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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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화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 독재자. 군사독재자였던 그의 이력에 비추어 통칭 총사령관, 영어로는 Generalissimo Chiang으로 통한다.[2]나는 중국이다. 중국은 나 없이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
신생활운동을 비판한 외국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에게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기의 제2 · 4대 국민정부 주석이자 헌정 실시 이후 대만의 제1 ~ 5대 총통을 역임하였으며, 무려 46년 동안 집권하여 세계사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장기집권한 비군주 지도자로도 꼽힌다.[3]
2. 설명[편집]
장제스는 청나라의 멸망, 위안스카이의 왕조 복권 시도, 군벌 때문에 갈라진 중국을 스승인 쑨원의 사상을 계승하고[4] 북벌을 감행하여 마지막 군벌인 봉천군벌의 항복을 받아 1920년대 후반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한 인물이다.[5]
하지만 인생 자체가 수난사의 연속이기도 했는데, 분열된 근대 중국을 겨우 통일했나 싶은 찰나 얼마 안 가 쳐들어온 일본 제국을 방어해야 했고[6] , 기어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국 연합국의 일원으로 여러 지위를 받아 유엔의 설립과 동시에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와 함께 향후 국제 세계를 이끌어갈 5대 강대국으로 인정받으며 유엔 상임이사국 지위까지 얻었더니[7] , 국공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결국 중국 대륙의 판세를 중국 공산당에 빼앗기고 타이완섬으로 쫓겨나는 국부천대의 치욕을 당하고 만다.
국부천대 이후 대만으로 쫒겨났을 당시에도 죽을 때까지 대륙 회복을 포기하지 않고 대만의 경제, 사회 시설을 발전시켜 본토에서의 행적뿐만 아니라 현대 대만에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나, 한편으론 대만이라도 사수하겠다는 아집 혹은 두려움 아래 수십 년 계엄령을 때리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등 독재자로 군림해 오늘날 대만에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국민당 계열에선 중정기념당에서도 보이듯 쑨원 바로 다음가는 주요 인물로 여기며 영웅시하지만, 민주진보당 같은 민주화 진영에선 민중을 탄압한 독재자로 취급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극단적인 대만 독립주의자들의 경우 아예 외국(= 중국)에서 온 침략자로 보기도 한다.
실제 그가 이룬 통일은 전대의 대표적 통일 군주들인 시황제, 유방, 조광윤, 주원장에 미치지 못한, 군벌들이 세를 유지한 채로 중화민국의 일원이 되는 일종의 연맹왕국 성격인 외형적 통일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의 갈등조차 제어하지 못해 반장전쟁이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내전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지속된 외형상 통일의 한계는 곯아 터져 시안 사건으로 드러나고 만다. 중화민국 몰락의 원인은 군벌과 장제스의 갈등 외에도, 낙후된 사회 시설, 그리고 공산당 토벌과 항일 운동 중 의견 차로 내부 분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안 사건을 일으킨 장쉐량은 순수한 항일 목적이 아닌,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빼앗겨 영향력을 상실해가자 궁지에 몰려 장제스를 감금한 것에 가깝다.
이후 일본 제국이 본토를 공격했고 난징 대학살 같은 비극을 견뎌내며 8년간의 항쟁 끝에 중국을 겨우 지켜냈으나 부정부패 등 내부 단속 실패로 인한 민심, 군심 이반과 시안 사건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중국공산당을 비롯한 마오쩌둥 세력에게 중국 대륙을 빼앗기고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타이완섬만 통치하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최악의 상황에도 장제스는 본토 수복을 목표로 삼는 열정을 보여주었지만 그에 반발한 대만 국민들이 시위에 나서자 군대를 동원하여 2.28 사건을 일으키는 등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3.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가 젊었을 시기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지지만, 군벌의 난립으로 중국이 난세에 빠진다. 장제스는 쑨원 사후 국민당의 지도자로 등극한 뒤, 국민혁명과 반장전쟁으로 외형적으론 군벌들을 굴복시켜, 외형상 중국 통일을 완성한다. 국공내전에서 패한 이후 국부천대로 대만으로 건너간다.
유년기엔 일본으로 유학하여 군관학교를 졸업했고 1912년 본토에서 제정을 폐지시키는 신해혁명에 가담했으나 쑨원을 속이고 황제를 선포한 위안스카이의 축출엔 실패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 그곳에서 전전하다 중국으로 돌아와 황포군관학교를 세워 자신만의 기반을 만든다.
이후 스승인 쑨원이 사망하자 중산함 사건을 계기로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내에서 힘이 강했던 왕징웨이를 몰아낸 다음 국민당 1인자가 되어 북벌을 감행해 위안스카이 이후 중국의 마지막 난세인 근대 군벌시대를 종식시켜갔고, 최종적으론 만주 일대를 장악한 봉천군벌의 장쉐량이 국민당에 투항하자 중국을 다시 통일했으며 군벌 군대의 축소를 두고 그것에 반대한 옌시산, 펑위샹 등의 반란을 진압해 1인자의 입지를 다졌으나 곧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장쉐량의 만주를 빼앗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워 만주국을 선포, 중국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소멸 직전의 중국공산당을 치기 위해 시안까지 이동하여 국민혁명군을 지휘하려 했으나 빼앗긴 만주 수복이 아닌 공산당 축출만을 앞장서는 장제스에 반감을 품은 장쉐량이 그를 감금하여 강제로 항일을 목적으로 하는 국공합작을 체결시킨다. 곧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 제국이 이를 빌미 삼아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결국 한계에 부딪혀 화북 지역과 수도인 난징까지 빼앗기고 난징대학살이란 끔찍한 피해까지 겪었으나 약 8년간의 긴 항쟁 끝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하여 중국 보존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전 중일전쟁의 후유증과 여러 개혁 정책의 실패, 부정부패에 대한 관리 실패로 인한 민심 하락은 국민당을 약화시키게 했고 공산당에게 처참하게 밀리는 모습을 본 미국마저 지원을 중단하기까지 이른다.[8] 서서히 대륙을 상실하자 마지막엔 대만 타이페이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본토 수복을 꾀한다. 하지만 수복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대만으로 이동한 후 자신에게 반발하는 본성인들을 학살해 자신의 독재를 강화했다.
비록 커다란 대륙을 잃고 국가적 위신마저 실추당하기까지 했으나 대만에서 명(命)을 보존하는 것은 성공해 이후 대만의 경제 성장, 문맹 퇴치, 부정부패 척결 등을 실시해 나름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죽을 때까지 계엄령을 휘두르며 대만을 통치하던 장제스는 1975년 87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차기 총통은 그의 아들 장징궈가 잇게 된다.
오늘날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일본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구한 항일 영웅 또는 민주주의를 탄압한 독재자, 심각한 부정부패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대륙을 중국공산당에게 빼앗긴 무능한 지도자, 대만의 기적을 이루어낸 지도자,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학살자라는 다양한 평가가 공존한다.
4.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사상과 성격[편집]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의 학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타 정치인과의 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타 정치인과의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이름 표기법[편집]
중국 근현대사 인물 중 본명보다 자로 더 잘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본명은 장중정(蔣中正), 자(字)가 개석(介石)인데 한국에서도 장개석으로 알려져있다.
마오쩌둥 역시 룬즈(潤之, 윤지)라는 자(字)가 있지만 그냥 본명인 쩌둥(澤東, 택동)으로 더 유명하다. 대부분의 중국 근현대 인물이 본명으로 더 유명한데 비해 유독 장개석만 동서를 통틀어 언급될 때 자로만 불린다.[10]
장개석의 본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생소한 편이다. 대만의 중정기념당, 중정국제공항 (현 타오위안 국제공항)을 통해 그나마 일반인들이 장제스의 본명을 알고 있는 정도. 당시 중정국제공항은 영문으로는 Chiang Kai-shek International Airport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한자문화권의 국민들이나 간간히 안다.
- 장제스의 학명은 '장즈칭(蔣志清, Jiǎng Zhìqīng)'이며 그의 두 번째 이름이 1913년경 바꾼 '중정(
中 正 )'이다. '제스(介 石 )'는 본래 191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이었으나 이후 자(字)로 사용했다. - 이 문서 표제로도 올라와 있는 '장제스'는 '장개석(蔣介石)'의 표준중국어 발음을 국립국어원의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옮겨 적은 것으로, 한어병음의 표기를 따르면 'Jiǎng Jièshí'가 된다. 병음을 보면 알겠지만, 스는 권설음이라 한국어 '스'와 다른 발음이다. 만약 온갖 표기 원칙을 무시하고 근사치 표기를 하면 [tɕjàŋ tɕjê.ʂɻ̩̌](지앙지에시으) 정도일 듯.
- 영어권을 비롯해 대부분의 서양 언어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창카이섹, 'Chiang Kai-shek'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표기는 광동어 발음 '쬥가이쎅(표기법 기준) / Zoeng2 Gaai3-sek6 (홍콩 언어학 학회(LSHK) 표기법 기준)'의 변형이다. 성씨 '蔣'은 표준중국어 발음 기준 웨이드식 표기법인 'Chiang'이고, 나머지는 광동어 발음 표기의 변형. 초기에 중국 국민당의 본진은 광둥성에 있었고, 장제스가 두각을 나타낸 때가 광동 국민 정부 시절이었기에 광동어식 발음으로 서구에 알려졌다. 영어 위키백과 해당 항목명도 'Chiang Kai-shek'. 드물게 표준 중국어 발음을 웨이드 식으로 옮긴 Chiang Chieh-shih도 쓰이기는 한다.
- 한국의 경우 국립국어원의 중국어 표기법에서 신해혁명 이후 중국 인물에 대해서는 한자 인명을 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옮겨 적는다는 원칙을 두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장제스'라는 표기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한국 한자음 그대로 표기해 '장개석'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문서가 장개석으로도 리다이렉트된다.
- 대만에서는 '蔣介石'보다도 본명을 적은 '蔣中正'이 더 널리 쓰이며(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ㄐㄧㄤˇ ㄓㄨㄥ ㄓㄥˋ'.[한어병음] 한국 한자음과 비슷한 '장중정'으로 읽는다.), 대만 내 영어 표기에서는 'Chiang Kai-shek'을 쓴다. 대만어 발음으로는 Chiúⁿ Kài-se̍k. 간단하게는 중정/C.K.S.으로 쓴다.
- 일본에서는 '蔣介石'을 자신들 방식으로 읽어 'しょうかいせき(쇼카이세키)'라고 한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중국어 인명을 표준중국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있고, 그나마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에 활약한 인물은 거의 그렇게 표기하지 않는다.
- 베트남에서는 '蔣介石'을 베트남어식 한자 독음으로 읽어 Tưởng Giới Thạch(뜨엉 저이 타익)으로 부른다. 베트남은 중국어 인명을 표준중국어 발음으로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고 거의 일괄적으로 베트남어식으로 읽고 쓴다. 따라서 마오쩌둥 역시 Mao Trạch Đông(마오 짜익 동)이 된다.
8. 어록[편집]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피부병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심장병이다.
The Japanese are a disease of the skin. The Communists are a disease of the heart.
1941년, 시어도어 H. 화이트와의 인터뷰에서.
중화민국을 설립한지 27년이 지났습니다. 이 시기 동안 소위 대중집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나 헌정주의는 없었습니다. 또한 불행히도 이런 초기 집회들이 몰고 온 수많은 부패 관행들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나라를 혼란과 허약한 상태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나라는 우리의 적들로부터 억압과 굴욕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인민정치위원회는 의회가 아니지만 여러분은 정당정치가 빚어낸 과거의 실수들이 지속적인 경고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동시에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굳건한 기반을 세울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동포 여러분. 구악을 생각하지 않고 타인에게 선을 배푸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지고지귀(至高至貴)의 특성이며 우리가 일관되게 성명한 '우리는 일본 군벌은 적으로 삼되 일본 인민은 결코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폭(暴)으로 폭을 갚고 능욕을 가지고 그들의 지금까지의 잘못된 우월감에 대응한다면 원통함과 원통함은 서로 앙갚음하여 영원히 끊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인의의 스승이 가르친 목적이 아닙니다.[11]
강대국의 압박에 맞설 수 있는 국가가 있다면, 그 국가는 강한 것이다.
대륙을 다시 공격하여.. 동포를 구하라. 대륙을 다시 공격하여.. 중국을 구하라.
장제스의 유언으로 알려진 문장.
9. 여담[편집]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여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갤러리[편집]
11. 한국과의 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한국과의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장제스/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1. 역사서[편집]
- 장제스의 저서라 알려진 중국의 운명이 1946년에 한국에 출판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고서점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다.
- 1970년대 말부터 대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일본의 산케이신문에서 연재 후 출판한 '장개석 비록'이 있다. 한국에선 1976년, 1부에 해당하는 분량이 6권으로 출판되었으나 2부는 끝내 정발되지도 않았고 그나마 들어온 것도 옛날에 절판되어서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이후 장개석 비록의 주요 필진이었던 후루야 켄지지의 주도로 영어 번역 버전도 나와서 세인트 존스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하였으나 이 역시 현재는 조너선 펜비와 제이 테일러의 장제스 평전에 밀려서 흔적도 찾기 힘들다. 현재도 판매되는 서문당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가 장개석 비록의 짭퉁인지라 정히 보고 싶다면 이쪽이 있다. 원래 1986년에 출판되었다가 2014년에 재판되었는데 재판을 대충했는지 곳곳에 오탈자가 많으며 문체나 편집 스타일 자체도 좀 예스럽고 장징궈가 아직도 현 대만 총통이라고 되어 있는 등옛날에 나온 책이라는 티를 좀 낸다. 이후 산케이 신문에서는 마오쩌둥 비록 역시 내놓은 바가 있다.
- 장제스는 1915년부터 1973년까지 57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붓으로 일기를 썼다. 1917년에 푸젠성 지역의 전투에 휘말리면서 1917년 이전의 자료는 일부 망실되었다.'제요(題要)'라는 제목 아래 그날 있었던 주요 사건과 알게 된 과정을, '예정(豫定)'이라는 제목 아래 급히 해야 할 일을, '주의(注意)'라는 제목으로 정세 평가와 판단, 유념할 일을 적고 '기사(記事)'라는 제목 아래 그날 한 일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매주마다 반성할 점과 다음 주에 할 일을, 매달마다 반성할 점과 그달 있었던 사건들을 적었으며, 매년마다 반성할 점을 적어두고 빠진 기록들을 보충해 놓았다. 주위 인물에 대한 평이나 쌍욕, 또는 검열삭제 관련 기록을 적어두기도 했다. 미국 후버 연구소가 유족으로부터 이걸 빌려와 2006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일기를 공개했다.
장제스가 집권자였던 시절의 일기가 공개되었다 한들 절대로 웹 공개를 허락하지 않으며 보고 싶으면 후버 연구소에 열람을 신청하고 다시 후버 연구소가 장제스 유족들에게 허락을 받는 식으로 진행하여서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보기 복잡했다. 게다가 이후 저작권 문제가 복잡해져서 장제스의 남은 유족들이 누구 맘대로 일기를 후버 연구소에 기증했냐고 소송을 걸어서 현재는 읽기가 좀 복잡해진 상태다. 즉, 전문가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보기가 힘들다.
한편, 1917년 이전의 일기의 일부는 장제스가 쑨원을 따라 광둥성으로 떠나면서 장제스의 은사가 맡아 보관하고 있다가 문화대혁명 시기에 발견되어 용케도 파괴되지 않고[12] 현재 중국대륙에서 전시하고 있다.
이는 위에 언급한 공개된 일기가 아닌 일기의 공개 이전에 나온 부분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레이 황 교수는 2006년의 일기 완전 공개가 있기 전인 2000년에 타계했다. 그래서 장제스 일기를 읽다의 역자의 말을 보면 번역이 너무 늦어져서 죄송스럽다는 역자의 말이 남아있다. 2004년에 원고를 받았는데 중국어판과 영어판이 너무도 다른 등 번역에 애로 사항이 꽃피어 2009년에야 완성됐다고 한다. 타이완 출판 버전과 미국 출판 버전이 다른데, 미국 버전은 미국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스틸웰-장제스 불화나 카이로 회담 등에 관한 내용을 더 많이 넣었다고 한다.
- 미국의 외교관 출신인 제이 테일러가 집필하고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장제스 평전(The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the Struggle for Modern China)이 있는데 이건 국내에 정발되지 않았다. 조너선 펜비의 책보다도 전향적인 장제스 재평가를 시도한 책 중 하나다.
-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 평전을 집필했던 알렉산드르 판초프와 스티븐 레빈이 장제스 평전을 2023년에 새로 썼다. 제목은 Victorious in Defeat: The Life and Times of Chiang Kai-shek, China, 1887-1975.
- 대만에서는 장총통전을 비롯하여 장제스를 칭송하는 저작들이 많다. 다만 장제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대만 보수 세력의 정치적 목적을 겸하기도 하기 때문에 저작의 학문적인 질은 장담할 수 없다.
- 중국 본토에서는 20세기까지만 해도 장제스를 부정부패와 부하 관리 제대로 못해 중공에 대륙을 홀라당 내주고 대만에 도망친 무능한 사람 정도로 비하하는 분위기가 강했으나, 21세기 들어 양안관계가 강조되면서 어느정도 재평가되어 항일 지도자로 평가하는 여론이 조성되면서 장제스 평전이 출간되는 등 일종의 장제스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장제스를 높여야 그와 맞서 이겨 대륙을 차지한 마오쩌둥을 더 높일 수 있게 되기도 하고….
13. 참고 문헌[편집]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의 전반적 생애 관련.
- 중일 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일 전쟁 시기와 공업화 관련.
- 중국 혁명사, 서지영, 한울 아카데미 - 장제스의 농업 정책 관련.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 - 난징 10년 관련
- 덩샤오핑 평전, 벤자민 양, 황금가지 - 국공 합작 결렬과 상하이 쿠데타, 펑위샹 관련.
-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로이드 이스트만, 민두기 역.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 출판 삼화 - 초공 작전 관련.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 역사 - 중일 전쟁 관련.
- 중일 전쟁과 중국의 대일 군사 전략, 기세찬, 경인 문화사 - 중일 전쟁 관련.
- 모택동의 사생활 1~3권, 리즈수이, 고려원 - 반우 운동 관련.
- 장칭, 정치적 마녀의 초상, 로스 테릴, 교양인 - 장칭의 난징 정부 회상 관련
- 학문의 제국주의, 폴 코헨, 순천향 대학교 출판부 - 서양 학계 시각 비판 관련.
- 남경 정부 시기 국가 주도하 국민 경제 건설, 강명희, 한세 대학교 - 장제스 경제 정책 관련.
- 1930년대 농촌 위기와 남경 국민 정부의 농업 정책, 아주 대학교 - 장제스 농업 정책 관련.
- 1920~30년대 난징 국민 정부의 농촌 정책: 장쑤 성을 중심으로, 박정현, 고려 대학교 - 장제스 농업 정책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