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패잔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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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2. 전선별 상황
2.1. 태평양 전선
3. 귀국 후


1. 배경[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각지에 남겨진 일본군 패잔병들을 말한다. 패잔병으로 세분하자면 포로가 된 사람과, 포로가 되지 않고 태평양 곳곳에 숨어 있던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본 문서에는 전자의 경우인 일본군/포로 문서 내용과 후자의 경우가 섞여 있다. 여기에 전자의 대표주자인 세지마 류조의 문서 일부와, 후자의 대표 주자인 마지막 황군, 오노다 히로 문서의 상당량이 발췌되어 짬뽕이 되어 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제일 잘 나가던 일본 제국일본군중국(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으로 중일전쟁 발발)에 이어 동남아(베트남, 홍콩, 버마, 라오스,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태평양(솔로몬제도, 파푸아뉴기니, 호주 북부)까지 지원병을 차출하여 보내 그곳을 선점하거나 인접해 있던 미국,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군대와 싸우게 했다. 그리고 결과는 다 알다시피 본토까지 밀려서 패전을 앞두고 있었다.[1] 게다가 1945년 8월에 소련까지 미국의 압력 및 동아시아에도 영향력을 넓힐 목적으로 일본을 공격하면서 승산은 더더욱 없어졌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을 크게 두번 맞고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천황옥음방송으로 포츠담선언에 담겨 있는 무조건적인 항복을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항복 직후에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본토로 복귀하지 못하고 버려지다시피 낙오된 일본군들이 상당수 있었다. 물론 그 중엔 종전 소식을 못 듣고 그 자리를 우직하게 지키거나 들어도 현실부정을 외치며 미치광이처럼 날뛰기도 하였다. 근데 그럴 만도 한 게 당시 상식(=대본영발표 등에 세뇌되었던 비교적 평범한 일본인)들로서는 갑자기 멀쩡하던 국가가 한순간에 패전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수 밖에 없다.[2] 오히려 미국이 자신들을 항복시키려고 만들어 퍼뜨린 심리전가짜 뉴스 등으로 취급하고 무시한 채 계속 전투[3]하는 등 여러모로 일본 정부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꽤나 많았다.

2. 전선별 상황[편집]



2.1. 태평양 전선[편집]


태평양 전선은 후술할 관동군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그나마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가장 민주적인 제도에 따르고 인권 문제에 민감했던 미군이었기에 포로들은 수용소에 있다가 전범의 경우엔 절차에 따라 사법 처리됐고, 일반 포로는 전쟁이 끝나고 본토 일본으로 귀국해 돌아갔다.

파일:external/www.kuronowish.com/image.jpg
  • 요코이 쇼이치(横井庄一).
1915년 3월 31일 아이치현 아마군 사오리쵸(현 아이사이시)에서 출생. 원래 성은 야마다(山田)였으나 태어난 지 반년 후에 부모가 이혼하면서 모친 오오시카 츠루(大鹿つる, 1889~1958)의 결혼 전 성인 요코이를 쓰기 시작했다. 패전 당시 계급은 육군 오장[4]이었다. 요코이는 의 정글 속에서 스스로 만든 지하 방공호에서 28년간 은둔 생활하던 중 1972년 1월 24일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강가로 갔다가 현지의 새우잡이 어부에게 발견되었고 매스컴에 알려져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죽은 줄 알았으나, 오랜 시간 후에 귀환한 최초의 일본군이었다. 그는 "부끄럽지만 돌아왔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귀국할 때까지 벌벌 떨었다고 한다. 자신은 미군에게 잡혔다고 생각하고 조사가 끝나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에 공포감을 느꼈다고 한다. 요코이의 이 발언은 당시 일제가 전체주의와 군국주의로 일반인들을 얼마나 세뇌했는지를 후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일본에 막 돌아오고 다시 적응하는 것에 대해 힘들어 했으나, 다행히도 비교적 잘 적응해 고향에서 잘 살았다. 아래에 서술된 오노다 히로에 비해 철저한 생존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옷은 나무껍질로 원시인들이 입었던 누더기 수준으로 기워 만들어 입었고, 게, 생선, 나무열매, 새, 야생동물을 잡아 먹고 수렵을 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을 파서 살았다고 한다. 현지인들과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한 이유는 '포로가 되느니 자살해라' 라는 일본군의 막장 명령 때문에 처벌받는게 두려워서 그냥 정글 속에서 숨어버린 것이다.[5] 그는 전형적인 소시민에 불과했고, 오노다와 달리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정글에서 홀로 생활했으며 군국주의로 인해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피해자로 동정하는 사람도 꽤 많다. 요코이는 자신의 괌 생활을 바탕으로 궁핍했던 생활의 평론가로 전국을 돌며 강연했고, 이후 오노다 히로의 등장 때문인지 관심이 적어졌으나 역설적으로 오노다와 달리 지역사회 정착에 성공했으며 토기를 구워 생활하다가 1997년 9월 22일, 82세의 나이로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noda-young.jpg
항목 참조

요코이와 오노다의 상반된 부분을 살펴보면, 요코이는 일본 제국의 압제에 시달리다가 입대한 평범한 징집병 출신이었던 데에 반해, 오노다는 장교 계급인 육군 보병 소위 출신으로 일본군의 막장행각에 대해서도 옳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철저한 군국주의자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 이전에 어떻게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극한의 상황에서의 행동방식이 철저하게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1974년 12월 인도네시아말루쿠 제도에 있는 모로타이 섬에서 다카사고 의용대[6]로 참전했던 나카무라 테루오(中村輝夫, 1919~1979)가 가장 마지막으로 항복했다. 이 사람은 일본인도 아닌 대만 원주민이라 일본에서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7] 대만으로 송환되었으며, 한족이 아니기 때문에 대만에서도 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8]

그리고 일부 패잔병들은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해당 국가에 남아 현지인들의 독립전쟁에 가담해 싸운 일도 있는데, 그 사례 중 하나로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때 구 일본군 출신자들이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함께 네덜란드군과 싸우기도 했다. 심지어 이들 중엔 일본군에 자원입대하거나 강제징집되어 인도네시아로 파견되었던 조선인도 포함되었는데, 바로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 출신인 양칠성(1919~1949)이라는 사람으로,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라는 창씨개명된 이름으로 1942년 일본군에 자원입대[9]태평양 전쟁에 투입되어 패망 때까지 자와 섬 포로 수용소 감시원으로 있었다. 허나 패망 소식에도 돌아가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남아, Komarudin(인도네시아어로 빛)이라는 이름으로 독립군에 가담해 싸우다 잡혀 1949년에 다른 '일본인' 2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이후 인도네시아군 고위 장성이 된 옛 동료들의 노력으로 1975년에 세상에 알려졌으며,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를 외국인 독립 영웅으로 공인하였다. 양칠성은 현재 자카르타의 칼리비타 국립 묘지에 안장돼 있으며, 현재 그의 묘비에는 KOMARUDIN YANG CHIL SUNG, KOREA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있는데 한동안 인도네시아에서는 그의 창씨개명만 보고 일본인이라고 생각해왔고,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독립영웅으로 추서된 뒤에 일본의 유족에게 유골을 전달하는데 야나가와 시치세이라는 일본인만 일본의 유족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일본에서 인도네시아에 와있던 무라이 요시노리, 우쓰미 아이코 교수 부부에게 야나가와 시치세이는 사실 조선인이라고 알려준 사람이 있었다. 이에 이들은 주인도네시아 일본대사관에 찾아가서, '자카르타에 남북한의 대사관이 다 있는데 왜 유족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느냐'고 따졌지만, "일일이 그런 거 하기 귀찮다"는 답만 돌아왔다고 한다. 이에 빡친 교수 부부가 나서서 야나가와 시치세이, 즉 조선인 양칠성의 존재를 유족에게 알려주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에 돌아온 뒤 교수 부부가 기고한 글을 읽은 양칠성의 조카를 찾아냈고, 동진회 모임에서 함께 지냈다는 동료들로부터 그의 고향이 전라북도 완주군이라는 것도 알아냈으며 1978년에 방한해 그곳을 찾아갔는데 그때 이미 양칠성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이 남아있어 양칠성이 인도네시아 영웅묘지에 묻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더니, 여동생도 "알려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왜 좀더 일찍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오빠에 대해 자신은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고 죽은 줄도 몰랐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실 전범 항목에서 일본 제국의 경우에 설명된 것처럼 양칠성과 같은 조선인 출신 일본군 군속들(B,C급 전범)에 경우는 일본과 남북한 모두에게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잊히다시피 한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국가기관의 조사와 함께 현대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씩 연구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일본에서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에 대해 활발히 연구되었다. 이 분야의 전문가로 손꼽히는 사람이 일본의 우쓰미 아이코 교수다. 관련 저서로 "적도에 묻히다",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등이 있다. "적도에 묻히다"는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 사건의 피해자로 알려진 김종익씨가 번역해서, 언론의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1980년대에 양칠성을 소재로 가톨릭 어린이 잡지에 <영웅묘지의 꼬마루딘>이라는 소설이 연재되었고 1989년에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현재는 절판되었다. 단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과는 별 상관없이 거의 전적으로 작가의 창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칠성 외에도 군속 자격으로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선전 영화를 찍다가 일본의 패전 이후 인도네시아의 독립 운동을 지원한 허영이라는 인물의 사례도 있다.

군인은 아니었지만 노동자로 따라 가서 필리핀 동쪽 팔라우 제도의 펠렐류 전투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조병기 같은 사례도 있다.

펠렐류 섬 전투가 끝나고 2년 후인 1947년 4월 22일 일본 육군 14사단 2연대 소속 야마구치 히사시(山口永) 육군 중위가 부하 육군 장병 25명 및 그의 부대에 합류해 있던 해군 45경비대 소속 장병 8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2차대전에서 정식으로 항복한 마지막 장병들이었다.[10]

그런데 그 펠렐류 섬 전투 후 10년 뒤에 1955년 5월 7일에 조선인 노동자 조병기 씨가 짐승같은 몰골로 작물을 훔치다가 섬 주민들에게 잡힌다. 전투 당시 펠렐류 섬에는 일본 육군 14사단 2연대를 중심으로 일본군 8,000명과 조선인 노무자 3,000명이 있었다. 그중에서 최후의 생존자가 조병기 씨였다. 구출 후 그는 괌과 부산을 통해 고향인 충북 단양으로 돌아갔다.

펠렐류 전투 문서 및 슈타인호프님의 카페글 참조

2.2. 관동군[편집]


관동군의 경우 패망 직후 개인 자격으로 (알아서)돌아오라고 지시를 받는다. 인간의 조건히키아게샤와 돌아오던 일본군 얘기가 나온다. 그러나 대다수는 도망 못 가고 소련군한테 잡힌다. 약 57만명[11]이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가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했고, 그곳에서 대략 6만명 정도가 사망했다.

1956년에 일본과 소련이 국교를 회복하면서 상당수가 일본으로 귀환하나 일본 공안 당국은 이들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여 1990년대까지 시찰 대상으로 봤다.[12] 정작 소련의 포로 관리자들은 장교를 우대했다. 일본군/포로를 참고할 것.

현재 이들이 일본 정부에 소송을 하고 있는데 법원에서 족족 기각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인 출신 포로들도 시베리아 억류 생활을 겪었는데, 이들도 일본 정부에 소송을 걸었으나, 마찬가지로 기각당했다. 관련 저서로 김효순의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가 있다.

총리 우노 소스케가 1945년부터 47년까지 시베리아에서 포로로 생활했다.

시베리아덴노(シベリア天皇)란 용어가 있는데 포로 생활할 때 소련인들에게 아부하고 일본 포로들 사이에서 왕 노릇하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카포와 유사한 말인 듯. 유명한 인물로 세지마 류조가 있다.

염계군벌 산하에 들어간 고모토 다이사쿠가 1200여명의 패잔병을 지휘해 인민해방군과 전투를 치렀다


3. 귀국 후[편집]


GHQ일본군 장교 출신의 자위대 입대를 금지했지만 실제 조직 운영에서 문제가 나타나자 허용했다. 자위관 문서에서 각 주요 자위관 군종지휘관을 보면 일본군 좌관(영관)급과 위관급에서 일부가 자위대로 흡수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독일 연방군의 경우와 비슷하다. 다만 자위대의 인원은 일본군에 비해 제한적이었으므로 상당수의 일본군 출신은 그냥 민간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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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점령지를 몽땅 잃고 본토까지 싹 밀리지는 않았다. 보르네오 섬, 수마트라 섬, 자바 섬베트남지역, 그리고 중국 일부 지역은 종전 시 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의 향방에는 아무 영향이 없었지만. 전황이 이렇게 된 데는 태평양 전쟁 특성상 어쩔 수 없었는데 태평양 전쟁 자체가 인류가 벌인 전쟁 중 가장 넓은 영역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뿐만 아니라 넓은 육상에서만 벌인 전투가 아닌 전선의 상당수가 바다에 해당되어 육군보다는 해군, 공군, 해병대가 더 중요하고 제공권과 재해권의 장악이 절대적이었다. 전역이 너무 넓은 데다가 해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고 유럽전선 문제까지 있어서 일본이 장악한 지역 전부를 탈환 하는 건 인력과 물자 낭비가 너무 심했기에 빠르게 일본 본토를 공략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 범위가 넓은데다가 사실상 해상전이라는 점에서 전쟁의 특성상 모든 점령지들을 탈환하거나 역점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2] 멀쩡한 국가가 갑자기 폭삭 정도가 아니라 천하의 대일본제국이 그런 서양놈들에게 질 리가 없다는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3] 말이 전투지, 상대할 군대가 없었으니 주변 민간인들에게 물자를 약탈하고 심하면 죽이는 등 전쟁범죄에 불과한 패악질에 불과했다.[4] 伍長, 육군 하사계급에 해당한다.[5] 포로가 되지 않으면 적어도 가족들은 무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군들 대부분은 부대가 붕괴되면 정글로 도망가면 갔지 항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6] 일본군 사상자가 늘어나자 군무원들을 부대 편성해 일선에 내보낸 것이기에 군인이라 하기엔 애매하다.[7]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32년간의 급여와 2계급 특진을 받아 귀향하였다는데 그 32년간의 급여가 계약할 당시의 급여라 몇만 엔에 불과하였다. 기타 일체의 보상금 같은 건 없었다. 이 사람 외에도 일본군을 도왔던 대만 원주민들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8] 당시 대만은 독재 국가였으며 정부는 원주민들 신경쓸 틈도 없었다.[9] 씁쓸하지만, 당시 한반도 내의 조선인 청년들은 일본군 입대를 못해서 안달이었다. 양칠성도 56.5대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자원입대한 케이스.[10] 이들 중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던 생존자가 나가이 케이지(永井敬司) 씨로, 2019년 말에 타계했다. 살아서 일본에 돌아온 후로는 평생 전쟁을 혐오하며 "평화헌법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11] 일본에선 65만명으로 본다.[12] 것도 그럴것이 그 시절 동안 공산주의에 감화된 이들이 꽤 많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