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코부르크고타의 지빌라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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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테르보텐 공작부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지빌라 공녀
Prinzessin Sibylle von Sachsen-Coburg und Got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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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독일어
지빌라 칼마 마리아 알리체 바틸디스 페오도라
(Sibylla[1] Calma Maria Alice Bathildis Feodora)
스웨덴어
시빌라 칼마 마리 알리스 바틸디스 페오도라
(Sibylla Calma Marie Alice Bathildis Feodora)
출생
1908년 1월 18일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고타 프리덴슈타인 궁전
사망
1972년 11월 28일 (향년 64세)
스웨덴 스톡홀름
배우자
베스테르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
(1932년 결혼 / 1947년 사망)
자녀
마르가레타, 비르기타, 데시리에, 크리스티나, 칼 16세 구스타프
아버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
어머니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빅토리아 아델하이트
형제
요한 레오폴트, 후베르투스, 카롤리네 마틸데, 프리드리히 요시어스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
3.2. 결혼과 자녀
3.3. 말년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5. 여담



1. 개요[편집]


스웨덴의 전 왕세손비.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인 카를 에두아르트의 장녀이자 현 스웨덴의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어머니이다. 남편이 왕세손 시절에 사망했기에 왕세자비와 왕비가 되지 못했다.


2. 작위[편집]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녀, 작센의 여공작, 영국의 공주 지빌라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Sibylla of Saxe-Coburg and Gotha, Duchess of Saxony, Princess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1908년 1월 18일 ~ 1919년 3월 28일)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녀, 작센의 여공작 지빌라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Sibylla of Saxe-Coburg and Gotha, Duchess of Saxony (1919년 3월 28일 ~ 1932년 10월 19일)[2]
  • 스웨덴의 베스테르보텐 공작부인 시빌라 왕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Sibylla of Sweden, Duchess of Vstersterbotten (1932년 10월 19일 ~ 1947년 1월 26일)
  • 스웨덴의 베스테르보텐 공작 대부인 시빌라 왕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Sibylla of Sweden, Dowager Duchess of Västerbotten (1947년 1월 26일 ~ 1972년 11월 28일)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1908년 1월 18일 프리덴슈타인 궁전에서 작센코부르크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3]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빅토리아 아델하이트 공녀의 둘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지빌라와 형제들은 대부분의 왕실 자녀들처럼 보모와 가정교사들에 의해 양육되었고 부모와 보내는 시간은 드물었다. 대신 형제들끼리 뭉쳤다. 놀이부터 공부까지 모든 걸 함께 하며 자랐다. 지빌라는 특히 남동생 후베르투스[4]와 사이가 돈독했으며, 육촌 여동생 키라 키릴로브나 여대공[5]과도 평생 지속되는 우정을 쌓았다. 지빌라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큰 관심이 있었으며, 미술사 책 읽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바이마르의 한 미술 학교에서 6개월간 공예를 배우기도 했지만, 당시 시대상 취미로 그쳐야 했다. 이에 대해 지빌라는 만약 운명이 다르게 흘렀다면 가구 디자이너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1928년과 1929년 겨울에는 고모 앨리스 공주와 함께 케이프타운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이때의 경험은 평생의 추억이 되었다.

3.2. 결혼과 자녀[편집]


스웨덴의 잉리드 공주는 오빠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의 짝을 찾고 있었고 지빌라를 오빠와 이어주고 싶었다. 지빌라는 유럽의 여러 왕가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또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지빌라와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는 둘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으로 6촌이기도 했다.[6] 좋은 결합이라 생각한 앨리스 공주도 조카 지빌라를 격려했다. 그러던 중, 앨리스 공주의 딸 메이의 결혼식에서 지빌라가 신부 들러리를 서게 되었다. 당시에 지빌라는 메이의 사촌이었고 애슬론 일가와 매우 가까웠다. 앨리스는 다른 친척들에게도 들러리를 부탁했고 그 요청은 잉리드에게도 전달되었다. 잉리드는 열심히 구스타프 아돌프를 설득했지만 그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구스타프 5세의 권유로 구스타프 아돌프는 런던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는 런던에서 지빌라를 만나게 되었고, 아름답고 수줍음이 많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지빌라 역시 잘생긴 스웨덴의 왕자에게 호감을 가졌다. 두 사람은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했고 곧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특히 이 연애를 주선한 잉리드 공주가 기뻐했으며, 이후 지빌라와 잉리드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1932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은 약혼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10월 20일 지빌라의 고향 코부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코부르크는 나치즘이 짙은 도시였기 때문에 구스타프 5세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나치당은 이 결혼식을 당 선전의 기회로 활용하여 도시 전체에 나치의 상징과 깃발을 배치했다. 히틀러 역시 결혼식에 초대되었지만, 참석하는 대신 축하 전보를 보냈다. 결혼식 주례를 맡은 슈베데 시장은 SA 소속으로 전쟁이 끝나고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탈리아와 이집트[7]에서 한 달 간의 신혼여행을 마친 후, 구스타프 아돌프와 지빌라 부부는 스톡홀름에 위치한 하가 궁에 정착했다. 지빌라는 남편과 스카우트 운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공유했다. 부부에게는 마르가레타, 비르기타[8], 데시리에, 크리스티나 네 명의 딸이 태어났다. 하가 궁에서의 평화로운 생활은 스웨덴 국민들에게 이상적인 가정으로 여겨졌으며, 공주들의 이름은 그 시기 여자 아이들의 이름 짓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점점 잔혹해지는 나치 권력과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지빌라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빌라의 아버지 카를 에두아르트돌격대에 가입하고 친위대를 지지하며, T4 작전에까지 적극적으로 가담한 나치 부역자였다. 이로 인해 지빌라는 협박 편지를 수시로 받게 되었다.[9] 지빌라는 전쟁 중에 독일군에게 선물을 전달하거나 전사한 독일군을 기리는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는 독일 출신의 공녀로서 한 일이었지만 스웨덴의 왕세손비로서 이웃 국가이자 친척인 노르웨이[10]를 점령한 독일군을 지원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60년대 인터뷰에서 그녀는 나치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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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지빌라와 구스타프 아돌프는 네 명의 딸을 두었지만 스웨덴에는 남성 왕위 계승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지빌라는 1945년 가을에 다시 임신했다. 이번 임신은 두통과 메스꺼움으로 고생했던 앞선 임신들과 다르게 순조로웠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이번에는 아들을 낳을 징조라며 농담했다. 모두가 아들의 탄생을 고대하던 중, 1946년 4월 30일 드디어 아들 칼 구스타프 왕자를 낳고 지빌라는 안도감에 눈물을 흘렸다. 스웨덴 전체가 후계자의 탄생에 들썩였다.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자와 루이즈 왕세자비가 일찍이 하가 궁을 방문했고 독감으로 요양하던 구스타프 5세도 달려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하가 궁의 시종장은 기쁨에 기절까지 했다.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구스타프 아돌프는 네덜란드에서 베른하르트 공과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항공사고로 요절하고 말았다.[11] 39세의 지빌라는 다섯 아이와 홀로 남겨졌고 막내 칼 구스타프는 겨우 생후 9개월이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지빌라는 결코 아이들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이들도 감히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못했고, 막내 아들 칼 구스타프는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가 사고사했다는 걸 몰랐다. 사별 후에는 큰 충격으로 머리가 하얗게 셌다. 1년 후에는 구스타프 아돌프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의 사망 후 지빌라를 지원해주던 폴케 베르나도테도 암살당해 지빌라를 더욱 힘들게 했다. 1950년 지빌라와 아이들은 스톡홀름 궁으로 이사했다. 후에 지빌라는 당시 발 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3.3. 말년[편집]


남편의 사망 후, 지빌라에게는 아들 칼 구스타프를 미래의 국왕으로 양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녀는 점차 더 많은 공무를 했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을 받았다. 1965년 시어머니 루이즈 왕비가 사망한 후로는 스웨덴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죽음이 아니라 '스웨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할지'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지빌라는 1972년 대장암에 걸려 쇠약해졌으며, 시아버지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90세 생일 축하연 약 2주 후인 1972년 11월 28일 오후 4시 막내딸 크리스티나 공주가 곁을 지키는 가운데 사망했다. 12월 7일 장례식 후 유해는 남편 곁인 솔나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다.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며느리의 죽음에 크게 슬퍼했다. 그리고 지빌라가 사망한 지 약 10개월 뒤인 1973년 9월 15일 아들 칼 구스타프가 왕위에 올랐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지빌라 공녀
(Princess Sibylla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

(Charles Edwar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Prince Leopold, Duke of Albany)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네 공녀
(Princess Helena of Waldeck and Pyrmont)
발데크피르몬트 공 게오르크 빅토어
(George Victor, Prince of Waldeck and Pyrmont)
나사우의 헬레네 공녀
(Princess Helena of Nassau)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빅토리아 아델하이트 공녀
(Princess Victoria Adelaid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Friedrich Ferdinand, Duke of Schleswig-Holstein)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Friedrich, Duk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델하이트 공녀
(Princess Adelheid of Schaumburg-Lippe)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의
카롤린 마틸데 공녀
(Princess Karoline Mathild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Augustenburg)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프리드리히 8세
(Frederick VIII, Duke of Schleswig-Holstein)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아델하이트 공녀
(Princess Adelheid of Hohenlohe-Langenburg)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배우자/자녀
1녀
앰블러 부인 마르가레타 공주
(Princess Margaretha, Mrs. Ambler)
1934년 10월 31일
(89세)
존 앰블러
슬하 2남 1녀
2녀
비르기타 공주
(Princess Birgitta)
1937년 1월 19일
(87세)
호엔촐레른의 공자 요한 게오르크
슬하 2남 1녀
3녀
실프버시올드 남작부인 데시리에 공주
(Princess Désirée, Baroness Silfverschiöld)
1938년 6월 2일
(85세)
니콜라스 실프버시올드 남작
슬하 1남 2녀
4녀
매그너슨 부인 크리스티나 공주
(Princess Christina, Mrs. Magnuson)
1943년 8월 3일
(80세)
토드 매그너슨
슬하 3남
1남
칼 16세 구스타프
(Carl XVI Gustaf)
1946년 4월 30일
(77세)
실비아 좀멀라트
슬하 1남 2녀[12]

5. 여담[편집]



  • 스웨덴 왕실에 시집을 와서도 스웨덴어를 잘 못했다고 하며, 스웨덴 궁정의 사교계에서도 이런저런 제한을 받아 어려워했다. 그럼에도 왕실의 의무를 중요시하였고, 시어머니 루이즈 마운트배튼처럼 소탈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 엄격했던 자신의 부모님과 그랬던 것처럼 지빌라는 자녀들과 따뜻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아이들은 유모 Nenne[13]를 어머니처럼 따랐고 지빌라는 종종 질투를 느꼈다. 그래도 Nenne와 훗날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 다양한 코끼리 관련 물품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 남편의 사망 후 친구인 한 은행가와 죽을 때까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어느 정도 깊이의 관계였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지빌라의 자식들도 그가 어머니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했다고 한다.#

  • 딸들이 누구든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 전체적인 삶을 통틀어 보면 비운의 여인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 카를 에두아르트가 나치에 관련되었기 때문에 결혼 생활 중에도 나치 동조자의 딸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남편 베스테르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도 잠시 막내인 칼 구스타프 왕자가 돌이 되기도 전에 남편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과부가 되었다. 이후에는 다섯 아이를 혼자서 힘겹게 키워야만 했다. 또한 시어머니인 루이즈 왕비가 사망하자 이번엔 스웨덴의 퍼스트 레이디가 되어 시아버지를 열심히 도왔는데, 결국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본인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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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ibylle로 적기도 한다.[2] 원래 아버지 카를 에두아르트가 영국의 왕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녀들도 영국의 왕자/공주 칭호가 있었으나 1차 대전 중인 1917년에 제정된 작위 박탈법(영국의 귀족이면서 전쟁에서 영국에 맞서 싸운 사람들의 작위를 박탈함)이 1919년 3월 28일 발효되어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 카를 에두아르트 일가 외에 하노버 왕가 등이 해당.[3] 빅토리아 여왕의 4남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의 아들이었다.[4] 2차 세계대전 중 전사했다. 지빌라는 후에 아들의 이름에 사랑했던 남동생의 이름을 넣었다.[5] 지빌라의 아버지 카를 에두아르트와 키라의 어머니 빅토리아 멜리타가 사촌이다.[6] 지빌라의 아버지 카를 에두아르트와 구스타프 아돌프의 어머니 마르가레타 왕세자비가 친사촌이었다.[7] 구스타프 아돌프의 부모가 처음 만난 곳이다.[8] 비르기타 공주에 의하면 자신이 태어나기 전 한 차례 유산이 있었다고 한다.[9] 결국 카를 에두아르트는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범 신분으로 재판에 서서 벌금형을 선고받고 전재산까지 몰수당했다.[10] 지빌라의 당고모인 웨일스의 모드가 노르웨이의 왕비였다. 아버지 카를 에두아르트와 웨일스의 모드는 서로 친사촌이다. 당시 왕세자였던 올라프는 6촌이다.[11] 지빌라도 초대받았지만 독한 감기에 걸려 집에 머물렀다.[12] 빅토리아 왕세녀, 칼 필립 왕자, 마들렌 공주[13] 잉리드 비욘버그(1913~1994) 칼 16세 구스타프의 세 자녀도 돌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