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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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러일전쟁 및 그 이전
3. 일본에 포로는 없다
3.1. 일본군이 항복하지 않는 이유
4. 일본군 포로들
4.1. 항복한 사례들
4.1.1. 자발적 항복과 포획, 그리고 항복 명령
4.2. 포로들의 대우
4.2.1. 태평양과 시베리아 포로들의 차이
4.3. 카우라 수용소 탈주사건
4.4. 전후의 포로들
5. 창작물/ 다큐에서의 일본군 포로
6. 다른 군대에서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발생한 일본군 포로들 및 일본군이 붙잡은 미군, 영연방군 등의 적군 포로들과 관련된 항목이다. 일본군 포로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등에도 발생했으나 여기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일본군 패잔병 문서의 하위 분류에 해당한다. 패잔병에는 태평양 곳곳에서 끝까지 숨어 있던 자들과 초기에 포로가 된자로 나누는데, 본 문서는 포로의 경우만 다룬다.


2. 러일전쟁 및 그 이전[편집]


일본 전국시대 때 농민 아시가루들은 전열의 장창병을 맡았고 전장에서 도망칠 경우 마을에서 따돌림이나 보복행위를 당하는 문화적 특징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특징은 비단 일본 전국시대뿐만 아니라, 구시대의 국가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꼭 일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메이지 유신 초창기에는 포로 대우를 그나마 정상적으로 한 축에 속했다. 이를테면 러일 전쟁 당시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등 몇몇이 포로로 붙잡혔는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그를 정중히 대우했고 필요한 서비스 지원도 충실히 제공했다. 말단 수병 포로들도 사원에 감금되어 담장 너머로 못 나갈 뿐, 사원 내에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지낼 수 있었다.

러일전쟁 와중에 포로가 된 일본군 병사들도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약 2만 명의 일본군 병사들이 러시아군에 항복했다. 그러나 이들은 훗날 태평양 전쟁 때 미군에게 항복하기를 꺼렸던 것과는 달리 러시아군에 항복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고 일본 정부나 군부도 러시아군에 항복한 일본군 병사들에 대해서 어떤 불이익이나 처벌도 주지 않았다. 딱히 적에게 기밀을 넘긴 것이 아니면 포로 전력이 있다 해도 크게 문제삼지 않았으며 오히려 숨겨진 공로가 발견되면 정상적으로 훈포상을 내렸다. 즉,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포로 문제는 30년대 군국주의화 이래 일본을 지배한 퇴행화와 관계가 있다.

3. 일본에 포로는 없다[편집]


1944년까지 일본군은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포로로 잡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사이판 전투에서는 31,000명중 921명이, 타라와 전투에서는 2,619명중 17명만, 이오지마 전투에서는 22,000명중 216명만이 포로로 잡혔고 나머지 99.5%가 전사하거나 자살해 버렸다. 일본군은 겨우 0.5%정도만 포로로 잡힌거다. 역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당대 스탈린그라드 전투나 토브룩 함락 때는 약 30% 정도가 항복했고 웨이크 섬 전투에서는 약 2/3이 항복했다. 게다가 상대가 후일의 IS나 북한군처럼 포로를 제도적으로 받아주지 않는 군대도 아니었다.[1]


3.1. 일본군이 항복하지 않는 이유[편집]


일본군은 모든 병사에게 자살을 강요했습니다. 이들에게 항복이란 최악의 불명예였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히면 수류탄으로 자살을 감행했죠.

이 일본군 조종사의 경우 비행기가 격추돼 추락한 후 미군들이 구조해 주려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군 조종사는 수류탄 안전핀을 이로 뽑았습니다. 그리곤 결국 숨졌죠.

미군은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습니다. 본능에 따라 일단 총부터 쐈고,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았죠.

- NGC 2차 세계대전 6부 전쟁의 끝 中

전쟁 내내 일본군 장병들은 수세에 몰려도 얌전히 항복하지 않고 반자이 어택을 하는 등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저항을 했는데 이유는 바로 전시에 항복을 하는 것을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상과 함께, 같은 이유로 설령 장병이 치욕을 감수하고 항복해도 돌아왔다간 죽는 것보다 더한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2차대전에서의 일본군은 앞뒤 사정 따지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항복과 포로 자체를 대역죄로 여겼다. 몇몇 지휘관들은 다른 나라처럼 포로가 되었던 아군을 멀쩡히 환대했지만 그런 지휘관은 극히 일부였고, 그나마도 또라이를 좋아하던 일본군인지라 제대로 진급을 못해서 대다수가 연대장 이하였다. 덕분에 포로가 되었다 귀환한 사람들은 매국노, 국가의 적, 민족의 치욕 등으로 낙인을 찍어서 스탈린굴라그 수감자 이하로 취급했다. 덤으로 자신 혼자만 그 수모를 겪는 것이 아니라 항복의 항 한글자라도 꺼내는 순간 자신의 동료, 상관, 가족, 친척, 친구가 작살난다.

원래 일본군은 작전 실패를 한 장교들에게 할복 자살을 시켰는데 하물며 군법을 위반한 사람들과 그 관계자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또한 직접 군부의 입김이 닿지 않아도, 소문이 퍼지면 민간 차원에서 항복자의 가족을 핍박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명목상 메이지 유신명예살인을 금지했지만, 전시에 느슨한 치안으로 그런 게 제대로 지켜질 리가 없었고, 이들은 쫒겨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이기면 구국영웅, 죽으면 호국영령이지만, 살아남으면 대역죄인이기에 일본에 돌아갈 곳이 사라진다. 말 그대로 죽어야 사는 상황인 셈. 간단히 정리하면 항복하거나 포로가 되는 순간 비국민화 한다고 보면 되겠다.

이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진주만 공습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일부 일본군 파일럿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 최초의 포로이자, 진주만 공습 당시 미군에 포로로 잡힌 갑표적 정장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없는 셈 치고, 공격대 정장 5명이 서명한 서장에서 서명을 지우고, 출격전 10명의 단체 사진에서도 삭제해 버렸다.

사카마키 가즈오는 일본 해군의 갑표적(대형 잠수함)에서 출격하는 특수 잠수정의 탑승원이었다. 진주만 공습 때 미군 함정을 기습하려고 했지만 나침반 고장으로 표류하게 되고 그러다가 미해군 구축함 헬름에게 공격을 받아서 배는 좌초당했다. 사카마키는 탈출 중에 산소 결핍으로 실신했다가 오하루 섬 해안에서 발견되어 (미군이 주장하는)일본군 1호 포로가 되었다. 미군은 방송을 통해 사카마키의 신원을 밝히고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을 공표했지만 일본군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동시에 사카마키를 포함해 잠수정에 탔던 10명을 전사처리했다. 대본영은 전사한 탑승원을 '군신(軍神)'으로 추대했지만 포로가 된 사카마키는 제외시키면서 '9군신'으로 발표했다. 사카마키는 포로수용소에서 자결하려는 일본군 포로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일본어 통역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포로로서의 태도도 좋았기 때문에 미군 관계자들에게서 평이 좋았다.

항복한 부대는 단 한 부대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런 내부 사정은 알려지지 않고 항복한 부대가 없다는 사실만 알려져서 모든 일본 군인은 애국심이 강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군인들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애초에 강제징병된 사람들이 절대 다수 였는데 그럴리가특히 오노다 히로같은 사항이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일본군은 포로가 되는 것을 (이념적인 면에서든 현실적인 면에서든)패배보다 더한 수치로 생각하였으며,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군은 미군에 끌려가던 자국 조종사 포로들을 약간 구출했는데 일본군 수뇌부는 이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이들에게 참회할 기회를 준답시고 카미카제 특공으로 보내 처리했다.

어쨌든 이런 까닭에 섬에 포위되어 탈출로가 없던 일본군은 전체병력의 99%가 죽어버리는 옥쇄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이러한 사상은 심지어 적군의 포로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전투에서 죽지않고 살아서 포로가 되었으니 용기가 부족한 비겁한 군인이라서 학대당해도 싸다는 요상한 논리를 적용해서, 일본군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포로학대를 자행했고, 평범한 포로생활중에도 각종 구타와 잔혹행위로 인하여 영•미군 포로사망률이 높은 편인데 도쿄 전범재판에서 밝혀진 바로는 모두 합쳐 27.1%정도이다. 단 이 집계는 중국군 포로가 빠진 수치라 실제 사망률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중국군 포로까지 따지면 40.4%가 사망했다.반면 독일군에게 잡힌 영미군 포로의 사망률은 3.5~5.1%였다. 그리고 독일군에게 잡힌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은 무려 57.5%로 일본군의 포로학대를 뛰어넘는 수준을 자랑한다. 소련군에게 잡힌 독일군 포로의 사망률은 14.7~35.8% 수준.

일본군의 이러한 항복과 포로를 죄악시하는 사상은 1941년 1월 8일, 육군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가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군기가 흐트러지고 있다며 발령한 훈유(訓諭)인 '전진훈'으로 인해 아예 공식적으로 명문화된다.

恥を 知る 者は 弜し。常に (キョウ(トウ家門の 面目を 思ひ

(いよ(フン(レイしてその 期待に 答ふべし

生きて (リョ(シュウ(はずかしめを 受けず

死して 罪過の 汚名を 殘すこと (なか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강하다. 항상 고향과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서

더더욱 분발하여 기대에 답할 것이며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죽어서 죄과의 오명을 남기는 짓을 하지 말라

-전진훈 2장 8절

전진훈은 위외 같이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지 말라."고 말하며 '무조건 항복 금지'를 못박아 놓았기에, 태평양 전쟁에서 무수한 일본의 젊은이들이 옥쇄라고 쓰고 개죽음이라 읽는 상황에 몰려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패전 뒤 도조 히데키는 (정황으로 보아 쇼가 아니었는지 매우 의심스러운) 자살 기도에 실패, 살아서 적의 포로가 되고 극진한 치료까지 받는 크나큰 치욕(...)을 당함으로서 전진훈이고 나발이고 전부 헛소리였음을 몸소 입증했다.

그리고 일본 병사들 스스로도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일본 군부는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히게 되면 끔찍한 꼴을 보게될 것이라 선전하였고 실제로도 미군의 일본군 전사자 사체 훼손 같은 사건이 있었으며 이러한 사건이 언론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보도됨에 따라 미군에게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미군의 항복 권유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자살 등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거기에 일본군의 인식상에는 '포로'라는 단어 자체가 들어 있지 않아서 만약 포로가 되었을 때 행동지침 또한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예를 들어 적의 심문에 대처해 중요 정보를 넘기지 않는 방법 같은 것. 그래서 일본군이 포로로 잡히면 잡히는 족족 가지고 있는 정보를 술술 부는 편이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아군 포로가 적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식의 정보기만, 왜곡을 걸어 성공한다면 결국 아군에게 큰 이득이 된다. 자질구레하고 잡다한 정보를 알려주며 신뢰를 얻다가 마지막에 크게 속여 엄청난 출혈을 강요하는 것은 정보전의 기본이다. 이중간첩이 무서운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군 지휘관은 교섭을 통한 아군포로의 권리보호나 포로 생활 중 포로들을 감독하는 방법 등을 배우지 않아서 일부 포로수용소에서는 평소 가혹행위를 일삼던 지휘관이 포로가 된 후 하급자에게 죽도록 맞고 종전 때까지 죽어지냈다는 기록도 종종 있다. 물론 사람 좋은 성격이거나 지휘를 잘했던 지휘관은 하급자들도 존중해줬다.

포로가 된 군인=실전을 겪어본 숙련병이란 이야기이다. 일단 포로를 재탈환하거나 교환하는 것에 성공하면 포로는 즉각전력이 된다. 그것도 포로수용소나 적군 일선부대를 경험하고 적군과 교류하면서 적군이 가진 여러가지 특성을 조금이라도 체험하였기 때문에 나름의 고급 인력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적군이라도 무력화된 포로가 대상이라면 방심하기 쉽다. 설령 적이 가진 정보를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적이 쓰는 언어만 대강 알아들을 수 있는 것 조차 큰 소득이다. 일상적인 소음으로 들리는 어떤 소리가 났을 때 그게 적군이 쓰는 언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포로 감시가 왜 철저한 것이다.

특히 파일럿의 경우 수많은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적군과의 전투경험이 매우 중요한데, 일본군 수뇌부는 '비겁하다', '감투정신이 부족하다'는 개소리나 지껄이며 숙련병 포로들을 할복이나 자살공격으로 날려버렸고, 파일럿들은 카미카제로 날려버려서 안 그래도 부족했던 인력을 시궁창에 버렸다.

거기에 더해 후퇴나 항복을 해도 죽는 건 똑같으니 일본군 대다수는 생환하지 않못하전선에서 소멸해버려서, 미군과 전투를 벌이며 얻은 전훈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후임자는 아무것도 배우지도 단점을 개선하지도 못한 채 종전 전까지 똑같은 방식으로 전투를 벌여 삽질만 하고 죽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물론 포로가 되는 것을 금지하더라도 적군을 이긴다면 전훈을 후임자에게 가르쳐줄 수 있겠지만, 그러질 못했으니... 반대로 미군은 어떤 초보 파일럿이 독일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 다시 미군으로 돌아와 전선에 복귀한 이후 10.5킬을 달성하고, 인류 최초로 음속을 돌파하고, 수많은 실험기를 타면서 공군을 넘어 항공기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사례가 있다. 바로 척 예거다.


4. 일본군 포로들[편집]


결국 이론상으로 포로는 없어야 정상이지만, 당연히 일본군 중에도 항복한 사람이 많이 있다.


4.1. 항복한 사례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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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에게 항복하고 포로가 된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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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선에서. 투항하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병사의 간곡한 권유에도 권총으로 자결하려는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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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육군과 일본 육군 포로.

일본군 중에도 머리가 돌아가는 인간은 있던지라 프래깅을 하고 연합군에 투항하거나 탈영해 투항하거나 전투에 패한 뒤 항복한 포로들이 있었다. 이게 정상인 데 별도 항목으로 분류된것만 봐도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정상이 아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실제로 싸우고 싶어도 의식을 잃는 등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포로로 잡히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으며, 애초에 일본군의 뇌리 속에 포로가 된다는 개념이 없었으니 일단 잡히면 군사기밀이 술술술 흘러나와 연합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포로로 잡히면 기밀을 불지 말고, 어떤 정보는 거짓으로 알려주고, 또한 어느어느 부분에서는 모른다고 일관하고, 어떤 상황이 되면 탈출을 시도하라는 식의 교육이 이루어졌어야 했는데 일본군은 그냥 죽으라고 교육했으니 정작 잡히고 보면 개손해(...)를 봤다. 일례로 영화 씬 레드 라인에서는 고든 대령이 일본군 포로들을 보고 귀중한 정보원이라며 기뻐하는 장면도 있다.

가장 심했을 땐 1/100에 달했던 일본군 포로/전사자의 비율은 오키나와 전투에 이르러서는 1/7까지 치솟아, 이 시점에서 "죽어도 항복하지 않는 일본군"의 신화는 완전히 무너진다. 그나마 이렇게 포로가 된 장병들도 본토에 우글우글한 오합지졸들이 아니라 나름 전장에서 구른 정예병력들이었기 때문에 미군이 본격적으로 본토 상륙에 착수했더라면 아마 포로/전사자 비율은 역전되었을 것이다.

일본군 포로들이 이렇게 싸울 때와는 정 반대의 면모를 보인 이유 중 하나로 "'미군이 새 상전이 되었으니 철저히 새 상전에게 충성해야지 내가 살아남는다.'라고 생각하여 절대적으로 미국에게 충성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 당시 일본인들이 그토록 심하게 저항했던 이유가 자기들이 속했던 집단에 대한 소속감, 그리고 그에 따른 조직의 리더에 대한 (어쨌든)절대적인 충성심인데, 이제는 미군의 포로가 되었으니 "내 상전(리더)은 미군이야." 라는 논리미군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그 일환으로 정보도 술술 분 것이라는 말.

실제로 당시 일본군 및 개개의 민간인들이 취한 행동을 보면 설득력이 있다. 괜히 전쟁이 끝나고 나서 한 일본군 포로가 '좋은 날 다 지나갔다' 라고 한탄한 게 아니라는 것. 물론 포로로 잡혀도 "이 귀축영미놈들! 내가 전부 모조리..." 라며 난동을 부리고 완전히 미군에게 복종한 상당수의 포로들을 "이 배신자(내지는 패배주의자들)! 내가 너희를 전부 죽여서라도 그 곤조(근성)를 다시 세워놓겠다!"라는 부류도 있긴 했지만..

부대원 전원이 모두 도망가 부대가 증발하기도 했고, 강제 징집되었기에 끝까지 저항할 이유가 없는 조선 출신의 군인들은 미군에게 투항하거나, 멀리 멀리 도망가 광복군과 합류해 일본군과 싸우기도 하였다. 이 실례를 그린 것이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 최대치(임팔 작전), 장하림(사이판 전투)이다. 일본군이 종전 직전까지도 조선인 징집병을 카미카제가 아닌 대전차총검술으로 굴렸던 것도 이것 때문이다. 자살공격하랍시고 비행기 태워서 보냈는데 그거 타고 도망가면 여간 손해가 아니라서...

특히나 관동군의 경우엔 교전도 제대로 치르지 않은 채 소련에게 무조건 항복했는데 특히 도미나가 교지는 제대로 치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개전하자마자 항복했다. 때문에 한반도 남부로 도망치거나 하지 않은 이상 고스란히 소련으로 끌려갔다. 소련은 1950년대까지 이들을 일본으로 귀환시켰는데, 일본의 공안당국은 소련에서 포로 생활을 한 관동군 출신들을 잠재적인 공산주의자로 보고 집중 감시했다고 한다. 이런 점은 일본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관동군에 강제 징집되어 끌려갔던 조선인들도 소련군에 붙잡혀 포로가 되어 소련에서 3년 동안 노동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면 경찰한테 붙들려 "소련에 있었으니 너는 빨갱이"라면서 고문이나 구타를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시베리아 생활이 실제로 힘들긴 했지만 최대한 자신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 소련 포로 생활이 생지옥이었다면서 더 과장을 해댔다.

4.1.1. 자발적 항복과 포획, 그리고 항복 명령[편집]


일본군들은 3가지로 서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 자발적 항복(Surrender)이다. 전투에 패하고 총알이 떨어져 도저히 가망이 없었든, 전투 하기도 전에 탈영하여 미군에게 항복하였든 전부 이 범주로 친다. 포로들 내에서 경멸을 받는 존재이다. 위의 항목에서도 나왔지만 일본 극우들은 이러한 자발적 항복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둘째, 포획(Capture)이다. 전투중 부상당하거나 기절하여 포획된 경우이다. <포로기>의 작가이자 주인공 오오카 쇼헤이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의 책에 따르면 포로수용소 내에서 대부분의 포로들이 다 자신이 포획된 경우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셋째, 전쟁이 끝난 후 천황의 명령에 따라 항복한 경우. <불모지대>의 주인공 세지마 류조의 경우이다. 이 때문에 그는 시종일관 당당하다.

<포로기>에서 나오는 일화로, 포로수용소 생활이 길어지며 피둥피둥 살쪄 가던 어느날, 일본이 항복한다.(책에는 이날 미군들이 일본이 항복했다고 열광한 것으로 나온다. 이후 천황의 명령에 따라 병들고 굶주린 패잔병들이 항복하는데 포로 수용소의 살찐 포로들을 보고는 눈이 뒤집힌다.)

이에 어느 일본군 소위가 병사들의 숙사에 들어가 "너희들은 어째서 할복을 하지 않았나? 포로가 되어서 뻔뻔스럽게 살아 있다니 부끄럽지도 않는가? 당장 할복하라!"라며 호통을 친다. 그러자 한 상등병이 "뭐라구? 고작 산 속을 도망만 치던 주제에 무슨 큰소리야? 이래봬두 우리들은 최전선에서 싸우다 부상을 당해서 어쩔 수 없이 포로가 된 거야!"라고 응수 한다. 이 짧은 문답에 패잔병과 포획당했다고 뻥을 치는 항복자들의 관계 및 병림픽이 완벽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들 패잔병들은 비겁한 포로들과 같은 수용소에 수용되기 싫다고 수용소장에게 항의 하기도 하고, 심지어 같은 중대에 배속된 패잔병들은 중대만이라도 바꿔 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포로 중대는 원래 먹을 것이 많아 통조림류는 침대 아래 땅 속에 많이 짱박아놓을 정도였으니 소속된 패잔병들도 잘 먹었으며, 같은 수용소의 패잔병 중대도 포로 중대 취사장에서 훔쳐 먹으며 중간은 간다. 가장 불쌍한 것이 패잔병만으로 구성된 포로 수용소로 먹을게 없어 고장난 시계를 바치고 포로들에게 통조림과 담배를 받아갔다. 더 이상 교환할 시계가 없자, 지난번에 교환해서 받은 담배를 바치고 통조림을 받아 갔다. 이것이 창조경제

어차피 패잔병이든 포로든 똑같이 포로 마크가 찍힌 미군복을 입고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1945년 말에 일본으로 귀환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렇게 알력이 있었다.

4.2. 포로들의 대우[편집]


만약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산 채로 금니가 뽑히거나 죽을만큼 구타당하지 않고 무사히 후속부대에 인계된다면 고생 끝. 행복 시작. 이는 미드 퍼시픽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다. 오키나와에서 육군이 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보고 '우리(해병대)는 포로 안 잡는줄 알았는데?' 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 포로들을 사살하려고도 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 오키나와 전투 이전까지는 일본군 포로를 잡더라도 난전중에 후속부대에 인계하기가 상당히 어려워 지휘관의 감시가 느슨할 때 몰래 쏴죽이는 일이 빈번했고 애초에 당시 미군에게는 일본군의 포로학대 만행에 대한 복수와 분노로 인해 암묵적으로 포로를 받지 않는 관습이 있었고 때문에 설사 항복하는 일본군이 있더라도 무시하고 사살했다는 기록이 쏟아져나온다. 이로 인해 일본군 포로 수는 독일군에 비해 현저히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련군에게 잡힌 이들, 하급자와(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포로 학대를 했던 놈들은 고생 끝, 지옥 시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99px-Bathing_japanese.jpg
미합중국 해군 전함 USS 뉴저지의 갑판에서 씻고 있는 일본 해군 포로. 해전 특성상 포로들의 대다수가 바닷물에 젖은 채로 포획되다보니 저체온증으로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단 씻기고 봤다.

당시 미 해군은 일본군 포로를 포획하면 착용한 피복을 모두 벗긴 뒤 씻기고 함내 재고품인 새 샘브레이당가리를 지급하였다. 어차피 막 입는 작업복이라서 비싼 옷도 아니고 포로들에게 부담없이 입혀줄 수 있기 때문. 포로가 입고 있던 피복은 아예 못 입을 만큼 걸레짝이 된 옷이 아니라면 세탁 및 정비를 거쳐 돌려줬다.

일본군의 포로 생활에 대한 비공식적인 사료로서 활용할 만한 오오카 쇼헤이의 자전적 소설인 '포로기'에서는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 포로생활 중에는 장교와 사병을 완전히 분리 수용 했기 때문에 서로 볼 일이 없었다. 다만 병과 하사관은 같이 수용 되었는데 포로 끼리는 계급으로 대우 하지 않고, 그보다는 먼저 수용된 포로가 권력을 차지 하였다. 주인공이 있던 제1수용소 대표를 맞은 이마모토는 상등병이었고, 각 중대장들은 하사관들이기는 하지만 이는 계급 때문이 아니라, 해군들이라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기도 전에 해전을 통해 포로가 되어 먼저 수용소로 왔기 때문이다. 즉 동시에 수용되면 하사관을 우대 하였지만, 그 보다는 먼저 수용된 사람이 '짱'이었다. 반면에 장교 포로들인 <어느 하급장교가 본 일본 제국 육군>(태평양 전선)이나 <불모지대>(관동군)의 경우 일본군 계급이 그대로 통용 되었다.

  • 포로생활은 매우 윤택했다고 한다. 밥은 많이 주는데 노동은 별로 시키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 이 좋은 생활이 끝났다며 한탄하는 포로도 많았다고 한다. 작가는 이런 포로들의 모습(아무 생각없이 먹고 싸고 놀고하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짐승같았다고 표현한다.

  • 집단 자살을 일삼는 일본군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미군에 자발적으로 투항하는 일본군도 많았다. 그러나 거의 전원이 부상으로 인해 포획된거라고 뻥을 친다.


  • 징용으로 끌려온 대만인은 갈등을 우려하여 일본인과 별도로 수용하였는데 일본이 졌다는 소식에 대만인 포로는 일본인에게 위협을 가했다고 한다.

  • 영어가 좀 되는 주인공은 미군들과 얘기를 많이 했는데, 미군 중 하나가 '여군은 장교들 장난감일 뿐이지'라고 말하자 주인공은 미군에게 실망한다. 교토대 출신의 불문학 전공자, 번역가, 기자로서 지금까지 책으로만 접했던 서구의 여성인권이 기대치에 못미쳤기 때문. 비슷한 예로서, 주인공은 흑인 미군을 생전 처음 접하면서 그들이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저들(서양인)도 동양인의 무표정함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걸 떠올리면서, 역지사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반성한다. 저자가 일본군1에 해당하는 평범한 포로가 아니라 당대 일본군에서는 드문, 인텔리 계층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인 등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식민지 주민들도 다수 포로로 잡혔고, 전쟁법상 하와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일본군의 징용생활이 워낙 지옥 같았던지라 포로 신세긴 해도 그 전과 비교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한국인 등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식민지 주민들도 다수 포로로 잡혔고, 전쟁법상 하와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일본군의 징용생활이 워낙 지옥 같았던지라 포로 신세긴 해도 그 전과 비교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는 일본군이 같은 부대 병사라도 조선인 병사에게 우선적으로 궂은 일을 시키고, 배식도 덜 주는등 2등 시민인 이들을 매우 차별하고 학대했기 때문이다.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한국인 포로들과 일본인 포로들이 패싸움까지 했고, 처음에 이들을 한 곳에 모아 수용했던 미군은 이 두 집단을 따로 수용하기도 했다. 대체로 적당히 일하고 돈을 받는 등 징용 시절엔 꿈도 못 꿀 혜택을 누렸고 건강 상태 등 모든 생활이 매우 나아졌다.

참고로 이 한인 일본군들은 대부분이 조선지원병이였는데 해당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 초졸이하의 저학력, 농어촌 출신의 청년들이였고 일본에 대한 소속감이라던가 충성심도 없었다. 그나마도 장남이 아니라 부모에게 경제적 도움을 기대할수 없었던 차남, 삼남들이 일본 경찰 및 주변의 직간접적인 강압 때문에 어쩔수 없이 입대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사기 또한 높지도 않았다. 그러나 저학력이라도 말이 저학력이지 조선지원병 모집 최소 조건이 일본어 독해와 작문 그리고 소학교 졸업(이 조건은 나중에 완화된다.)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아주 무식쟁이들은 선발되지 않았고, 이들은 해방 및 한국전쟁이후 지역유지 수준은 되는 사람들로 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 잘 해줬으면 일본이 전후에 그렇게 욕 먹지 않았을텐데 이들마저도 아주 무시하고 차별했기 때문에 전후에 일본에 대한 이 조선지원병들의 감정이 아주 좋지 못했다. 이 때문에 처음에 미군이 하와이 포로수용소에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을 같이 수용했을 때 패싸움까지 벌이는 등 전우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남남이라는 의식이 확고했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일본군의 학대로 원한이 쌓여있던지라 자신들도 연합군으로 참전하겠다고 자원했지만 제네바 협약에 위배되는 일이라 무산되었다. 제네바 협약에서는 포로를 군사적인 일에 동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기때문이다. 때문에 후일 한국전쟁 때도 미군은 공산군과 싸우겠다고 지원한 인민군 포로들을 그냥 다 거제 포로수용소로 보내버렸다. 다만 한국군에서는 그런 포로들을 현지입대시켜 병역자원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북한군의 경우 자발적으로 항복한 한국군을 '해방군 동무'라고 하며 분대당 한명씩 배치하여 썼다.

이 때 포로수용소에서 미군에게 번 돈으로 해방된 뒤에 한국으로 돌아가 부자가 된 사람들이 몇 있다. 하지만 정작 일본정부는 이들에게 입대시에 약속했던 돈을 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이 당시 포로수용소 출신 한인들이 연판장을 만들어 일본정부에 항의했지만, 한일기본조약으로 청구권이 소멸되어 이 분들은 돌아가실때까지 끝끝내 일본정부에게 한 푼도 받지 못 했다. 원래는 한국 정부가 한일기본조약으로 일본에게 받은 돈을 나눠줘야 했지만, 자기 멋대로 써버리고 입을 씻어버렸기 때문.

간혹 소수의 포로들은 자신들을 붙잡은 연합국 군인들과 친해진 경우도 있었다. 한 미해군 잠수함이 일본 해군 조종사 한 명이 해상에서 표류중인 것을 발견하고 구조, 하와이에 포로를 잡았으니 귀항시 인계병력을 보내달라고 보고한 적 있었는데, 이를 보고받은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 해병 헌병들을 입항 예정일에 대기시켰다. 잠수함이 입항하고, 함장에게 헌병 지휘관이 포로를 인계해 달라고 하자 함장이 포로를 데리고 나오라고 시켰는데, 나온 포로가 앞치마와 취사모를 착용하고 식칼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헌병들이 기겁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당시 미해군 잠수함들은 승조원 수가 항시 부족해서, 누군가를 구조하면 그가 부상자가 아닐 경우 내릴 때까지 계급고하 관계없이 승조원들의 일을 보조토록 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은인들이 시키는 것인 만큼 대부분 군말없이 따른 편이었다고 한다. 육군 항공대 중령이 구조된 후 몸이 좀 회복되자, 부사관 한 명이 따라오라고 하더니 기관실에서 여러 잡무를 시켰는데, 아무 불만없이 따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잠수함의 함장은 대개 소령이었는데. 함장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에게 잡무를 시킨 것. 이러한 상황땜에 이 잠수함에선 그 포로에게 조리병 보조를 맡겼던 것. 승조원들은 '그 포로 밥 잘했는데 아쉽네' 하며 헤어지는 걸 내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군에게 잡힌 관동군 포로들은 얘기가 달랐다. 수많은 포로들이 일본으로 송환되는 줄 알고 탔던 기차는 시베라아행 기차였다. 포로들은 용변과 취식도 힘든 열악한 조건에서 운송되었다. 가다가 멈추고 내려서 취식, 용변을 하는 식. 기차가 떠날 때면 용변 중이라도 올라야 했다. 조금만 지체하면 총살. 여기에 소련 민간인들의 조롱과 약탈까지도 간간이 있었다. 또한 초반에는 일본군 시절의 계급 등도 어느 정도 통해서 군관 출신인 포로가 병사 출신인 포로에게 자신의 짐을 들게 하는 등의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4.2.1. 태평양과 시베리아 포로들의 차이[편집]


간단히 말해 소련 치하의 관동군 포로수용소는 지옥, 미군 치하의 태평양 전선 포로수용소는 천국이었다.

먼저 포로기를 쓴 오오카 쇼헤이는 계속 본인이 전쟁시기의 일본 본토나, 아직 전투중인 일본군들에 비해 너무 잘먹으니 항상 미안해한다. 200여명의 포로 중대가 식사 하면 매끼 드럼통 하나 분량이 짬이 남는다는 것이 미안함의 절정이다. 심지어 씨레이션 통조림의 경우 상당량을 야전침대 아래 땅속에 파묻어 모아두고 있는데도 이 정도다. 책에 나오는 미군들은 예외 없이 친절하다. 작중에는 미군과의 트러블로 죽은 일본군 포로가, 탈출하다 죽은 조종사 단 2명 외에는 아예 안나온다. 아니, 초기 포로병원 시절을 제외하고 포로수용소 수용중에는 그 안에서 죽은 일본군 포로가 단 한명도 안 나온다. 책 내용 대부분이 얼마나 많이 먹고 남겼으며, 포로들은 비역을 즐기며 타락하고, 미군들과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는지가 대부분이다.

야마모토 시치헤이의 <어느 하급 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에서는 태평양 전선의 일본군 장군 포로들이 얼마나 나태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가 묘사 된다. 또한 1942년 바탄 죽음의 행진을 하던 미군 포로에게는 “돌맹이 세례가 아닌 꽃 세례가 내려졌던 것이다. 몰려나온 사람들은 꽃을 던지고 담배를 건네주기도 했으며,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건넸다. 이런 장면이 끝없이 이어졌다. 사람들을 아무리 쫓아내도 소용없었다.”라고 하며, 반대로 패전 후, 포로가 된 일본군에게 필리핀 사람들이 “바보새끼, 도둑놈, 이놈, 이자식, 살인자, 너같은 건 죽어버려 등, 증오에 찬 표정으로 악을 쓰며 목을 긋는 흉내를 내고, 돌과 부러진 나무토막들이 날아 온다. 새총을 쏘기도 했고 옆 사람은 머리에 돌을 맞고 피가 났다.”라고 하며 호송하던 미군이 소총으로 공포탄을 쏴서 경고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위의 <포로기>에서도 같은 일화가 설명 된다.

반면에 불모지대에서 묘사된 소련 치하의 관동군 포로들은 수없이 죽는다.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는다. 그냥 지옥이다. 심지어 주인공은 고급 장교인데도 그 지경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한 반박 의견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의 아버지 오구마 겐지는 스무 살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수용소에 갇혔는데, 그 때의 경험을 아들에게 들려주었고 이 내용을 오구마 에이지가 자신의 책인 <일본 양심의 탄생>(김범수 옮김, 동아시아 펴냄)에 실었다. 오구마 겐지는 소련군 포로 생활에 대해서 "소련군은 일본군보다 나았던 것 같다. 소련군은 임무를 벗어난 사적인 관계로 있을 때는 장교와 병사가 마음 편하게 서로 이야기했다. 메이데이 같은 휴일에는 수용소에 가족을 데리고 와서 함께 춤을 춘다거나 했다. 상관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이유가 있으면 병사가 항변하는 것도 가능했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오구마 겐지의 주장에 의하면 수용소에서 정작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오히려 일본군이었다고한다. 일본군 포로 내부에서는 작업량, 식량 배분 등도 지위에 따라 차별받았다. 소련 군인끼리의 평등함을 동경하던 일본군 포로들은 민주운동을 진행했는데, 일본군 내부에서의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였지만 조직민주주의를 경험해본 적이 없던 이들의 운동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졌다고...출처

그런데 주의할 점은 소설 <마지막 빨치산 사단장 황의지>에 의하면 일본군에 있던 시절 보다는 시베리아 수용소가 더 좋았다고 한다(...). 밥도 주고 월급도 주고 조센징이라고 때리지도 않는다. 나중에는 다른 일본군이 귀환 할 때 같이 안가고 시베리아에 남고 싶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 사람은 소련에 귀화신청까지 했는데, 소련 측에서 "당신은 조선인이니 3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면서 거부당했다고 한다.

4.3. 카우라 수용소 탈주사건[편집]


1944년 8월 5일,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의 허술한 수용소 관리를 틈타 일본 육해군 포로들이 담요를 철조망에 덮어씌워 길을 만든 후 집단으로 탈주를 감행했다. 경비대원들이 기관총으로 응전했으나 포로들의 돌격에 수용소장 포함 4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 포로는 231명이 사살되거나 자살했으며, 이 중에는 탈출에 참여하지 않은 포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상자는 108명이며, 378명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 탈출자들도 전원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탈주 이유는 포로가 된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죽음으로 수치를 씻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포로수용소에서 탈주하는 이유는 살아서 원대에 복귀해 다시 싸우기 위해서이며, 설령 탈주에 실패해 사살된다 해도 의도치 않은 사고인 경우가 다수인데, 이들은 처음부터 '도마 위의 잉어'처럼 깨끗하게 죽기를 바랐다는 게 참으로 끔찍하다.

이 탈옥에 가담하지 않으려 했던 몇몇 포로들이 몇 가지 수단을 동원해 경계병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으나, 이들이 눈치채지 못해 사전에 막지 못했다.

일본 육군에 강제로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된 한국인들은 이 일본군 탈주 행위에 가담하지 않고 오히려 사전에 폭동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수용소 측에서는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모함이라 여겼는지 무시했다고 한다.


4.4. 전후의 포로들[편집]


1946년에서 1947년까지 미국영국은 포로를 석방했다.

관동군 포로는 1946년에 18,616명이 석방됐고 1947년에 166,240명, 1948년에 175,000명이 석방됐다. 1949년에 97,000명이 추가로 석방됐고 1950년에 1,585명이 석방됐으며 2,988명은 소련에 남았다. 다만 불모지대의 실존모델 세지마 류조는 전범으로 분류되어 무려 11년이나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있다가 그때까지 남은 전범들과 다 함께 마지막으로 석방 된다. 포로생활 중 사망한 사람은 약 6만 명.

태평양 전선에서는 <포로기>의 주인공 오오카 쇼헤이는 1진으로 1945년 12월에 석방되어 일본으로 귀환했고, 책에서는 포로가 된 직후 포로 병원에서 죽은 사람을 제외하면, 수용생활 내에서 죽은 경우는 아예 없는 듯 하다. 다만 여기서도 전범... 주로 죽음의 행진에 관여하거나 미군 포로를 학대한 일본군은 남았다. 또한 포로관리를 담당하는 군무원으로 온 조선인들 역시 상당수가 전범으로 지목되어 남았다. 그리고 미군 포로를 학대한 것이 전범 재판을 통해 증명되면 C급 전범이 되어 처형당했다.


5. 창작물/ 다큐에서의 일본군 포로[편집]


1984년 신원문화사, 야마사키 도요코 저, 이병주 번역, 전 4권
세지마 류조를 모델로 한 소설 불모지대 중 제 1권 분량. 관동군의 포로의 삶에 대해 다루었다. 대본영 참모로 있다가 일본이 항복한 다음날인 8월 16일에 항복명령 지도차 만주에 갔다가 소련군 포로가 된다. 최고지휘부의 입장에서 관동군이 소련군 포로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 보며, 도쿄의 전범 재판에도 참석한다. 그리고 시베리아로 끌려가 11년간 같은 고생을 한다.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이기 때문에 실존인물인 세지마 류조문서와, 소설인 불모지대 문서를 보면 서로 차이가 난다.
또한 소련에서 포로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친공으로 사상 전향했는지 책이 끝날 때 까지 의심받는데 이는 당시 일본 분위기상 사실인 것 같다. 소설에서도 편의를 위해 사상 전향한 일본 포로 이야기가 여러번 등장 한다. 심지어 현대 일본 공산당의 주요한 한축은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일본군 포로이다.(또 다른 축은 일제시절 자생적 사회주의자)

  • 장군의 후예(마지막 빨치산 사단장 황의지)
2013년 도서출판 작가, 박찬두 저, 전3권
2권이 황의지가 관동군에 끌려 갔다가 소련군 포로생활을 하는 내용이다. 책 자체에 대해서는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문서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일본군은 조선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는데, 오히려 소련군은 포로인 자신들에게 욕만 하지 폭행은 없었다. 그리고 능력에 따라 대우해주고 월급도 줬다. 이 때문에 황의지는 포로생활시 소련에게 상당히 호감을 가져 귀환하지 않고 시베리아에 남을까? 하고 고민까지 한다. 가장 최근 책이라 구하기 쉽다. 소련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남한에 오자 마자 빨갱이로 오인 받아 군경에서 두들겨 맞다가 결국 입산하여 빨치산이 된다.

  •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시베리아 억류자, 일제와 분단과 냉전에 짓밟힌 사람들)
2009년 서해문집, 김효순 저
역시 조선인으로 일본군에 속해 있다가 시베리아에 끌려간 내용이다. 소설 불모지대에서는 시베리아에 갔다가 돌아와 비참한 삶에 빠진 귀환자들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건 다 뻥이다. 실제로는 돌아오자 밀린 '월급'을 받고, 고생했다며 계급에 따라 '은사금'을 받았으며 고급 장교들은 '연금'까지 받아서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에 비해 일본 병사들은 그딴거 없었다. 하물며 조선으로 돌아온 조선인 병사는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이다.
좌익적인 <장군의 후예> 주인공과 달리 이 책의 주인공들은 우익 인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남한에 넘어 오자 마자 빨갱이로 오인 받아 군경에게 두들겨 맞는다. 북한에서 환대를 받고, 남한에서 두들겨 맞는 과정이 장군의 후예랑 복사를 한 듯이 동일하다.

  • 포로기
1995년 웅진출판, 오오카 쇼헤이 저
불모지대를 지은 야마사키 도요코 만큼은 국내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일본에서 오오카 쇼헤이는 20세기 일본 문학의 대표자중 하나로 꼽히는 권위자이다. 오오카는 자신의 경험담을 1948년부터 단편으로 발표하였는데, 이 책은 이러한 단편 13편을 묶어서 출판한 것이다. 이때문에 소개나 내용 면에서 겹치는 부분이 계속해서 나온다.
위에서 소개한 3권의 책들이 관동군이 시베리아에 끌려가 개고생한 경험담인데 비해, 이 책은 태평양 전선의 일본군이 미군포로가 되어 호의호식을 하며 부끄러워 하고 자기 변명 하는 내용이다.
제국대학의 하나인 교토 대학 문학부(불문 전공)를 나온 초 엘리트로 무려 35세 때인 1944년에 소집 되어 필리핀으로 파견된다. 2/3가 34~35세, 1/3이 21세이며, 하사관 이상 전원 예비역으로 신규 편성된 부대에 들어 간다. 그 바람에 모두가 똑같은 이등병이라 일본군 특유의 악습은 겪지 않는다. 소속도 이상해서 무슨 무슨 사단이나 연대가 아니라 독립 359보병 대대 1중대(니시야 중대) 소속의 경비 전담 부대로 수송대대 예하에 편제되었다.
그리고 필리핀에서 1945년 1월에 포로가 된다. 본인의 주장은 부상을 입고 기절했다가 포로로 잡혔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변명이 상당히 길다. 일본군 포로 대다수가 부상을 입고 기절했다가 포로가 되었다고 뻥을 치는 것이 함정 영어가 그나마 가능해 포로수용소에서 통역 역할을 맡으면서 생활한다. 필리핀 전선에서 비교적 초기에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이후 진행 상황에 대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귀환시엔 먼저 포로가 된 순서대로 귀국하였기 때문에 귀환 1진에 속해 그해 12월에 일본으로 귀환한다.
일본군 포로들의 체험기가 일본 내에서는 여럿 있지만 이 책을 제외하면 거의 번역되지 않아 가끔 인용 자료로 나오는 정도이다. 이때문에 포로수기로 치면 이 책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차지한다. 수많은 상을 받는 등, 문학적으로도 인정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적 허구로 영웅담을 만든 <불모지대>와는 비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

  •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
2016년 글항아리, 야마모토 시치헤이 저
<포로기>와 마찬가지로 태평양 전선의 일본군 포로이다. 다만 <포로기>는 35세에 보충병으로 끌려온 사병의 시점이고, 이 책은 장교인 소위의 시점에서 바라보았다. 주인공이자 작가인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일본에서는 그를 연구하는 학문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문호이다. 매우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지만 주인공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페이지 마다 빵빵 터지게 재미있다. 예를들어 미군의 죽음의 행진을 변호 해준답시고 하는 소리가 “무거운 짐 없이 걷는 100킬로미터가 죽음의 행진이고, 30킬로그램의 짐을 등에 지고 걷는 300킬로미터가 지옥의 행진이라면 3톤짜리 포차와 탄약차를 끌면서 걷는 300킬로미터는 도대체 어떤 행진이라고 해야 할까?”라며 자학 개그를 일삼는다. 일본군이 딱히 미군 포로를 학대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은 원래 걷는게 '죽음의 행진'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포병 소대장인 주인공은 포 운송수단이 없어 정글속에서 몇백km를 인력으로 끌고 행군한다. 결국 포를 단 한번 쏘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자폭 시키는 부분에서 아무리 일본군이라고 할지라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초지일관 일본군을 비판하고 조롱하기 때문에 보기에 매우 즐겁다. 다만 포로 체험담이 주가 아니라 포로가 될 때 까지 1년도 안되는 짧은 종군을 한 태평양 전선에서의 일본군의 무능함과 졸전을 비난하는게 주 내용이다. 포로가 되어서는 장교들끼리 분리되어 수용되는데 이때 만난 네임드급 장군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생활하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포로기에서 주인공은 사병이라 장교와 분리 수용되었기 때문에 묘사가 전혀 없다. 국제협약에 따라 일본군 사병들은 월급을 받고 적당한 일을 하는데, 장교는 일을 안하고 피둥피둥 살만 찌고 있다.
문학적으로 뛰어난데다 정보 가치가 높고, 기호에 딱 맞는데 웃기기까지 하니 꼭 한번 읽어 볼만한 책.


6. 다른 군대에서[편집]


고대 전투에서는 칸나이 전투 때 로마군 6만명 중 1만+1만(주둔지 경계병)이 포로로 잡힌뒤 그중 로마 시민 8천이 노예로 팔려갔다. 다른 군대들의 경우에는 포위된 상황에서 개죽음이 확실하면 이후 맞이할 결과가 참혹하더라도 대부분 항복을 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포위된 30만의 독일군 중 9만명 정도가 항복했고, 웨이크 섬 전투에서는 600여명의 미군 중 400여명이, 토브룩 함락때는 영국군 110,000명 중 3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심지어 나치의 악랄한 포로학대를 알고있을 폴란드 시민들도 바르샤바 봉기 때 시민군 50,000명중 15,000명이 항복했다. 물론 수용소로 직행했지만 그걸 알면서도 당장의 개죽음을 면하기 위해 항복한 것이다. 이렇듯 포위되어 탈출로가 없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잔혹한 처우가 기다려도 적어도 몇 십%의 포로는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리아 내전이나 이라크 내전 때 그 악명높은 IS도 적군의 포위섬멸전 상황에서는 손을 들었다. 외국 지원병을 제외하고는 즉결처분이 유력하다는 거 뻔히 알지만 어차피 싸워도 결말이 뻔하니까.

물론 대부분의 국가에서 항복을 금지하는 규정을 두기는 한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국군의 군형법도 지휘관이 자기 할 바를 다하지 않고 적에게 항복을 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엄하게 규정한다.(군형법 제22조) 또한 지휘관이 아닌 군인이 투항을 하면 '적진으로의 도주죄'라고 해서 사형에 처한다.(군형법 제33조) 아군이 자기 멋대로 아군을 불리하게 하도록 내버려두면 패배는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적인 군대라면 설령 항복을 말라고 법에 규정해도 임무를 수행할 수 없고 싸워봤자 득도 없다면, 항복하고 포로로 잡혔다가 본국에 돌아와도 기밀 누출 같이 아군에 해가 될 행위를 하지않고, 항복한 것도 완전히 임무를 저버린 것이 아니며 어쩔 수 없었다고 입증하면 군법 위반으로 처벌하기는커녕 참전 용사로 대접한다. 법학 용어로 "기대가능성이 없다"라고 한다.

군인도 일단 천부인권을 지닌 인간인 이상 목숨이 누구보다 소중한 가치인건 맞지만, 군인의 경우는 자신을 희생해서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임무의 가치를 그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임무를 성공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내놓으라는 건 군인에게도 기대가능성 없는 행위다. 때문에 한국군도 군진수칙에 어쩔 수 없이 항복을 했을 경우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어찌보면 위 군형법과 모순되는 규정을 두고있다. 진주만 공습 후 필리핀에 고립된 미군도 보급이 끊겨 탄약과 식량은 없고 적은 많은 상황을 설명하고 상부의 허가받고 항복했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운명은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총맞고 죽는게 더 나을 상황이었긴 하지만) 개죽음이 뻔한 상황이면 상부에 보고한 뒤 항복이 가능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후퇴와 항복을 금지한 유명한 사례로 스탈린의 명령 227호가 있지만, 실제 일선에서는 무시하는 경우도 많았고 명령을 내린 스탈린조차도 다른 수단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실제로 전쟁 중기부터는 포로가 되었던 소련군 대부분이 원대복귀하며 유명무실해졌다.

반면 일본군은 이를 너무 철저하게 지켜서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많은 병력과 충분한 영토와 공업능력이 갖춰진 상황인지라 이런 병크를 저질러도 어느 정도는 용납이 되지만(물론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가진 것 없고 영토가 작은 일본이 이런 짓을 따라한 것 자체가 에러다. 소련조차 베를린 전투 직전 시기가 되면 인원이 모자라 보통 1만명 이상의 병력인 사단의 실제 병력이 연대도 안되는 2천명 이하인 등 제대로 완편된 부대가 없어서 본의 아니게 세계에서 두번째로 차량화가 잘된 군대가 되어버렸다. 전후에 팔다리 하나쯤 없어도 여자 사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오죽 남자가 줄었으면 독일군 포로들을 소련 여성들이 덮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인구 많은 소련도 이럴진대 인구 얼마 되지도 않은 일본이 이런 짓을 따라 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실상에 제일 가까운 사례를 들자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프랑스군으로 볼 수는 있다. 이때의 프랑스군은 밝은 면도 있지만 또한 어두운 면으로도 악명이 높았는데, 후퇴를 하는건 물론이요 참호 밖으로 뛰어나가지 않거나, 회의적인 발언을 해도, 심지어는 항복을 해도 무조건 총살이었다. 이런 인명경시 탓에 연합군 사이에서 프래깅전쟁범죄가 많이 일어났고 심지어 적군 포로의 대우도 최악이었다.

사실 일본군도 프로이센군국주의 체계와 더불어 이 당시의 프랑스군의 엘랑 비탈같은 정신주의와 청년학파 같은 군사교리들을 도입했다. 그런데 이 군국주의 체계를 제멋대로 이상하게 도입하는 바람에 역사에 길이 남은 내분이 탄생하게 된다. 원래 반자이 어택의 탄생은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에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프로이센과 프랑스군의 나쁜점을 도입함으로써 이런 지경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나마 프랑스 육군은 이른바 "헌병 사냥"이라는 묘사가 나올 만큼 대규모 반란 사건을 겪은 뒤 페탱 장군 등 일부 지휘관들이 무분별한 총살 선고를 막는 등 처우를 개선했다.

다만 당시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대는 같은 인종인 동양인이 아니라 당시 동양인들 입장에서 보면 생소한 서양인이 였고 서양의 기술과 외형을 모방하려 했으나 서양의 사고관이나 정신은 이해하는 사람이 적은것이 현실이었다. 또한 당시 세계에 팽배한 제국주의로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에 준하는 노동과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으며 각지에 식민지가 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일반 신민들은 그들에게 잡히면 평생 노예로 가축처럼 부려지며 패배할 경우 본국의 여자들 역시 그들의 성노리개로 더욱 심한 고초를 당할 것이라고 믿고 있던 상황또한 감안해야한다.물론 그런 본인들도 점령지의 사람들을 상대로 약탈, 폭행, 강간, 학살등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결국 전쟁에서 졌고, 일찍이 항복하고 포로가 되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분히 결과론적인 이야기고 일본이 이겼다면 그들의 죽음은 미화되어 영웅 대우를 받고있을 것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무모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전투를 결사항전으로 승리한 기적같은 전투들 또한 세계사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불가능할 것을 알고 전투에 임한 것이 잘못된 일인가? 모든 것은 결과에 따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물론 일본의 포로대우가 처참한 수준이며 귀축영미 이미지를 만들어 항복을 막고, 정신력이 무기한계를 초월한다며 모자란 행동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전투에서 항복을 포기하고 결사항전을 택한 나라 또한 세계사에 흔한 일이다. 고로 이런 불가능한 전투에서 끝까지 싸우는 것이 일본만의 고유 행동양식은 아니다. 특히 송나라의 경우는 더했는데 개개의 전투에서는 포로가 나왔지만 국가적으로는 항복 따위 없이 군주와 신하를 넘어 백성이 결사항전을 벌였으며, 마지막 전투의 패배가 전달되자 천자와 백성 수십만이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근데 무의미한 죽음을 강요한건 쉴드쳐줄 일이 아니다

7. 포로는 필요없다?[편집]


가끔씩 "적에게 투항한 아군 포로를 인정하지 않고 엄벌로 처벌하면 죽을때까지 싸울테니 나라엔 좋지 않겠느냐"라며 이런식의 포로취급을 두둔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이는 포로의 입장이나 인간의 생존본능에 대해 잘 모르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실 어지간히 정신나간 놈이거나 어지간히 정신나간 군대, 국가에서 복무하지 않는 이상 적에게 항복을 하고 싶어하는 군인은 별로 없다. 반대로 정말 가망이 없는 상황이면 아무리 포로 대우가 가혹하다는 것을 알더라도 항복하는 것이 사람이다.

테러와의 전쟁 당시의 미군도 이라크, 아프간에서 반군들의 기습을 숱하게 받았는데 대개 싸우다 안되면 진내사격 요청하고 부대가 전멸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어차피 가혹한 대우를 받거나 심지어 참수당할 걸 뻔히 알면서 항복한 군인들 또한 소수나마 나왔다. 그런 포로들에게 "너 반역자", "너 오면 사형" 따위의 취급을 하게된다면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포로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별거 없다. 아군이 너무 우세하지 않으면 마지막 남은 희망(?)인 적군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불고, 충성을 맹세해 적국에 귀화를 시도하는 거다. 만약 그 적국이 일본 제국이나 파시스트 북한 같은 인간백정들이 아니라 투항해도 먹고 살만한 정상적인 국가라면 이야기는 끝이다. 데이브 그로스먼의 살인의 심리학에서는 미군이 신사적인 포로대접 덕분에 더 적은 피해로 승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때문에 정상적인 국가들은 포로가 된 아군이 이적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 참전용사로 대우해주고, 만약 오랜기간 전향하지 않는 경우 존 매케인처럼 국가적으로 영웅대우를 해주거나, 장무환씨의 경우[2]처럼 적어도 국민들은 영웅으로 대접해준다.

하다못해 한국군도 용호도 사상검증에서 보듯 포로를 윗선에서 좋게 보진 않았지만 결국 무고함이 밝혀진 포로 출신들은 한직을 돌지언정 최소한 군에 남을 수는 있었고, 적어도 공식적으로 불명예를 준 사례는 없다. 심지어 자진해서 전향의사를 밝힌 포로들에게 군입대를 권했을 정도다. 한편 반공포로들은 북한 출신들이 다수로 갈 곳이 없어 군에 들어간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던 건 사실이다. 1950, 60년대 한국 자체가 워낙 열악했기 때문에 군인 등 공공기관에 소속된 사람이나 금수저가 아니면 먹고살기가 극도로 어려운 현실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적에게 넘어간 장병들이 전시선전에 동원되어 자신의 전 조국을 "비인도적인 전체주의 국가"로 강도높게 비판하고 이웅평 대령처럼 자신의 동료들에게 넘어오라고 회유하는 심리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웅평 대령은 김신조 목사와 함께 김만철 일가 탈북사건 당시 김만철 일가가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거나(당시 일본측에서 보낸 통역이 하필이면 조총련 계열이어서... 자세한 사항은 김만철 문서 참고 바람.) 제 3국을 택하는 대신 대한민국에 들어오도록 회유하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회유를 받은 군인들은 '저런 더러운 배신자 새끼!' 라고 생각하기보단 '오오 쟤가 저렇게 잘 사는걸 보니 나도 넘어가면 잘 살겠네?'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포로 대우를 그딴 식으로 하는곳이니 병사나 국민에 대한 대접도 별로 좋지 못할게 뻔한지라 전선의 장병들도 심적 부담과 박탈감을 유발해 "나는 국가로부터 존중받는 국민이 아니라 그저 전쟁터의 총알받이일 뿐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리하여 바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떨어지고, 최종적으로 멀쩡한 부대가 전투도 없이 적국에 투항하는 골때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이런일이 벌어진다면 이미 심리전에서부터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북한이 대북방송이나 대북전단 살포에 극도로 예민하고 신경질스러운 반응을 벌이는게 바로 이런 이유다. 이웅평 대위가 탈북하고 대한민국에 망명하자 그의 귀순으로 조종사들의 처우가 더 좋아졌고, 이에 조종사들이 '이따금씩 하나가 남으로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몰래 수근댔다고 한다. 강명도 교수가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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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적으로 미군은 일본군 포로를 포획하도록 장려되었으나 일본군의 악랄한 막장 행태와 가짜항복을 이용한 자폭전술 등으로 비롯된 미군의 증오는 매우 깊었고 포로 포획을 거부하거나 전투 중 포획한 포로를 학살해버리는 등 암묵적인 포로는 필요없다 관습이 미군 사이에 만연했다. 지휘부에서 포로를 포획한 병사에게 포상을 주거나 휴가를 보내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정도였다. 일본군 역시 휘하 장병들에게 미군에게 잡히면 학살당할 것이라 세뇌시키고 항복이나 탈영을 시도한 병사를 처형하여 공포감과 압박감을 주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도록 내몰았다.[2] 주중한국대사관에 구출요청을 시도했는데 외교부가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