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무기체계/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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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우가키 군축
3. 빈약한 화력
4. 기본화기
5. 지원화기
6. 전차
7. 실패한 초중전차 계획
10. 병력수송장갑차와 지원장갑차량
11. 대전차 임무
12. 육군 소속 군함
13. 본토 결전용 병기


1. 개요[편집]


일본 제국 육군일본 제국 해군에 비해 여러가지 측면에서 뒤떨어졌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특히 주적을 설정할 때 일본 육군은 중화민국이나 소련을 설정하였고 이후에 추가된 것도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를 지키던 2,3선급의 연합군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주적을 미국으로 상정한 일본 해군과 전혀 달랐고 이 때문에 무기체제의 차이도 커졌다.

애초부터 일본 제국의 국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육군이건 해군이건 소수정예화를 추구하는 것은 같으나 육군은 일단 점령지 치안유지 같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규모는 있어야 하고 주적도 열강들의 1선급 병력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딱 전간기 수준에 어울리는 군대를 만들어놓은 반면에 해군의 경우에는 미국이 주적이기 때문에 장비의 수준이 높아야 하고 세계 제3위의 해군력을 유지해야 하므로 장비의 수준이 육군보다 높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일본 육군의 큰 문제점은 수준이 낮은 병기도 제때 보급을 못해서 부족한 전투능력을 인간의 정신력으로 돌파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한 것이 많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특히 무기체계 쪽에서 비판이 더 많이 가해지는 상황이 많아진다.


2. 우가키 군축[편집]


원래 일본 육군이 메이지 시대부터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사단의 갯수는 평시 상비 25개, 전시 50개였다. 1921년까지 일본 육군은 "현실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여기던 21개 사단까지는 확보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나타난 현대전의 모습을 보고선 신장비들을 도입하여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산의 한계상 제대로 된 편제를 완성한 부대를 만들 수는 없었다.

우가키 가즈시게가 주도한 우가키 군축은 바로 평시 21개 사단을 17개 사단으로 줄이는 대신 4개 사단분 만큼의 예산을 현대적인 장비로 무장한 신규 부대를 창설하는 비용으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즉 육군의 5분의 1을 감축하며 4개 사단 외에도 5개 육군 병원과 2개 육군유년학교를 패쇄하는 것이다.

그리고 절감한 예산으로 1개 전차연대, 1개 고사포 연대, 2개 항공연대, 1개 타이완 산포연대를 확충하고, 육군 자동차학교, 통신학교를 개설한다. 또한 각 부대에 항공기, 전차, 경기관총 및 트럭견인포와 야전중포를 배치하도록 하였다.

물론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평시에 감축된 사단을 운용하는 간부 인원만 유지했기 때문에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급팽창된 사단들에게 배속시킬 장교부사관 인원이 수가 부족하고 능력이 떨어졌다. 특히 일본 육군의 장교 교육 제도상 제대로 된 장교 교육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참모 교육을 받은 장교의 부족이 심각했다. 사단 감축으로 인해 이들 부대에 배속되던 참모 인원까지 줄여버리면서 육군대학의 학생 정원까지 동시에 줄여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정책은 1차대전 패배 이후의 군대 축소에도 장교 집단의 유지에 노력한 독일과는 정반대이다. 독일은 뛰어난 실적을 올린 장교들을 최대한 군에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 제2차 대전 중 활약한 지휘관들은 대부분 이 때 군에 남은 인물들이다.

그리고 악영향이 바로 발생하기 시작한다. 일본 육군이 침략전쟁으로 인해 갑자기 급팽창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33년까지는 징병제라고 해도 현역 징집률이 겨우 20% 밖에 안되었다. 일본군의 기본 군사 전략이 소수정예를 지향하는 것도 있지만, 그 소수를 차량화/기계화/중무장화 시킬 장비가 없는 상태여서 더 이상 뽑아도 어차피 소화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중일전쟁 발발로 엄청난 병력 소모가 있자 과거에는 군대에 안 가던 제1을종, 나중에는 제2을종까지 징집하여 1937년에는 징집률이 25%로 올라가고 1940년에는 무려 50%까지 올라갔다.

그럼에도 병력 부족 사태는 심각하였다. 특히 일본군의 병역제도는 평시에 상비사단 17개 체제로 짜여져 있는데 1938년까지 정확히 두배인 총 34개 사단 115만명으로 늘어 난다. 여기에 일본군은 평시에 비해 전시에는 사단 병력이 2배로 늘어 난다. 결국 평시에 비해 딱 4배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현역 2년외에 예비역 5년 4개월을 전부 동원해서 복무해도 평시 병력은 3.67배 밖에 안되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을종까지 동원하여 전시 34개 사단 병력을 채우게 되었다. 그중에서 제2을종의 경우 아예 군사교육을 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 소집이라는 이름으로 사단 병력을 보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소수 정예제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병력이 부족하였다. 1939년에는 8개 사단 증설, 1940년에는 7개 사단, 1941년에는 2개 사단이 증설되어 총 51개 사단 210만명이 되었다. 결국 1939년에 대량소집을 위한 법개정이 이루어져 기존의 보충병역 12년 4개월이 17년 4개월로 연장되었다. 최고 38세의 남성까지 소집이 가능해졌다. 다시 말하자면 예전에는 도저히 군인으로 써먹을 수 없던 체격과 나이까지 소집되어 질적으로 심각하게 떨어지게 된다. 거기다 현역들이 예비역들을 사람 취급 안하고 개무시 하는 건 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에는 이래도 부족하여 징병연한을 20세에서 19세로 낮추고 현역 징집률을 77.4%까지 올렸다. 이 과정에서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해 조선인과 대만인도 징집했다. 육군 총병력은 99개 사단 420만명에 달했다. 덕분에 이미 심각하게 상태가 안좋았던 1941년과도 비교도 안되게 질적으로 심각하게 떨어지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렇게 병력이 급팽창하자 일본 육군의 장교 부족이 날로 심각해졌다. 1939년의 경우 전체 장교 60,700명에서 소좌 정원 7,366명중 4,231명(57.4%)만 채우고, 대위는 더 심각하여 정원 18,597명중에 7,191명(38.7%) 밖에 안되었다. 게다가 채워진 인원들도 상당수가 예비역 장교로 39년 기준으로 현역 비율은 36% 밖에 안되어 소좌가 83.1%, 대위가 77.7%, 중소위의 경우 겨우 21.2%였다. 그바람에 본래 소좌가 맡아야 할 대대장을 대위가, 대위가 맡아야 할 중대장을 중소위가 맡는 것이 보통이였다. 덕분에 이전까지처럼 진급시킬때 연공서열 따위에 목을 메던 것도 사라지며 중위 임관한 장교가 1년만에 소좌가 되는 경우까지 생겼을 정도다. 설상가상으로 진급도 속성으로 이뤄지게 되면서 1939년에 졸업한 육사 52기 생들이 1944년에 딱 5년 장교생활 하고 소좌를 단 인원들이 있었고, 1933년 졸업한 1912년생 중좌가 있을 정도였다. 20대 소좌와 30대 초반 중좌라는 건 태평양전쟁 초기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다급하게 마구잡이로 장교를 충원한 결과 1945년에는 육군 전체 장교가 25만명 까지 늘어났지만, 현역 장교 비율은 무려 19%까지 떨어 졌고, 정원 충족률도 74%까지 떨어진다. 대대장(소좌), 중대장(대위)의 경우 현역은 20~40% 정도였으며, 정원 충족률은 겨우 70%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서 병사들을 징집해서 일본 육군의 크기를 크게 늘리는 바람에 장교 1인당 사병의 수는 1939년에는 17.5명이었지만, 1945년에는 24.6명에 달했다.

같은기간 미 육군은 1939년에는 12.1명, 1943년엔 11.1명, 1945년엔 8.3명으로 오히려 장교 비율이 점점 올라갔다. 그것도 미군이 1939년 총병력 10만명에서 1945년엔 1,000만명까지 늘어난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전쟁준비가 제대로 안된 상황에서 기습적인 선빵 얻어맞고 단시간 안에 급격하게 군대를 증강시킨 것은 미국인데 장교의 수급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일본 육군이라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심지어 일본 해군도 일본 육군보다는 장교 수급을 제대로 했다.

또한 각급 부대에 전차를 배치하는 것도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이유인즉슨, 기존의 군마의 경우 말/사료 구입에서 막대한 이권을 지휘관에게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전차는 생산부터 공급까지 참모 본부에서 통합 구매를 하니 지휘관에게 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방산비리가 이렇게 무섭다.

게다가 우가키 군축이 관동대지진과 겹치는 바람에 현대화를 위해 기존의 예산을 유지하면서 사단수를 삭감하려던 계획이 삭감된 사단의 예산 이상으로 육군 총예산이 삭감당하면서 예산 절약을 위해 탄피 회수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정도가 지나쳐버린 나머지 만주사변 기간 동안 일본군 보병들은 교전 중인데도 한 번 사격한 후에 탄피를 줍는다고 법석을 떠는 희한한 광경을 자주 보였다. 그나마 현대의 한국군이 탄피를 수거하는 것은 예산보다는 실탄 유출로 인한 총기 사고나 범죄 발생 등을 방지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탄피를 수거해야 실탄 소모량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계량할 수 있고, 방치한 탄피로 다시 실탄을 만들어 범죄에 악용할 수도 있는 문제[1]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군은 사격 훈련도 아닌 실전에서 저 짓을 했으니 그야말로 병맛이다. 물론 실전에서도 탄피가 장비에 끼거나 적에게 위치를 노출시킬 가능성이 있어서 이를 막고자 될 수 있는 한 탄피를 회수함이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눈에 띄는 것만 회수하는 선에서 끝내도 별 문제가 없다.

전반적으로는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정예를 추구한다는 모순점을 해결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빈약한 화력[편집]


무모한 반자이 어택으로 빈축을 사는 일본 육군이지만, 반자이 어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게 바로 부족한 화력이다.

러일전쟁 당시 뤼순 요새의 중요거점인 203고지에서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 총검을 장비한 총검 돌격으로 함락시켰을 때, 당시 일본 측에선 이런 상황을 불가피한 것이 아닌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육군의 상식적 수준에서 포병화력으로는 요새 방어력을 무력화할 수 없다고 여기고, 따라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전술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은 사기 왕성한 보병들을 모아 총검돌격을 하는 것뿐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런 경험 하에 일본군은 명인화와 백병화를 추구하였다. 선진열강들만 한 재정과 기술을 가지지 못한 일본이 전쟁에서 빠른 시간 내에 이기려면, 사병들이 특정 병기의 명인 반열에 들어야 하고 보병은 포병과 기관총 등의 화력을 극복할 수 있는 백병전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기관총 전력과 포병 전력에 대해 정성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육군의 이러한 사상은 203고지에서의 경험과, 프랑스의 엘랑 비탈의 나쁜 점만 배우기 시작하면서 더 심각해진다.

프랑스군 항목에도 나온 이야기지만, 엘랑 비탈은 청년학파가 창안한 사상이다. 기술과 재정, 양과 질 모두를 앞선 상대를 이기기 위해 만든 사상을 일본군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

하지만 일본군은 여기서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203고지를 함락시킨 1등 공신은 총검돌격이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 끌고 온 280mm 대포였던 것이다! 화력으로 요새 방어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니 일이 단단히 꼬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 상층부, '280mm 공성포를 끌고 와서 요새 방어력을 제거해놓고도 총검돌격을 제안한' 본인들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였으니 군사력과 무기체계가 어그러지고 망가짐은 당연지사.

게다가 프랑스가 참호 앞에서 인명피해를 엄청나게 입기는 했으나 이는 주요 참전국들이 공통으로 겪은 일이다. 오히려 프랑스는 1915년에는 이런 정신 나간 짓거리를 때려치웠다. 게다가 프랑스는 포병 화력을 매우 중시해서 1916년부터 155mm 포를 본격적으로 전장에 투입하였다.[2]

그와 달리 일본은 서부전선에서 참호전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정신차릴 기회조차도 없었고, 칭다오 전투에서 요새에서 방어중인 독일군을 상대로 충분한 포병 화력을 동원한 화력전을 해서 사상자 700여명이라는 일본 육군 기준으로는 적은 피해만 내면서 요새를 함락시킨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와 탄약이 많이 들어간다고 애써 해당 전투의 교훈을 무시하는 뻘짓까지 작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만 겁을 줘도 전열이 붕괴하는 중국 군벌을 총검으로 찔러대며 자신들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였다. 태평양 전쟁 개전 이후 필리핀, 말레이 등지에 배치된 2선급 식민지 치안군을 1선급 정규군으로 착각하면서 열강의 군대도 별 거 없다고 한참 빗나간 착각을 하고 말았다. 할힌골 전투에서 그 한계를 겪었지만, 일본군은 이 전투 자체를 그냥 없는 셈 쳤다. 이런 상황이니 보병을 위시한 육군의 화력을 향상시킬 시도나 의지 같은 건 없었다. 문제는 제대로 마주친 상대인 미군이 중국군이나 식민지 치안군 같은 허접들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일본 육군에게 비극이 시작되었다.

기본보병화력만 비교해보자. 일본 육군 분대아리사카 볼트액션 소총인 38식 소총이나 99식 소총으로 무장한 소총병 12명. 여기에 96/99식 경기관총을 운용하는 분대지원화기 사수 1명으로 구성된다. 반면 이에 대응하는 미육군 보병 분대는 M1 개런드 반자동소총, M1 카빈 반자동소총, 톰슨 기관단총, M3 기관단총등으로 무장한 소총수 9~11명과 M1918 브라우닝사수 1~3명으로 구성된다. 미 해병대의 경우에는 해병대 12인 분대는 미 육군과 비슷하지만 M1918 브라우닝 3정이 보통 배치되며 전쟁이 후반기로 갈수록 1정만 받은 분대는 줄어들어갔다. 게다가 브라우닝 자동소총은 이름과는 달리 20발 탄창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7.62mm탄의 위력으로 일본군의 경기관총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화력을 발휘하면서도 운용하기 편했으니 정면에서 대결하면 화력에서부터 일본군은 미군에 밀림이 당연하였다. 일본군 쪽은 한 발 쏘고 노리쇠 제끼고 쏘는 상황인데 미군은 방아쇠만 당기면 그냥 바로바로 나가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총기대국 미국답게 보통은 징집 후 교육에 시간이 많이 들 시골출신들이 오히려 총기에 익숙하다는 점도 치명적인 차이점이었다.

같은 추축군인 독일은 볼트액션 소총인 Kar98k와 기관단총으로 MP40을 사용했는데, 소총이야 거기서 거기지만 기관단총에서는 밀리는 데다가 기관총까지 가면 확실하게 압도당했다. 게다가 후반에는 볼트액션 소총과 같은 가격으로 최초의 돌격소총을 만들기까지 했다. 영국군은 볼트액션이긴 했어도 10발이나 쏠 수 있고 연사력이 준 반자동 수준으로 빠른 리-엔필드 소총과 배관공의 피임 실패라는 악명을 가지긴 했어도 간단한 설계로 대량으로 뿌려져서 일선의 화력을 담당한 스텐 기관단총으로 무장했으며, 일본군 자신들이 무고장이라 칭송했던 체코제 명품 기관총 Vz.26의 라이센스 생산판인 Bren을 분대지원화기로 사용했다. 소련은 연사력과 5발 장탄수는 고만고만하다지만 1800년대부터 사용한, 설계가 간단하고 신뢰성도 우수한 모신나강이 주력이라 그나마 일본군과 비슷할 뻔했지만, 받쳐주는 자동/반자동화기로 PPSh-41, PPS-43 시리즈, 일부 문제가 있긴 했지만 적당한 화력을 내는 SVT-40을 주력으로 쓰며 분대지원화기 또한 신뢰성 좋고 간편한 DP-28을 사용했다. 일본군의 기관총은 연사력에 심각한 결점이 있는 물건들뿐이었고, 그나마도 수가 매우 적어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들었다.

중대간에서도 일본육군이 89식 척탄통 3정이 추가되는 것이 전부이지만 미군의 경우 60mm 박격포 3문과 M1919 브라우닝 기관총 2정,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1정이 추가된다. 보병 전술 최소단위인 소대에서도 미군은 기관총이 추가되는 형식이라 화력차이가 굉장히 벌어졌다.

대대급으로 가서도 일본군의 화력 열세는 여전해서 일본군은 92식 70mm 보병포 2문과 기관총 중대 배속의 92식 중기관총을 12정을 보유하기 시작하지만 미군은 81mm 박격포 6문과 M1919 브라우닝 기관총 8정,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1정이 배치되고 대대 직속 대전차 소대의 M1 57mm 대전차포 3문이 추가가 된다. 이것도 모자라서 미군은 M1917 브라우닝 중기관총까지 대대에 배치했고, 이 녀석을 상대로 착검돌격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참호전 항목 참조.

그나마 92식 70mm 보병포보병포로는 나름 성능이 좋았고, 보병포라는 특성상 분리가 쉽고 가벼워 미군에겐 골칫거리였지만 운반시엔 포 본체만 감안해도 말 한마리로 운반하거나, 3등분으로 분해하여 말 세마리로 나눠 운반했으며, 인력으로 운반할땐 10명이 동원되는 문제점 때문에 유사시에 인력으로 신속하게 이동이 불가능하여 전황이 안좋으면 버리고 가야 하며 탄약도 한 박스당 5발들이 30kg짜리를 말로 운반할때는 세개씩, 인력 운반할때는 한개씩 짊어졌는데 당시 일본군의 부실한 체격에다 탄약운반엔 그 체격보다 더 떨어지는 인원을 유용했기에 이것저것 힘든 것이 많았고, 말로 견인되는 전용 탄약 운반 차량이 개발되기도 할 정도라 유사시 탄약 수급에도 문제가 많았다.

연대급에서도 미군이 105mm 견인곡사포 6문과 M1 57mm 대전차포 12문이 추가되지만, 일본의 경우 75mm 94식 산포 4문과 94식 37mm 속사포 혹은 1식 기동 47mm 속사포같은 대전차포 4문이 추가된다. 이미 일본군에게서 105mm 구경이라 함은 중포(重砲)로 분류되어 사단 지원 화력으로 분류되는 화력이었으나 미군은 105mm를 1개 연대에서 굴리고 있었으니 레벨의 차이가 너무 심하게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교범 자체도 글러먹었으니 정상적인 전투로는 화력 열세를 극복하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미군의 중포는 240mm M1 블랙드래곤 곡사포203mm M1 8인치 평사포다. 이래서는 일본군에게 꿈도 희망도 없다.

즉, 똑같이 사격전을 벌일 경우 이론상으로 일본 육군은 매우 높은 확률로 미군에게 화력으로 제압당한다. 착검돌격이 아니고선 화력 우세를 극복할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일본 육군의 교범은 적극적 공세로 적 주력을 격멸하라고 가르치고 공격은 당연히 공세, 방어도 공세, 공방 공히 모두 착검돌격이다. 따라서 교과서대로 훈련받은 일본군 장교가 생각해낼 만한 전술은 반자이 어택 딱 하나뿐이다. 공세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전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소수 장성들뿐이었고, 대부분 장교들의 뇌리엔 공세 없이는 그 어떤 전술도 의미가 없다는 명제만 각인되었다. 병맛 나는 화력과 병맛 나는 편제와 병맛 나는 전술교리가 버무려져 만들어진 개그였으나, 그 결과는 일본군 병력들의 살과 피로 치러야만 했다.

간단히 말해서 일본군은 국력이나 기술력에서 타국에게 밀리니 엉뚱한 구석에서 화력 열세의 해답을 찾으려 했다. 미군같이 진짜 강한 상대와 대결에 임하면서도 자신들의 화력이 밀리는 줄은 알았지만, 근본부터 잘못되어서 개선할 방법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기에 반자이 어택 따위의 무모하고 멍청한 짓을 시도한 것. 그리고 그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는 태평양 전쟁 관련 항목의 눈팅만 잘해봐도 알 것이다.

마지막으로 너무 약한 화력은 상대국가의 무기와 보급품을 이용할 줄 아는 정보를 알려주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노획품을 사용하는 경우 당장의 몇몇 전투에서는 유용하게 사용하지만 수리 및 보급이 불가능하므로 결국에는 몇 번 사용하지도 못하고 버리게 되거나, 수리 부속 및 탄약 등을 확보하기 위해 적에 대한 무리한 공격을 하게 되는 역효과가 일어나므로 어디까지나 응급조치일 뿐이다. 게다가 일본군은 이런 개념도 미약하니 말 다한 셈이다.


4. 기본화기[편집]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무기의 수량이 태부족인 것도 큰일인데, 지급되는 무기의 질도 상당히 좋지 않았다.

첫째, 장교들의 무기중 하나인 권총은 전부 사비로 구입해야 했다.[3] 사실 일본도 육해군 모두 관급 권총이 있고 다른 나라도 장교가 사비로 권총을 조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긴 하지만, 문제는 일본에선 신뢰성 있는 일본산 권총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의 국산 권총은 전투용으로 꺼내기란 자살행위일 정도로 불안정한 제품이 많았다. 그나마 남부 대소형 권총은 본토의 공장에서 제대로 된 품질 관리를 받으며 생산된 물건이라면 일본군 기준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물건이 나왔다. 문제는 외국 기술을 완전히 배제한답시고 순수 국산 기술로 설계한 나머지 괴악한 작동방식을 채용하여 방아쇠압이 너무 높아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던지, 탄창이 갑자기 빠지는 것은 기본인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중에는 떨어뜨리기만 해도 격발되거나 심지어는 측면에 손을 대기만 해도 발포되는 기상천외한 94식 권총까지 나왔다. 일본 권총의 괴악한 전설의 대부분은 이 94식 권총이 일으킨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중국 현지에서 숫자만 채우고 품질 관리는 뒷전인 상태로 만든 남부식 권총들도 94식과 비슷한 문제를 일으켜서 마우저 C96같은 권총을 쓰던 국민혁명군은 물론 무기가 부족한 중국 공산당군조차 노획시 중국 현지 생산품은 그냥 버렸다.

그나마 해군은 그 권총을 해군이 사서, 주로 파일럿에 한해 필요한 장병들에게 나눠주기라도 했다. 하지만 육군은 그 관급 권총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국내 총포상에 대량의 외국산 권총, 그것도 신뢰성 높고 값싼 전투용 권총이 대량으로 유통될 때조차, 국산품 애용이라는 명목으로 홀스터에 넣고 다니는 것이 자살행위에 가까울 정도였던 위험한 쓰레기 권총을 자기 돈 주고 사야 했다. 덕분에 미국에서 레지스탕스를 위해 1회용 권총으로 생산한 FP45 리버레이터를 주워다가 권총으로 사용한 일본군 장교도 있었다고 한다. 단 이쪽은 성능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제 권총이 아무리 구리다고 하지만 강선도 없고 제조시간보다 장전시간이 더 길다는 리버레이터보다는 정상적인 총에 가깝다. 일본군이 노획한 리버레이터를 소지한 사례 자체는 제법 있는듯 하지만 이건 돈 없는 초급 장교가 아쉬운 대로 주워서 사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안전성 면에서 보자면 리버레이터가 일본 권총들을 이기는 게 현실이었기 때문에 신뢰성 하나만 보고 가지고 다녔을 수도 있긴 하다. 돈이 없거나 원래 쓰던 권총을 망실했거나 리버레이터의 안전성에 주목했거나 등 여러가지 요인이 겹쳤을 수도 있고. 여담으로 일본이 소지한 리버레이터를 본 미군은 이걸 일본의 저렴한 자살용 무기로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장교용 권총의 이와 같은 낮은 신뢰성은 결과적으로 일본군 장교들로 하여금 본래 복장 규정에 따라 지휘도로 패용하던 일본군도반자이 어택에 사용하게 만들었다. 이런 병크없이 그냥 마우저 C96이나 M1911을 카피해 사용했던 중국군은 문제를 겪기는 커녕 권총을 부족한 총기 숫자를 채우는 주무기로 삼아 근접전에서 쏠쏠하게 써먹기까지 했으니, 중국군에게조차 뒤졌던 일본군 권총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두번째, 제식 소총인 아리사카 소총은 일본군 무기답지않게 괜찮은 물건이고 이 소총이 가진 볼트액션 방식은 2차대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방식이었다. 하지만 중일전쟁 와중에 기존 6.5mm 아리사카탄의 저지력 부족을 느끼고 제식 소총탄을 7.7mm 아리사카로 변경하면서 기존의 38식 소총을 대신해서 새로운 제식 탄환을 사용하는 99식 소총을 도입하게 되었는데, 안 그래도 생산력이 딸리는데다 전쟁 중이었기에 전군 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 치열한 전면전 중에 38식과 99식을 모두 제식으로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연히 이러면 탄약 호환에 문제가 생기고 일본군도 이를 모르는 건 아니라서 부대별로 통일해서 일괄 지급하고, 본토에 돌아온 부대에 우선적으로 99식 소총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나름 체계적으로 보급을 해서 혼란이 발생하는 것을 줄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2종류의 제식 소총용 탄환을 생산한다는 막장 사태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미군도 초반에는 스프링필드 M1903M1 개런드라는 2종류의 소총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쪽은 최소한 탄 공유는 가능했다.

문제는 상대방인 미군은 반자동소총을 대량으로 사용했기에 볼트액션 소총 중에는 제법 좋은 축에 들어간다는 장점도 상대적으로 밀린다는 거지만 이건 추축국 공통의 문제라고 변명할 수는 있다. 그리고 무기 자체의 문제는 아니지만 전쟁 말기에는 생산력의 부족으로 인한 품질 하락으로 강선도 없다시피한 막장 물건이 생산되었으니 이 문제는 더 심각해진 셈. 물론 패전국이 패망이 임박할 때 생산한 물건이 정상적인 품질이기를 기대하는 쪽이 도둑놈 심보이기는 하다.

세번째, 일본군의 기관총은 너무 참담하기만 하다. 그나마 제식 소총은 총알을 2종류를 사용하지만, 기관총은 총알을 3종류나 사용한다는 것은 둘째치고, 구경 자체는 제식 소총과 같지만, 92식 중기관총처럼 위력 강화를 위해 7.7mm 강장탄을 채용하는 바람에 일반적인 제식 소총용 총탄과 비슷하지만 호환이 안되는 독자적인 기관총용 탄환을 사용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급하다고 비슷해 보이는 총탄을 장전하면 장전까지는 잘 되지만, 발사하면서 작동 불량을 일으킨다는 소리다! 그나마 후속작인 1식 중기관총은 99식 소총용 7.7mm 탄환을 사용하지만, 이렇게 되니 기존의 7.7mm 강장탄을 사용하지 못하는 웃기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다만 11년식 경기관총이나 96식 경기관총같은 자동화기에 소총용 아리사카 탄을 사용하면 탄피 파열 등의 문제가 발생해서 6.5mm 약장탄을 채용해야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기관총용 탄약을 생산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머지는 오해에 가깝다. 자세한 것은 해당 링크 참조.

그리고 급탄 방식도 중구난방인데, 11년식 경기관총은 소총탄용 클립을 그대로 장전하는 특유의 괴이한 장전 구조를 가지며, 96/99식 경기관총은 상자형 탄창을 사용하고, 중기관총들은 보탄판을 사용하는 등 복잡한 체계를 자랑한다. 게다가 급탄 방식의 신뢰성에도 큰 문제가 있어서 먼지가 좀 들어가면 기관총이 작동 중지되는 것은 기본이다. 그나마 상자형 탄창을 사용하는 경기관총의 신뢰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점이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장점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연사에 유리한 탄띠 방식을 채용한 기관총이 하나도 없어서 기관총 주제에 지속사격 능력이 크게 부족하다는 것은 큰 단점이었다.

그나마 장점은 99식 한정으로 손쉬운 총열 교환이 가능하다는 점과 명중률이 좋다는 점이 장점이지만, 기관총에서 명중률은 그렇게까지 중요시되는 항목이 아니다. 애초에 기관총의 타깃은 개인이 아니라 일정 범위다. 연발로 제압 사격중 범위 내에 들어오는 적을 갈아 버리는 게 목적이지, 단발로 한 명 한 명 노려서 쏘는 게 아니란 거다. 그리고 명중률이 좋다는 것도 지속적인 연사가 힘들다는 점 때문에 조성된 장점인지라 그낭 막장이라고 보면 된다.

명중률 좋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연사시 명중률이 좋아야 하는데 예시로서 MG42를 들 수가 있고 해당 기관총의 명중률이 좋은 것은 전용 삼각대가 반동을 잘 흡수하기 때문이다. 이런 삼각대가 개발된 이유는 독일 상황상 중기관총을 따로 생산해내기가 어려워 그냥 라페테42와 결합해 중기관총으로도 썼기 때문이고, MG42의 발사속도가 분당 1,200발에 이르는 만큼 반동도 엄청났으며, 결정적으로 라페테42를 결합했을 때의 안정성과 기능성이 2,000m 밖의 적 대열을 공격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급격하게 올라가기 때문이다. 사실 굳이 라페테 없이도 앞에 달린 양각대 가지고 경기관총으로도 잘만 쓰긴 썼다.

총열 교환은 원판인 VZ.26이 워낙 좋아서 그런 거고. 마지막으로 쓸 데 없이 잔탄 확인을 위한 구멍을 뚫어놓는다던지, 경기관총까지 총검을 다는 등 쓸데없는 데 정성을 들였다. 그뿐 아니라 상자형 탄창을 사용하는 96/99식 경기관총에는 탄창에 총알 아껴 쓰라고 잔탄 카운터를 달기까지 했다. 기관총은 기본적으로 일정 범위를 제압하기 위해 탄을 퍼붓는 무기체계이기 때문에 적절한 연사력은 기본에 그 연사력을 받쳐 줄 넉넉한 탄약이 필요하다. 물론 탄약도 공짜는 아니니 막 낭비해도 안되겠지만 굳이 잔탄 카운터를 다는 건 뻘짓이다.

그나마 총기류는 세밀하게 점검하고 정확한 탄환을 쓰면 기본적으로 발사라는 것 자체는 별 문제없이 작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수류탄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위험물 덩어리 그 자체다. 지연신관을 채택한 주제에 심하면 안전핀을 뽑거나 안전캡을 눌러서 발화하면 그대로 터져버리는 경우가 많으며, 나중에는 생산력 부족으로 인해 도자기에 화약을 넣고 도화선을 연결한 막장 물건까지 등장한다. 자세한 것은 수류탄/일본군을 참조.

이런 이유로 인해 중일전쟁의 일본군 중 상당수가 국부군에게서 노획한 Vz.26 경기관총을 무고장 기관총이라고 부르면서 지속적으로 써먹는 한편 이를 복제하여 위에도 나온 92식과 99식 경기관총을 만들었으며, 임팔 작전에서 미야자키 시게사부로가 했던 것처럼 노획한 상대방의 무기로 아예 기본 화기를 바꿔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일본군 입장에서도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일본군 기본 화기에 대한 평가는 일본군 내에서도 아주 좋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나 자랑할 무기가 없었는지 100식 기관단총같이 그 당시의 평균 미만인 기관단총이면서 제대로 양산되지도 못하고 보급도 안 된 물건을 역사를 바꿀지도 모르는 환상적인 무기라고 자화자찬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해당 기관단총이 제대로 생산되지 못한 이유는 일본육군은 러일전쟁이나 중일전쟁과 같이 넓은 전장에서 주로 실전경험을 해봤기에 사거리가 짧은 기관단총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국력의 한계로 탄약 수급에 어려움을 겪어서 탄약을 대량사용하는 기관단총을 대대적으로 사용하기엔 명백한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육군기병대만 기관단총에 관심을 보였기에 예산상의 제약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37년에 잠시 개발이 중단되었다. 그나마 중일전쟁으로 전비예산이 풍부하게 편성되고 공수부대 등 여러 병과에 관심을 보여 개발이 진행되었다. 물론 6.5mm → 7.7mm 주력 탄환의 전환과 같이 대규모의 산업력을 소모하는 사건들이 겹치면서 생산이 지지부진하다 1944년 즈음에야 기관단총의 양산을 겨우겨우 제대로 개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에는 고품질을 유지하면서 대량생산하기도, 전선으로 수송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참고로 100식 기관단총은 남부 권총에도 쓰이는 8x22mm 남부가 사용 탄약이었는데 이 탄약은 당시 서양에선 호신용 권총에나 쓸 만한 운동 에너지를 자랑하는 약한 탄환이었다(...). .45 ACP같이 강력한 탄을 날려대는 미국의 기관단총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조약한 물건이다.


5. 지원화기[편집]


그나마 이런 일본군도 최소한 소총같은 기본 화기는 그럭저럭 숫자는 채워서 장병들에게 지급했다. 하지만 이들을 지원할 지원화기는 진짜로 수량을 못 채울 때도 많았고, 포탄 같은 탄약의 보급도 어려울 때가 많았다.

우선 박격포의 경우에는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으로 인해 타국이 사용하는 것처럼 스토크식 박격포가 뭔지도 알고, 실제로 소수나마 양산한 경우까지 있었지만, 대부분의 박격포는 차마 박격포라고 불리기도 힘든 10식 척탄통이나 89식 척탄통이었다. 물론 이들 척탄통은 작은 크기에 비해서는 화력이 강하며, 포탄도 수류탄을 사용할 수 있고 정비요소도 적은 등의 장점이 있어서 무기 자체로는 일본군 기준에서는 매우 성공적이지만, 본질적으로 유탄발사기나 다름없는 물건에 지나치게 많은 능력을 요구했다는 것이 문제다. 기관총의 생산량이 부족해 척탄통을 대신 지급한다던지 하는 막장 사태는 기본이다. 여기에 더해서 생산력 부족으로 인한 품질 저하가 척탄통에도 적용되는 바람에 경우에 따라서는 발사하면 포탄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척탄통이 폭발해서 사람을 잡기도 했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곳에 척탄통을 설치한 후에 줄을 잡아당겨서 발포하는 웃기지도 않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이런 방식으로 쏘니 당연히 연사력이 기존보다 극단적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지원용으로 사용하는 중박격포는 말 그대로 중구난방이었다. 일단 종류는 많은데 수량이 부족한 것은 기본이고, 나중에 가면 항공기가 없으니 재고가 있는 항공기용 폭탄을 날리기 위해 개조된다던지, 스피곳식 박격포에 외장형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탄두를 사용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개조되었다. 일단 위력은 탄두의 크기가 엄청난지라 그럭저럭 있었지만 탄도가 개판이라 일단 발사하면 발사한 사람을 포함해서 포탄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예측이 안됐다. 물론 이렇게 로또식으로 떨어지는 위험성 때문에 상대하는 미군도 골치 아팠지만, 바꿔 말하자면 재수 옴붙은 경우가 아니면 이 무기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을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골치가 좀 아플 뿐 위협적인 물건은 되지 못했다. 본질적으로 이런 식의 무기는 테러용이지 정규전에서 지원 화력으로 쓸 물건이 아니므로 이미 지원화기라는 점에서는 실격이었다.

다음으로 제대로 된 대포의 경우에도 엄청난 문제점이 산적했다. 야마토급 전함의 주포인 94식 40cm 45구경장 함포까지 만드는 국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포의 질과 양이 모두 모자랐다. 일단 형식적으로는 소형 산포에서 열차포와 대구경 전함 주포까지 있을 것은 다 구비하고 있었지만, 세밀하게 살펴보면 타국의 화포를 라이센스하거나 무단으로 카피해서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일부 대구경 화포는 생산이 불가능해서 전량 수입품이었다. 덤으로 카피나 라이센스 능력도 부족해서 원본이 된 물건보다 모든 면에서 성능이 모자랐다. 결국 이런 점은 할힌골 전투에서 야포를 좀 많이 사격했더니 포다리가 부러지거나 포가가 내려앉는 막장 사태는 물론, 폐쇄기가 탈이 나서 장전이 안되고, 탄피의 자동 배출이 안 돼서 포병이 갈고리등을 이용해서 수동으로 탄피를 뽑는 상황이 발생했으며, 그나마 발사한 포탄도 탄도가 개판이라 아군 진지에 명중하는 일이 많았다. 포탄 관측용 정찰기 및 일선의 보병들이 그 따위로 포격하려면 아예 포격을 하지 말라는 욕을 하게 만들 지경이었을 정도.

게다가 자주포라는 개념이 별로 없고, 생산된 자주포는 포격 지원용이 아닌 대전차용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대부분의 대포가 견인포인데다가 대포 견인용 차량의 수도 크게 모자라서 대부분의 대포를 말이 끌거나 인력으로 이동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서 평상시라면 몰라도 실전에서는 차량이나 말을 소모하거나 적의 공격에 상실할 경우 더 이상의 보충이 어렵기 때문에 무거운 캐논포를 오직 인력으로만 이동해야 했으므로 대포병 사격같은 것에 매우 취약하며, 패배해서 전선이 이동할 경우에는 다수의 대포를 방기해야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각 부대에 지원화력으로 들어가는 화포의 구경이 작고 화포의 수량 자체도 적은 것도 문제였다. 75mm급 화포로 지원사격을 주로 하므로 미군의 105nn와 155mm 대포의 대량 사격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 타격을 입는 것이다. 덤으로 91식 10cm 곡사포96식 150mm 곡사포같이 일본 육군에서 군단급 포병에서나 쓰는 중포들도 사정거리가 미묘하게 짧아서 적의 대포병 사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당장 할힌골 전투때부터 이 문제가 터진다.

덕분에 일본 육군 입장에서 자랑할 만한 대포는 94식 산포92식 10cm 캐논포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들 대포도 포탄의 위력이 강하다던지, 지속적인 연사가 가능하다던지 하는 능력이 아니라 쏘고 난 후에 인력만으로 즉시 빠르게 도망칠 수 있다던지, 일본군의 화포치고는 사정거리가 길어서 멀리서 활주로같이 움직이지 않는 고정 표적에 테러용 공격을 가할 수 있다던지 하는 부차적인 능력이 뛰어난 경우였다. 물론 이런 능력으로 한동안 미군을 괴롭히는데는 성공했지만, 어디까지나 괴롭힌다는 의미지 미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으므로 나중에 가면 포탄이 떨어져서 버려지거나 미군의 집중 사격으로 개발살이 나는 등의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대전차포는 후술하겠지만 진짜로 쓰레기였다. 그나마 일본군의 야포는 세밀한 점검을 받고 몇 발 발사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명중률은 좋았고, 포탄의 위력도 그럭저럭 부족하나마 쓸만 했는데, 대전차포는 기본적인 장갑 관통력이 모자란 것은 둘째치고, 일단 착탄한 포탄이 깨져서 충분히 관통할 장갑도 뚫지 못하는 등 아예 제 역할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이렇게 지원화기의 수와 질이 모두 부족한 상황이니 일본군이 육탄돌격이나 자살돌격을 중시하는 바보짓을 했다 하더라도 어느정도 정상 참작을 해줄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본인들이 보기에도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고, 애초에 이런 종류의 지원을 받으면서 시원치 않은 기본 화기로 미군과 싸우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밀리는 것은 일본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군이 정말로 정신을 차리고 최대한 실용적, 전략적인 안목을 지니고 전쟁에 임했다면 저런 막장 무기만을 가진 상황에서도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해 미군에게 큰 피해를 강요한 쿠리바야시 타다미치같은 명장들이 여럿 배출되었겠지만, 애초에 실용적인 전술을 창안하고 장려할 인재가 고위직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국 일본군이 택한 것은 패전을 앞당길 뿐인 반자이 어택이었다.


6. 전차[편집]


일본군 전차는 1930년대 초반 수준에서 발전하지 않아 시대에 완전히 뒤쳐져 버렸고, 미숙한 공업력으로 인해 질마저 떨어졌다. 이후에 한 개량도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공업력으로 인한 악영향으로 전부 옆그레이드없그레이드가 되어버렸다. 사실 옆그레이드 수준이면 다행인 거고, 없그레이드 수준이 아닌 웬 산업 폐기물이 나오곤 했던 게 2차대전 말기 일본군이었다.

예를 들어 일본군의 주력인 치하는 물론 전면장갑은 표면경화장갑을 쓰고 경사장갑을 도입해서 소총탄을 막을 수 있지만, 소총탄형 철갑탄은 이론상으로는 40m 정도까지 근접하면 측후면의 관통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의 경우에는 35야드까지 근접하면 포방패 같은 곳을 빼고 치하의 전면장갑도 관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치하에 대한 적정 교전거리까지 메뉴얼로 만들어 배포하였다. 출처 물론 실전에서 미군들이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을지는 의문인게 35야드면 32m밖에 안되고 치하가 아무리 구려도 57mm 보병포는 보병 상대로는 충분한 위력이 나오니 자칫하면 미국판 대전차총검술이 되기 딱 좋다. 게다가 미군은 저렇게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아도 일본 전차 따위는 박살낼 수단이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일본군이 기습돌격해서 전선을 돌파한다는 아주 잘나가는 상황에서도 최후의 발악으로 사격하는 중기관총 1정같은 전차가 밟아버려도 충분한 빈약한 저항에 전차가 당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 자체다.

설상가상으로 치하는 같은 시기에 등장했던 일본군의 전차 중 가장 장갑이 튼튼한 축에 속했다. 95식 경전차 하고는 소총탄으로 전면장갑이 관통될 정도였다. 성능이 이렇게 병맛스러워서 대부분의 2차 대전 토론에서는 가여운 존재로 취급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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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혀가는 기갑차량은 94식 경장갑차다.[4] 이걸 싣고 가는 전차는 미군의 M4 셔먼.

워낙 일본군 전차의 수준이 떨어지므로 일본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각종 옹호론이 나오기도 한다. 우선 97식 전차까지는 1930년대 물건이었고 그 때 당시 기준으로는 대전차 공격능력이 없다는 문제점을 제외하면 장갑이나 속도나 뒤떨어지지는 않은 무기였다는 평가가 있고 맞는 면도 있다. 애당초 전차의 컨셉이 적 참호 돌파였고, 그 당시에 많은 국가들이 대전차전을 그렇게 크게 신경쓰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 프랑스, 영국, 소련 같은 다른 국가에서는 이미 대전차전도 가능한 전차를 개발 및 생산하거나 최소한 컨셉이라도 제대로 잡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1930년대를 기준으로 잡더라도 잘해봐야 1930년대 극초반 기준에서나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변명이 가능하며 그 이상 넘어가면 그런 변명은 불가능해진다. 소련의 BT 전차만 봐도 1931년 11월에 이미 대전차전이 가능한 37mm 주포를 장착했으며, 1932년이 되면 이미 T-26과 공용사용이 가능한 45mm 20-K 대전차포가 달린 신형 포탑을 장착해서 BT-5로 업그레이드된 상태였다. 처음부터 대전차전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은 대보병용 주포를 장착한 일본의 정신상태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나마 대전차전을 염두에 둔 95식 경전차 하고를 거론하면서 해당 전차의 개발은 당시 일본군이 그래도 전차 교리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는 옹호 논리도 있지만 이 역시 BT전차와 비교하면 바로 파해되는데, 화력, 장갑, 주행등 어떤 면에서도 BT전차에 비해 나은 면이 없다. 애초에 하고는 1인용 극소형 포탑을 사용해서 전차장이 1인 3역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공축기관총도 없고 포탑에 있는 기관총은 포탑 후부에 붙어있어서 기관총을 사용하려면 전차장이 주포 조작을 포기하고 몸을 180도 돌려서 기관총을 잡아야 하는 등 전투에 매우 지장을 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일본은 대전차전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 대책이라는 것을 매우 미약하게 했으며, 이런 대책을 볼 때 대전차전의 중대성에 대한 인식도 매우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차를 대전차전도 가능하게 만들려 하긴 했으나, 자기들의 정치적 입지 + 사료값등의 문제로 인해 군내 지위가 흔들릴 것만을 걱정한 기병대가 전차는 보병 지원으로만 쓰라고 방해했다는 설도 있다.

단순히 일본의 공업능력 같은 문제로만 넘어갈 수도 없는 것이, 같이 욕먹는 이탈리아도 1943년 들어 P26/40같이 그래도 본격적인 75mm 대전차용 주포를 단 중형전차를 개발해냈고, 심지어 식민지인 호주조차 열악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치하보다는 훨씬 나은 센티넬 전차를 만들었다. 일본의 공업능력과 기술이 아무리 열악한들 식민지 호주만 못할 리야 없으니 그저 일본군 수뇌부의 개념과 투자 방향 자체가 글러먹었다는 결론만 나온다.

다른 문제점은 대부분의 일본 전차에는 공축기관총이 없다. 해당 기관총은 포수가 보병을 살상, 제압하거나 거리 측정용으로 사용하는 부무장인데 치로, 하고, 치하, 치헤처럼 이게 포탑 뒤에 가 있거나, 97식 경장갑차 테케, 치누, 치토 전차처럼 아예 없거나, 치리처럼 포탑 좌측에 있다. 중국에서 보병을 주로 잡아댄 전차 경험을 가진 주제에 공축기관총이 없어 타국보다 전면 대보병전이 허약하다는 웃기는 전차들이다. 이게 해결된 건 다름 아닌 후기 경전차 뿐으로, 98식 경전차 케니, 2식 케토 밖에 없으며 수량은 둘 다 합쳐서 150대 미만이었다.

따라서 기본 개념부터 잘못 잡혔는데 일본군 스스로 전차의 장갑과 속도가 적절하다고 해봤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였다. 그나마 그 당시 일본군 전차의 주력인 치로는 현가장치의 문제로 인해 야지에서 속도가 바닥을 기는 바람에 도망가는 보병도 제대로 추격하지 못하며 장갑도 기관총탄이나 막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97식 전차가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실수는 할힌골 전투에서 전차들이 줄줄이 터져나가면서 드러나게 된다. 이때 소련측 전차들도 장갑이 부실하기는 했고 조준 장비의 성능도 영 좋지 못했지만 대전차전 능력만큼은 앞서 있었고 당시 소련군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으나 소련군 지휘관이 게오르기 주코프였다. 물론 전차 전차 손실은 소련이 더 컸지만 대다수 소련 전차들은 전차전이 아니라 보병들의 자살성 공격이나 매복한 대전차포등에 당한거라 일본 전차 성능에 대한 변명은 못된다. 무엇보다도 이 전투에서 일본은 참패를 당했다.

더 큰 문제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될 때 일본군은 그 1930년대 초반 기준에서 전혀 발전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된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 전차 교리 및 일본군 전차 자체를 크게 변화할 필요성이 드러났으나, 일본군은 전투 결과를 은폐하는 데만 급급했고 결국 이는 태평양 전쟁에서 대재앙을 일으킨다.

태평양 전쟁 시작시 일본군 주력 전차보다 스튜어트 전차같은 미국의 일개 경전차 따위가 더 강력하고 신뢰성 높다는 문제가 있었고, 그 강한 경전차를 대비하기 위해 가제식이던 47mm 1식 속사포를 그제서야 치하의 주포로 삼는다. 그러나 그 경전차를 뒤이어 등장한 것은 더 강력한데다 숫자도 많은 M4 셔먼이었고, 치하는 M4 셔먼과 대등한 상대가 되기는 커녕 학살당하기에 바빴다. 더 암울하게도 M4 셔먼을 이기기 위해 새롭게 강한 전차, 요컨대 치누 등을 어떻게든 개발했을 때 미군은 이미 유럽 전선에서 작정하고 독일군의 중전차를 상대하기 위한 M26 퍼싱을 태평양에 배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퍼싱을 이어 나올 전차는 진짜 중(重)전차 T29였다. M26 퍼싱항목을 보면 나오지만 퍼싱도 체급만으로는 중형 전차다.

같은 전차는 고사하고 치하는 장갑차나 보병에게조차 열세라서 같은 추축군의 Sd.Kfz. 234는 넘어가더라도 M8 그레이하운드에게도 선제공격당하면 박살나기 딱 좋은데 이런 수준의 전차가 과연 퍼싱과 맞닥뜨렸을 때의 결과에 대해선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

이렇듯 일본은 1930년대 초반 이후 전차 개발에 뒤쳐졌고, 저조한 공업력과 더불어 97식 전차부터 일본군 전차의 악명을 만들게 된다. 일본 중형전차의 진화 과정 영국의 보빙턴 전차 박물관에서도 1930년대 일본 전차에 대해서 형편없는 설계라고 대놓고 언급하고 있다.[5]

덕분에 일본 내부에서도 가공전기를 쓸 때는 치하나 하고 따위의 양철 조각은 일본 육군이 예산 관련 문제로 일본 해군탓을 하는 상황같은 것이 아니라면 거의 주역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티거같은 독일군의 전차를 어떻게든 입수한 후 본토로 들여와서 사용하거나, 3식 중전차 치누를 일찍 등장시킨다. 문제는 3식 중전차도 M4 셔먼에 비해서는 종합전투력이 열세라 매복하고 선제사격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셔먼 상대로 승산이 적으므로 보통은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그 이후에 개발 중이던 4식 중전차 치토나 5식 중전차 치리, 그리고 그 이후의 페이퍼 플랜으로 만들어진 전차를 추가로 등장시켜서 M4 셔먼을 발라버리는 전개를 주로 사용한다. 즉 일본의 극성스러운 우익세력조차 그 당시의 일본군 전차에 대해서는 사실상 옹호를 포기한 것이다.

심지어는 이런 유머도 있다.

몽고메리 장군, 패튼 장군, 르클레르 장군드골 대통령, 롬멜 원수주코프 원수보빙턴 전차 박물관을 방문했다. [6]
몽고메리 장군은 챌린저 2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내게도 이런 전차가 있었다면, 내 부하들이 덜 죽었을 텐데..."[7]
패튼 장군은 에이브람스 전차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내게도 이런 전차가 있었다면, 북아프리카들의 나치들을 다 쓸어버렸을 텐데...
르클레르 장군과 드골 대통령은 르클레르 전차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내게도 이런 전차가 있었다면, 우리 조국을 더 빨리 해방시켰을 텐데..."
롬멜 원수는 레오파르트2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내게도 이런 전차가 있었다면, 북아프리카가 죄다 우리 땅이였을 텐데..."
그러자 일본 전차들을 보던 주코프 원수도 한숨을 쉬었다.
"우리의 상대가 일본 전차들이였다면 한 달 내에 베를린을 묵사발로 만들었을 텐데..."


7. 실패한 초중전차 계획[편집]


파일:attachment/일본군의 무기체계/Type100OI.jpg
일본 위키피디아 오이차 (내용 출처)

일본에도 초중전차가 있었다. 그 이름은 100식 전차 오이. 일본어로는 오이차(オイ車).

O-I의 개발 사유는 할힌골 전투로, 여기서 소련군에게 개발살난 후에 개발되었다고 한다. 일단 105mm 포를 주포로 달고, 47mm포를 부포로 다는 화력덕후스러운 무장을 갖추었으며, 중량은 무려 100톤이었다. 그러나 주행시험에서 땅이 무너지고 차체가 가라앉고 차륜이 저절로 이탈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제식 채용에 실패했다.

두 번째로 개발한 초중전차가 바로 Dae-I 거대이동요새로, 105mm포와 75mm 포를 달았으며 일본전차답지 않게 포탑에 200mm라는 두꺼운 장갑을 둘렀다. 차체 전면도 200mm로 일본군 전차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두꺼웠고, 그 중량은 무려 120톤(140톤이란 말도 있다). 이 정도면 미군의 M4 셔먼 정도는 야라레메카로 만들어줄 수 있었겠지만, 만들어졌는지도 의문이고 실전 투입도 당연히 없었다.

독일에서도 희대의 괴작인 마우스 전차를 만들었는데, 공격, 방어, 주행 등 모든 면에서 오이차를 능가한다. 애초에 오이차는 마우스보다 장갑이 얇은데다가 이미 비효율적이라고 낙인 찍힌 다포탑 전차의 컨셉을 유지했기 때문에 그나마 약한 방어력이 더 약해지며, 부포인 47mm 포는 이미 대전차용으로는 쓸모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물론 주포인 105mm도 마우스의 128mm보다 위력이 약하다. 속도와 주행성능면에서도 시제품이 만들어져서 실제 주행한 마우스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떨어진다. 더군다나 일본의 개판인 공업능력과 장갑 성능이나 무기 성능으로 볼때, 그 잘난 200mm의 장갑은 실질적으론 잘 쳐줘도 티거나 티거2에 가까울 것이며 105mm의 화력도 셔먼은 잡아도 이후 몰려올 퍼싱같은 괴물 을 상대로는 택도 없고 47mm는 거론조차 할 가치가 없는 수준이다.

반대로 마우스는 단일 장갑만 240mm, 포방패등 2중 보호가 되는 일부 부분에 한해서지만 최대 460mm라는 흉악한 중장갑으로 중무장했고, 측면장갑이 장갑 두껍기로 유명한 야크트티거 전면장갑보다 더 두꺼웠다. 그리고 야크트티거의 차체 장갑은 150mm로 마우스 측면급이지만 경사장갑이기 때문에 수직인 마우스보단 방호력이 좋았고 전투실은 수직 250mm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장갑의 두께가 실감이 날 것이다. 심지어는 일반적으로 장갑이 가장 얇은 부분 조차도 웬만한 중형전차 전면장갑에 필적하는 60mm. 주포도 128mm PaK 44와 함께 보병같은 부수적인 목표 제압용으로 단포신 75mm 동축 부포를 포탑에 동시 장비했다. 또한 독일조차 기술력의 한계상 이 녀석을 겨우 움직이게 했지만, 주행조차 못하고 제풀에 퍼져버린 오이차 따위하고는 비교하는게 미안할 정도다. 한마디로 같은 뻘짓을 하더라도 독일과 일본의 격차가 매우 컸다는 이야기다.

결정적으로, 이 항목에서 수도 없이 까고있다시피 무기 체계가 안좋기로 유명한데다 그런 성능의 무기를 가지고도 전쟁이 끝날때까지 꿋꿋하게 연합군과 싸워온 그 천하의 근성 일본군조차 답이 없다고 절망하고 폐기했다는 점에서 이 놈의 성능에 대해선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다.


8. 장갑차[편집]


국력이 약해서 전차는 제대로 만들지 못하지만 장갑차는 제대로 만드는 국가는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탈리아 왕국군으로 AB40/41은 적인 연합군도 성능을 인정하는 훌륭한 장갑차였다.

하지만 일본 육군은 차륜형 장갑차를 잘 만들지 못했다. 92식 장갑차93식 장갑차는 소량만 제작되었으며 성능도 딱 그 시기의 평균적인 경무장 장갑차로 중일전쟁같이 상대방이 빈약한 경우에만 그럭저럭 쓸만했다.

궤도형 장갑차의 경우에는 92식 중장갑차, 94식 경장갑차, 97식 경장갑차 테케등을 만들었는데 성능 자체는 원래 의도한 것처럼 화포 견인욛이나 물자와 인원 수송용 같은 경우에는 쓸만했지만 회전포탑에 기관총 정도를 장비했다는 이유로 탱켓같이 사용되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본격적인 기갑전까지 투입되는 사태를 만들게 된다.

문제는 이들 장갑차가 원래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데다가 본격적인 기갑전에서 사용하기에는 무장과 장갑이 모조리 빈약했으며 1인용 포탑에 2 ~ 3명의 승무원이라는 적은 인원은 전투에 큰 지장이 오게 하는 요소였다. 차라리 원래 목적대로 견인용이나 수송용으로 쓰면서 적의 게릴라 습격 같은 경우에만 잠깐 전투를 했다면 좀 더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9. 자주포[편집]


일본 육군도 자주포를 보유하긴 했다. 호니, 호니2, 2식 포전차 호이, 호니3, 4식 포전차 호로, 5식 포전차 나토등 종류도 다양하다.

하지만 포전차(砲戦車)란 말처럼 이들은 일단 대전차 자주포에 가까운 임무를 주력으로 담당했으며 탑재한 화포가 대전차 작전에 어울리지 않을 경우나 호니2처럼 일반적인 후방에서 포격지원용으로 쓰는 자주포로 전환된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생산수량이 엄청나게 모자란데다가 보통 자주포의 주요 임무인 후방 포격지원용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고 대다수가 본토 결전용으로 비축된 것도 모자라서 필리핀 탈환전에서의 4식 포전차 호로처럼 대전차 임무에 투입되었다가 손실을 입는 등 매우 비효율적으로 사용되었고 성과도 미미했다.

그렇다고 포전차들의 대전차 화력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90식 75mm 야포 수준의 대전차 화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4식 포전차 호로처럼 38식 15리 유탄포를 가져서 일반적인 포병용으로 쓸만한 경우라도 그냥 대전차 직사화력으로 사용되었으며 대전차 화력은 90식 75mm 야포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5식 포전차 나토쯤 가서야 75mm 5식 전차포를 탑재했는데 최대 140mm의 장갑 관통이 가능했지만 생산수량이 고작 2대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포병들은 92식 10cm 캐논포같은 무거운 견인포를 인력으로 운용하면서 고생을 해야 했고 자주포도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10. 병력수송장갑차와 지원장갑차량[편집]


일본 육군은 1930년대부터 중국에서 기계화보병을 꽤 효과적으로 운용했지만 현장 지휘관들은 장갑차가 일반 트럭에 비해 너무 느리고 당시의 보병전술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병력수송장갑차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97식 경장갑차 테케를 개조한 98식 장갑운반차 소다, 1식 장갑병차 호키, 호하등 쓸만한 수준의 병력수송장갑차를 미리 개발해놓고도 소량만 생산하거나 생산시점이 너무 늦어서 일본 본토에다가 쌓아만 두다가 패전하는 등의 삽질을 한다.

덕분에 일본군의 보병들은 수량이 부족한 트럭밖에 이동수단이 없어서 포장도로만 벗어나면 충분히 병력수송장갑차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험지에서도 무거운 짐을 들고 도보로 이동해야 했으며 그나마 트럭도 지급받지 못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천리행군하는 전투능력 다 까먹는 삽질을 해야 했다.

그 외에도 전투공병전차라고 할 수 있는 장갑작업기를 비롯하여 치하 전차를 개조한 각종 지원차량을 개발하였고 성능도 나쁘지 않았으나 역시 필요량에 비해 수량이 크게 부족할 정도로 적게 생산해서 일본 육군 공병은 말 그대로 맨몸으로 각종 전투지원에 나서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11. 대전차 임무[편집]


물론 일본군도 눈꼽만큼은 대전차 임무도 고려했지만, 치하 따위를 중국 본토에서 굴리며 “아 이렇게 굴려도 나쁘진 않겠다. 아마 다른 나라들도 우리들같이 굴리겠지."라며 착각해 버렸을 정도로, 대전차 임무와 전차에 대한 인식은 차마 입밖에 내기도 쪽팔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싱가포르 전투의 성공과 퍼시벌 중장 휘하 영국 식민지 치안군의 졸전이 일본군의 착각을 확고하게 굳히고, 전차 운용 교리와 전술, 대전차 전술의 고착 및 일부 분야에서의 퇴화를 낳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일본군 사단의 편제를 보면 대전차 대대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대전차 임무를 수행하는 대전차 중대는 있었으나 평균적으로 보병연대에 배치되는 대전차포라 함은 37mm, 혹은 47mm의 대전차포 4문 정도가 고작이었고 혹은 20mm 97식 자동포가 존재하는 정도였다. 문제는 성능이 안좋다는 것이다. 94식 37mm 속사포는 동급의 대전차포 중 최약의 관통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시기에 배치된 영국의 2파운더 대전차포보다 한참 아래의 성능을 보이던 물건이며, 1식 기동 47mm 속사포는 그래도 일본군 최강의 대전차포라는게 포탄이 안 깨질 경우에 한해 100m에서 60mm 뚫는 게 고작이었다. 체코의 스코다사가 만든 47mm 대전차포는 100m에서 82mm의 균질압연장갑을 관통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답이 없다. 그리고 2파운더는 유럽에서는 비교적 빠르게 도태된걸 생각하면...

관통력의 가장 큰 원인은 일본의 떨어지는 철강기술이었다. 당시 일본은 강도가 높은 철갑탄을 제조하기 힘들었고, 치하 문서에도 나와있듯 포탄은 장갑에 착탄할 경우 포탄이 도자기마냥 깨져버리는 일이 많았다. 또한 다른 예로는 포탄이 튕겨져 나가거나, 혹은 미끄러져 튕겨져 나가는 사례까지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막을 수 있는 기술인 피모철갑탄, 즉 APC의 존재를 아는 일본 해군과 달리 육군은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으로 개념조차 모르고 있었다. 정작 알면서 APC보다 수중탄에 더 신경 쓴 해군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

그래서 대전차고폭탄을 개발하게 되는데 당시의 일반적인 화포는 강선이 있어서 포탄이 회전하면서 발화시 발생하는 메탈제트를 흩뿌리는 부작용이 있으므로 동급 구경이라면 바주카 같은 탄환이 회전하지 않는 병기에 비해 관통력이 떨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독일의 8,8cm FlaK에 사용하는 대전차고폭탄 관통력이 90mm 밖에 안되는 시기였고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2차대전이 끝난 후니 일본의 대전차포들은 대전차고폭탄 혜택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덤으로 대전차고폭탄 보급도 시원치 않았다.

그런데 중국 본토 배치 정예사단의 경우 이런 대전차포가 32문, 태평양전선의 2선급 사단에는 16문이 배치되었다. 이렇다 할 전차 하나 제대로 없는 중국군에게는 하이 클래스, 넘사벽 괴물 미국을 상대로는 마이너 버전. 미군 전차는 중국군 전차보다 못하다? 뭔가 반대로 된 것 같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착각이 아니다. 원래 러시아를 목표로 한 영일동맹의 예처럼 일본의 주적은 북방의 소련이었다. 오히려 미국은 소련 견제를 위해 일본을 지원해주던 입장이었다. 그리고 중일전쟁 당시 중국 본토배치 사단은 러시아를 적으로 두고 훈련받은 부대였다는 것. 그래서 대전차포의 배치가 저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감안해도 지금 당면한 강적 앞에 2선급 병력과 장비로 상대하겠다는 구상 자체가 웃긴 일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싸구려 대전차포들은 미군 및 영국군 전차를 상대로 전혀 화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일본군 입장에서 연합군 전차라는 물건은 도로 위의 괴물, 악마였다. 편제 자체도 타국의 대전차 편제에 비해 정말 대전차 편제라고 부르기 민망할 수준의 편제였고 대전차포의 수량도 적었다. 더군다나 상대인 미군은 보병사단에 바주카 약 500여 문이 배치되어 보병과 벌인 전투에서도 전차가 학살당하는 일본군 입장에서는 엿같은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일본도 개발을 안한 것은 아니라서 시제 57mm 대전차포시제 105mm 전차포도 개발했으나 전자는 위력도 그렇게 썩 좋지도 않으면서 양산이 힘들어서 시제품 제작 후 포기해버렸고 후자는 시제품 수준에서 끝나버렸다. 더 큰 문제는 해군과의 협조가 전혀 안되므로 이미 육상설치형까지 있는 98식 10cm 65구경장 함포를 육군용으로 개조하는 쉬운 길을 버리고 독자개발해서 시간과 인력을 소모했다는 짓까지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본군의 높으신 분들의 대전차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했다. 대전차총검술이라는 병맛스러운 대전차 전술이 자칭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에 의해 개발되어 적극 사용되었는데, 이렇다할 활약을 못한 것은 이미 전설 아닌 레전드. 초기 대전차 총검술은 전차의 관측창에 총검을 찔러넣어 전차병을 죽인다는 계획이었는데, 당시 미군 및 영국군 전차는 이미 잠망경식 관측창에 방탄유리까지 채용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물론 이런 저질스러운 대전차 전술은 둘째치고 정상적인 대전차 전술을 구사해도 영미의 전차를 까부수는건 정말 힘들었다. 한 예로 동남아 전선에 배치되었던 마틸다 II를 상대로 대전차포, 야포, 공병까지 투입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성형작약탄을 들고 육탄 돌격을 해서 겨우겨우 마틸다의 측면에 구멍을 뚫는 데에 성공을 했으나, 마틸다는 수리된 후 또다시 일본군을 유린하고 돌아다녔다. 참고로 같은 추축국이자,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폴고레 공수사단은 사흘 동안 마틸다 100여 대를 잡는 데 성공하였으니 일본의 대전차 무기와 전술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다.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이렇게 일본군이 연합군 전차를 격파하지 못하는 경우야 수도 없었으며, 이렇게 되니 야간에 반자이 어택을 해도 끔살, 주간에 탱크 한 대만 끌고 와도 그걸 못 막아 끔살. 그래서 일본군은 자연스레 야행성으로 변해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연합군은 밤새도록 조명탄을 쏴댔으므로 전과가 영 좋지 않았다. 결국 깊은 정글이나 동굴 속에 틀어박혀 연합군에게 밀리는 것은 거의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제대로 된 대전차 병기와 대전차포 및 대전차 전략 및 전차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박혀있었다면 전차 몇 대에 훅 밀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실로 전차에 대한 인식 부족과 기술력의 한계, 전술의 한계 등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만들어낸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12. 육군 소속 군함[편집]


일본군은 상륙작전에 쓰기 위해 강습상륙함의 선조격인 신슈마루라는 상륙함을 만들었는데, 이 배는 중일전쟁에서부터 태평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유용하게 쓰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여기에 재미를 붙였는지, 신슈마루의 후속으로 특종선 병형 강습상륙함을 2척 만들었고, 안전한 물자보급을 위해 삼식잠항수송정도 다수 건조했다. 잠수함을 물자 보급용으로 쓰는 건 분명한 삽질이지만, 어쨌든 일본군은 그렇게 했다. 해군의 삽질을 왜 육군 항목에 쓰냐고 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위쪽 타이틀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전 세계 최초이자 아마도 전 세계 유일의 육군에서 만든 강습상륙함과 잠수함과 항공모함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속을 가진 군함들이 만들어지게 된 근본적 원인은 바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다. 해당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육군과 해군은 총기류를 제외한 무기들의 연료인 석유도 같이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육군용 유전 지역과 해군용 유전 지역이 따로 있었고 그걸 서로 공유도 하지 않았을 정도다.

그래도 육군으로서는 해군 눈치 안 보고 마음대로 사용 가능한 해양 전력인 덕분에 나름대로 활용은 했다. 그런데다가 이쪽은 적어도 만들어야 할 이유라도 있었다. 이 군함들을 육군이 굳이 만들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었는지 하면, 해군이 이미 망했는데도 계속 이겼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고 있어서다. 일례로 대만 항공전 직후 일본군이 "대규모 공격으로 미 제3함대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여러 척의 군함을 격침하였다"고 거짓 발표를 하자 윌리엄 홀시 제독이 체스터 니미츠 제독에게 보낸 "침몰당했다는 제3함대는 현재 해저에서 무사히 인양되어 적을 향해 급속 퇴각중"이란 이야기를 할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특히 레이테 만 해전 이후 해군이 대양 진출은커녕 더 이상 근해도 못 지킬 정도로 약화됐음에도 미 해군 함대를 궤멸시켰다는둥 하는 헛소리들을 하는 와중에 뒤에서 움츠러드는 데다가 육군에서는 해군이 분명히 이겼다고 해서 안심하고 점령지 주둔군에게 물자를 보내는데, 그 물자들을 실은 수송선들이 계속 침몰당하는 사태에 해군은 "너희들 때문에 우리 배만 축나잖아. 이런 건 우리에게 맡기지 말고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했고, 이 때문에 육군에서 어쩔 수 없이 양산에 들어간 게 삼식잠항수송정이며, 이거 만들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해군이 저런 반응을 보인 걸 이상하게 생각한 육군 측 수뇌부가 스파이를 통해 해군이 선전과 달리 완전 패망했다는 걸 알고는 경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뿐 아니라 이것들을 만든 배경에 더 심각한 이유가 있는데, 육군이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게 아니라, 해군이 육군에게 만들라고 부추긴 거다. 특히 삼식잠항수송정의 경우 현재의 잠수함도 사용하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공법이라 할 수 있는 모듈식 건조공법으로 만들어져서 해군도 놀랐다고 한다. 당시 일본 해군 잠수함도 이런 공법을 못쓰던 상황에서 해군이 얼마나 놀랐는지 하면, 육군에서 삼식잠항수송정으로 잠수 훈련을 할 때 해군에서 사람을 보내 도와주기도 했다고. 숫제 육군에서 양성한 삼식잠항수송정 운용병을 해군 잠수함 학교에 입교시켜서 훈련을 시켜주기도 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시초는 잘못되었으나 필요성이 있었고 활용을 잘했다는 점에서 괜찮은 병기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절대적인 성능면에서는 육군에서 만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렇게 신통치는 않았다.


13. 본토 결전용 병기[편집]


대체 이 죽창 따위로 미국놈들과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빌어먹을! 우리가 덤비기도 전에 미국놈들이 기관총으로 우릴 몽땅 죽이고 말 거요. 기관총으로 말이오!

- 《맨발의 겐》 중에서 나카오카 다이키치의 말


먼 동네 유럽 추축국 동맹국인 독일은 비록 너무 늦은 뒷북이긴 했어도 최소한 대전차무기로 판처파우스트라케텐판처뷕세를 개발하여 군대에 많이많이 나누어 주었고, 국민척탄병도 없어서 1차대전에 참전했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나 아예 너무 늙어서 사흘 지나면 돌아가실 것 같은 노인분들까지 징집해 국민돌격대를 만들었을 때도 일단 무기라는 것을 지급해주기는 했다.

아무리 급조했다지만 적어도 총열만큼은 제대로 되어 있고 운 좀 좋으면 괜찮은 성능을 기대해볼 수 있었던 VK98는 단발 볼트액션 소총으로 만들어졌지만 일단 불량이 아닌이상 총알만큼은 제대로 나가며 5발들이 바리에이션도 있었다., MP3008은 영국의 스텐 기관단총을 강하게 참고한 총으로, 스텐과 다른 점은 탄창이 아래쪽에 있어서 아래에서 급탄을 받는다는 것으로 급조 기관단총치고는 그럭저럭이었고, 포츠담 장비는 스텐 기관단총을 완전히 복제해서 연합군이 종전 후 포츠담 장비들까지 다 스텐으로 착각해 회수한 바람에 나중에 관련인이 숨겨두었다가 공개한 1정이 전부일 정도였다. 이리하여 독일 국민돌격대의 총은 복불복으로 쓰레기가 나오거나 구식이기는 해도 일단 불량이 아니면 대체로 총알은 제대로 나가는 성능이 나왔다. 여기에 더해서 구식이어도 일단 성능 자체는 괜찮은 게베어 1888 등의 총들과 판처파우스트를 어떻게든 지급했으며 일부는 구식이기는 해도 괜찮은 중/경기관총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 목숨은 내다 버리는 것인 일본군께서는 자돌폭뢰대전차총검술로 탱크를 까부수라고 하였고, 소련에서는 파블로프의 개 효과를 응용하여 대전차 견을 개발했다면, 효율성을 중시한 일본군께서는 개 대신 노인과 학생을 이용한 폭탄을 만들어 사용한 것은 상당히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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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양심은 있었는지 독일의 국민돌격대처럼 허접하지만 무기 노릇을 할만한 화기류를 보급해 주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뭔가 2차대전 시기의 소총과 비교하면 뭔가 많이 이상하지 않은가? 위 그림의 출처에서 설명을 보면 "본토 결전의 단발 화승총" 그러니까 과거 17~18세기쯤 조선인 업복이가 쓰던 조총과 같은 종류다. 갑자기 국민돌격대가 델타포스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총대는 학교 책걸상 다리를 분해해서 만든 것이고, 개머리판과 총몸 등은 학교 책상 상판을 잘라 만든것임을 알 수 있다. 하다못해 격발 장치나 기타 부품은 재료도 안 정해져 있다. 알아서 열심히 잘 만들어봐라 인 것이다. 생긴 것만 봐도 무기로 보기에는 외모가 무기같아 보이지 않고 위력도 약한데다가 사격시 위험성까지 있어서 종전후 미군이 행한 무장 해제에서도 살아남아 야쿠자들간의 항쟁에 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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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위의 소총은 총이기라고 했지 폭죽물로켓짬뽕시켜 놓은 것처럼 생긴 괴상한 물건이 대공 무기란다. 영국이 콩그리브 로켓을 사용하긴 했지만 130여년 전 무기며 대공용도 아니었다. 구조가 딱 신기전과 똑같은데 신기전이 양반으로 보이는 열악함을 자랑한다.

놀라운 것은 위의 무기의 탈을 쓴 고철덩어리가 정규 예비군 부대에 지급된 무기라는 점이다. 보통 예비군 부대엔 여분의 정규군 무기 내지는 정규군이 퇴역시킨 전 세대 무기가 보통이다. 독일의 국민돌격대가 좋은 예시로, 정규군도 쓰는 판처파우스트 + 독일제, 체코제, 러시아제, 프랑스제 등의 퇴역한 소총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모아서 지급하는 바람에 탄약과 부품 공급에 차질이 발생했지만 어찌되었든 나치 독일은 최소한 소총 정도는 병사들의 손에 쥐어줄 수 있었다. 결국 이는 당시 일본의 빈약한 공업 생산력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꼴이었다.

이외에도 본토 결전을 대비한 신설 사단은 인원 및 물자 부족으로 인해 축소 편제로 이루어져 보병 연대 3개가 전부에 포병 전력이 없어서 투석기를 포병 세력으로 쓰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다.

기갑조차도 전쟁 전이나 말기나 암울하긴 매한가지라 그나마 치하가 부족하다고 치로를 편제에 넣는 등 노인 학대가 의심되는 짓을 진짜로 하려고 했다. 그나마 전차전을 하다가 처발리기나 하면 다행이지 이들을 굴릴 기름조차 없어서 일본군은 포탑만 남기고 땅에 파묻은 뒤 고정 토치카로 용도 변경을 하려고 했다.

그 외에 실제 죽창이나 목창, 을 지급하여 각급 학교 공작시간에 제작하도록 했다. 특히 목창 만든답시고 신문 부수를 줄였는데, 이는 정보통제의 목적도 겸한 조치이다. 자신들이 졌다는 이야기는 최대한 숨겨야 했을 테니. 게다가 전선에 편지 보낼 종이로 창 만들자고 위문편지 보내지 말기 운동까지 벌이는 병크까지 터뜨렸다. 덤으로 전쟁 말기에는 대나무까지 부족했었다. 예시

민간인을 지키는 게 군인의 임무인데 앞장서서 민간인을 죽음으로 내몬, 양심을 저버린 행위를 한 것이다. 아니, 사실 일본군은 '황군', 즉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 덴노의 군대였으니 사실 그들은 그들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실 대본영은 국민의 안위가 아닌 덴노의 권위와 안위를 핑계로 삼아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 국민을 전쟁에 희생시키며 가망없는 전쟁을 질질 끌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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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탄피만 있으면 신뢰성은 의심되지만 그래도 사람을 살생할 수 있는 실탄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다 쓴 탄피들을 가지고 차고 등에 있는 공구들을 이용해서 재생해서 쓰기도 할 정도로 재생과정도 생각 외로 쉬운 편이라고 한다.[2] 그 이전에 Rimailho Model 1904TR 곡사포도 있기는 했다만 숫자가 너무 적으니 패스.[3] 웃기는 게 일반 병사나 부사관에겐 권총도 지급이 되는데, 장교는 권총뿐만이 아니라 군도, 군복, 약모, 군화 등등 장비를 죄다 자기 돈 들여서 사야 했다.[4] 사진을 가만히 보면 탄약 유폭으로 포탑이 날아가서 솥뚜껑마냥 뜯긴 거다.[5] 해당 내용의 전체 문장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As an island nation, Japan concentrated on its navy. It had some tanks but they were of poor design compared to western standards.'[6] 다만 보빙턴에는 챌린저 2를 제외한 현대의 MBT들이 없다. 그냥 유머를 위한 설정이라고 봐주자. 보빙턴이라는 설정을 붙인 이유는 아마 치하치로를 넣기 위해서 추정된다. 당연히 2000년대에 그런 걸 굴리는 군대는 없을 테니...[7] 주력인 M4 셔먼크루세이더 전차, 크롬웰 전차 등이 티거에게 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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