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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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文休
1. 개요
2. 정보


1. 개요[편집]


발해장군.


2. 정보[편집]


발해의 장군들 중 유일하게 군사적인 군공이 알려진 장군.[1] 발해 조정과 계약을 한 해적이거나 고구려 귀족이라고 보는 시각, 고구려 해상 세력의 잔당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남아있는 기록 자체가 희박하여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삼국유사에도 구삼국사의 기록을 인용해 해당 공격과 관련된 내용을 수록했다.

【『삼국사(三國史)』에서는, (중략)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에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침략하자,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말갈과 발해


천문령 전투에서 무주군의 중랑장 색구를 참살했고[2] 이후에는 무왕의 명을 받아 산둥 반도의 등주를 기습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죽였다. 이후 등주에는 실업자가 넘치는 등 발해군의 기습으로 인한 피해가 컸다고 한다. 등주는 에서 발해를 해로로 공격하는데 있어서 최적의 군항으로 이용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이 시기 육로는 거란, 돌궐 등과 얽혀 있었기 때문에 신라로 하여금 발해의 후방을 치게 하고 바다를 통해 수도를 직접 공격하는 과거 백제 공격과 같은 형태를 노릴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발해의 입장에서는 등주가 군사적 목표점으로서 의미 부여가 된다.

이 때 요동 반도에서 당군의 저지가 보이지 않고 산둥성하북성에 이르러서야 저지선이 형성되는 점, 요동 일대를 관할하는 발해의 직책이 보이는 점과 더불어 발해가 이미 이 시점에서 요동 일대를 차지했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3] 계속 바다를 통해 공격한다고 언급되는 이유는 등주가 산둥 반도의 발달된 상업항이고 발해가 굳이 육로로 당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요동은 물론이고 요서 일부까지 점령해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도 만리장성황하를 넘는 등의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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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해 장군들에 대해 남아 있는 발해의 기록 자체가 없다. 장문휴 개인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고 발해의 등주 공격 내용이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2] 박은식발해태조건국지에 이것이 나타나 있다.[3] 실제로 남아있는 기록은 무왕이 장문휴로 하여금 등주를 공격하게 했고 그 결과 등주자사를 죽였다는 것으로 끝이므로 과정은 전혀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