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해군 항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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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日本帝国海軍航空隊 / 大日本帝國海軍航空隊
(だいにっぽんかいぐんこうくうたい)


1. 개요
2. 라운델
3. 장점
4. 단점
4.1. 설계 문제점
4.2. 인력 관리의 문제점
5. 운영 기체
5.1. 제로센 (A6M)
5.3. 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
5.4. 육상 비행장용 폭격기
5.5. 각종 전용 목적의 함재기
5.5.1. 전용기의 문제점
5.5.2. 특정 군함 전용기의 전과
6. 조선인 출신 인사



1. 개요[편집]


일본 해군해군 항공대. 조종사 양성제도로는 해군비행예과연습생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육·해군 항공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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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항공대

단좌 전투기
Ki-27, Ki-43 하야부사, Ki-44 쇼키, Ki-61 히엔, Ki-84 하야테, ◈Ki-87, ◈Ki-88, ◈Ki-94, ◈Ki-98, Ki-100, †ⓩKi-162, ◈ⓩKi-200 슈스이, ◈ⓩKi-201 카류, †ⓩKu-4
복좌 전투기
Ki-45 토류, ◈Ki-83, Ki-102, ◈Ki-93
폭격기
습격기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BR.20 치코냐, Ki-21, Ki-30, Ki-32,
Ki-48, Ki-49 돈류, Ki-51, Ki-67 히류, †Ki-91
자살 공격기
Ki-115 츠루기
훈련기
Ki-9, Ki-6, Ki-17, Ki-55, Ki-54, Ki-79, Ki-86
정찰기
Ki-16, Ki-36, Ki-46
해군
항공대

함재기
A 함상
전투기

A5M, A6M 제로센, A7M 렛푸, †A8M 리쿠후, †N1K3-A 시덴 카이 二
B 함상
공격기

B5M, B5N, B6N 텐잔, B7A 류세이
C 정찰기
C3N, C5M, C6N 사이운,▼D4Y1-C
D 함상
폭격기

D1A, D3A, †D3Y 묘조, D4Y 스이세이
E 수상정찰기
E2N, E7K, E9W, E10A, E13A, E14Y, E15K 시운, E16A 즈이운
F 수상관측기
F1M, F1A
G 육상공격기
G3M, G4M, G5N 신잔, G8N 렌잔, †G10N 후가쿠
H 비행정
H6K, H8K, H11K 소우쿠
J 국지전투기
J1N 겟코, J2M 라이덴, †J3K 17시 국지전투기, ◈J4M 센덴, ◈J5N 텐라이, ◈J6K 진푸, ◈J7W 신덴, †ⓩJ7W2/J7W3 신덴 카이, ◈ⓩJ8M 슈스이, ◈ⓩJ9Y 킷카, ▼N1K-J 시덴, ▼N1K2-J 시덴 카이, ▼N1K3-J 시덴 카이 一, ▼N1K4-J 시덴 카이 三, ▼†A7M3-J 렛푸 카이
K 훈련기
K5Y, K9W 코우요, K10W, K11W 시라기쿠, ▼A6M2-K, ▼M6A1-K 난잔
L 수송기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DC-2,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L2D, L3Y, L4M, ▼H6K-L, ▼H8K-L 세이쿠, ▼H11K-L 소우쿠, ▼G5N2-L 신잔 카이
M 특수공격기
MX 특수활공기

MXY-7 오카, ◈(제식명 불명)N 토카, M6A 세이란, D4Y4 스이세이
N 수상전투기
N1K 쿄후, ▼A6M2-N
P 폭격기
P1Y 긴가
Q 초계기
Q1W 토카이, Q2M 타이요, †Q3W 난카이
R 육상정찰기
R2Y(세이운, 케이운), ◈ⓩR2Y2 케이운 카이, ▼J1N1-R
S 야간전투기
◈S1A 덴코, ▼J1N-S 겟코, ▼P1Y1-S 바야코, ▼P1Y2-S 쿗쿄, ▼D4Y2-S 스이세이
노획 항공기
파일:소련 국기.svg LaGG-3-8, I-16, 투폴레프 SB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F2A 버팔로, P-40, B-17, P-51 머스탱, F4U 콜세어, F6F 헬캣, 커티스 BT-32, CW-21, DB-7, 마틴 139
파일:영국 국기.svg 호커 허리케인, 브리스톨 블렌헤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독일로부터 수입한 기체
A7He, AxHe, 하인켈 He 119, 융커스 Ju87 슈투카, 메서슈미트 Bf 109E-7, 포케불프 Fw 190A-5, 메서슈미트 Me 210 A2, 메서슈미트 Me 410, ⓩ메서슈미트 Me163, †ⓩ메서슈미트 Me 262, †포케불프 Ta152, †융커스 Ju 390, †V2 미사일
글라이더, 무동력기, 미사일
Ki-147, †Ki-148, †MXY8 아키구사
◈ 시제, 프로토타입 / † 페이퍼 플랜, 수입 실패 / ⓩ 제트 혹은 로켓 엔진 장착기 / ▼ 타 목적 기체를 유용함
국지전투기: 일본군이 운용했던 본토 방어 및 폭격기 요격 전용 전투기. 요격기 문서 참조.
※ 나무위키에 문서가 없거나 이 틀에 기재되지 않은 일본군의 항공병기 전체 목록은 일본 항공병기 설계안 문서 참조.
연합군(특히 미국)이 대전기의 일본 항공기를 지칭할때 사용했던 코드에 대해서는 연합국 코드명 문서 참조.
템플릿:일본 제국의 항공병기를 참조해 주세요. 전반적인 내용의 개선이 필요합니다.






일본군은 항공모함 등의 이유로 항공부대를 운용했다. 1904년에 최초 기안이 검토됐고 풍선을 운용하는 육군과 달리 해군은 정찰이 필요하단 이유로 1912년에 해군항공기술연구회가 설치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2,900대의 항공기를 운용했다. 해군 항공대의 총괄기구로 해군항공본부(海軍航空本部)를 해군성의 지국으로 두었다. 해군 항공본부장은 중장급이었다.


2. 라운델[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Japan_Air_Self-Defense_Force_roundel.svg.png
라운델. 이 일장 라운델은 항공자위대로 이어졌다. 항공자위대 소속기체 뿐만 아니라, 육상자위대·해상자위대 소속기체에도 그려져 있다. 육군 항공대도 똑같은 라운델을 썼다.


3. 장점[편집]


후술할 여러가지 큰 문제점이 있으나 대공황 당시만 하더라도 견직물을 팔아서 서구 열강들로부터 무기와 장비를 수입해서 무장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업력과 기술력이 약했던 일본 제국일본군의 육해군 대립같은 내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해군 항공대 육성에 성공하여 당시 세계 3위, 일시적으로는 세계 1위의 해군 항공대를 만들었다는 점은 인정할 필요가 높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개전 극초반에 진주만 공습, 남방작전, 말레이 해전, 실론 해전같은 주요 해전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가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미드웨이 해전이후 대타격을 입었지만 저력은 남아있어서 동부 솔로몬 해전산타크루즈 해전까지 미 해군에게 만만치 않은 타격을 안겨주었다.

결국 과달카날 전역을 비롯한 솔로몬 제도에서의 극심한 항공력 소모전으로 인해 숙련된 조종사와 병력을 대거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해 해전에서 사실상 종지부가 찍힐 때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끼로 사실상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계속 싸웠다. 항공모함 전력을 사실상 상실한 후에도 패전까지 해군 소속의 육지 비행장에서 출격해서 항공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후술하는 여러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비효율적인 문제점을 숙련 조종사와 병력을 갈아가면서 버틴 조직이라는 오명을 피할수 없게 되었다.


4. 단점[편집]


일본 해군 항공대의 문제점을 이해하려면 거함거포주의에 기초한 함대결전점감요격작전을 알아야 한다.

위에 언급한 요소를 맞추기 위해서 에이스여야 하지만 소모품이라는 모순된 결과물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함대결전에 써먹어야 하니 첫 공격에 최대한 피해를 주기 위해서 에이스여야 하지만 점감요격작전의 특성상 거함거포주의에 입각한 함대결전이 일어나기 전에 적의 전력을 깍기 위해 소모품처럼 쓰이는 신세라는 소리다.


4.1. 설계 문제점[편집]


해군이 운용한 항공기들은 항속거리가 매우 길었으며 무장도 당대 기준로는 강력한 20mm 기관포를 장비하는 등 화력도 쓸만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능을 저출력 엔진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대부분 자동 방루 연료 탱크라든지, 조종석에 방탄 설비 같은 방어수단이 없다시피 했다. 이는 항공모함에서 운용하는 항공기와 지상기지에서 운용한 항공기 모두 적용되는 문제점이었다. 오죽하면 미 해군 항공대의 일본 해군 항공대 항공기에 대한 평가가 원샷 라이터였겠나? 그나마 대전말에는 조금씩 도입되기는 하지만 육군이 Ki-43 하야부사에서부터 일찌감치 방탄판과 자동 방루 탱크를 도입한 것에 비하면 해군은 훨씬 늦게 도입한 셈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점감요격작전에 따라서 적의 전력을 줄이기 위해서 최대한 원거리에서 항공모함의 직접 손실은 줄이도록 항속거리와 화력을 늘리지만 어차피 함대결전을 준비하는 단계이며 1회 공격에 계획에 명시된 최대한의 타격을 줘야 하므로 방어력이나 생존성 같은 것은 일부러 무시하는 것이다. 어차피 기술력 딸려서 저출력 엔진으로는 모든 것을 충족시킨다는게 어렵기도 했지만 이후의 후속기들도 그런 경향을 지속하게 된다.

이는 항공모함의 핵심은 우수한 함재기와, 그걸 제대로 다루는 조종사 및 정비병들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다. 실제로 항공전력의 운용을 보면 항공을 중시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후진성이 드러난다. 육군이 중일전쟁을 치르며 항공대와 기지의 연계를 느슨하게 해 항공대가 기지를 옮겨다니며 작전할 수 있게 만든 일명 '공지분리제도'를 1937년에 전격 도입한 반면 해군에는 그런 개념조차 없어 미드웨이 해전에서 배는 멀쩡했던 즈이카쿠를 놀려두는 계기가 되었고, 해군이 비슷한 제도를 도입한 것은 1944년 3월, 실제 조직 개편은 마리아나의 패배 이후인 1944년 7월이었다.[1]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을 치르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전투기 중점 체제를 확립했으며, 1943년 8월까지 벌어진 남태평양 방면의 항공 소모전을 겪은 후 육군은 전투기를 2.5배 가까이 늘리며 전투기:폭격기 비율을 3.5:1로 맞추었다. 그러나 해군은 중일전쟁은 물론 태평양 전쟁에서조차 치열한 항공 소모전을 치르면서도 전훈을 반영하지 않아 전투기 중점 체제로 전환한 것은 1945년 들어서였다. # # #번역 상기 연보 해당 부분의 작성자인 유라 후지오(당시 2좌, 간부학교 전사교관실)의 항공자위대 OB 홈페이지 기고문, 상기 연보의 요약본에 가까운 내용이다. 그때는 이미 항공모함에 실을 항공전력이 바닥난 지 오래였다.

해군의 항공주병론이라고 해봤자 함대결전의 보조전력으로서 폭격기 무적론 수준에서 노는 후진적인 수준이었던 것이 실상. 확실한 제공권 확보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격 일변도 사상에 의한 공격기/폭격기 중시는 폭격기무적론의 한계를 상대적으로 빨리 실감하고 전투기 위주로 전력을 재정비한 육군보다도 후진적이었으며 성능은 부족하고 방어력도 부족한 폭격기성능은 부족하고 방어력도 부족한 전투기로 호위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고쳐지지 않았고 신형 전투기의 개발 및 양산조차 연합군은 고사하고 같은 일본 육군에게조차 뒤처진다. 육군이 Ki-61 히엔을 의욕적으로 도입하고 약 3,000여기를 생산, Ki-84 하야테를 1944년에 양산하기 시작해서 신뢰성은 문제가 많았지만 3,500여기를 생산한 반면 해군은 2,000마력급 고성능 전투기를 다 합쳐도 1,900기 남짓이며 그나마도 그중 1천기가 초기불량도 고치지 못하고 양산명령이 떨어진 N1K-J 시덴, 그나마 전투기와 요격기로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던 개량형 시덴 카이와 J2M 라이덴은 각각 4~500여기 남짓이 고작, 제로센의 후계기로 기대를 모았던 A7M 렛푸는 시대착오적인 ROC와 맞물리며 양산조차 되지 못한다. 반면 단순 계산으로도 같은 엔진을 쓰는 라이덴을 두 대 만들 수 있는 종이비행기 G4M 1식육공은 2,200여기나 생산되었다.

이로 인해서 연합군과의 항공전력의 격차는 더 벌어지게 되고 이는 항공요원의 피해를 증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결국 이런 저질 항공기로 능력 이상의 무리한 공세를 펼친 결과 서전기의 우세를 뒷받침했던 숙련 항공탑승원의 괴멸을 불러왔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항공모함이 너무 갑작스럽게 당하는 바람에 싸울 기회가 있었던 히류를 제외한 3척의 파일럿 손실은 크지 않다. 본격적으로 숙련 파일럿이 갈려나가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 남태평양의 항공 소모전을 벌이며, 물론 이 와중에도 전함전력은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산타크루즈 해전을 기점으로 개전시의 숙련 탑승원은 사실상 소진되었고, 1943년 4월의 이(い)호 작전에서는 재건 중이던 3함대의 항모 항공대를 기지항공대로 투입해 소진시키는 악수까지 둔다. 해상 항법 및 항모 이착함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항모 항공대는 기지항공대보다 육성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단기결전만을 고려해 전력을 정비한 결과 장기 육성능력이 떨어지는 일본군 입장에서는 치명적이었다.

적이었던 니미츠의 평가가 압권으로, '1급 항모 탑승원의 큰 손실은 일본 항모부대의 전력을 이제까지 이상으로 크게 저하시켰다'라고...(니미츠의 태평양전쟁사 일본어판 162p) 당연히 오자와의 3함대는 이 방침에 반발했지만, 소위 항공주병론자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오자와를 직접 만나 양해라고 쓰고 강요라고 읽는다를 받아낸다.[2] 1943년 10~11월의 로(ろ)호 작전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결국 1944년 2월 들어서야 체제를 정비할 수 있었던 항공전력의 숙련도 및 재건에도 엄청난 악영향을 끼쳐 그 결과가 칠면조 사냥. 그나마 배는 멀쩡하게 완성된 운류급 3척도 사실상 무용지물, 1944년 후반기부터 항공공격은 거의 대부분이 카미카제로 이루어졌다.


4.2. 인력 관리의 문제점[편집]


일본의 조종사 훈련 과정은 훈련내용이 어려워서 수료에는 50-64개월이 필요했고, 매년 졸업하는 수송기 조종사는 100명에 불과했다. 이 훈련이 성적순으로 잘라서 소수정예의 초인적인 실력을 가진 조종사를 양성하려는 의도였다.

어느나라 군대에서든지 정해진 TO가 넘는 지원자가 몰리면 TO를 넘어간 인원은 무조건 잘리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필요한 조종사는 100명인데 요구사항에 걸맞는 후보생이 2~3백명쯤 있다면, 선발 과정중에 사소한 결함이나 핑계로 잘리는 사람이 나올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선발 과정에서 또 똥군기오컬트로 좋은 자질을 가진 조종사 후보자를 여럿 날려먹었다. 교과 내용중에는 비행과 아무 상관없는 검사 및 수업등이 있었다. 20여 명을 일렬로 앉혀놓은 뒤 비행기로 이륙한다고 생각하고 뛰어봐라며 훈련생을 서전트 점프로 날게 만든다는 황당한 과목도 당당히 정식 훈련과정으로 있었고, 훈련생에게 행하는 신체 검사 중에는 손금골상학 검사도 있었다.[3]

그중 가장 압권은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비행학교 졸업 전날에 "군복 단추를 잘못 잠갔다"고 복장 불량으로 퇴교시키고, 졸업 전날 몰래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퇴교한 것이다.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에는 이런 식으로 사소한 규정 위반에도 "정신머리가 썩었다!"면서 퇴교시킨 사례들이 다반사였다고 나온다.

그가 졸업한 츠치우라 해군 항공대의 경우 1500명이 지원해 70명이 합격했는데 10개월간의 훈련 기간 중 45명이 탈락하여 조종사가 된사람은 겨우 25명 뿐이다. 이정도면 조종사가 아닌 장인을 키우는 수준이다. 물론 1:1로 겨룬다면 이런 장인급 조종사는 도움이 되겠지만, 전쟁은 결국에는 물량빨.

설상가상으로 연합군 쪽은 일단 조종사들 인원도 늘어났고, 진주만 이후 초창기에는 부족한 조종사를 수급하기 위해 3기 이상 격추시킨 경험이 있는 조종사들을 바로 본토로 보내서 후진양성이라는 명목하에 교관으로 임관시키고 해당 조종사들은 조종사 훈련생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했으며, 전쟁 후반기쯤 가면 그동안 양성한 조종사의 숫자가 충분하다고 보고 양성속도를 약간 줄이는 대신 훈련을 크게 강화해서 조종사들의 기량이 상향 평준화된 반면 일본군은 오히려 베테랑 에이스들을 최전방에 내세우며 소모시켰다.

이것도 이유는 간단했다. 에이스 급이 아니면 점감요격작전에서 성과를 낼 수 없으니 조종사를 최정예로 유지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최정예 조종사를 소모품처럼 상실하면 그 뒤에는 어떻게 할 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러니 미국을 상대로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가뜩이나 처참한 내구성으로 하늘을 나는 관짝 혹은 가솔린통이라고 불리는 제로센에서 100대 중 몇 명이나 살아남을 것인가? 제로센으로 격추되어 포로가 된 사람은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 반면 미국은 조종사의 가치가 매우 컸기에 생존성을 극대화 하였기에 비행기가 격추되어도 조종사 생존률이 상당히 높다. 조지 H. W. 부시도 비행기가 격추돼서 해상에 불시착했으나 잠수함에 구조되었거나 PBY 카탈리나를 통해 구조된자들도 많았다. 그렇게 생존한 조종사는 다시 와서 조종간을 잡지 못하는 부상을 입지 않는 이상 재투입된다. 생사의 기로에서 살아 돌아온 조종사의 경험치는 귀중하고, 그들의 기술을 최대한 초보 조종사들에게 전수시킬 수 있지만, 이렇게 가치가 큰 조종사를 일본군은 카미카제로 굴리는 미친 행동을 벌이며 일회용품처럼 소모했다. 이러니 공중 교전에서 일본군이 연합군에게 밀리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운영 면에서도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목숨은 내다 버리는 것" 정신을 훈련, 교육만 감안하더라도 육성에 상당한 시간이 드는 귀중한 병력인 파일럿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남태평양에서 상당한 위협이 되었던 대남항공대의 궤멸의 가장 큰 원인은 인간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그저 기체 스펙에만 관심있던 대본영의 삽질이었다. 에이스인 사카이 사부로도 누적된 피로에 의해 후방기총을 가진 어벤저 뇌격기를 헬캣으로 착각하고 덤볐다가 간신히 죽다 살아났을 정도니 말 다했다.

또한 파일럿의 계급을 조종사 지원전의 계급으로 유지하는 병크를 터트렸는데 이로 인해 병 계급의 조종사가 탄생하였고, 파일럿의 진급에도 엄청나게 인색했다. 그래서 파일럿 개인의 발언권이 제한당하는 문제가 생겼다. 타국의 파일럿만 봐도 대개 장교나 못해도 부사관이므로 작전 수립 단계에 직접 개입해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지만, 일본의 파일럿은 심지어 정비부서보다도 계급이 낮은 경우가 압도적이라 자신의 비행기가 어디에 이상이 있으니 고쳐달라는 부탁도 제대로 못했다. 반대로 연합군과 나치 독일은 조종사가 되면 대개 사관후보생 신분이라도 줬다. 계급에 밀려서 자기 할 말도 못하고 찌그러져 있지 말고 요구사항을 제대로 전달하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미합중국 해군 또한 2차대전 이전에 사병 조종사 제도(NAP)를 운영해 봤다가 곧 장교 조종사만 뽑기로 하고, 기존 사병 조종사들의 사관후보생 과정을 적극 장려했다. 단, 상당수의 부사관 조종사들이 이를 일종의 프라이드로 여기고 장교 임관하지 않고 부사관, 준사관 신분으로 계속 조종간을 잡았으며, 6.25 전쟁기에도 소수나마 이런 비 장교 조종사 자원이 남아 있었다. 물론 이런 경우는 경험과 근무기간이 많은 조종사이므로 발언권이 장교급으로 강력하다.

이것도 모자라 일본 육군과 해군을 막론하고, 지상에 배치된 항공기와 항공대가 전황이 좋지 않아 비행장을 포기하고 퇴각하려고 하면, 꼭 정비병같은 지원 인원을 끝까지 퇴각시키지 않고 파일럿들만 쏙 빼낸뒤 그냥 내버려두고 떠나거나 육군 알보병이나 해군 육전대로 쓰는 정신 나간 짓거리를 저질렀다. 이런 뻘짓으로 인해 얼마 가지도 않아서 숙련된 정비 인원의 부족으로 안 그래도 부족한 부품에 정비도 못하고 그에 따라 출격 시간은 물론 기체 개개의 신뢰성조차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막장 테크를 탔다. 그나마 이와모토 테츠조같은 개념인이 소수나마 있었다는 게 위안.

물론 해군도 이 문제 자체를 모르진 않아서, 해군병학교 생도들과 유사한 형태의 전용 정복을 수병 교육생 포함 전 예과연습생들에게 지급했고, 수병 조종사들은 하사관 피복을 착용하게 해 약간이나마 권위를 세워 주려고는 했다.

그리고 조종사들에게 가해진 박한 취급과는 달리, 항공참모 직책의 사관의 권한은 꽤 센 편이었다. 제독들은 항공전에 임하기 전 무조건 항공참모의 조언을 구하도록 규정돼 있었고, 사실상 항공참모의 결정이 곧 제독의 결정으로 이어지다시피 했다. 항공참모의 조언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결정을 했다 "당신이 항공참모보다 항공전을 더 잘 아느냐?"는 이유로 징계받은 제독도 있었다. 그러나 항공참모는 실전을 다수 겪은 조종사 출신이 아니라 일본해군병학교를 졸업한 장교 출신들이 외국 유학좀 다녀오고 담당하는 직책인지라 실제적인 조종사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보다는 조종사들에게 압박 가하는 직책이라는 게 큰 문제였다.

이리하여 태평양 전쟁 발발시 일본 해군은 평균 650시간, 육군은 500시간의 비행시간을 경험한 우수한 조종사를 3500명이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전투 같은 일방적인 대승에서도 55명의 조종사를 잃었는데 이정도만 해도 인력 손실이 부담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후 몇번의 전투 만으로 해군 조종사 대부분을 날려 먹고, 이후 급하게 양산한 초보 조종사들로 메꾸게 된다.

당연히 전쟁이 거듭되며 조종사는 죽어나가고 필요한 비행기 숫자와 조종사 숫자는 계속 늘어났고, 모자란 조종사 수요를 맞추기 위해 이런 혹독한 선발 기준은 갈수록 낮아진다. 1943년 이전: 700시간, 1943년 이후: 500시간, 1944년: 275시간, 1945년: 90시간이다. 2년 사이에 훈련 시간이 1/8 정도로 급감한 셈이다.

미드웨이 해전과 필리핀 해 해전 등을 거치며 숙련된 조종사를 대량으로 잃은 뒤에는 반대로 비행기 이륙하고 착륙할줄만 알면 죄다 전선에 투입할 정도로 선발과정이 날림이 된다. 이 시기에는 사카이 사부로가 자신이 비행학교 있을때 군복 단추 따위로 퇴교당한 아까운 동기들이 다수의 일선 조종사들보다 더 뛰어난 조종사였다고 회고할 정도가 된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이전에 조종훈련과정에서 탈락한 사람을 다시 찾아내서 다시 조종사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들 중 대다수가 그냥 징집되서 전선에서 알보병으로 투입되었다가 사망하거나 조종사 훈련생에서 정비병 훈련생으로 전환된 후 정비병으로 항공모함에서 근무하다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폭탄 맞고 불타는 항공모함과 같이 전사하거나 전선 근처의 비행장에서 근무하다가 앞서 언급한대로 고립된 비행장에서 조종사만 탈출한 후 현지에서 알보병으로 징집당해서 싸우다가 전사한 후였다.

그나마 미군의 급속한 전진으로 남태평양 산호초에서 전투없이 고립된 채 남겨진 비행장 정비병중 소수를 잠수함으로 빼내서 다시 일본 본토로 귀환시켜서 써먹은 게 사실상 유일한 성과였다.


5. 운영 기체[편집]



5.1. 제로센 (A6M)[편집]


기종명 자체는 영식함상전투기(零式艦上戦闘機/れいしきかんじょうせんとうき)이지만 레이센이 아니라 제로센으로 흔히 불리는데, れい를 ゼロ로 바꿔 표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A6M이 모델 넘버인데 0식 함상전투기의 모델넘버로 A6M을 쓰는 이유는 A: 전투기, 6: 여섯번째 모델, M: 기체를 처음 설계한 회사인 미쓰비시에서 나온 것이다. 제로센의 수상기 버전인 2식 수상기는 N이 붙어 있는데, N은 수상기로 개조했다는 의미.

전투기 총 생산수는 Bf109와 엇비슷한 정도였지만, 성능이 Bf109보다 훨씬 낮았다. Bf109는 지속적인 개량을 성공적으로 받아서 대전 말까지도 미국의 P-51 머스탱과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고 최후기형은 머스탱 D형보다 우세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머스탱이 다른 연합군기에 비해서 전투시 안정감이 좀 떨어지는 편이기는 했지만 이건 중폭격기에 대한 호위기로 만들어진 머스탱의 역할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머스탱은 수랭식 엔진 + 익내연료탱크 때문에 바이탈 파트가 늘어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익내연료탱크문제는 그래도 떡장 + 소화/방루장치 다 갖추고있어서 제로센따위와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저렇게 대조를 해도 미 해군 항공대에는 최강의 전투기인 F4U 콜세어 계열의 F4U-4가 있으니...

남방작전 기간 대활약을 했던 제로센A6M은 그 화려한 기동성을 위해 내구력과 방어력을 포기한 설계다. 그리고 무전기의 성능이 형편없었는데 이는 후기형에서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제로센의 모든 문제점의 근원은 일본의 낮은 공업기술로 만들어진 엔진이다. 당장 엔진 출력이 높아져도 부족한 실정에서 가장 출력이 낮은 엔진은 치명타라고 보면 된다. 스핏파이어나 Bf109가 어떻게든 1000마력이 넘는 엔진을 달려고 고심할때 제로의 초기형 21형은 고작 900마력을 겨우 넘는 정도였고 미국이 2000마력 더블 와스프 엔진을 달던 전쟁 말기에 이르러선 후기형 52형의 엔진은 이제야 겨우 1000마력을 좀 넘는데 그쳤다. 이로 인해 어떻게든 타국 기준에 맞추기 위해 기체의 자중을 상당수 포기하면서 비유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실제로 공중분해 당한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고.

그나마 제로센보다 하위로 평가되는 F4F 와일드캣과의 교전은 전초반까지 우수한 파일럿들로 인해 제로센이 선전했었다. 일본의 내로라하는 에이스들은 거진 중일전쟁에서 양민학살하며 배출된 에이스들이며, 대부분의 격추숫자도 중일전쟁에서 격추한 중국군 기체가 대다수다. 그때문에 이와모토 테츠조처럼 전쟁 중후반까지 활약한 에이스가 아니라면 실력을 약간 의심해볼수도 있지만 상대방인 미군은 태평양 전선 자체가 2선급 전장인데다가 미국이 전쟁준비가 별로 안된 상황인지라 이른바 엘리트들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조금 있던 대부분의 고참 파일럿은 일단 교육 요원으로 투입해 전선 대부분이 신병 투성이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제로센이 압도적인 격추비를 기록한 것도 아니고 그나마도 엄밀하게 따지자면 와일드캣이 근소하게 우위에 있었다. 전쟁이야 개전 초반에 일본이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인식처럼 제로센이 와일드캣을 말 그대로 발라버리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1942년 5월부터 11월까지의 와일드캣과 제로센의 손실비는 111:127로 제로센이 오히려 열세다. 특히 와일드캣이 전쟁 후반기에도 FM-1 & FM-2로 이름을 바꿔서 호위함공모함의 함재기 용으로 개량된 후 계속 쓰였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참고로 호위항공모함용 와일드캣의 이름이 바뀐 이유는 제조사가 그루먼에서 제너럴 모터스로 바뀌었기 때문이지 기본적으로 같은 기종이다. 엔진이 F4F시절에 쓰던 1200마력에서 1300마력대의 엔진으로 업그레이드 되고 기총 수가 F4F-4 형태에서 F4F-3 형태로 돌아간 걸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서 일본 우익이 항상 주장하는 전초반의 미군 와일드캣을 상대로 학살했다라는 주장은 완벽한 뻥카.

전쟁 후기에 가서는 기어코 교환비를 확실하게 역전해버리며 와일드캣이 우위에 선다. 미국 조종사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타치 위브라든지, 붐앤줌 같은 전술을 확립해가며 대응해가는 와일드캣에게 어느새 입장이 확실하게 반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고참 파일럿을 교육 요원으로 투입하는 로테이션 제도는 대전 중기 이후 여유가 있었던 모든 나라가 실행했다. 문제는 그 국가들이 모조리 연합국이라는 것. 그로 인해서 독일처럼 백여 기 넘게 격추시키고 가끔 와서 신병들 잠깐 교육시키고 바로 출격한 슈퍼 에이스는 없지만 5기 이상을 격추시킨 일반 에이스는 압도적으로 많아지며 조종사들의 실력이 평균적으로 향상되었다. 인력관리쪽에서도 설명했듯이 조종사의 숫자 자체도 부족했고 전투로 인해 지속적으로 숙련된 파일럿이 사라져가고 신병의 숫자도 부족했던 일본의 입장에서 미국의 로테이션 시스템은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거기다 미국은 이미 제로센 언더테이커F6F 헬캣으로의 기체변경이 거의 이루어진 상황에도, 심지어 전쟁 말기에는 F4U 콜세어를 들이미는 판국까지 도달했다. 해당 기체는 F6F 헬캣과 비슷한 시기에 함재기로 개발됐으나 F4U 콜세어는 함재기의 한계를 초월했다. 함재기는 육상기에 비해서 성능의 페널티가 심한데 저건 어지간한 육상기보다 더 좋은 물건이었다. 비록 성능과 맞바꾸어서 항모에서 운용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그 전에는 육상기지에서 운용했다가 이제 항공모함까지 다시 진출한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신형 기체의 개발이나 기존 기체의 성능 개량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제로센의 후계기로 준비되던건 A7M 렛푸라는 물건인데, 시제기 몇 기만 나오고 끝났다. 본토의 그 개판을 달리던 공업능력 때문. 그래서 기존 기체인 제로센을 우려먹는다. 그런데다가 렛푸 자체의 성능은 뒤떨어진 설계사상 덕분에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호넷을 대파시켰던 일본군 파일럿 시가 요시오가 렛푸의 테스트 파일럿으로 참여하고 나서 내린 결론이 "이따위 물건을 만들려는 놈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다."였으니 뭐...

여기에 대응해서 제로센도 개량을 하긴 했다. 문제는 성능 향상이 별로인데 반해 그나마 있던 장점도 점점 까먹는다는 점이다. 기체 강도와 무장을 강화시키면서 기동성이 줄어든다던지 항속거리가 줄어드는 폭이 큰 것이었다.

애초에 제로센의 화려한 기동성도 알고 보면 여타 항공기들이라면, 연합군기는 물론 루프트바페의 항공기라도 실속에 빠져서 추락하기 딱 좋은 저속에서의 선회전을 중심으로 한 기동성이란 거다. 저속 선회전이 언제 유행한 전술인지를 생각해보면 역시 시대에 뒤처진 전술교리가 만들어낸 것이다. 특히 본문에 나오는대로 엔진 기술부터 떨어지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비행성을 끌어올리는 설계를 하다 보니 기체를 만든 재료부터 경량화에만 올인하며, 경량화 기법을 너무 남용해서 A6M 문서에 들어가서 보면 한계속도가 629km/h남짓이던 21형의 경우 시험 모델이던 12시(試) 전투기의 급강하 기동 테스트시 매스밸런스가 무너지면서 공중분해(!)됐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테스트 파일럿은 탈출을 못해서 순직. 그리고 자중을 포기하면서 포기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기체의 구조 강도. 그래서 P-40 워호크의 주익을 이용한 육탄공격을 받고 꼬리날개가 잘려서 격추된 사례도 있으며, 제로센 21형의 경우 급강하 속도가 629km/h 정도로 제한되면서 이 속도를 넘어가면 심할 경우 기체의 매스밸런스가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면서 나중에야 기체강도를 개선했지만 그래봐야 740km/h 정도로 극초반의 와일드캣의 급강하속도인 772km/h보다 못한 수준인데다가 미국, 독일, 영국의 고성능기는 그 정도 속도를 수평비행으로 달성하는 상태였다.

그렇게 날이 갈수록 빨라지고 튼튼해지는 미국 항공기들과 가면 갈수록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고 동료기와의 연합 전술 능력도 향상돼 가는 미군 파일럿과의 공중전은 점점 힘들어졌다. 결국 한번의 전투에 미군 항공기에게 30대의 피해를 안겨주고 '순수 함재기만' 239대가 격추당하는 대굴욕을 겪게 된다. 단 하루 공중전에서의 단순 교환비만 여덟 배 차이라는 대기록도 달성했으며 저기서 지상기지에 있던 기체들을 포함하면 단 하루 공중전에서 290대가 격추당했다.

결국 날아다니는 잡몹이 된 끝에 결국 카미카제 공격의 상징물로 변해버리거나 전후에 거의 모든 기종이 고철 처분되어버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카마카제시 가장 효율이 높은 급강하폭격식 공격을 할 경우 앞서 언급한 급강하 제한속도의 적용을 받아서 목표에 명중하지도 못하고 혼자서 공중분해 될 위험성이 높으므로 저공비행 후 함선 측면에 돌입하거나 하는 대체방법을 써야 했다. 그리고 이런 방법을 쓰면서 실적을 올리려면 에이스 파일럿이 필요한데 그 때쯤에는 에이스 파일럿이라 할 만한 파일럿들은 거의 죄다 야스쿠니 신사로 영구재배치 되던 무렵이다.

사실상 육군의 Ki-43 하야부사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병기이며 이는 실제 성능은 무시한 채 겉보기 스펙만 달성할것을 요구한 일본군의 한심한 사고가 그 근본적인 원인이니만큼 이는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 병맛넘치는 운용까지 겹쳤으니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게 이상할게 없는 셈이다.


5.2. 2식 수상전투기 A6M2-N[편집]


상술한 제로센의 수상기 파생형으로, 도합 357기라는 적은 수량에도 불구하고 여러 전역에서 활약하였다.

5.3. 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편집]


전쟁 초반의 급강하폭격기로는 99식 함폭이라고 불리는 D3A를 썼고 뇌격기로는 97식 함공이라고 불리는 B5N을 썼다.

이들은 공격력과 항속거리는 양호했으나 99식 함폭은 250kg 이라는 적은 폭장량을 가져서 대함 공격용 철갑탄을 97식 함공이 운용하게 만드는 요인을 제공하였으며 두 기체 모두 자체 방어 화력이 매우 모자라고 방어력도 별로 좋지 않았으며 전투기 상대로는 매우 느려서 점점 갈수록 손실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급강하폭격기로는 D4Y 스이세이가, 뇌격기로는 B6N 텐잔이 등장하였으나 스이세이는 초기형에 채택한 수랭식 엔진이 계속 말썽을 부렸고 폭장량이 500kg라는 소량이라는 게 문제였으며 텐잔의 경우에는 기본 성능은 나쁘지 않았지만 개발 과정에서 엔진 문제로 인한 지연으로 늦게 등장하는 바람에 때를 놓쳤다. 그리고 방어력 개선이 덜한 것도 문제라서 많은 수의 스이세이와 텐잔이 연합국 전투기의 제물이 된다.

나중에 와서야 B7A 류세이라고 불리는 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를 통합한 기종이 등장하였으나 이 때는 이미 배치할만한 항공모함이 없던 시절이라서 지상 비행장에서 운용하였다. 하지만 이 기종도 충분한 방어력을 부여하지 못해서 동급 연합군 기체에 비해 1톤 이상이나 가벼웠는데 이는 캐터펄트를 설치하지 못해서 폭장을 만재한 상태로 자력 이함을 해야 하는 일본 항공모함의 한계로 더이상의 질량증가는 함재기로써 운용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었다.

제로센으로 대표되는 전투기와 1식 육공으로 대표되는 육상 비행장용 폭격기에 비해서는 정상적인 발전과 후계기의 등장이 이루어졌으나 항공모함 함재기용 캐터펄트가 제대로 실용화가 안된 상황에서 고속으로 항해하는 대형 항공모함이 없게 되자 폭장을 만재하고 자력으로 이함해야 하는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기체 방어력이 계속 낮은 상태를 유지하는 바람에 승무원의 손실이 매우 컸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5.4. 육상 비행장용 폭격기[편집]


일본 해군은 육상 기지에서 운용해야 하는 G3M, G4M를 대량으로 운용했다. 대략 1,048대의 G3M과 2,435대의 G4M을 운용하여 총3,483대를 운용했다. 이 중에서 G3M은 발전도상의 물건이라 개전 초반을 제외하면 가급적 2선급 임무를 담당하였고 제대로된 물건은 G4M이었다.

일본 해군 항공대는 원거리의 목표를 공격할 목적으로 1식 육공이라고 불리는 G4M을 만들었는데 공격력 강화와 4발 중폭격기급 능력을 2발 경폭격기에게 요구한 결과 그 당시로는 높은 상승고도와 쓸만해 보이는 속도와 긴 항속거리를 얻었지만 반대급부로 방어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개량에 신경을 안쓴 것은 아니라서 자동 방루식 연료탱크는 1944년에나 나오는 G4M3에서나 도입하며 방어력 강화 조치도 주익 외판 안쪽에 30mm 두께의 고무시트를 붙여 연료탱크 아랫면의 방호력을 강화한다. 또한 동체 내부 연료탱크 주변에도 적층된 고무시트와 스폰지를 대는 조치를 하고 후방 총좌 사수석에 5mm 짜리 방탄장갑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갈수록 강화되는 연합군 전투기와의 전투에서 말 그대로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몇 번 상대해본 결과 탄환이 스치기만해도 불이 붙는다면서 "원샷 라이터" 또는 "날아다니는 지포 라이터", 모양이 시가랑 비슷해서 "날아다니는 시가"란 별명을 붙였다.

애초에 이런 종류의 항공기를 운영하려면 당연하게도 적 전투기가 공격해올 것에 대비해서 B-17이나 B-29처럼 기체의 방어력 자체를 크게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이 선택한 것은 후방 기총좌에 20mm 기관포를 설치해주는 것이었으며 딱 폭격기 무적론 상태를 못벗어난 산물 그 자체였다. 결국 개량형인 G4M3도 연합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불타면서 추락하는 것은 매 한가지가 되었다.

큰 문제는 후속작도 안좋은 제로센과는 달리 G4M은 쓸만한 대체제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2식 대정이라고 불리는 H8K이다. 이 기체는 4발 비행정으로 기체 강도도 높은 편이고 탑재량도 좋고 항속거리도 좋고 속도도 쓸만하며 방어 무장도 G4M 보다 좋았으며 특히 방어력 측면에서는 적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도 불이 잘 안붙고 만신창이가 된 채로 귀환 가능할 정도의 능력을 가졌다. 실제로 제조사가 해당 기체를 육상형으로 개조해서 4발 중폭격기화할 계획까지 수립했으나 대본영의 의지가 없다시피해서 포기했다. 대체제가 훌륭한데도 어처구니없이 포기한 어이없는 사태였다.

애초에 이런 식의 육상비행장용 대형폭격기는 그냥 일본 육군 항공대와 공동개발해서 쓰는 게 더 효율적이었지만 이건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이해할만한 구석은 있다. 이들 폭격기들은 지상폭격 임무도 수행했지만 대함임무 또한 수행하였으므로 해군에 소속된 것 자체는 정상적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시 미 해군도 비슷한 목적으로 2발 중형 폭격기인 B-25J 건쉽의 해군 버전인 PBJ-1J 미첼과 4발 중폭격기인 B-24리버레이터의 해군 버전인 PB4Y-2를 운용했다.

게다가 일본은 공군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해군 항공대에서 대함임무로 대형폭격기를 운용하는 것 자체는 별로 이상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소련 해군에서도 항공대를 운용했던 방식이며 현대에도 P-3같은 대잠초계기는 해군 지상기지에서 운용한다. 이건 당대 미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초대 미 합중국 공군참모총장인 헨리 아놀드 역시 대전기 호칭은 육군항공대 사령관, 계급은 육군 원수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공군을 독립된 편제로 보유한 국가는 영국과 독일 뿐이었다.

문제는 해군에 소속된 중(中)형 폭격기들이 태평양 전쟁 중, 후기에 맡은 임무가 병맛이 넘친다는 것인데, 크기로 보나, 운용 목적으로 보나, 전투기라기보다는 카미카제용 유인 유도 단거리 대함 순항미사일인 MXY-7 오카를 운반, 발사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같은 목적으로 만든 Ki-115 츠루기의 경우는 자력으로 이륙이나 이함이 가능한 프로펠러 엔진이라도 달려 있지, MXY-7 오카는 그런 것도 없이 로켓 엔진이어서 자력으로 이륙이나 이함이 불가능하다. 물론 오카는 당시 기술로는 요격이 어려울 정도로 굉장히 빠르긴 하지만 그 이전에 자폭병기라는 시점에서 이미 문제가 많다. 사람을 유도장치 삼은 유인 유도도 큰 문제지만 오카의 최대 사거리가 40km에도 미치지 못하므로 목표에 근접하다가 폭격기인 모기도 같이 격추당한다는 것. 자폭병기에 대해서는 일본군/무기체계 문서의 자살특공 문단을 참고.

또한 대함임무를 위한 의도와는 별개로 실제로 이 폭격기 운용 면에서 육해군 대립 때문에 발생한 삽질도 존재한다. 이 부분은 육해군 대립 문서와 점감요격작전 문서를 참고할 것.

그리고 일본 해군이 발주한 중(重)폭격기로는 G10N 후가쿠가 있는데, 이건 육군 항목의 실패한 초중전차인 100식 전차 일명 오이차의 후계인 Dae-i 거대 이동 요새와 비슷한 궤를 갖고 있다. 쉽게 말해 프로토타입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한 페이퍼 플랜. 특히 G10N 후가쿠의 경우는 기체는 제대로 설계가 완료안된 대략적인 설계도로만 있었고 엔진만 몇기 만들어지다가 그것도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일본 내에서 게임이나 프라모델로 나오는 G10N들은 완성된 모델을 상상해서 만들어낸 거다. 애초에 이 수준이면 대함공격용이 아니라 전략 폭격용인데 해군이 엄청난 비용과 자재와 시간을 쏟으면서 개발하기에는 문제가 좀 많다.

그리고 이놈이 실제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데, 당장 미 육군항공대의 B-29만 해도 당대의 어느 항공기보다 덩치가 큰 항공기인데, 이건 그 B-29조차 능가하는 덩치로 만들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텍싱으로 이착륙하는 항공기들은 헬리콥터 같은 수직이착륙기가 아닌 이상 덩치가 커질수록 이착륙시에 요구하는 활주거리도 길어진다. 즉 그 당시 일본의 내부 사정을 감안했을 때 이놈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이륙을 위한 텍싱을 하다가 정찰 나온 미군기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격파될 운명이라는 것이다.


5.5. 각종 전용 목적의 함재기[편집]


일본 해군은 특수한 용도의 함재기들을 많이 개발했는데, 항모를 제외한 특정 수상함 전용기(이하 특정 군함 전용기)가 바로 그것이다. 해당 기체를 운용하는 항공전함, 잠수항모, 항공순양함 등의 배다. 그들 생각으로는 상대적으로 비좁은 갑판에서 이착함을 해야 하므로, 그에 걸맞은 전용기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런데 이 당시의 기술로는 수직이착륙기를 만들 수가 없었으므로, 특정 군함 전용기들은 모두 수상기로 만들어졌다. 항공전함 같은 배들이라도 캐터펄트를 실으면 함재기의 이함이 가능하지만, 태생이 전함인 탓에 함재기가 여유롭게 착함할 공간이 없으므로 물 위에 착수시키고 크레인으로 건져내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비행기들은 정찰기로 사용되었으나, 1930년대의 물건을 1940년대에 사용하는 것은 성능 면에서 문제가 있으므로 일본군은 새로운 수상정찰기를 개발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군은 E15K 시운이라는 수상정찰기를 만들어냈다. 전투기보다 빠른 수상정찰기가 있으면 제공권을 빼앗긴 상태에서도 정찰이 가능할 거라는 논리로 만든 것인데, 이건 오요도급 경순양함 전용기다. 뭐라고요? 시험제작기를 포함해서 15기가 생산되었으며, 자세한 건 오요도급 경순양함 일본 위키피디아시운 일본 위키피디아를 참조하자. 폭격기 무적론하고 하등 다를 바 없는 논리인데 같은 엔진기술로 수상기가 빨라지면 상대할 비수상전투기는 훨씬 빨라진다. 물론 엔진기술은 영미의것이 훨씬 나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일본군은 정찰과 폭격을 모두 할 수 있는 다목적 수상정찰기도 만들어냈다. E16A 즈이운이 바로 그것으로, 순양함에 탑재해서 정찰과 폭격을 병행함으로서 부족한 함재기 전력을 보충하려고 했으며 이세급 전함에 탑재될 예정이었다. 220기가 생산되었으며, 일본인들은 이걸 걸작이라고 칭했다. 자세한 건 즈이운 일본 위키피디아를 참조하자.

그러나 압권은 단연 M6A 세이란이다. 잠수 항모에 탑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신형 수상정찰기 겸 폭격기로, 플로트 대신 바퀴를 붙인 육상 운용형 개량기 난잔까지 합쳐서 28기가 생산되었다. 이 수상정찰기는 비좁은 잠수함 격납고에 격납하기위해 주익이 뿌리부터 접혀 밀착되고 꼬리날개까지 접혀지며 플로트 역시 평소엔 분리하여 함내에 보관하다 출격시 기체에 장착하는 상당히 독특한 구조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극지방의 운용까지 상정해서 자이로스코프를 설치하는 등 세계 어디서나 이용 가능하도록 특수하게 제작되어 대당 단가가 제로센 50대와 맞먹는 굉장히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세이란 일본 위키피디아 참조.


5.5.1. 전용기의 문제점[편집]


위에 소개된 전용기들의 생산량은 적다. 220기라면 많아보이지만, 2차대전 당시의 전투기들 중에는 1만 기를 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즈이운은 많은 편이고, 시운이나 세이란은 시험제작기나 바퀴 달린 개량기들을 합해도 채 30기 조차도 안 된다. 이래가지고는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하니 대량 생산을 통해 가격을 떨어뜨릴 수가 없으며, 전용 부품을 사용하므로 보급에도 혼란을 초래한다. 따라서 안 그래도 개발비가 비싼 물건이 제작비도 비싼데다 다른 무기 체계랑 사소한 부품조차 공유하지 않는다.

많이 찍어서 가격을 낮추면 된다고? 말은 쉽지. 위에 있는 세 기종 모두 특수한 배에 전용 함재기로서 실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비행기들이므로 그럴 수가 없다. 즉 세이란이나 시운, 즈이운 등을 충분히 양산해서 가격을 내리려면 그만큼 해당 함재기를 요구하는 전용 모함인 센토쿠급 잠수 항모나 오요도급 항공순양함을 양산해야 한다. 일본군에게 과연 그것이 가능한 지에 대해선 더 이상 말이 필요한가?(...) 애초에 일본이 항공전함, 항공순양함같은 걸 만든 이유가 항공모함을 건조할 재료와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인 시나노도 건선거를 비울 정도까지만 건조하다가 중단된 것을 항공모함으로 개장한 것이니...

그래도 갑판이 좁은 특수한 배에서 이착륙을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도 나올 수 있지만, 미군에는 그런 거 없다. 미군이 60m짜리 비행갑판을 가진 미니 항공모함을 만들었을 때, 여기에 실린 것은 육군 관측기였지 새롭게 만들어진 전용 함재기가 아니었다. 호위항공모함에 실린 함재기들도 이미 만들어진 해군의 함재기들을 그냥 갖다 놓았을 뿐이고 그나마도 미 해군 호위항공모함에 쓰인 함재기는 F6F 헬캣의 직전 함재기인 F4F 와일드캣을 호위항공모함 용도로 소폭개량한 FM-1, FM-2이다. 그런데 이거... 원래의 와일드캣 개발사인 그루먼에서 만든 게 아니라 자동차 회사인 제너럴 모터스에서 만든 것이니 사실상 전용 함재기 같은 건 개발할 생각조차 안 했다. 호위항공모함이 무려 100척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미국의 미니 항모에 대한 내용은 항공모함 항목에 소개되어 있으니 참조하자.

그리고 굳이 순양함에 탑재할 수상정찰기를 개발하고 싶다면 그냥 한 가지로 통일하면 된다. 오요도급 순양함에는 시운, 항공전함에는 즈이운, 잠수항모에는 세이란. 이런 식으로 개발하는 건 낭비다. 게다가 적어도 세이란은 그나마 모함인 센토쿠급 자체가 잠수함이라 격납고를 충분히 확보하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격납고가 너무 좁았고, 다른 배와는 아예 개념 자체가 전혀 다른 잠수 항모라는 특성상 격납고 크기에 맞춘 별도의 전용기가 필요했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E15K 시운 같은 건 변명 자체가 불가능하다. 오로지 오요도급 경순양함에만 실을 전용 함재기를 개발하고, 실패작으로 판명되었는데도 양산하다니 답이 없다.

사실 세이란의 경우에도 위의 변명이 명확한 변명이 될 수 없다. "도대체 잠수함이 함재기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말로야 미군의 수상함대의 저지선을 뚫고 파나마를 폭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지만 그게 가능한 소리인가? 고작 잠수함에서 발진한 수상기 2~3기 정도에 타격을 받을 정도로 파나마가 녹록한 타겟일 리도 없거니와, 유효한 타격을 주려면 수십 기는 필요할 텐데, 고작 28기로 그게 가능할 리 없다. 일본군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서 잠수항모의 대량생산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파나마 운하의 경우에는 매우 중요한 시설인지라 전시에는 대공포요격기, 레이더로 도배가 되어있었을 것이 뻔하니 정규항공모함 부대로 공습해도 성과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특정 군함 전용기니까 성능은 괜찮지 않았냐고? 위에 소개된 특정 군함 전용기들은 모두 수상기라서 플로트를 달고 있는데, 이러면 공기 저항을 심하게 받으므로 어설프게 설계하면 다른 비행기보다 시속이 100km 이상 느려진다. 가장 빠른 세이란조차 최고시속이 474km다. 수상기는 원래 그렇다고 변명하고 싶어도, 이탈리아1931년에 개발한 경주용 수상기인 마키 MC. 72는 최고시속이 709km다. 이탈리아의 항공기술은 세계 제이이이이이이일!!

물론 이 경우는 마키 MC. 72가 경주용으로 속력을 매우 강조한 경우임은 감안할 필요는 있다. 플로트가 없는 육상기인 독일의 Bf109나 영국의 스핏파이어의 후기형도 최고속력이 650km/h 전후였고 최후기형쯤 가야 700km/h를 넘기는 버전까지 나온다. 대전기 가장 빠른 기체중 하나라는 미국의 F4U 코르세어도 초기형은 700km/h가 안되는 속력이었다. 전투기들 보다도 빠른 기체를 세이란과 비교하니 당연히 느릴 수 밖에 없다. 세이란도 당시 미국이 운용한 OS2U 킹피셔같은 수상기보다는 빠른 편이라는점을 생각하면 어디까지나 수상기 치고는 빠른편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래에 있는 '특정 군함 전용기의 전과' 항목 참조.

애니메이션이라면 이런 특정 군함 전용기들이 큰 위력을 발휘했겠지만, 현실에선 그런 거 없다. 성능도 모자란 한 줌의 특정 군함 전용기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미군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일본군의 개전 직후부터 패전까지 잠시라도 보유했던 경항모, 정규항모 등을 전부 포함한 항공모함 총 생산량이 26척인데, 태평양 전쟁 말기 미해군은 정규항모만 따져도 28척에 달했다. 한마디로 일본군이 전쟁 시작부터 끝까지 보유했던 모든 항공모함 숫자보다 미해군의 급조 정규항모 숫자가 더 많다는 소리다. 왜 급조인가 하면 에식스급 항공모함들이 건조된 연도가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 직전인 1941년부터였기 때문. 미국에 있어서 전시 급조가 아닌 항공모함은 에식스급의 전 함급이자, Big E가 포함된 함급인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와스프제2차 세계대전도 개전되기 전인 1931년부터 건조된 것이기 때문에 급조가 아니다. 게다가 정규항모 개개의 성능 역시 비교를 불허하는데다 미국의 100척이 넘는 호위항모 숫자는 제외했는데도 저렇다.


5.5.2. 특정 군함 전용기의 전과[편집]


제대로 써먹었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E15K 시운은 원래 목표에 크게 못 미치는 속도를 내는 실패작이고, E16A 즈이운도 일본인들의 주장대로라면 성능은 괜찮았지만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으며, 그들 모두 본래의 목적인 함재기로서의 활용은 전혀 되지 못했다. 그나마 M6A 세이란은 잠수 항모에 탑재되었지만, 실전 투입 직전에 전쟁이 끝났다. 한술 더 떠 이쪽은 미군기 도색으로 위장 도색을 입혀서 작전에 나갈 계획도 세워뒀다가 걸리기 전에 죄다 바다에 버렸다!

이 꼴이 된 이유는 미군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특정 군함 전용기를 띄웠을 때는 전쟁 후반기인데, 이 무렵이면 미군이 제공권을 틀어잡은 시기다. 당연히 미군 전투기들이 특정 군함 전용기를 요격하기 위해 몰려오게 되고, 특정 군함 전용기의 빈약한 성능으로는 미군 전투기들을 따돌릴 수 없다. 일본군 수상기들의 실적이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급격히 추락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군이 일본군 수상기를 잡는데 전투기를 동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까먹은 일본군의 잘못이었다.


6. 조선인 출신 인사[편집]


일본 해군에서는 조선인이 입대해도 함선 배치를 최대한 막았기 때문에 일본 해군에 입대한 조선인은 항해과나 포술과, 수뢰과 등 전투병과에는 배치받지 못하고 주계과나 기관과 같은 비전투병과로 배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투병과에 배치되는 인원은 죄다 이 해군 항공대 아니면 해병대해군 육전대에 속했다. 해군 항공대 출신 중 일부 인사는 광복 후 대한민국 공군으로 들어갔으나, 일본군 경력을 숨기고 평생 숨어산 사례도 많다.

[1]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2] 『戦史叢書39 大本営海軍部・連合艦隊4 第三段作戦前期』 118p[3] 물론 저 시절은 오늘날에 비해서 각종 미신이 더 성행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가령 영국 공군에서도 작전에 심령술을 사용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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