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극

덤프버전 : r20210301



1. 평안도 출신 독립운동가, 임병극
2. 만주방면 독립운동가, 임병극



1. 평안도 출신 독립운동가, 임병극[편집]


성명
임병극(林炳極)
생몰
1885년 ~ ?
출생지
평안도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임병극은 1885년생이며 평안도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그 외의 인적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917년 만주로 망명한 뒤 1919년 북간도에서 조직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담하여 제2중대장을 맡았다. 1920년 5월 15일 대한국민회에서는 왕청현(汪淸縣) 춘화향(春華鄕)에서 각 지회의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장정을 독립군으로 양성할 것, 국내와 연락을 긴밀히 하여 국민회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고, 러시아 과격파로부터 무기를 다수 구입할 것, 중국 혁명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 등 여러 사항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 사항들을 실행할 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이 때 임병극은 이진(李鎭), 김강, 강구우(姜九禹), 박만홍(朴萬弘), 황일보(黃一甫), 황병길, 한대진 등과 함께 선정되었다.

또한 1920년 5월 대한국민회와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조직하자, 그는 이에 가담하여 피복과장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11월, 임병극은 장백현 17도구에 본부를 둔 군비총단(軍備總團)에서 경호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서 러시아에 무기구입을 위해 부대를 파견할 때 제8회 인솔자로 75명의 부하를 이끌고 러시아에 갔다.

임병극은 1922년 6월경 연해주에서 조직된 고려혁명군 연해주 총지부(總支部)의 남부 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총지부 총재인 이중집(李仲執), 서부사령관 신우여, 총사령관 김규식, 동부사령관 김응천(金應天), 북부사령관 이용(李鏞) 등과 함께 활동했다. 이후 군비단 별동대장이 되어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부대에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1922년 가을부터 1923년 봄까지 패주하는 러시아 백군을 바리바쉬(현재의 노부끼예프까)방면에서 추풍(秋豊), 한국과 러시아의 국경인 녹동(鹿洞)까지 추격전을 전개하여 승리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임병극은 창조파(創造派)의 일원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독립운동기관을 설치하고 자신과 지청천, 김세혁(金世爀) 등이 중심이 되어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는 창조파에서 조직하고자 한 국민위원회의 국민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병극 등 창조파의 이러한 계획은 소련과의 갈등으로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24년 5월부터 임병극은 다시 북간도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부하 5명과 함께 연길현에서 중국군대에 체포되어 국자가 진수사공서(鎭守使公署)에 구금되어 징역 15년을 받았다. 이에 일본인들은 임병극의 인도를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던 중 동지들의 도움으로 러시아로 탈출한 그는 어업꼴호즈 등지에서 생업에 종사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임병극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만주방면 독립운동가, 임병극[편집]


성명
임병극(林秉極)
이명
임병윤(林秉允)
생몰
? ~ 1926년 6월 13일
출생지
미상
사망지
경성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임병극은 1920년 3월 서일을 총재(總裁)로 하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의 지방과원(地方課員)으로 연락업무에 종사했다. 그러던 중 군정서의 부총재인 현천묵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최수길(崔壽吉), 주기연(朱基淵), 임정삼(任正三) 등과 함께 일제의 밀정 안대화(安大和) 등을 처단하는데 참여하였다. 1922년 7월경에는 국내에 입국하여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6년 6월 13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임병극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