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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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大洪
1920년 4월 27일 ~ 2016년 4월 5일

1. 개요
2. 생애
3. 경력
4. 가족관계


1. 개요[편집]


대한민국기업인. 대상그룹과 세원그룹의 창립자 및 초대 회장이며 아호는 인곡(仁谷)이다.


2. 생애[편집]


1920년 4월 27일, 전라북도 정읍시 농가에서 5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리농림학교[1] 수의축산학과를 졸업했으며, 졸업 직후 인근 마을인 고창군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8.15 광복 직후 학창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모피가공업으로 사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5세 나이에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정읍시에서 피혁공장을 세웠으며, 이듬해 부산광역시에서 대림상공을 세웠다.

그는 일본 대표 조미료 회사인 아지노모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제조법을 습득했다.[2] 제조법을 습득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미원'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조미료 사업을 시작했다.

미원에게는 라이벌이 있다. 바로 CJ제일제당이다. 1960년대 삼성그룹의 모태이자 당시 주력계열사이던 제일제당에서 미원을 이기고자 야심차게 내놓은 브랜드가 바로 '미풍'이었다.[3] 당시 두 기업의 조미료 전쟁이 얼마나 과열됐던지 정부에서 제재에 나설 정도였다. 결국 삼성그룹의 엄청난 공세에도 불구하고 미원 승. 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 본인 인생에서 뜻대로 안되는 것 세가지가 자식, 골프, 미원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후 제일제당이 내놓은 조미료가 '다시다'였고, 이에 맞서 대상이 내놓은 조미료가 '맛나'였는데, 70년대까지만 해도 미원이 조미료 판매 1위였으나 80년대 들어와 결국 다시다에게 1위 자리를 내주고 현재까지도 변동이 없다.

인도네시아, 일본, 홍콩, 이집트, 인도, 중국 등 해외 진출을 본격화했으며, 조미료 외에도 각종 장류와 냉동식품, 육가공식품 등을 생산하는 종합식품기업으로 확장했다.

1987년 그룹 회장직을 장남인 임창욱에게 물려주면서 명예회장으로 추대됐고, 1997년에는 임창욱도 명예회장으로 추대되면서 '창업회장'으로 불리게 됐다.

창업 이래 대외 활동이나 언론 노출을 하지 않은 채로[4] 제품 개발과 연구에만 몰두했으며, 평소엔 사내에서 주로 도시락으로 점심을 챙기거나 일본 출장 때마다 도쿄 변두리 7평짜리 아파트를 쓰는 등 검소한 모습을 보였다.

1987년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2000년대 초반까지 정정한 상태로 전통 장류 개발에 몰두했다가 2005년에 부인과 사별한 직후 은둔 생활을 하다 2016년 4월 5일 노환으로 생을 다했다. 향년 95세. 장례는 그의 유지에 따라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거행됐다.


3. 경력[편집]


  • 1997년 대상그룹 창업회장
  • 1987년 미원그룹 명예회장
  • 1973년 ~ 1974년 미원문화재단 이사장
  • 1973년 ~ 1987년 대한투자금융 회장
  • 1971년 미원문화재단 설립
  • 1968년 ~ 1986년 미원그룹 회장
  • 1965년 내쇼날플라스틱 사장
  • 1965년 미원 사장
  • 1964년 국산제당 사장
  • 1947년 대림상공 사장


4. 가족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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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2년 설립된 이리농림학교는 2007년 전북대와 통합한 익산대학교의 모태가 된 학교이자 전북대의 모태가 된 이리농과대학 설립에도 큰 역할을 했으니 전북대학교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다. 이리농림학교는 1948년 이리농과대학을 설립하고, 1952년 이림농림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91년 이리농공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98년 익산대학교가 되었다. 이리농림학교는 전국 최초의 5년제 관급 농림학교로 학생모집은 전국 단위로 이루어졌고, 전국 13도 도청에서 입학시험이 실시되었는데, 이후에 설립된 수원농림, 진주농림과 함께 전국 3대 명문으로 불렸다.[2] 이 때 조미료 회사 퇴직 직원들이 기술을 전수해줬다고 한다.[3] 미원을 이겨먹기 위해 미원이 벤치마킹했던 아지노모도와 기술제휴로 만들었다.[4] 이 때문에 조선일보 1982년 3월 19일자 연재물 <재벌25시>에서의 평가가 '한국의 하워드 휴즈(?)'였다. 비슷한 예로 박경복(1922~2007) 전 하이트맥주 명예회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