면서 여색을 밝히지 않는 것도 아니니, 실존인물 관우는 연의에서 묘사된 고고한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연의판 장비같이 인간미가 넘치고 다혈질인 캐릭터에 가깝다.[45] 연의의 이미지가 강해서 조표가 단순한 부하로 여겨지는데, 사실 둘의 관계는 좀 복잡하다. 일단 연의에서는 장비가 아랫사람으로 표현된 조표에게 술을 먹이면서 그가 사양하자 두들겨 패는 갑질을 한게 분명하다. 그러나 정사에서 그는 하비으로, 당시 장비는 유비가 평원상이던 시절 받은 별부사마직 뿐이었고 아직 장군도 아니었기에 조표는 오히려 관직이 그보다 높았다. 물론 장비는 서주지배자 유비의 왼팔이었기에 공식 관직 이상의 권한이 있었다. 즉 당시 장비는 하비를 지키라는 유비의 명을 받은 심복이고, 같이 하비의 수비를 맡은 조표는 공식 직위는 장비보다 높은 다소 애매한 관계였다는 것. 어쨌거나 당시 조표와 장비는 서로 반목하고 견제하는 관계였지 상하관계는 절대 아니었다. 당시 서주는 유비가 접수한지 얼마안되어 외부에서 들어온 유비파+유비에게 호의적인 기존의 서주호족파(진규/진등 등)와 도겸에게 충성하던 단양파 사이 갈등이 있는 상황이었는데, 유비파 중 가장 강경한 장비와 단양파의 중심이었던 조표 간의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46] 만약 정사 이미지 그대로 지략도 뛰어나고 신중한 인물로 설정해버리면 관우나 조운과 설정이 겹친다. 역사적으로는 몰라도 자칫 개개의 인물의 캐릭터성이 묻히기 쉬운 소설로 보면 다소 무식하지만 솔직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자신의 답답함을 긁어주는 장비라는 캐릭터는 완벽히 성공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47] 술을 좋아하고 난폭하다는 것[48] 반대로 지용겸비처럼 2차 창작에서 그려지는 관우도 연의에서의 활약을 잘 보면 용맹한 모습이 대부분이지 지략을 쓰는 모습은 의외로 적다.[49]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온갖 입에 담기도 힘든 패드립과 욕설로 도발했다고 나온다.[50] 판본에 따라 다른데 예전에 여포한테 서주 빼앗겼던 이야기 같은 자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했다는 이유가 많다.[51] 셋 중 한 부대는 산을 돌아 후방을 기습하는 임무를 맡았다.[52]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시에는 전쟁이 일상이며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군들은 당연히 머리도 기본 이상으로 좋아야 한다. 단 장비는 문보다 무가 더 강조되는 장군인지라 티가 안 났을 뿐.[53] 실속이 없음에도 큰 소리 치거나 허세를 부린다는 뜻의 사자성어다.[54] 엄안이 관문마다 앞서서 "나조차도 유현덕께 항복 했거늘 너희가 감히 버티겠단거냐? 어서 문을 열고 항복하거라!" 식으로 회유하고 엄안의 높은 명성에 힘입어 엄안 장군께서 항복하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것이라 판단한 나머지 관문의 군사들도 줄줄이 항복한다.[55] 그래서 유비가 장비를 크게 칭찬한다.[56] 가장 큰 사고가 바로 서주 사건. 유비와 관우가 출정하면서 주의를 줄때 절다 술 안 마신다고 하고 그 새를 못참고 술판을 벌인다. 그런데 여포의 장인 조표만 안 마셨고 이에 술을 강요하지만 조표는 계속 거부한다. 꼭지가 돌아서 패려고 들자 조표가 내 사위 여포의 얼굴을 봐서라도 용서해달라 했지만 오히려 뚜껑 개방된 장비에게 미친듯이 맞는다. 앙심을 품은 조표가 소패의 여포에게 가서입을 털어 여포가 군사를 일으키고 결국 서주를 빼앗긴다. 이 다음으로 큰 사건이 바로 황건적 토벌후 십상시들이 구색용으로 준 벼슬인 안희현 현위 자리에 오른 유비에게 뇌물을 받으려고 와서 시비 걸던 독우를 술에 취해 피떡이 되게 팬 사건이었다. 다만 정사에서는 유비가 직접 독우를 팼다. 정사와 연의를 섞어서 창작한 웹툰 삼국지톡에선 유비와 장비가 같이 독우를 팬다.[57] 당연히 장비와 공명이 서로 합의하고 짠 것이다.[58] 판본에 따라선 심지어 즉석에서 씨름 대회까지 벌였고 그 대회에서 우승한 병졸이 장비가 하사한 술 한 사발을 들이킨 뒤, 마찬가지로 우승 상품으로 준 그럴싸한 갑옷을 입고 성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않는 조홍과 장합을 비웃는 도발을 하자 다른 병사들도 신나서 같이 비웃고(...) 그 꼴을 보다 못한 장합이 야습을 감행하는 것으로 묘사된다.[59] 장합은 당시 조조군 장수 중에서 손꼽히는 장수인데 이 두번의 패배때문에 조홍한테 제대로 욕먹었다. 조홍은 아예 저놈을 처형하라고 닦달하나 곽회가 삼군은 모을 수 있어도 좋은 장수는 모으기 어려운데 장합이 그러하니 처형은 삼가달라고 말렸다.[60] 여포, 공손찬, 손책, 태사자, 장료, 감녕, 방덕, 정봉, 문앙 같이 개인 무용 면에서 엄청난 모습을 보여준 인간병기들이 즐비하지만, 당대인들의 평가에서 이들 중 가장 위명을 떨친 것은 만인지적이라는 관우, 장비였다. [61] 드라마, 게임 등 대중매체에서는 해석에 따라 관우라는 이름의 상징성과 위엄있는 이미지로 인해 관우의 무력을 더 높게 쳐주기도 하고 단순무식하지만 화끈한 무력의 이미지인 장비를 높게 쳐주기도 한다. 중국 쪽에서는 아무래도 무신으로까지 모시는 관우를 높게 쳐주는 경향이 강하다.[62] 오히려 장비의 굵직한 군공의 대부분은 삼국지 연의에서도 대부분 묘사되었는데 대중에 허저에 버금가는 무력돼지로만 대중에 인식되는 것이 의아하기까지 하다. 다만 이건 '소설캐릭터' 장비의 캐릭터성 때문이기도 하다. 연의는 집필 당시 삼국지평화 등을 통해 중국 대중들에게 친숙했던 (실제 인물 장비와 전혀 다른) '단순무식하고 좌충우돌하는' 장비의 캐릭터성을 잘 살렸다. 예를 들어 조표와 갈등, 이에 따른 조표의 배반으로 서주를 뺏기게 된 것을 '술 좋아하는 장비가 술에 취해 사고를 쳤다'로 각색하거나 실제론 유비가 패버린 독우를 장비가 팬 것으로 각색하는 등. 워낙 그 묘사가 맛깔났고 원래부터 '단순하지만 매력적인 장비' 캐릭터 자체도 인지가 높았기에 장비=싸움 잘하지만 단순함이 확연히 각인되어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63] 곽가와 정욱은 장비를 관우와 더불어 만인지적이라 평했으며, 주유 역시 관우와 장비는 맹수처럼 용맹한 장수라 평하면서 둘을 자신이 지휘할 수 있다면 대업이 가능하다고 호언장담했다. 실제로 남군 공방전 때는 아예 유비에게 직접적으로 장비를 잠깐 빌려달라고 요구했을 정도다.[64] 엄밀히 말하면 너무 솔직담백한 성격 탓에 오만함이 부각되어 보이는 부류다.[65] 제갈량을 끝까지 꺼리던 관우와 달리 장비는 제갈량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자 곧바로 제갈량을 인정했다. 사실 관우도 인정하긴 했다. 유비의 총애를 나누게 되는 걸 질투했을 뿐(...).[66] 사람 사는 세상에서 자신과 맞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고 그때문에 맞지 않더라도 어울려 사는데 이것을 우리는 사회생활 혹은 사회성이라고 부른다. 장비에겐 이것이 부족했다. 일찍이 사대부 출신에 돈이 많았던데다가 자신과 죽이 잘 맞는 유비, 관우와 함께 했으니 고칠 필요성도 못 느꼈을 것이고 있었더라도 고칠 타이밍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유학에서 군자는 유학적 식견이 뛰어나고 인을 깨달은 자로서 인간됨이 훌륭하고 사리가 능한 사람이다. 즉, 완벽한 인간군상. 불교의 부처와 플라톤의 철인과 어느정도 동치되는 개념이다. 반대로 소인은 어리석고 아둔하며 깨우치지 못한 자로, 유교에선 군자가 이들을 교화시켜야 한다 말한다. 즉, 군자와 소인은 잘나고 못나고의 개념이 아니라 인품이 뛰어나고 말고를 의미하는 것이며 군자를 경애하고 소인에 무례하다는 말은 쉽게 말해 '무식하고 예의 없는 놈 봐주는 꼴이 없었다.'로 해석 가능하다.[67] 정확히 말하면 격노했다는 기록은 있긴 한데 그냥 화만 냈지 딱히 뭘 했거나 앙심을 품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이때 유파의 행동은 촉한 진영은 물론 동오에서도 이 얘기를 두고 떠들 정도로 퍼졌을 만큼 소문이 좍 났으니 장비 입장에서는 개망신을 톡톡히 당한 셈인데, 화만 내고 넘어간 수준이면 관용이 부족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68] 끽해야 장비의 차남인 장소가 중신으로 활동하고 장손인 장준이 무장으로 활동한 기록 밖에 없는데 관우나 조운의 자손들하고 비교해봐도 딱히 어마어마한 차이는 아니다. 오히려 오호대장군 중 친족이 가장 높은 관직에 올라간 것은 유비 세력 소속의 역사가 가장 짧았던 마초이며 종제인 마대가 평북장군까지 올라갔었다.[69] 이는 유비 세력이 유비라는 존재 단 하나로 뭉친 세력이기에 충성심이 뛰어난 자들이 뭉쳤으며 힘든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한 이들이 많으니 여기서부터 다른 세력과는 차별화 된다. 더군다나 위연마저도 유비에게 충성했으니. 그런데 제갈량이 내정하면서 철저한 관료제/능력중심 국가를 만들고 철저한 법치에 따라 국가를 관리하였는데 유비가 죽을 때 제갈량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으니 이엄말고는 이미 공신 세력이 다 죽고 자식들만 남은 촉한에서 누구도 제갈량의 권위를 위협할 순 없었다. 유비 세력의 마지막 맏어른인 조운도 공명정대하고 청렴했기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신이고 외척이고 감히 누가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을까. 즉, 안 그래도 공신 세력은 유비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했고 번성~이릉 전후로 갑작스럽게 관우, 장비, 법정, 황충, 마초, 미축 등 공신 세력들이 사망하였는데다가 살아남은 조운은 욕심이 없으며 유비가 사망하면서 제갈량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했고 그에 따라 철저한 관료제 형식의 법치 국가를 세웠으니 공신의 자손이나 친척들이 감히 권위를 내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70] 방통이 뇌양현 현령으로 임명된 후 아무 업무도 하지 않고 놀고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비가 감독관을 보내려 했는데, 뇌양현에 호즙주라는 명주가 있다는 걸 알고있던 장비가 자처해서 감독으로 떠난다. 당연히 뇌양현에 도착해 호즙주로 거하게 취하려고 술집부터 찾았지만 모든 술집에서 물을 타 밍밍한 호즙주를 팔고 있었는데, 방통이 애주가 장비가 온다는 것을 알고 마을의 모든 주점에 장팔사모를 든 사내가 오거든 호즙주에 물을 타서 내놓으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 이후엔 연의의 그 이야기로 진행되며, 장비도 모든 사건이 해결된 후 진짜 호즙주를 마시고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71] 헌데 이런 부분은 착각물 스럽게 상대방이 진지한 질문을 던짐 - 장비는 상대적으로 유치한(시세를 논한건데 먹을거 얘기인줄 안다든가...) 질문으로 여김 - 장비가 대답함 - 그런데 상대방은 진지한 대답으로 착각 - 이하반복 - 상대방이 장비에게 놀라며 이야기 끝으로 흘러간다.[72] 그러나 한나라 장군직을 했던 장비가 스스로 촉대장이라고 할 리 없다는게 중론이다. 노필이 살피길 '익덕이 칼을 만들어 새겼으면, 마땅히 스스로 한장(漢將)이라고 적었을 테지, 필시 촉장(蜀將)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은, 몽산(濛山)에서 돌에 새기며 스스로 한장이라 썼으므로,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73] 제갈량이 처음 입촉해서 법률을 지을때 '한과'가 아닌 '촉과'로 지었다는 이유로 장비 역시 촉대장이라고 자칭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노필의 주장을 반박하는 설도 있지만, 촉과는 촉 자역을 다스리는 법이라는 의미에서 촉과라고 하는 것이지 유비의 정권 전체를 아우르는 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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