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마르 베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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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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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칸 영화제
파일:칸 영화제 로고.svg
감독상
제10회
(1957년)


제11회
(1958년)


제12회
(1959년)

로베르 브레송
(사형수 탈출하다)


잉마르 베리만
(생명에 가까이)


프랑수아 트뤼포
(400번의 구타)
특별심사위원상
제9회
(1956년)


제10회
(1957년)


제11회
(1958년)

앙리 조르주 클루조
(피카소의 비밀)


잉마르 베리만
(제7의 봉인)

안제이 바이다
(카날)

자크 타티
(나의 삼촌)


역대 베를린 영화제 수상작
파일:베를린 국제 영화제 로고.svg
황금곰상
제7회
(1956년)


제8회
(1957년)


제9회
(1958년)

시드니 루멧
(12인의 성난 사람들)

잉마르 베리만
(산딸기)

클로드 샤브롤
(사촌들)


역대 베니스 영화제
파일:silverlion.png
심사위원대상
제22회
(1958년)


제23회
(1959년)


제24회
(1960년)

루이 말
(연인들)

잉마르 베리만
(마술사)

알렉산드르 알로프, 블라디미르 나우모프
(피스 투 힘 후 엔터스)
공로상
제35회
(1971년)

잉마르 베리만



잉마르 베리만
Ingmar Bergman


파일:external/florhage.files.wordpress.com/wpid-pressbildbergman.jpg

본명
잉마르 에른스트 베리만
Ingmar Ernst Bergman
출생
1918년 7월 14일
스웨덴 웁살라
사망
2007년 7월 30일 (향년 89세)
스웨덴 고틀란드 포뢰섬
국적
[[스웨덴|

스웨덴
display: none; display: 스웨덴"
행정구
]]

직업
영화 감독
신체
179cm
활동
1944년 ~ 2005년
모교
스톡홀름 대학교
자녀
9명
종교
개신교(루터회) → 무종교
서명
파일:Ingmar_Bergman_Signature.png

1. 개요
2. 상세
3. 여담
4. 작품(TV시리즈 포함)



1. 개요[편집]


"베리만은 현대 유럽 영화의 가장 독창적인 작가이다.” – 장 뤽 고다르


"그의 영화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며 인간 의식의 심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막스 오퓔스 다음으로 제가 가장 존경하는 영화 감독을 뽑으라면 고민 없이 잉마르 베리만을 뽑겠습니다. 저는 그분의 영화를 전부 다 봤습니다. 《한 여름 밤의 미소》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 스탠리 큐브릭 (카예 뒤 시네마, 1957년 7월 인터뷰) * #


스웨덴영화 감독으로,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 거장 중의 거장이다. 2003년 사라방드를 마지막으로 골반수술 합병증으로 2007년 사망. 과거 한국에선 80년대 영화지에선 '잉그마르 베르히만'이란 이름으로 자주 소개되었는데 일본식 표기인 イングマール・ベルイマン을 그대로 번역한 듯 하다.


2. 상세[편집]


세계적인 예술 영화감독으로, 60-70년대의 대표적인 감독. 《페르소나》를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1957년~1959년간 세계 영화제의 상을 휩쓸었다. 대표적으로 늙은 박사의 한 기묘한 꿈으로 시작된 룬드로의 로드트립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삶과 죽음, 사랑과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인 《산딸기》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타는 영광을 얻었다. 특출한 영화기술을 쓰지 않고서도 현실과 환상을 왔다갔다 하며 극을 이끌어 내는 연출의 묘미가 있다. 《제7의 봉인》을 포함한 작품들로 칸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의 상을 받고 그 뒤 전미 비평가 협회 시상식에서 감독상, 각본상을 휩쓸었다. 이 외에도 스웨덴 감독으로서 북미권 시상식인 아카데미에서 3번의 외국어영화상, 5번의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그 후 세계 영화사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칸, 베니스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처녀의 샘》은 웨스 크레이븐이 나중에 설정만 따와서 과격한 피투성이 영화로 만들었는데 1972년작으로 크레이븐의 데뷔작인 《분노의 13일》혹은 《왼편 마지막 집》(The Last House on the Left)[1] (그런데 이런 여성이 피해받는 복수극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한국에도 한품은 처녀귀신 이야기가 많지않은가).[2] 참고로 《처녀의 샘》은 이미 80년대 KBS 3TV 이름이던 시절의 EBS 일요특선 외화로 방영된 바 있다.

부모와 사이가 그닥 좋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는데 열 아홉 살에는 아버지[3]와 주먹다짐까지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뒤 그들은 수십년간 의절한 상태로 지내다가 1966년에 어머니[4]가 사망한 후 화해하게 된다. 비록 서로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목사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기독교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시작하는 작품들도 여럿 있다.[5] 스웨덴은 예술영화에 한해 국가가 자금을 지원해주는 제도가 존재하였는데, 베르히만은 그 지원비로 1년에 한편씩 영화를 만들어낸다.

1976년 탈세 혐의로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외국으로 도피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여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감독 본인에 따르면 1967년부터 불어난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재무 변호사를 국제 스카우트 연맹으로부터 소개받았는데, 잘못 처리되거나 아예 취소된 거래가 은근히 많았다. 자신도 회사의 재무 관리가 공정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3개월 만에 중앙 국세청에서 기각을 해주었고 영화제작도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그뒤에는 자신의 부모가 어떻게 만나서 결혼했는지를 다룬 '최선의 의도(Den goda viljan)'[6] 등 TV시리즈를 감독하면서[7] 여생을 보냈다. 페르소나를 찍었던 포뢰섬에[8] 정착해 말년을 보냈다. 말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사라방드 발표 직후 발표된 베리만 아일랜드라는 다큐멘터리에 담겨 있다.

2017년 탄생 백주년을 맞이해 스웨덴 영화 연구소에서 전작을 대대적으로 4K 디지털 복원 후 DCP하는 작업을 거쳤으며[9] 복원 작업이 마무리된 2018년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전작 박스셋을 내놓았다.

잉마르 베리만 영화의 거울


3. 여담[편집]


  • 삼남매 중 둘째였다. 첫째 형은 외교관이 되었고, 여동생인 셋째는 소설가가 되었다.[10]


  • 예술영화를 많이 감독하였고, 주로 서정적인 내용의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정작 감독인 본인은 촬영장 안팎에서 흉악한 성격으로 악명 높았다.[11] 나이가 들면서 줄어들긴 했으나 배우와 스태프에게 의자를 던지는 건 기본이었다고. 뮤즈였던 리브 울만(딸이 한 명 있었다. 결혼신고는 안 했음)과 동거했을 때의 일인데 그녀가 베리만에 대해 질문하는 실수를 저질러서, 베리만이 미친듯이 쫓아왔다. 그녀는 화장실에 문을 잠그고 숨었는데 베리만은 문을 발로 차서 구멍을 냈다. 그 과정에서 슬리퍼가 울만의 머리위로 날았고, 노르웨이의 위대한 여배우가 머리에 털 슬리퍼를 얹은채 변기 옆에 웅크리는 모습을 보자 화내는 걸 잊고 웃었다고... 그리고 곧바로 화해하였다.

  • 열여섯 살 때의 흑역사가 있다. 교환학생 자격으로 독일로 간 적이 있는데 일요일 아침 예배마다 목사가 들려주는 나의 투쟁 이야기를 듣고 모두가 하일 히틀러라고 외쳤다고 한다. 물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서 정치에는 절대 관심을 두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 찰스 브론슨과 만난 적이 있다. 브론슨이 화공효과를 위해 몸에 피주머니(전기신호를 보내면 터진다) 를 두르자, 베르히만은 그걸 보고 "멋져요. 이렇게 하는 건 줄 몰랐어요!"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브론슨 왈 "그럼 당신 영화에서는 총기 장면이 안 나오나요?"[12]

  • 베리만의 친딸인 안나 베리만[13]미녀였고 TV와 영화에서 배우로 활동했는데, 자유분방한 성격이라서 노출이 심한 에로틱한 영화들에도 여러 편 출연하였다. 심지어 1970년대 중후반엔 덴마크의 전설적인 포르노 영화 시리즈물인 Zodiac-films 시리즈[14] 중 두 편인 "I Skorpionens Tegn"와 "I Skyttens Tegn"에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포르노 영화인 만큼 당연히 그녀의 실제 성교 장면들도 그대로 나온다. 1960~70년대의 북유럽은 성에 대해 워낙 개방적이고 관대했던 시절이라서 대감독의 친딸이 그런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서 별로 비판받지도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아버지 영화에는 결혼의 풍경화니와 알렉산더에 출연했다.

  • 철학적인 예술영화를 만든 거장으로 유명하지만, 의외로 영화를 관람하는 취향은 다양했다고 한다. 《펄프 픽션》이나 《쥬라기 공원》 같은 영화들도 좋아했고, 집에서 손주들과 《진주만[15]을 관람하기도. 그리고 《섹스 앤 더 시티》를 빼먹지 않고 보는 열혈 시청자였다! 특히 킴 캐트럴이 연기한 사만다 캐릭터를 좋아했다고 한다. 《블루스 브라더스》도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과거의 예술주의적, 작가주의적인 대부분의 감독들이 이런 미국의 상업 영화들을 혹평하고 폄하하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다양한 취향을 갖고 있던 감독인 것이다.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기풍을 자유자재로 연출한다면서 굉장히 부러워한 감독이기도 하다. 타르콥스키는 《희생》을 통해 베리만에게 경의를 표한 바 있다.

  • 현재 스톡홀름에도 그의 이름을 딴 Ingmar Bergmans Gata라는 이름의 길과 광장이 있다. 아주 짧은 길이지만 스톡홀름의 부촌, 명품거리로 유명한 외스테르말름에 있으며 바로 옆에 왕립연극극장(Dramaten)이 있다.



4. 작품(TV시리즈 포함)[편집]


연도
제목
연출
각본
출연
비고
1946
위기
K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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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연출 데뷔작
사랑에 내리는 비
Det regnar på vår kärl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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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인도로 가는 배
Skepp till India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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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음악은 나의 미래
Skepp till India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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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항지[16]
Hamnst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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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감옥
Fänge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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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
Tö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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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환희에 부쳐
Till gläd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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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
Sånt händer inte hä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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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여름 이야기
Sommarl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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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여자들의 꿈
Kvinnors vän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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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모니카와의 여름
Sommaren med Mon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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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밥과 금속 조각
Gycklarnas af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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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사랑 수업
En lektion i kärl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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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Kvinnodrö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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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 밤의 미소
Sommarnattens lee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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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제7의 봉인
Det sjunde inseg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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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딸기[B]
Smultronstäl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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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생명에 가까이[17]
Nära liv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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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
Ansikt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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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처녀의 샘[A][B]
Jungfrukäl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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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눈
Djävulens ö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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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A]
Såsom i en spe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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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겨울 빛[18]
Nattvardsgäster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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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19]
Tystna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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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이 모든 여인들
För att inte tala om alla dessa kvin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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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페르소나
Pers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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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늑대의 시간
Vargtim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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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
Skam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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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의식
Ri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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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
En pa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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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접촉
The To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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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외침과 속삭임
Viskningar och r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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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결혼의 풍경[B]
Scener ur ett äktensk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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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마술피리
Trollflöj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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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고독한 여심[B]
Ansikte mot ansik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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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저주받는 여자들의 춤
De fördömda kvinnornas d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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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1977
뱀의 알[20]
The Serpent's E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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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가을 소나타[B]
Höstsona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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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마리오네트의 생
Aus dem Leben der Marionet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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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화니와 알렉산더[A][B][21]
Fanny och Alex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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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리허설이 지난 후
Efter repetitio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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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카린의 얼굴[22]
Karins ansik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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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다큐멘터리
1986
축복받은 자들
De två sali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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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최선의 의도
Den Goda Vil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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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사적인 고백
Enskilda Sam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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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어릿광대 앞에서[23]
Larmar och gör sig t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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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사라방드
Sarab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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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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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엔 비디오판으로만 소개되었다가, 2009년 리메이크되어 국내에도 원제를 번역한 원래 제목대로 개봉한 영화이다. 9만 달러로 만들어 미국에서만 200만 달러 이상을 벌었다고 한다. 다만 정식으로 리메이크한건 아니다.[2] 영화 자체의 모티브는 중세 스웨덴의 구전시가인 '페르 튀르손의 두 딸들(Per Tyrsson's daughters in Vänge)'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막바지에 아버지가 맹세해서 세웠다고 전해지는 교회는 '셰르나 교회'(Kärna kyrka)라는 곳인데 1834년에 재건축되었기 때문에 원형이 남아 있지 않다.[3] 에리크 베리만(Erik Bergman), 그 당시 루터교회 목사였다.[4] 카린(Karin), 에리크와 결혼하기 전에는 간호사였다.[5] 위에서 언급된 '제7의 봉인'도 사실은 그의 종교관이 녹아들어간 작품이다.[6] 차후에 영화 감독인 빌 어거스트가 베리만이 쓴 각본을 가지고 동명의 영화(The Best Intentions, 1992)를 만들었으며, 이 작품은 9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7] 이후로는 텔레비전 쪽으로 활동 영역을 옮겼다.[8] 김태용탕웨이가 결혼식을 올린 장소기도 하다. 스웨덴 내에서는 휴양지로 유명한 곳.[9] 작업 자체는 2014년부터 꾸준히 해온걸로 보인다. 대표작들은 2010년대 초 이미 복원이 완료된 상태.[10] 작풍이 비슷하다는 평을 받는다. 다만 서로 협업은 안 한 듯.[11] 사실 서정적이라고 해도, 상당히 독기 어린 영화들이 많았다. 《늑대의 시간》처럼 대놓고 공포 영화도 있을 정도.[12] 늑대의 시간에서 권총을 쏘는 장면이 있다. 사람이 안 맞긴 했지만. 베리만은 주로 대화 위주의 실내극 영화로 찍었던 감독이다. 폭력 묘사도 구타나 칼질 정도.[13] Anna Bergman[14] 포르노 배우들이 아닌 기존의 일반 메인스트림 배우들이나 패션모델, 그리고 일반 여성들 대상으로 오디션을 통해 뽑은 신인을 캐스팅하여 일반 영화처럼 스토리가 있는데 섹스 장면은 완전 포르노 수준으로 만들어서 화제를 모으며 당시 덴마크 극장가에서 대히트를 쳤던 흥행작들이다.[15] 애들이 어려서 야한 장면은 빨리 돌리기로 넘기면서 봤다고(...)[16] '항구의 거리'로도 불린다.[B] A B C D E F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작품[17]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 작품. <인생의 가장자리>라는 제목으로도 번역되나 국내 미개봉으로 제목이 정해지지 않음[A] A B C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 작품[18] 스웨덴어 원제는 성만찬 참석자들이란 뜻이다.[19]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20] 상술한 세금 문제가 해결된 후 처음으로 할리우드 대규모 예산을 들여 서독에서 올 로케이션 촬영한 작품이지만 감독 본인은 실패작이라고 회고했다.[21] 기생충, 와호장룡, 서부전선 이상 없다와 나란히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수상작 중 오스카 최다 수상작(4관왕 - 외국어영화상, 촬영상, 의상상, 미술상)을 달성한 영화이다.[22] 감독의 어머니 카린에 관한 다큐이다.[23] 미국에선 1999년에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