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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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 自由意志
영어: Free Will
1. 개요
2. 자유의지가 없다면?
3. 리벳 실험
4. 결정론과의 관계
4.1. 양립가능론
4.2. 양립불가능론
4.2.1. 강한 결정론
4.2.2. 자유의지주의
5. 철학사의 사례
6. 다른 분야에서의 자유의지


1. 개요[편집]


형이상학윤리학에서 논쟁거리인 개념 가운데 하나. 구속당하거나 강제당하는 것 없이 순수하게 로부터 비롯되는 의지. 이런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을 두고 "자유로운 행위"라고 부른다. 기초적이면서도 직관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상황: 철수가 은행강도 짓을 저질렀다

* 시나리오 A: 괴한들이 철수를 보고 은행강도 짓을 하라고 협박했다. 지금 철수 몸에는 원격 폭탄이 부착되어있다.

* 시나리오 B: 누군가가 철수의 음료수에 환각제를 탔다. 그 환각제를 복용하면 은행강도 짓을 하고 싶어진다. 철수가 그 음료를 마셨다.

* 시나리오 C: 철수가 길을 걷다 그냥 스스로 마음을 먹고 은행강도 짓을 저질렀다.


시나리오 A의 경우 철수는 괴한들에 의해 "강제로" 은행강도 짓을 저지른 것처럼 보인다. 시나리오 B에서도 철수가 은행강도짓을 한 것은 "스스로 마음을 먹은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 같다. 반면에 시나리오 C에서 철수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은행강도 짓을 저지른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시나리오 C는 시나리오 A, B와 확연히 대조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때 시나리오 C에서 철수는 직관적으로 '자유의지를 발휘'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2. 자유의지가 없다면?[편집]


"자유의지"라는 게 없다고 가정해보자. 즉 자유로운 의지도, 자유로운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가정은 대개 위험하다고 여겨진다. 만약 이 가정이 맞다면 문명을 가진 인류가 지금껏 쌓아온 , 제도, 윤리, 종교 거의 대부분이 기초하고 있는 것이 자유의지인 만큼 인류의 대혼란을 야기하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통상 도덕적 책임필요조건이라고 여겨진다. 즉 자유의지가 없었다면, 도덕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상기 예시를 다시 들어보자. 철수가 괴한에게 협박당한 시나리오 A와 환각제를 먹은 시나리오 B의 경우, 철수는 자유의지를 발휘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철수는 은행강도 짓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의지라는 게 없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시나리오 C는 시나리오 A, B와 다를 바가 없다. 자유의지란 것은 없으므로, 시나리오 C에서도 철수는 자유의지를 발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 필요조건이 만족되지 않았으므로 철수는 시나리오 C에서도 은행강도 짓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즉 시나리오 A와 B에서 철수에게 처벌을 내리는 것이 부적절하다면, 시나리오 C에서도 철수가 처벌을 받을 근거는 전무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귀결은 위험해 보인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한 입증 근거가 아니다. 다만 자유의지가 인류가 지금껏 쌓아온 제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만큼 그 유무 여부가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선 별도의 증거를 제시해야만 한다.


3. 리벳 실험[편집]


'자유의지가 있다'는 주장은 운명을 중시한 고대부터 오랫동안 의심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의심은 생물학심리학이 발전하면서부터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런 자유의지의 유무에 관해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신경과학 실험 중 하나가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이 1980년대에 수행한 소위 '리벳 실험(Libet Experiment)'이다. 리벳 실험의 골자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피험자는 EEG 기구를 착용한다. 이때 EEG로는 대뇌피질 운동영역에서 발생하는 준비 전위(readiness potential)을 측정한다. 준비 전위란 근육 운동이 이뤄지기 전에 측정되는 두뇌 활동 신호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준비 전위가 측정되는 시점을 RP라고 하자.

피험자의 앞에는 버튼 하나가 놓여있고, 피험자가 원하는 때 아무 때나 그 버튼을 눌러도 된다. 이때 버튼을 누르는 시점을 A라고 하자. 다만 버튼을 누르기 전 피험자는 '자기가 버튼을 눌러야겠다고 느낀 것을 깨달은 시점'을 타이머를 보고 확인해야만 한다. 해당 시점을 W라고 하자.

해당 실험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실험한 결과, 세 시점 RP, A, W의 시점은 평균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RP: -500 밀리초
W: -200 밀리초
A: 0 밀리초

즉 위 측정대로라면 버튼을 누르기 위해 근육이 준비를 시작하는 시점은 버튼을 누르기 0.5초 전이며, '버튼을 눌러야겠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은 버튼을 누르기 0.2초 전이다. 그런데 이는 놀라운 결과다. 왜냐면 상식적인 생각은 '버튼을 눌러야지'라고 마음을 먹은 다음에야 근육을 움직일 준비를 하는 것일텐데, 위 실험 결과는 '버튼을 눌러야지'라고 의식적으로 마음을 먹기 전에 이미 근육은 버튼을 누를 준비를 하고 있었던 셈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버튼을 누르겠다고 의지를 발휘하기 전에 이미 몸은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통상 다음과 같은 함축을 갖는다고 해석된다: "자유의지"를 '이렇게 행동해야지!'라는 스스로의 의식으로 정의하자. 그렇다면 어떤 행동을 실행하겠다는 자유의지는 그 행동보다 뒤늦게 나타난다. 따라서 그 행동이 자유의지 때문에 발생한다고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런 정의대로라면 자유의지는 그 행동의 원인이 되지 못하므로 마치 허상이나 다름없다.

이렇듯 리벳 교수는 인간의 결정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며 자유의지의 존재는 거짓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후 존-데일란 하인즈 교수 연구팀 또한 더 발전된 방식의 실험을 벌였다. 어느 쪽 버튼을 누르는 결정을 하면 말하도록 한 것인데, 놀랍게도 이번에는 의사 행동의 최대 10초 전부터 뇌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신호를 포착했다.

이러한 실험 결과가 '자유의지'를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지는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자유의지를 두고 이루어지는 논쟁은 이런 리벳 실험의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루어진다.

4. 결정론과의 관계[편집]


전통적으로 결정론은 자유의지와 양립하기 어렵다고 여겨졌다. 서양 철학사에서 결정론의 대표적인 동기는 다음과 같다:


  • 근대과학적 결정론: 뉴턴 이후로 과학은 수학적 원리로 표현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모든 영역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법칙에 대해서 완벽히 알고, 지금의 세계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에 대해서 안다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플라스의 악마 참조. 앞으로의 미래를 모두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면, 이는 곧 미래는 결정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밀접한 관계이다. 왜냐면 모든 것이 결정되어있다면, 우리는 '달리 행위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며, 이는 자유의지의 해석에 따라선 우리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관계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있으며 , 아래 견해들은 이런 양자 간의 관계에 대한 잘 잘려진 사례들에 해당한다.

4.1. 양립가능론[편집]


Compatibilism
결정론이 참이면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주장 또한 참인 게 가능하다는 입장. 즉 우리가 '달리 행위할 여지가 없었다고 한들', 여전히 우리의 행위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입장에 해당한다. 현대 철학자 중엔 대니얼 데닛이 대표적인 양립가능론자다. 진화의 결과물로 인간에게만 자유의지가 허락되었다는 것. 양립가능론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현대적 논변으로는 프랭크퍼트 사례 참조.


4.2. 양립불가능론[편집]


결정론이 참인 동시에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주장 또한 참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


4.2.1. 강한 결정론[편집]


Hard Determinism
결정론이 참이므로, 자유의지는 없다는 입장. 강한 결정론을 옹호했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스피노자가 있으며, 그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은 당대에 큰 스캔들이 되었다.

4.2.2. 자유의지주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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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tarianism
자유의지가 있다는 게 참이며, 곧 결정론은 거짓이라는 입장. 전통적으로 이 입장에 속하는 경우는 주로 사상가 내지 철학자로, 데카르트칸트, 실존주의 철학자들, 예컨대 장 폴 사르트르가 있다고 할 수 있다[1]. 일부 현대 자유의지론자는 양자역학코펜하겐 해석이 비결정론적임을 들어 자유의지론을 옹호하고자 하나, 이러한 입장은 소위 '우연 논변', 즉 "만약 인간의 행동이 비결정론적이라 한들, 그 행동이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라면 그게 어떻게 자유의지냐?"라는 반론을 해결해야만 한다. 관련된 현대적 논의는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해당 항목 참조.


5. 철학사의 사례[편집]



5.1. 데모크리토스[편집]



5.2. 데카르트[편집]



5.3. 스피노자[편집]



5.4. 라이프니츠[편집]



5.5. 칸트[편집]



5.6. 니체[편집]



5.7. 해리 프랭크퍼트[편집]




6. 다른 분야에서의 자유의지[편집]



6.1. 법학[편집]


법학에서 자유의지는, 특히 형법학에서의 자유의지는 책임성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특히, 자유의지가 없이 외부의 강압이나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범죄행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기대가능성이 없으므로 책임성이 조각되어 죄책을 물을 수 없게 된다. 책임 항목 참조.

6.2. 신학/기독교[편집]


기독교 신학적 예정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출발한 예정설을 편의상 결정론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정론과는 큰 차이가 있다.예정론은 결정론과 다르다. 결정론에 따르면 인간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으며, 인간은 그 운명에 항거할 수 없는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예정설은 시간상 원인관계 순서가 아니라 신학적 설명을 위해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이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적의지도 제한받는다고 보았다. 창조주라 하더라도 스스로 만든 법칙에 이탈할수 없다고 봤다. 그러나 이런식의 접근은 초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그를 이어받은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The modern Augustian School), 오컴의 윌리엄이 대표적인 새로운 길(via moderna)노선에서는 옛 노선인 스콜라적 보편주의 방법론[2]비판했고, 이러한 논쟁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중요한 논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대체로 신은 인과 관계나 물리법칙 같은 스스로 정한 제약에 구속받지 않고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이나 "스스로 인간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신적의지를 제한했다" 정도로 정리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기독교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당시 헬라어로 표현된 성경에서 autexousia라는 단어를 로마시대 스토아 학파들이 쓰는 Liberum Arbitrium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법학자 출신 테르툴리아누스의 언어적 상상력이 떨어지는 상당한 졸역으로[3] 원래의 원어 의미는 '행동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는것' 정도고 현대 영어로는 authority over oneself 정도로 표현된다. 흔히 자유라는 의미의 Liberty, Freedom 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의 인간의 자유 의지는 '인간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행동 책임을 온전히 질 수 있는가' 라는 신학적 명제와 관련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심끝에 기존 번역 단어를 수용하며 논리상 수사학적 설명을 열심히 깃들였지만 이 난해함 덕분에 훗날에까지 많은 오해를 사게 만들었다.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 시기, 당시 지식인들은 로마법의 영향으로 "인간은 행동으로 평가 받는다" 원칙에 익숙했다.[4] 그러나 성서에 기반한 기독교 신학은 인간을 행위로 평가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실존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본다. 인간 이미 고통받고 비참한 상태이다. 예외없이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이다. 어떤 인간도 도덕적 행위를 완벽하게 할 수 없으며 자신의 행위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이 때문에 자유의지는 있으나 무력해진다고 본 것이다.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은 전지전능하므로 시간이나 공간같은 물리적 제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 법칙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인간은 신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행동에 대한 결과를 알지 못할 때도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고, 의도 없이한 행동으로 죄를 짓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다. 일상에서 선택의 자유, 예컨대 점심 메뉴를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같은 일반적 자유의지는 무력하지 않지만, 인간의 종교적 죄악을 다투는 자유의지는 원죄로 타락하여 무력하다. 무슨말이냐면 선과 악의 경계점에서 선택할 자유가 주어지면 자유의지는 악으로만 향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는 이성, 자신의 선함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타고 나지만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하기에 죄를 지을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욕망에 따라 죄를 짓는 동시에 양심의 고통을 받는다. 마치 알콜, 마약중독자들 처럼 후회하고 후회하면서 계속하여 중독에서 벗어날수 없는 처지와 같다. 이처험 인간은 자유의지는 무력하기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고, 결국엔 죄로 손상된 자유의지를 회복하는건 타력으로만 (신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에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러나 인간은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기엔 무력한 존재이다. 이를 회복하는건 인간 자력으론 불가능하다. 신의 구원이 필수적이다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진 못한다. 경험적으로 세상엔 선함을 쫓기보다 악을 행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고, 이들은 완전해 질수 있는 신의 도움을 자유의지로 거부하기에 필연적으로 신의 은혜를 받는 사람은 적다. 이처럼 예정설은 기독교 교리인 인간론과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이다. 예정설 논란은 기독교 내부의 오래된 신학적 논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시절 이래 단독설, 신인 협력설로 갈라져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논제이다. 가톨릭이나 정교회에선 예정설을 부정적이며, 개신교 내부에서도 500년간 중요한 신학적 논쟁이었다. 역사상 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 논쟁, 마르틴 루터와 에라스무스 논쟁,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 주의와의 논쟁등이 있는데 전자가 자유의지는 있으나 무력하다는 단독설 후자가 자유의지를 좀 더 긍정하며 협력할수 있다는 협력설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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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석에 따라 이들이 어떤 입장을 가지는지는 갈릴 수도 있다. 특히 칸트...[2] 새로운 길과 대비된다 하여 옛 길(via antiqua)라고 부른다.[3] Alister E. Mcgrath의 저서 <Iustitia Dei> 참조[4] 그래서 아프리카인 아우구스티누수는 인기가 없었고, 브리튼 섬 출신 수도사 펠라기우스의 설이 유행했다. 펠라기우스는 어디까지나 인간은 행동은 전적으로 책임을 감수해야하며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