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토/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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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사실 삼국시대만 해도 이 100여년간의 시간대에서도 무려 일곱번의 일기토가 있었고 그 중에서 4번이 1:1 일기토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역사 전체의 레벨로 가면 정말로 장수끼리 1:1로 맞짱을 뜨는 경우를 좀 모을 수 있다. 당장 관장지용 문서에서도 일기토를 뜨는 무장 가지고 관우, 장비에 비하는 문구를 꽤 발견할 수 있다.

2. 사례[편집]



2.1. 실제 중국역사상의 일기토들[편집]


조익은 양쪽의 진이 세워지고 나서, 각각 그 장수가 나와 싸우니, 이를 도전(挑戰) 이라 일렀다고 기록하고 있고 왕안정의 경우 이를 투장(鬪將)이라 부르며 옛날부터 진실로 투장의 일이 있었으며, 모두 패관(稗官) 문학, 그러니까 삼국지연의 같은 망령된 이야기 아니라고 이르기까지 한다.


2.1.1. 초한전쟁[편집]


항우가 유방에게 1:1로 붙을것을 제의하나 유방이 당연히 거부. 이에 항우가 장사에게 나가 도전하게 하니, 한의 장수 누번(樓煩)이 번번이 이를 사살했다.

한서


이어 기병을 넷으로 나누어 사방을 향하게 했다. 한군이 몇 겹으로 포위하자 항왕은 기병에게 "내가 공을 위해 저 장수를 베마"하고는 기병들에게 사방으로 말을 달려 내려가서 산의 동쪽 세 지점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이어 항왕은 크게 고함을 지르며 아래로 치고 내려가니 한군은 모두 엎어지고 쓰러졌다. 이어 마침내 장수 하나를 베었다. 이때 기병의 장수 적천후(赤泉侯)가 항왕을 추격했는데 항왕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자 적천후의 사람과 말들이 모두 놀라 몇 리 밖으로 도망쳤다. 항왕은 세 지점에서 기병들과 다시 만났다. 한군은 항왕의 소재를 모르게 되자 군을 셋으로 나누어 다시 포위하게 했다. 항왕이 치고 나와 도위 하나를 베고 백 수십 명을 죽인 다음 다시 그 기병들과 합류하니 기병 둘만 사망했을 뿐이었다.

사기 항우본기.


의외로 역발산기개세로 유명한 항우의 일기토 기록이 이 정도인데 그럴수밖에 없다. 본문만 봐도 알겠지만 당대에 이 인간 상대로 설령 이름있는 장수라도 1:1 일기토를 자청하겠다고 감히 나설만한 인간이 없다. 위에서 나온 누번도 항우가 1:1로 붙자고 할때 그 살기에 놀라서 바로 도주했다. 여기서 항우가 적장을 물리친 것도 그냥 항우가 달려가서 고함 한 번 지르니 한나라 병사들이 모두 엎드려 덜덜 떨며 쫄아붙은 상태에서 그냥 도망도 못 가던 이름없는 한나라 장수들을 죽인건데 이건 말이 장수를 죽여서 일기토인 거지... 애시당초 이 인간에게 굳이 이런 사소한 일기토 기록이 필요하긴 할까. 진짜 항우가 상대편 장수 죽인다고 작정하고 나서면 사람이고 말이고 다 덜덜 떨고, 그냥 눈만 한번 부릅떴다고 그 패기에 지려서 그냥 명색이 제후급 장수라는 사람이 몇 리 밖으로 도망갈 지경인데 일기토라는게 제대로 성립할리가, 마지막에 그가 죽을때도 병사고 장수들이고 누구도 혼자인 항우한테 접근할 생각을 못했고 결국 항우 스스로 자결해서 죽었다.

계포의 외삼촌 정공(丁公)은 초나라 장수였다. 정공은 항우를 위해 팽성(彭城) 서쪽에서 고조를 추적하여 짧은 병기로 접전을 벌였다. 고조는 다급해져 정공을 보고는 "우리 둘 다 좋은 사람들인데 어찌 서로 해치려 하는가"라고 했고, 정공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고조는 몸을 피해 도망쳤다.

《사기》 계포난포열전.


위 일화에 비하면 상당히 인간적인 레벨의 일기토다. 근데 유방은 나중에 천하를 통일하고 정공을 배반자의 본보기라면서 이런 자 때문에 항우가 천하를 잃었으니 본 받으면 안된다고 죽여 버렸다.


2.1.2. 삼국시대[편집]


사실 이 목록 중에서도 일부를 제외하면 서로 상대했다기보다는 난전 중에 한 쪽이 상대방을 직접 죽인 것이 대부분이며, 난전 중이 아닌 서로 일대일로 싸운 경우에는 굵은 글씨로 표시.

오서 태사자전
곡아
196년
손책 vs. 태사자
유요군을 정탐하던 손책을 태사자가 공격한다. 손책이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손창을 빼앗았으며 태사자도 손책의 투구를 빼앗았다. 양쪽의 군대가 난입해 승부는 내지 못했다.
촉서 관우전
백마
200년
관우 vs. 안량
원소군이 백마를 침공했을 때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깃발을 바라보다가 말에 채찍질을 해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목을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제장들 가운데 당해낼 장수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1][2]
위서 방덕전
평양
202년
방덕 vs. 곽원
분수를 건너는 원상군을 마등군이 급습한다. 방덕은 난전중에 직접 곽원의 목을 베었다. 방덕은 적장의 신원을 모르고 죽였으나 동맹인 조조군에 있던 종요(곽원의 삼촌)가 알아보았다고 한다.
오서 여몽전
강하
208년
여몽 vs. 진취
여몽은 선봉대를 통솔해 직접 진취의 목을 베었으며, 장수와 병사들은 승기를 타고 진격해 황조의 성을 공격했다.

아래는 주석으로 인용한 부분. 흔히 위략 등의 기록에 신빙성을 제기하지만 적어도 이것들은 배송지가 감수한 부분이고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실었기 때문에 신빙성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영웅기 등 정사 삼국지보다 먼저 작성된 것도 있다.

영웅기
장안
192년
여포 vs. 곽사
여포군과 대치한 곽사가 1:1 대결을 제안했고 여포는 이를 수락했다. 곽사는 여포의 창을 맞고 부상을 입었고, 부하들에게 구출되어 후퇴했다.
영웅기
하비
196년
학맹 vs. 조성
여포에게 반란을 일으킨 학맹에게 그의 부장 조성이 반기를 들어 서로 싸웠다. 학맹은 조성을 찔렀고 조성은 학맹의 한쪽 어깨를 찍었다. 결국엔 반란을 진압하러 온 고순이 학맹을 참수.
위략
서량
196년쯤
마초 vs. 염행
염행은 일찍이 마초를 찔렀는데, 모가 부러지자,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쳐서 거의 죽임에 이르렀다.

정사를 보면 '누가 누구를 죽였다' '목을 베었다' 등의 기술이 여러 차례 나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일기토라고는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정군산에서의 하후연과 황충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忠推鋒必進,勸率士卒,金鼓振天,歡聲動谷,一戰斬淵,淵軍大敗

황충이 앞장서서 나아가 사졸들을 독려했다. 징과 북소리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환호성이 계곡을 흔들었다. 한 번의 싸움으로 하후연을 참하니 하후연의 군대는 대패했다.

여기서 참(斬)이라고 하는 글자는 말 그대로 '무기를 가지고 손수 적을 벤다'의 의미도 있지만 전투의 결과로 전사, 사로잡은 적의 처형, 형벌의 집행 등의 의미도 포함된다. 연진에서 문추가 전사했을 때의 기록도 "(조조가) 병사를 풀어 (원소군을) 대파하고 문추를 참했다.(遂縱兵擊, 大破之, 斬醜)"라고 되어 있으나 누구도 조조가 문추를 직접 베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관우전을 살펴보면 안량과의 싸움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나온다.

曹公使張遼及羽為先鋒擊之。羽望見良麾蓋,策馬刺良於萬衆之中,斬其首還

(관우가)말에 채찍질을 해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목을 베어 돌아왔다.

정사 삼국지 관우전


여기서는 策馬, 刺 등 특정한 행위에 대해 묘사했다.

慈便前斗,正與策對

태사자가 앞으로 나아가 정면으로 손책과 대적했다.

(중략)

策刺慈馬,而攬得慈項上手戟,慈亦得策兜鍪

손책이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목덜미를 끌어당겨 수극을 빼앗았다. 태사자도 손책의 투구를 빼앗았다.

정사 삼국지 태사자전


태사자전에서는 좀더 자세한 서술이 되어있음을 알수가 있다.

更親斬郭援首級

(방덕이) 곽원을 직접 참했다.

정사 삼국지 방덕전


방덕전에서는 '親'이라는 문자를 사용해서 직접 베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行嘗刺超,矛折,因以折矛撾超項,幾殺之

행(염행)이 초(마초)를 찔렀는데, 모가 부러지자,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쳐서 거의 죽임에 이르렀다.

위략


여기서도 확실하게 마초가 죽을뻔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가 위략이라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적어도 배송지가 주석에서 인용했으니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고 마초가 약했다는 것은 아니며, 정사에도 그가 용맹스러웠다는 서술이 있다. 다만 염행보다 약했을 뿐. 무엇보다 이 때의 마초는 20살로, 젊은 수준을 넘어 사실상 청소년이었다.


2.1.3. 오호십육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편집]


유요 평선(平先)에게 진안(陳安)을 추격하게 했는데, 진안은 왼쪽 손에는 대도(大刀)를 쥐고, 오른손에는 장팔사모(丈八蛇矛)를 쥐며, 가까우면 도와 모를 함께 펼쳤고, 멀면 말을 타고 활을 쐈으나, 평선이 진안과 싸워, 세 번 엇갈리더니 그의 모를 탈취해서 돌아왔다.

진서


형양내사(衡陽内史) 왕응지(王應之)가 하혜문(何慧文)과 더불어 군을 내버려두고 직접 싸워(...), 하혜문을 8곳 찍었고, 하혜문은 왕응지를 찍어 다리를 잘라, 그를 죽였다.

송서

지휘관들끼리 군대를 버리고 지들끼리 치고박고 일기토하다가 결국 하나가 죽은 케이스이다(...)

노상(魯爽)이 반역해, 설안도(薛安都)가 그를 토벌했는데, 노상은 일세의 건장하고 날랜 장수였으나, 설안도가 바로 나아가 그를 찌르니, 즉시 쓰러졌다.

남사

설안도의 일화는 관장지용의 일화 중 하나다.

초도(焦度)가 위(魏)의 표피공(豹皮公)과 조우해, 창을 교차하며 싸우니, 표피공이 땅에 떨어졌다.

남사


진경지가 현호성(懸瓠城)에 있을 때, 위의 효장(驍將) 요웅(堯雄)의 자식 요보악(堯寳樂)이 가장 용맹해, 단기로 교전하길 구하나, 진경지의 자식 진흔(陳昕)이 말을 채찍질해 뛰어들어서 바로 요보악을 취하니, 위의 군이 흩어져 달아났다.

남사

명색이 최고지휘관의 아들이 일기토를 하겠다고 나섰는데 적장의 아들과 1:1로 일기토를 하다가 패해 죽었고 위나라 군은 지휘관이 죽자 바로 흩어져 도망쳤다.

유중례(柳仲禮)가 청당(靑塘)에서 후경과 싸울 때, 창이 장차 후경에게 미치려는데, 지백인(支伯仁)에게 어깨를 베여, 마침내 달아났다.

양서

후경은 후경의 난 일으킨 그 사람 맞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 1:1로 싸우다가 다른 장수의 난입으로 일기토가 중단된 것이다.

북제의 군이 여량(呂梁)에 이르렀을 때, 서역호(西域胡)가 궁술이 훌륭했는데, 오명철(吳明徹)이 소마가(蕭摩訶)에게 이르길 "만약 이 호를 죽이면, 저들의 군은 기세를 잃을 것이오." 소마하가 이에 말을 타고 달려가 제의 군에 충돌하니, 호가 앞장서 진 앞으로 10여 보 나왔는데, 소마하가 선현(銑鋧)을 던져, 그의 이마에 정확히 적중시켜, 즉시 쓰러뜨렸다.

진서

역시 관장지용 일화에서도 나온 1:1 일기토 사례

여사휘(徐嗣徽)의 효장 포팽(鮑砰)이 작은 군함으로 전후(殿後)가 됐는데, 주문육(周文育)이 포팽의 배에 뛰어 들어가 포팽을 참살하고, 이에 그의 배를 이끌고 돌아갔다.

진서

이제는 1:1 일기토를 떠서 적장을 죽이고 그 배를 빼앗아서 돌아간다.

위(북위)의 종실 탁발가실릉(拓跋可悉陵)이 양주(凉州)를 정벌하는데 종군했는데, 저거무건(沮渠茂虔)이 효장 한 명에게 탁발가실릉과 싸우게 해, 양쪽의 창이 모두 부러져, 탁발가실릉은 화살을 뽑아 그를 쏴서 낙마시키나, 그들의 구원이 이를까 두려워, 검을 뽑을 겨를도 없이, 칼날로 그의 목을 어그러지게 해서 잘랐다.

북사

명색히 황족이라는 사람이 직접 1:1 일기토를 뜨고 있다.

후주북제와 싸울 때, 주의 장수 왕웅(王雄)이 곡률광(斛律光)을 추격하니, 곡률광의 좌우는 모두 흩어져, 오직 노복 한 명과 화살 하나만 남았다. 왕웅이 살피기론 창이 곡률광에게 1장 남짓 미치지 못해서, 곡률광에게 이르길 : "너를 죽이지 않고, 응당 생포해 천자께 보이리라." 곡률광이 활을 쏴 왕웅의 이마에 적중시켜, 왕웅은 물러나 달아났으나, 영에 이르러 죽었다.

북사

이 경우에는 적이 무너져 흩어지고 지휘관만 남은 상태에서 좋다고 생포한답시고 달려들다가 화살에 맞고 죽은 사례, 참고로 삼국시대 때 어떤 남자도 저런식으로 이마에 화살을 맞았었는데 안 죽었다(...)

채우(蔡祐)는 하교(河橋)의 전투에서, 동위(東魏)가 두터운 갑옷에 장도를 든 자에게 바로 채우를 취하게 했으나, 채우는 그가 이름을 기다렸다가 10 보 떨어진 곳에 이르니 곧 활을 쏴서, 그의 얼굴에 정확히 적중시키고, 곧 창으로 찔러 죽였다.

북사

역시 활로 쏘아 적장을 죽인 케이스.

돌궐이 진양(晉陽)을 핍박할 때, 진중의 한 기장(騎將)이 대오를 벗어나 와서 싸워, 기연맹은 앞장서 홀로 나와, 그와 상대하다, 적을 찔러 낙마시키고서, 바로 그를 참살했다.

북제서

이민족과 싸울때도 일기토를 뜬다.

후막진숭(侯莫陳崇)이 묵기추노(万俟醜奴)를 토벌할 때, 적이 아직 대열을 이루지 못해, 후막진숭이 단기로 적 안으로 들어가, 말 위에서 만사추노를 사로잡으니, 무리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주서

이 경우엔 적이 방심한건지 후막진승이 날렵했는지 어쩐건지 대열을 이루는 동안 후막진승이 단독으로 적의 지휘관을 사로잡아서 적진이 바보가 된 사례(...)


2.1.4. 수, 당 시대[편집]


두영정(竇榮定)이 돌궐의 아파가한(阿波可汗)을 정벌할 때, 사람을 파견해 돌궐에게 이르길 "사졸이 무슨 죄가 있겠소? 다만 응당 각자 장사 한 명을 파견해 승부를 결정해야 될 뿐이오." 돌궐이 이에 기병 한 명을 파견해 도전했다. 두영정이 사만세(史萬歲)를 파견해 나와 이에 응하게 하니, 사만세가 그의 목을 참하고 돌아왔다.

수서

전형적으로 서로의 진형에서 1:1로 무예가 뛰어난 자들을 가려뽑아 일기토를 시킨 사례다. 병사들이 무슨죄냐며 '일기토로 승부 봅시다!' 하는 지휘관은 덤.(...)

한왕(漢王) 양량(楊諒)이 반역해, 교종규(喬鍾葵)를 파견해 대주(代州)를 포위했다. 교종규에게는 장수 왕발(王拔)이 날래고 용맹하며 전투에 능하여, 양의신은 이를 근심해, 왕발을 당해낼 수 있는 자를 모집했다. 거기장군 왕사은(王思恩)이 그를 감당하길 청하여, 양의신(楊義臣)이 이르길 "장사로다!" 적은 양의 술을 줬다. 왕사은이 왕발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곧 땅에 잔을 던지고, 말을 채찍질해 그에게로 달려가나, 재차 이기지 못하고, 왕발에게 살해당했다.

수서

후세의 어느 소설가가 보고 본인작품에 분명히 반영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어디서 많이 본 시츄에이션, 거기장군이나 되는 양반이 일기토를 뜨는 것도 황당하지만 더 웃기는 건 소설과 달리 술을 받은 사람이 멋지게 이길수 있을거처럼 나갔는데 죽었다.

선웅신(單雄信)이 바로 진왕(秦王, 이세민)에게 달려가나, 울지경덕이 말에 채찍질해 달려들며 큰소리로 부르고, 선웅신을 찔러 낙마시키고, 곧 왕을 호위해 나왔다.

당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당태종 이세민이 한참 원정할때 일화로 이세민을 보고 단기로 나갔다가 울지경덕한테 당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이 때 죽지는 않았다.

왕세충의 자식 왕완(王琬)이 두건덕의 군중에 있으며, 수제(隋帝)의 말을 탔는데, 개갑(鎧甲)이 화려하고 정연해 무리에게 자랑했다. 울지경덕과 고증생(高甑生), 양건방(梁建方) 세 기사가 나와, 왕완을 사로잡고 돌아갔다.

당서

명색이 최고사령관 아들이 괜히 멋지게 차려입고 자랑하고 싶어서 군대앞에서 설치다가 이세민측 장수 세명이 갑툭튀해서 사로잡았다.

진왕이 유흑달(劉黑闥)을 토벌할 때, 유흑달의 장수 고아현(高雅賢)이 단기로 이세적을 추격하니, 이세적의 장수 반모(潘毛)가 그를 찔러 낙마시켰다.

당서

이 경우에는 위기에 처한 사령관을 휘하 장수가 구출한 케이스이다. 이것 역시 전형적인 1:1 일기토 사례

매번 적 중에 효장이 과시함이 있으면, 진왕이 번번이 진숙보에게 명해 이를 취하게 하니, 많은 무리 안에서 찔러 죽이며, 뜻한 바와 같지 않음이 없었다.

당서》 진숙보전

그렇다. 사실 진경은 당태종 전용의 일기토 머신이었던 것이다.

토번의 찬보(贊普) 자식 낭지도(郞支都)가 용맹을 믿고, 명마를 타고는 도전하니, 왕난득이 달려 나와, 바로 그의 목을 참했다. 실위의 우두머리 단보락(段普洛)이 변방을 어지럽혀, 유객노(劉客奴)가 단기로 그를 습격하여, 참수하고 돌아왔다.

당서》 왕난득전

토번이고 실위고 간에 일기토 앞에선 얄쨜없다.

장백의가 이희열(李希烈)의 장수와 싸우다 패해, 적이 추급(追及)했는데, 장백의가 도를 휘둘러 이를 막으니, 양쪽의 칼날이 서로 향하며 낮아질 수 없었는데, 때마침 구원병이 이르러 이에 면하였다.

당서》 장백의전

이 경우도 전형적인 도망치다가 1:1로 살기 위해서 맞붙은것. 정말 지휘관의 위기였는데 산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2.1.5. 오대십국시대[편집]


유수광(劉守光)의 장수 선정규(單廷珪)가 주덕위와 용두강(龍頭岡)에서 조우해 이르길 "오늘 반드시 주양오(周陽五)를 사로잡으리라!” 단기로 그를 추격해, 창이 주덕위의 등에 미쳤는데, 주덕위가 측면으로 몸을 비틀어 이를 피하고, 를 휘둘러 반격해, 선정규는 낙마하여, 마침내 그를 사로잡았다.

오대사

상황을 설명하면 우연히 적 장수를 만나서 '아싸 내가 너 잡는다!'라고 신나서 일기토를 했는데 오히려 본인히 패해서 사로잡혔다(...)

진종권(秦宗權)이 장질(張晊)에게 변(汴)을 포위하게 해, 적강(赤岡)에 주둔했는데, 변의 장수 장귀후(張歸厚)가 장질과 진 앞에서 홀로 싸우다, 장질이 피곤하여 물러나니, 여러 장수가 이를 틈타, 장질은 마침내 패하였다. 장귀후가 다시 시부(時溥)를 공격하는데 종군했는데, 양(梁)의 장수 진번(陳璠)이 배반해 시부가 있는 곳에 있음을 보고, 두 눈을 부릅뜨고 말을 타고 달려가, 바로 가서 그를 취했다.

오대사

보면 1:1 일기토 하다 피곤해서 물러나는 장수를 단체로 다구리해서 때려잡는 상황이다.(...)

진(晉)의 이존효(李存孝)가 이한지(李罕之)를 택주(澤州)에서 구할 때, 양의 장수 등계균(鄧季筠)이 출전해, 이존효는 창을 마음대로 다뤄 그를 사로잡았다.

오대사


초왕(楚王) 마은(馬殷)이 자식 마희범(馬希範)에게 고계흥(高季興)을 토벌하게 했는데, 고계흥의 종자(從子)는 이름이 종사(從嗣)로, 단기로 초의 군루에 이르러, 마희범과 결전하길 청하니, 초의 장수 요광제(廖匡齊)가 나와 싸워, 몽둥이로 쳐죽였다.

오대사

일기토에는 어떤 무기도 상관없다 몽둥이도 충분한 일기토 도구!

하로기(夏魯奇)는 유주(幽州)를 공격하는데 종군하였는데, 유수광에겐 장수 선정규, 원행흠(元行欽) 이 있어, 모두 날래고 용맹했다. 하로기가 두 장수와 싸우며, 번번이 저절로 그칠 수가 없어서, 양군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이를 구경했다.

오대사

선정규는 바로 위에서 주덕위한테 사로잡힌 그 인물 맞다(...). 하로기는 후량 최고의 맹장인 왕언장을 단기로 쫓아가서 사로잡은 기록이 있으며[3] 원행흠은 유수문과 유수광의 형제 내전에서 유수광이 패했는데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가 유수문을 사로잡아서 패전을 승전으로 뒤바꾼 기록도 전해진다.

2.1.6. 요나라[편집]


석야선(石也先)이 거란의 영토를 빼앗고, 그곳을 약탈하니 대장군 술률노속이 친히 나서, 적진으로 진격하여, 안에서 적장 석야선을 죽이고, 장수 10명을 생포하였다.

요략

다름아닌 대장군이라는 양반이 친히 적진으로 돌격해 적장을 죽이고 장수 10을 생포한 진귀한 기록이다. 다만 요략 술률노속 열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인물은 어려서 부터 전장에 뛰어들어 70이 넘는 나이까지 장수하며 대장군대승상을 해먹고 야율아보기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대우 받은 인물이다.

2.1.7. 송나라[편집]


왕군만이 땅을 빼앗을 때, 홀연히 기병 하나가 뛰쳐나와, 모가 장차 미치려는데, 왕군만은 측면으로 몸을 비틀어 이를 피하고, 반격해 그 목을 참하니, 바로 강(羌)의 우두머리 약시포(藥厮逋)였다.

송사》 왕군만전

이상하게 이민족들 중에서 족장이나 되는 양반이 친히 일기토 뜨다가 죽는 경우가 있는듯하다.

후익이 처음에 당장종(唐莊宗)을 따라 양과 싸울 때, 양의 장수 이립(李立), 이건(李建)이 날래고 용맹하다고 알려졌는데, 후익은 앞장서 나와 싸워, 두 장수를 사로잡고 돌아왔다.

송사》 후익전

2:1 일기토에서 승리한 케이스

후연광이 홀로 적장 유악(劉渥)과 큰 나무 아래에서 싸워, 그의 오른쪽 팔을 잘랐다.

송사》 후연광전


청간채(靑澗砦)를 쌓았는데, 하(夏, 서하)의 군이 와서 다퉈, 철기(鐵騎) 중 도전하는 자가 있었다. 장옥은 철간(鐵簡)을 쥐고 나와 싸워, 그의 목과 말을 취하고 돌아왔다.

송사》 장옥전


하의 군이 와서 침략해, 진에서 효장[4]

을 내보내고 곽준에 필적한다고 소리 높여 말하나, 곽준이 철저(鐵杵)를 휘둘러 그의 머리를 박살냈다.

송사》 곽준전

필적하는 장수 말고 그냥 더 쎈 장수를 데려왔으면 좋았을것 그랬지?(...)

하의 군에서 효장이 백기를 쥐고 창을 세우고는 꾸짖길 "누가 감히 나와 대적하겠느냐!" 창이 바로 왕규의 오른쪽 팔을 상처 입혔으나, 왕규가 왼손으로 철저를 가지고 그의 머리를 부쉈다. 또한 한 장수가 창을 가지고 다가와, 왕규는 그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저(杵)로 공격해 죽였다.

송사》 왕규전

이상하게 서하군이 한세충도 그렇고 송군 상대로 일기토에서 지는 기록이 좀 있는데 '서하사'가 있었으면 서하 장수들이 송 장수들 상대로 일기토 승리한 기록이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징기즈칸 때문에...(...)

악비가 태행산(太行山)에서 싸워, 단기로 장팔철창(丈八鐵槍)을 쥐고는, 흑풍대왕(黒風大王)을 찔러 죽였다.

송사》 악비전


올술(兀术)이 초주(楚州)를 공격해, 조립은 6기를 데리고 외치길 : “내가 진무(鎭撫)사니, 와서 결전해도 된다!” 두 기병이 돌출했는데, 조립은 모를 휘둘러 그들을 찌르니, 모두 떨어져, 그들의 말을 탈취하고 돌아갔다. - 송사 조립전, 저기서 나오는 올술은 금나라 황족 완안올술인듯하다.

영벽(靈壁)의 전투에서, 금의 장수 중 쌍철간(雙鐵簡)을 쥐고 말을 채찍질 해 달려 나오는 이가 있었는데, 필재우가 좌도(左刀)로 그의 간(簡)을 막고, 우도(右刀)로 그의 머리를 베니, 금의 장수는 낙마해 죽었다.

송사》 필재우전

1:1 일기토에서 기마 쌍도술로 적장을 베고 있다.


2.1.8. 금나라[편집]


태조(太祖, 완안아골타)가 단기로 마산(麻産)을 추격하니, 마산이 말을 버리고 갈대 안으로 들어갔다. 활랍호(活蠟胡)가 와서 태조에게 묻길 : “이는 누구입니까?” 태조가 이르길 "마산이오." 활랍호가 마침내 나아가, 그를 사로잡고 나왔다.

금사

아직 금나라가 안습한 시절이라서 그런지 건국군주가 친히 상대편 장수잡으려고 1:1로 추격하고 있다(...)

모자렴이 험조(險阻) 안에 들어가, 노언륜(盧彦倫)에게 포위당했는데, 두 기병이 돌출해 바로 공격해, 모자렴은 활을 쏴 그 중 한 명을 적중시켰고, 그 중 다른 사람이 창을 겨누어 들어, 모자렴의 겨드랑이를 거의 적중시킬 뻔했다. 모자렴이 그의 창을 피하고는, 더불어 싸워, 그를 생포했으니, 바로 노언륜의 건장(健將) 손연수(孫延壽)였다.

금사》 모자렴전

2:1 일기토 승리 사례다.

목리문전(木里門甸)에서 적(고려)과 만나, 오랫동안 힘껏 싸웠고,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창을 겨누어 들어 고려의 진중(陣中)에서 그 장수를 질주하여 찌르자, 적이 드디어 궤멸하였다.

금사사묘아리

금나라 최고의 먼치킨 사묘아리의 대 고려전 당시 일기토 모습이다. 적과 아군의 혼전 양상때 고려군의 진중으로 달려가 독려하던 장수를 죽인것. 고려 입장에 더 안습인것이 이 기록 바로 다음에 한국사 최악의 패전 중 하나인 갈라수 전투에서 사묘아리등 여진 장수들에게 고려군이 개털려 버린다는 것이다.


2.1.9. 원나라[편집]


양자교(楊子橋)의 전투에서, 강재姜才의 군중에서 한 기병이 뛰쳐나와, 바로 장홍범(張弘範)에게 달려갔는데, 장홍범이 말머리를 돌려 도리어 맞이해 그를 찌르니, 즉시 죽었다.

원사


송의 저주(滁州)를 공격할 때, 송의 효장이 돌출해, 장유의 고삐를 잡고는 끌고 그의 진으로 들어가, 비석(飛石)이 장유의 코에 적중됐는데, 양쪽의 군이 싸워, 장유는 이에 돌아올 수 있었다.

원사》 장유전

꽤 굴욕적인 에피소드인데 갑자기 적이 나타나서 고삐를 획 잡아끄는 바람에 코에 돌을 얻어맞았다(...) 타이밍 좋게 양쪽이 싸움에 돌입해 돌아올수 있었다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이건 일기토, 투장 사례가 아니라 그냥 재수없이 잡힐뻔한 사례인듯.

왕선(王禪)이 상도(上都)에서부터 병사를 일으켜 유하(榆河)에 이르러, 연첩목아가 이를 막았는데, 아자첩목아(阿刺帖木兒)가 로 연첩목아를 찔러, 장차 미치려는데, 연첩목아가 측면으로 몸을 비틀어 로 그의 를 막고, 그를 찍어 팔을 적중시켰다.

원사》 연첩목아전



2.1.10. 명나라[편집]


웅천서(熊天瑞)가 감(贑)을 점거해, 상우춘이 그를 포위했다. 웅천서의 양자 웅원진이 몰래 나와 군을 엿봤는데, 상우춘 또한 수 기를 이끌고 나와서, 갑작스레 함께 만났으나, 웅원진은 상우춘을 알지 못해, 그를 지나쳤다가 비로소 깨달아, 마침내 단기로 나아가 상우춘을 습격했다. 상우춘이 수종하는 기병을 파견해 도를 휘두르게 하니, 응원진이 철과(鐵撾)를 휘두르며, 싸우면서 달렸다. 상우춘이 이르길 : “장사로다!” 그를 놓아줬다.

명사


부우덕(傅友德)이 서주徐州를 지켰는데, 확곽(擴廓)이 장수를 파견해 와서 공격하게 하나, 부우덕은 단기로 삭(槊)을 휘두르며, 그의 장수 한을(韓乙)을 찔러, 마침내 패하고 떠났다.

명사


이렇게 보면 생각보다 일기토, 투장(鬪將)의 사례가 많은것 같지만 기원전 200년대부터 서기 1300년대까지 1500년간 있었던 일 중에서 불과 60여가지 사례가 꼽히는 것이다. 보면 진짜 진지하게 싸우는 사례도 많고 난전중에 적과 아군이 뒤엉켜서 우연히 지휘관끼리하는 맞붙는 경우도 많지만, 뭔가 황당무계하거나 대체 왜 그랬어요? 싶은 일화도 꽤 있다.(...) 그러나 진짜 진지하게 장수들끼리 1:1로 싸우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했으며 그 묘사도 생생한 경우가 있다. 다만 중세를 넘어서면 중국에서도 이런 투장의 사례가 꽤 줄어드는걸 확인할 수 있다.


2.2. 일본사[편집]


각 진영을 대표하는 사무라이가 앞으로 나와 일대일로 겨루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본식 일기토는 헤이안 시대부터 14세기 가마쿠라 시대까지 무려 500년 동안이나 이어지던 일종의 전쟁 관습이었다. 일본에서는 센고쿠 시대 이전까지 기마 무사 중심의 기마전이 주전법을 이뤘는데 적과 마주한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교전에 들어가기 전 각군의 기마 무사들이 앞으로 나와 자신의 성명과 신분, 가문 내력, 전공, 전쟁의 명분 등을 외치는 '나노리(名乗り)'라는 의식을 통해 자신의 명예와 아군의 사기를 높였다. 이때 적을 도발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일기토를 걸기도 하는데, 적으로부터 일기토 도전장을 받은 측에서는 상대와 비슷한 신분과 명성을 가진 장수를 보내어 싸우게 하거나 거절하기도 한다. 만일 신분이 낮거나 한미한 가문의 장수를 보내면 상대를 모욕하는 행위가 되어 오히려 커다란 불명예를 뒤짚어 쓰게 되며, 이렇게 싸운다고 한들 이는 일기토(一騎討ち)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결투 방식은 활을 쏘는 것(騎射)과 근접 무기로 겨루는 두 가지가 있으며 어떤 방식이든 결코 말에서 내려 싸우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무로마치 시대부터 다시 전란이 빈발하면서 아시가루로 대표되는 보병 중심의 집단전으로 주전법이 바뀌게 되자 기마 무사들의 여흥과도 같았던 '나노리'와 '명예로운 일대일 대결' 문화는 급속히 사라지고 만다. 센고쿠 시대에는 갓산토다 성 전투에서 시나가와 마사카즈(品川将員)의 정식 일기토 도전을 받아들인 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幸盛)와 같은 사례도 몇몇 있기는 했지만 거의 대다수의 일기토는 치열한 교전 상황에서 적장끼리 만났을 때 발생했다.

황록색의 민소매 겉옷(胴肩衣)을 입은 무사, 흰색 수건으로 머리를 감쌌으며 누런색 말에 올라 3척 길이의 칼을 뽑아 들고 접이 의자에 앉아 계신 신겐 공이 있는 곳으로 똑바로 쳐들어와 칼끝으로 세 번을 찔렀으나 신겐 공이 일어나시어 군바이 부채로 막아내셨다. 나중에 신겐 공이 부채를 보니 칼자국이 8개나 나 있었다... (중략) ... 후에 듣기로 그 무사, 테루토라(輝虎)[5]

였다고 한다.

《코요군칸(甲陽軍鑑)》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기토인 다케다 신겐우에스기 겐신의 대결이 바로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 중 혼란한 상황에서 발생했는데 다케다 신겐 측 사료인 《코요군칸(甲陽軍鑑)》에 따르면 다케다군의 본진까지 쳐들어 온 우에스기 겐신이 직접 다케다 신겐에게 칼을 휘둘렀지만 신겐은 이를 군바이(軍配)로 막아냈고, 마침 옆에 있던 가신 하라 토라요시(原虎吉)가 겐신의 말을 창으로 찔러 위기의 순간을 벗어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우에스기 겐신 측 사료인 《우에스기케고넨푸(上杉家御年譜)》에 따르면 우에스기군의 공세에 완패해 진영을 버리고 퇴각하던 다케다 신겐은 아라카와 나가자네(荒川長実)라는, 우에스기 군의 말단 무사와 일기토를 치르다가 손을 다쳐 가신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의 순간을 벗어난 것으로 나온다. 한편 당대의 고승이었던 텐카이의 목격담에 따르면 도망치던 다케다 신겐에게 칼을 휘두른 적장은 우에스기 겐신이었다.

또 센고쿠시대의 독특한 전투 문화 중 하나였던 '이치반야리(一番槍)'[6]는 사무라이로서 개인의 명성을 올리고, 사후 논공행상 때 아주 중요한 가점 요소였기 때문에 각 진영에서 창칼 좀 휘두른다고 자부하는 젊은 사무라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치반야리를 자처했다. 그래서 전투가 시작되면 선봉에 선 각 진영의 이치반야리들 간에 종종 일기토가 벌어졌는데, 이렇게 젊은 시절 이치반야리로 참전해 적의 이치반야리로 나선 적장과 많은 일기토를 벌여 명성을 쌓은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시마즈 요시히로다.[7]

2.3. 한국사[편집]



2.3.1. 삼국시대[편집]


겨울 10월 경인 초하루 기유. 백제의 왕자 여창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을 향했는데, 백합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갑자기 북치고 피리부는 소리가 들리니 여창이 크게 놀라 북을 쳐 대응하였다. 밤새 굳게 지키다가 새벽이 되어 일어나 텅 비었던 들판을 보니 군대가 푸른 산처럼 덮여 있었고 깃발이 가득하였다. 때마침 날이 밝자 목에 경개를 입은 자 1기, 징을 꼽은 자 2기, 표범 꼬리를 끼운 자 2기, 모두 합해 5기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어린아이들이‘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여창이 “성은 (고려 왕실과) 동성이고 관위는 간솔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백제편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백제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고려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때 백제군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부장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을 동성산 위에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일본서기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보면 고대 한국에서는 전쟁이 무척 잦았으나, 일기토에 대한 묘사는 거의 전무하다. 그런데 일본서기 19권 흠명기 14년(553년)에 드물게도 한반도에서 고구려군과 백제군의 일기토 기록이 하나 남아있는데, 바로 백합야 전투에서 펼쳐진 일기토이다. 상대방이었던 고구려군 장수의 이름은 남아있지 않지만 여기서 백제군 장수인 부여창은 태자 시절의 위덕왕이다. 부친인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뒤 그 죄책감으로 승려가 되려고도 했고 40여년간 재위했음에도 별다른 업적이 없는 위덕왕이지만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태자 시절엔 전쟁의 선봉을 도맡아 설 정도로 용맹했으나 부친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정신적으로 상당히 망가졌을 거라는 추측을 해 볼 수도 있다.

황제고려를 정토하면서, 조서로 계필하력을 전군총관으로 삼았다. 백암성에 나아가, 적의 삭에 맞았는데, 창상이 심하여, 황제가 직접 약을 붙여주었다. 성을 뽑고 나서, 계필하력을 찌른 자인 고돌발을 얻었는데, 사신을 치달아 보내어 그를 자살하게 하려 하자, 고사하며 말했다 : 「저 자는 그 주인을 위하여, 흰 칼날을 무릅쓰고 신을 찌른 것이니, 이는 의로운 사인입니다. 개와 말도 오히려 그 먹인 것에 보답하는데, 황차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끝내 그를 풀어주었다.

(帝征高麗,詔何力為前軍總管。次白崖城,中賊槊,創甚,帝自為傅藥。城拔,得刺何力者高突勃,騶使自殺之,

辭曰:「彼為其主,冒白刃以刺臣,此義士也。犬馬猶報其養,況於人乎?」卒舍之.)

신당서 권110-06 제이번장전(諸夷蕃將傳) 글필하력전(契苾何力傳) 中


또한 중국 측 기록인 신당서에서는 당나라 태종의 장수 글필하력과 고구려 장수 고돌발의 단기 접전 상황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당시 고돌발의 직급은 알 수 없지만, 당태종의 총애를 받았던 무예가 뛰어나고 용맹한 철륵 출신 총관 글필하력을 창으로 찔러 떨어 뜨린 것으로 보아, 무예가 뛰어난 장수로 추측된다. 또한 정황상 오골성 출신 혹은 오골성에 주둔하고 있던 장수로 위기에 빠진 백암성을 구원하러 긴급히 출동하였던 기병으로 판단되며, 이에 글필하력의 철륵 출신의 당나라군과 백암성 부근에서 교전 후 백암성에 입성하였던 것으로 역시 추측된다. 어쨌거나 이 일기토 기록 하나 덕분에 고돌발은 고구려-당 전쟁을 다루는 고구려 말기 한국 역사극에는 한번씩 얼굴을 비치는 중요 인물로 등장한다.


2.3.2. 고려[편집]


적이 제주를 공격해 오자 김수와 고여림 등은 역전하다가 전사했지만 진자화는 곧장 적중에 들어가 그 장수 곽연수(郭延壽)의 목을 베어 돌아 왔다.

《고려사》 열전, 김응덕

삼별초의 난 당시, 제주로 온 삼별초의 침공에 고려군이 당황하자, 19살의 소년 장수였던 진자화가 제주도에 상륙한 삼별초와 혈투를 벌이던 중 곽연수의 목을 베어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얼마 후 적의 정예 기병이 다시 와서 마주 보고 진을 쳤는데, 뒤미처 온 나이만다이대왕이 연기현의 승전에 끼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해 적과 교전하려 했다. 용맹스러운 적군 한 명이 아군에게 활을 쏘았는데, 쏠 때마다 아군이 거꾸러졌다. 한희유가 창을 꼬나 잡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격해 겁을 낸 적이 퇴각하는 틈을 타 그 자를 끌어내어 목을 벤 후 머리를 창에 꽂아 적에게 보이니 적의 기세가 사그라졌다.

《고려사》 열전, 한희유

충렬왕 재위 당시 원나라의 반란군이 고려를 침공한, 일명 카다안의 침입이 일어났을때 고려의 장수 한희유가 일기토로 추정되는 장면을 연출했다. 1292년 5월 8일, 카다안의 한 장수가 활을 쏘는 족족 고려병사들을 맞춰잡자 이에 장수였던 한희유가 직접 창을 들고 뛰어들어가 그 장수의 목을 베고 창에다 매달았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

태조가 조금 후에 이르러 호발도는 두꺼운 갑옷을 세 겹이나 입고 붉은 털옷을 껴입었으며, 흑색 암말을 타고 진을 가로막아 기다리면서 속으로 태조를 깔보아 그 군사는 남겨두고 칼을 빼어 앞장서서 달려나오니, 태조도 또한 단기로 칼을 빼어 딸려나가서 칼을 휘둘러 서로 쳤으나, 두 칼이 모두 번뜩이면서 지나쳐 능히 맞히지 못했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타기 전에 태조가 급히 말을 돌려 활을 당겨 그의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는지라, 곧 또 그의 말을 쏘아 꿰뚫으니,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호발도가 땅에 떨어졌다. 태조가 또 그를 쏘려고 하니, 그 휘하의 군사들이 많이 몰려와서 그를 구원하고, 우리 군사들도 또한 이르렀다.

태조실록

조선왕조실록에는 1383년 8월에 이성계가 호발도와 싸워서 이겼다는 묘사가 나온다.


2.4. 서양[편집]



2.4.1. 고대[편집]


이런 장수끼리의 일대일 대결은 전쟁의 한 양식으로서 정복전쟁이 시작된 청동기시대부터 동서양 막론하고 벌어진듯 하다.

BC 12세기 청동기시대에 일어났다고 추정되는 트로이 전쟁을 다룬 일리아스오디세이아에서는 전쟁에 말이 도입되기 전이라서 일기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대일 대결이 자주 나타난다. 하지만 이건 진짜 트로이 전쟁 시기의 묘사라기 보다는, 호메로스가 살았던 서사시 시대의 묘사에 가깝다는 것이 중평이다. 이 시기의 전투는 모두 귀족에 가까운 호족들간의 소규모 접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병력간의 대결보다는 개인적 결투의 형태에 더 가까웠다고 보고 있다. 이 시기 소국의 양상은 일리아스에서 오디세우스의 나라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일리아스를 보면 그리스 측의 제일 맹장인 아킬레우스는 총사령관 아가멤논에 삐져서 출전을 거부하고, 트로이 측의 헥토르는 그리스측 무장이 나오자마자 족족 일기토로 죽인다. 이들이 벌이는 일기토는 말은 이용하지 않고 처음에 창과 방패로 싸우다가 나중에 칼을 쓰는 형식이다.

그리스 측 장수들은 헥토르의 무용을 두려워해서 제비뽑기를 하여 상대하게 된다. 그러다가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와 일기토 끝에 죽자 아킬레우스는 드디어 출전하고 헥토르를 일기토에서 죽인다.

나중에 국가체제가 발전하면서 대규모 회전이 일상화되었지만 그래도 종종 장수들간의 일대일 대결이 벌어지긴 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다리우스 3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 등. 로마의 마르켈루스도 켈트족과의 싸움에서 부족장 비르도마루스와 일대일로 싸워 승리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서기관이었던 에우메네스는 문관이었지만, 이후 후계자 전쟁에서 군을 지휘하면서 적장과 일대일로 싸우기도 했다. (게다가 이겼다.)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 부족장 콤미우스는 로마군 대대장 가이우스 볼루세누스와 일기토를 벌여 볼루세누스를 낙마시키고 무사히 도주했다는 기록도 있다.

다라 전투에서는 열세인 로마군과 페르시아군이 요새 앞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대치가 지루해졌는지 페르시아군 장수 하나가 로마군에게 접근해 사령관인 벨리사리우스에게 일기토를 신청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직접 나서는 대신 자신의 목욕탕 청소 노예(...)를 대신 내보냈는데, 이 목욕탕 노예가 중무장한 페르시아 장수를 가뿐히 죽여버리고??? 분노하여 나선 두 번째 페르시아 기사까지 연달아 죽였다. 페르시아군의 사기는 크게 낮아졌고, 그 덕분이었는지 다음날 치뤄진 전투에서 로마군이 두 배 정도의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승리한다.

2.4.2. 중세[편집]


파일:external/www.medievalists.net/Tournament_bavarian_engraving.png

푸아티에 전투 이후. 잉글랜드 기사 두 명이 패주하는 프랑스 기사와 종자에게 대결을 신청하다

한 잉글랜드 기사가 렌티의 우다르 경을 추격해서 이렇게 외쳤다. "돌아오시오, 기사여, 그렇게 도망치다니 수치스러운 일이오."

우다르 경이 돌아서자, 잉글랜드 기사는 창을 겨누어 그를 찌르려 했다. 그러나 우다르 경이 옆으로 피하고는 검을 휘둘러 잉글랜드인의 투구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갑작스럽게 공격을 당한 잉글랜드인은 말에서 떨어졌고,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우다르 경은 말에서 내려서 잉글랜드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항복하시오. 아니면 그대를 죽일 것이오."

잉글랜드인은 항복해서 붙잡혀갔으며 나중에 몸값을 내고 풀려났다.

피카르디 출신의 종자(squire)인 장 드 엘렌은 전장에서 빠져나와 하인이 가져온 말에 갈아타고, 홀로 말을 달려 도망쳤다.

젊은 귀족 기사였던 잉글랜드의 버클리 경이 혼자 그를 추격했다. 1마일쯤 달렸을 때, 장이 말머리를 돌려서 검을 창처럼 겨누고 돌격해왔다.

버클리 경도 검을 들어서 프랑스 종자를 치려고 했으나, 그가 공격을 가하는 순간 장이 몸을 틀어 피하며 그의 팔을 검으로 맹렬하게 가격했다.

버클리 경은 검을 놓쳐버렸고, 말에서 내려서 바닥에 떨어진 검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프랑스 종자가 검으로 강하게 찔러서 그의 허벅지를 꿰뚫어버렸고, 버클리 경은 바닥에 쓰러졌다.

장은 말에서 내려 버클리 경의 검을 집어들었고, 그에게 항복할 것이냐고 물었다.

버클리 경이 이름을 묻자 종자가 대답했다. "저는 엘렌의 장이라는 사람입니다. 경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버클리 경이 대답했다. "나는 웨일즈 변경령 세번 강에 있는 아름다운 버클리 성의 영주 토머스다."

종자가 대답했다. "이제 경은 제 포로가 되었습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기사가 대답했다. "좋다. 네가 기사의 방식으로 나를 이겼으므로, 너의 포로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

그렇게 버클리 경은 맹세를 했고, 종자는 허벅지에 박힌 검을 뽑아내고 벌어진 상처를 묶어줬다.


오터번 전투 이후. 스코틀랜드 기사와 잉글랜드 기사의 대결

제임스 린지 경이 전투에서 도망치는 매튜 경을 발견했고, 용기와 명예에 대한 열망으로 혼자 그를 추격해 가까이 따라붙었다.

원했다면 그대로 달려들어 창으로 찌를 수도 있었겠지만, 대신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사여, 말머리를 돌리시오. 그렇게 도망치다니 수치스러운 일이오. 내 이름은 린지의 제임스고, 이대로 말머리를 돌리지 않으면 그대의 등짝에 창을 박아줄 것이오."

매튜 경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더 힘차게 박차를 가했다.

추격은 3마일이 넘게 이어졌고, 결국 말이 지쳐서 비틀거리자 매튜 경은 말에서 내려와 검을 뽑아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스코틀랜드인이 그의 가슴을 창으로 찌르려 했지만 매튜 경은 갑작스럽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고, 창끝이 바닥에 박혔을 때 검을 휘둘러 창대를 잘라버렸다.

제임스 경은 몽둥이가 된 창대를 던져버린 다음 말에서 내렸고, 스코틀랜드인들이 잘 하는 대로, 작은 전투도끼를 뽑아들어 한손으로 능숙하게 다루며 매튜 경을 공격했다,

매튜 경은 훌륭한 기술로 그 공격을 방어했으며, 두 사람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각자 도끼와 검을 들고 오랫동안 대결을 펼쳤다. 그러나 강력한 타격을 받아내던 매튜 경은 결국 숨이 차서 항복을 선언했다.


1380년 버킹엄 백작의 프랑스 원정 도중 일어난 사건

잉글랜드군이 보스(Beauce) 지방의 투리(Tourey) 성 앞에서 전초전을 벌이는 동안, 한 프랑스인 종자가 혼자 앞으로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숙녀를 경애하는 신사로서 저와 무기를 들고 겨루어볼 분이 계십니까? 본인은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창으로 세 번, 도끼로 세 번, 단검으로 세 번 공격을 가할 준비가 돼 있으니, 당신들 잉글랜드인들 중에 신사다운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봅시다."

이 종자의 이름은 고뱅 미셸이었고, 그의 요청은 잉글랜드인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조아킴 케이터라는 잉글랜드인 종자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내가 그의 도전에 응할 것이니, 그를 성 밖으로 불러주십시오."

지원자가 나타나자 잉글랜드군의 원수인 피츠월터 경이 전선에 나와서 말했다. "우리 사람을 보내겠으니 너네 종자를 내보내라. 그의 안전을 보장할 것을 맹세하겠다."

고뱅 미셸은 그 말에 기뻐하며, 영주들의 도움을 받아서 즉시 갑옷을 입고 말에 탔다. 그리고 창과 도끼와 단검을 든 세 명의 하인을 데리고 성 밖에 나왔다.

이 프랑스 종자는 잉글랜드인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왜냐면 육박전을 걸어오는 프랑스인이 나타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으로 세 번 공격할 것이라는 규칙에 따라 그는 세 개의 검을 준비해서 나왔다.

버킹엄 백작도 시합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그것을 직접 가서 보겠다고 말했다. 스태퍼드 백작과 데번셔 백작도 그와 함께 구경을 나가면서 투리 성에 대한 공격은 중단되었다.

잉글랜드인들이 시합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조아킴 케이터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앞으로 나섰다.

두 종자가 정해진 시합 장소에 나오자 각자에게 창이 지급되었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돌격해갔다. 하지만 말이 날뛰는 바람에 창 공격이 전부 빗나가 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돌격에서는 서로를 제대로 맞췄지만, 둘 다 창을 놓쳐버렸다.

그러자 버킹엄 백작이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여기서 마치고 나머지는 다음에 하세."

성모축일 다음날, 고뱅 미셸과 조아킴 케이터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다시 시합에 나섰다. 그들이 창을 겨누고 서로에게 돌격했을 때, 프랑스 종자는 상대를 정확히 찔러서 버킹엄 백작의 기대를 만족시켰지만, 잉글랜드 종자는 창끝을 너무 내려버렸고, 상대의 허벅지를 가격했다.

버킹엄 백작과 다른 영주들은 크게 화를 냈으며, 조아킴이 수치스러운 행위를 저질렀다고 모두가 입을 모았다.

조아킴은 말이 날뛰어서 조준이 빗나갔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검을 들어 세 번의 검격(또는 찌르기)을 교환했으나, 고뱅 미쎌이 너무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을 본 버킹엄 백작이 충분히 잘 싸웠다며 시합을 중단시켰다.

백작은 고뱅에게 사자를 보내서 100프랑을 수여했고, 용감하게 실력을 발휘했다는 치하와 함께 그를 성의 동료들에게 돌려보냈다.


조아킴과 고뱅의 마상시합이 발단이 돼서 일어난 잉글랜드 기사들과 프랑스 기사들의 도보전투시합

프랑스인들이 시합장의 한쪽 끝에 자리잡았고, 반대쪽에 잉글랜드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첫번째 시합으로 푸잔스 남작과 베르탕 남작이 날카로운 창을 손에 들고 걸어나왔으며, 높은 명성과 대단한 용기를 지닌 두 영주는 두려움 없이 몸을 내던져 서로에게 강력한 타격을 가했다.

베흐탕 남작은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고, 푸잔스 남작은 흉갑이 관통당해서 피를 흘렸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검, 도끼, 단검으로 공격을 주고받았고, 큰 부상 없이 시합을 마친 다음 관객석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다음 시합에서 에노의 장 드 암브리쿠르 경과 포와투의 트리스탐 드 라자일 경이 나와서 용감하게 싸웠고, 부상 없이 대결을 마친 다음 돌아갔다.

그다음에는 에드워드 뷰챔프와 사부아의 사생아 클래랑스가 나와서 싸웠다.

클래랑스는 힘세고 강했고 상대인 잉글랜드인보다 덩치가 훨씬 컸다.

그들은 격렬하게 달려들어 서로의 가슴을 강하게 쳤고, 에드워드가 바닥에 쓰러졌으며, 따라서 잉글랜드인들은 매우 실망했다.

에드워드는 일어서서 두 번째 대결에 나섰지만, 사부아 사람의 공격을 받고 다시 쓰러짐으로써 잉글랜드인들을 더 실망시켰다.

잉글랜드인들은 에드워드 뷰챔프가 프랑스 종자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허약하다며 시합을 중단시켰다.

하지만 클래랑스는 그런 식으로 시합을 끝내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그러면 에드워드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서 대결을 끝까지 진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버킹엄 백작은 그의 용기를 칭찬했고, 잔캥 핀칠리라는 잉글랜드인 종자가 나와서 무릎을 꿇으며, 자기가 클래랑스와 대결하겠다고 말했다.

백작이 허락하자 잔캥은 무장을 갖추고 시합장에 나섰다.

클래랑스와 잔캥이 창을 들고 서로를 찔렀으며, 맹렬한 타격에 창대 끝이 부러져 날아갔다.

두 번째 공격에서도 창이 모두 부러졌고, 세 번째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창 여섯 개가 전부 부러졌으며, 관객들은 이것을 기사도적인 용맹의 증거로 여겼다.

그런 다음 그들은 검을 들고 싸웠으며, 세 번의 대결 끝에 네 개의 검이 부러졌다.

그리고 도끼 싸움을 준비했지만, 버킹엄 백작은 두 사람의 용기와 능력을 충분히 증명했으니 그만두라고 지시했다.

클래랑스와 잔캥이 물러나고, 다음 시합자인 잔캥 클린턴과 장 드 샤텔몽타니가 앞으로 나왔다.

잔캥 클린턴은 버킹엄 백작의 측근이었지만, 덩치가 작고 말랐기 때문에 백작은 그가 장 드 샤텔몽타니 같은 크고 강한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들은 힘차게 달려들어 공격을 주고받았고, 상대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던 잉글랜드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백작은 그의 종자가 수준에 맞지 않는 상대에게 대적하고 있다고 말했고, 때문에 몇몇 수하들이 잔캥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저 프랑스인은 네가 상대하기엔 너무 강해. 영주님도 불평하고 계시니까 그냥 포기하고 나가서 쉬어라.”

잔캥이 기권하자 장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종자가 너무 허약해서 저를 상대할 수 없다면, 부탁이니 더 강한 상대를 보내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끝내는 것은 저에게 있어 치욕스러운 일이므로 반드시 정해진 시합을 끝까지 마쳐야 합니다.”

그러자 사령관이 대답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그리고 기사들과 종자들 중에서 지원자를 찾는데, 윌리엄 패링턴 경이 나서서 말했다. “저자에게 싸움이 끝까지 진행될 것임을 알리십시오. 그리고 내가 무장을 갖추는 동안 앉아서 쉬고 있으라는 말도.”

장 드 샤텔몽타니는 말을 전해듣고 크게 기뻐했다.

잉글랜드 기사가 곧 준비를 끝내서 시합장에 나왔으며, 두 사람은 면갑을 내리고, 투구끈을 단단히 묶고, 상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몸통과 머리가 아닌 다른 부위를 공격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에, 사지가 아닌 다른 곳에 창을 내질렀다.

장 드 샤텔몽타니가 먼저 윌리엄 패링턴 경의 투구를 가격하자, 윌리엄 경이 약간 비틀거리며 발을 헛디뎠고, 양손으로 부여잡고 있었던 창을 그대로 휘둘렀다.

그렇게 아래로 내뻗은 창날이 허벅지를 관통해서 반대쪽으로 튀어나왔지만, 장 드 샤텔몽타니는 휘청거렸을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았다.

잉글랜드인들은 매우 격분하면서, 윌리엄 패링턴이 불명예스러운 반칙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윌리엄 패링턴 경은 자신이 먼저 타격을 받고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조준을 잘못 했으며, 미리 알았으면 멈췄을 것이라 변명하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소란이 가라앉자 프랑스인들은 장 드 샤텔몽타니를 데리고 조슬랑 성으로 돌아갔으며, 그는 이날 당한 부상으로 사경을 헤맸다.

그렇게 무술시합이 전부 끝났고, 참가자들과 관객들 모두 각자 자기가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1387년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포르투갈의 주앙 1세와 결혼동맹을 맺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위를 주장한 전쟁을 일으킨다. 잉글랜드군이 엔텐차(Entenza)를 점령하고 그곳에 주둔하는 동안, 카스티야군의 프랑스인 기사 르노 드 루와(Renaud de Roye)가 잉글랜드군의 지휘관 존 홀랜드에게 편지를 보내 마상시합을 제안한다

존 홀랜드 경과 르노 루아 경이 갑옷을 입고 말에 타고, 준비된 시합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두 기사의 무술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왕과 귀부인들, 그리고 잉글랜드의 공작과 영주들을 위한 높은 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창과 도끼와 칼이 준비되었고, 양 선수는 적당히 서로 떨어져서, 관객들의 주목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시합장을 활보했다.

모든 행동이 허용되었지만 상대를 죽이는 것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먼저 뾰족한 창끝을 마주해야 하며, 그다음에는 투구로 막아내기 어려운 날카로운 검, 그리고 잘 단련되어 어떤 것도 그것을 견뎌낼 수 없는 전투도끼와 단검의 타격을 받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기사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감당해야 할 위험이란! 한 번의 불운한 타격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것이다.

두 기사가 마치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일직선으로 달려가 부딪혔고, 각자 상대의 투구를 창으로 맞췄다. 르노 경의 창이 네 조각으로 부서졌고 파편이 높이 날아올랐다.

홀랜드 경의 창도 르노 경의 투구에 적중했지만, 느슨하게 묶인 투구가 창에 가격당한 순간 머리에서 벗겨졌기 때문에 상대에게 전혀 충격을 주지 못했다.

기사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관객들은 멋진 대결이었다고 환호했다.

르노 경은 다시 투구를 쓰고 새로운 창을 지급받았으며, 존 경은 망가지지 않은 창을 그대로 사용했다.

두 기사는 능숙하게 말을 몰아 서로에게 두 번째 공격을 가했다. 양쪽 모두 투구를 맞췄으며, 창끝이 면갑에 부딪히면서 불꽃이 튀어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르노 경의 투구가 벗겨져 날아갔다.

반면에, 이전과 달리 르노 경의 창이 부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존 경이 받은 타격은 극심했다.

잉글랜드인들이 이렇게 외쳤다. "저 프랑스인은 속임수를 사용해서 부당하게 이득을 누리고 있다. 저놈은 왜 홀랜드 경처럼 투구끈을 단단하게 묶지 않는거지? 상대와 동일한 조건을 갖추라고 가서 주의를 줘야겠어."

그러자 랭커스터 공작이 이렇게 말했다. "진정하시오. 상대가 투구끈을 묶는 방식으로 이점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되면, 존 경도 똑같이 하면 되는 것일 뿐이오. 물론 나라면 시합에 나갈때 투구끈을 단단히 묶겠지만, 열 사람한테 묻는다면 그중 여덟 명은 르노 경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말할 것이오."

그러자 잉글랜드인들은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귀부인들과 처녀들은 훌륭한 창시합이었다고 칭찬했고, 포르투갈의 왕도 똑같이 말했다.

세 번째 공격에서 다시 서로의 투구를 맞췄고, 머리 안에서 눈알이 요동쳤으며, 두 개의 창이 모두 부러졌다. 그리고 르노 경의 투구가 다시 벗겨져 날아갔다.

그렇게 두 기사는 낙마하지 않고 서로 지나쳐갔으며, 관객들은 멋진 시합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인들은 투구끈을 일부러 약하게 묶었다며 르노 경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랭커스터 공작은 프랑스인을 비난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규칙을 어기지 않으면서 합법적으로 이익을 가져간 현명한 작전이었다. 존 경도 잘 싸웠지만 그의 상대가 마상시합에 대해서 더 배울 것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을 뿐이다."

그리고 두 기사는 검, 전투도끼, 단검으로 각각 세 번의 타격을 가했다. 시합이 끝났을 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339년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서 있었던 작은 전투

잉글랜드의 왕이 몽셍마르탱(Mont St. Martin)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그의 수하들은 바폼므(Bapaume)를 지나 패론느(Peronne)과 셍컹탱(St.Quentin) 근처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지방이 오랫동안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았기에 부유하고 풍요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플랑드르의 헨리 경(가터 기사단의 창립 멤버인 Henry Eam)은 얼마전 수여받은 기사작위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발켄부르크, 베르그, 랑스의 영주들과 그밖의 500여명의 병력이 집결한 에노의 존 경의 부대에 들어갔다. 그들은 근처에 있던, 엔쿠흐(Hennecourt)라는 소도시 하나를 정찰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의 요새에 의지하고자 옮길 수 있는 재산을 전부 가지고 피난을 와 있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서로 힘을 합쳐 그 도시를 점령하려 했다.

이때 엔쿠르에는 훌륭한 지혜와 용기를 가진 수도원장이 있었는데, 그는 마을 밖에 목책을 세우고, 목책의 모든 말뚝의 간격이 반 피트(15cm)를 넘지 않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병력을 소집하고 돌과 생석회를 쌓아놓으며 전투를 대비했다.

곧 잉글랜드의 영주들이 도착하자, 수도원장은 목책 뒤에 병력을 배치했다. 영주들은 말에서 내려서 목책에 접근했고, 용감하게 자리를 지키는 방어군에게 검을 휘두르며 강력한 공세를 가했다.

영주들이 용감하게 목책을 공격하는 동안 방어군은 돌과 통나무와 생석회를 던져댔으며, 수도원장 역시 자신의 안전을 염려하지 않고, 좋은 가죽조끼 하나를 걸치고 적과 싸우며 여러번 강력한 타격을 주고받았다.

한편 선두에서 전투를 이끌고 있던 플랑드르의 헨리 경이 수도원장을 공격하다가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바람에 검을 붙들려버렸고, 상대의 강력한 힘에 끌려가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칼자루를 쥔 손을 놓지 않았고, 그의 오른팔이 목책 반대편에 어깨까지 당겨들어갔다.

동료 기사들이 뒤늦게 수도원장을 공격해서 헨리 경을 구출했지만 그는 이미 심한 상처를 입은 뒤였고, 그의 검은 수도원장의 손에 남겨지게 되었다.

내가 예전에 이 마을에 머물렀을 때, 수도자들이 보물로 간직되던 검을 보여주면서 그 전투와 관련된 모든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날의 공격은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많은 공격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마을을 공격한 플랑드르인, 에노(Hainault)인, 잉글랜드인, 독일인들은 방어군의 용기에 맞서 자신들이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한 채 패배한 것을 보았으며 부상자들을 수습해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출처는 프루아사르의 연대기[8][9]

일기토가 사라지고 한동안 카이사르나 한니발식 전술에 의한 진형으로 승부가 결판나던 전쟁도 중세에 접어들어 기사 계급이 발생하자 다시 일대일 대결이 나타났다. 하지만 기사들의 시합인 토너먼트(Tournament)를 보면 기사들간의 일대일 대결 자체는 실전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토너먼트는 일대일 대결인 주스트와 양측이 모두 붙는 일종의 회전이라고 할 수 있는 밀리(melee)전으로 이루어졌는데, 중세 중기까지는 밀리와 주스트의 구분도 흐릿했으나 일종의 전쟁 시뮬레이션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스트보다는 밀리가 훨씬 중요했다. 역시 일대일 대결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나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월터 스콧의 역사소설 아이반호를 보면 그 형식이 잘 묘사가 되어 있다.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여러 장면 장수간 대결들도 모두 이런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는 후대로 가면서 주스트라는 일종의 운동경기의 형태로 남았고, 오늘날에도 다시 복원되어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가 된다. 그러나 백년전쟁기 프랑스군의 명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도 전장에서 일기토로 적장을 물리친 기록이 있으며 그외 여러 기사들의 일기토 기록도 남아있다. 전쟁의 승패 자체를 가르는 일기토의 비중이 높진 않았지만 기사들끼리 1:1 대결은 생각보다 자주 있었다는 것이다.

1242년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튜튼기사단의 대장과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에서 1:1 대결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전투는 벌어졌으나 전술적인 승리였고 전투 당시에 일기토가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게 되면서 가톨릭의 동진은 저지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스탈린 시절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당시가 독소전쟁 시기라 러시아인들은 독일인을 이긴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이길 것이라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제작된 것이다.

다만 1211년 니케아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1세룸 술탄국의 술탄 카이후스로 1세와 일기토를 벌여 그를 전사시켰다는 것은 당대 역사가인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역사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351년 백년전쟁 시기 일기토로 전투의 승부를 결정한 사례가 있는데 브르타뉴 지방을 둘러싸고 프랑스 영국이 서로 용사 30명을 뽑아서 결투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승패를 정하자고 하였다. 이것이 30인의 결투라 불리는 유명한 결투이다. 처음에는 1대1 대결이었지만 협의 과정에서 30명 씩 싸우는걸로 늘어났으며 일종의 토너먼트 시합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기사들이 이겼고 영국군은 물러났다.

2.4.3. 근현대[편집]


파비아 전투 이후 총의 시대가 열리면서 군대 규모는 이전보다 훨씬 커졌기에 지휘관이 직접적으로 싸우는 경우는 줄었다. 그러나 기병 지휘관의 경우엔 돌격 과정에서 일기토가 벌어지는 경우도 가끔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나폴레옹의 기병대장 조아킴 뮈라가 적진으로 돌격해 적 지휘관 무스타파와 단기접전을 벌인 사례가 있다, 어쨌건 기병의 시대가 지나고 화기가 발전하면서 지휘관들은 점점 개인적인 무용보다는 화력의 집중도와 병력의 이동속도를 계산하는 수학적 연산 능력을 더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저런 몇몇 예외 사례를 제하면 일기토는 의미가 없어졌고 역사에서도 사라지게 된다.

20세기 들어서 일기토의 정의에 가장 근접한 사례라면 1차대전의 공중전들을 들 수 있다. 1차대전의 공중전들은 공군의 전략적 가치가 제대로 조명되기 전이고 기체들도 덜 개발된 시점이어서 하늘의 기사들의 결투라는 기사도적이고 낭만적인 의미로 받아 들여진 측면이 상당했다. 그래서 에이스 파일럿들의 의도적인 1:1 매치가 적지 않게 실현되었다. 그나마도 대전 후기로 접어들면서 항공전술이 발달해 웬만하면 편대전이 나오게 되었고, 훨씬 정교화된 항공기와 전술이 쓰이던 2차 대전 때는 아주 우발적인 조우전에서나 1:1 매치가 발생하게 된다.[10]

그 이후에도 조지 S. 패튼이나 잭 처칠 처럼 적장과의 일기토를 꿈꾸는 기인이 있긴 했지만 실제로 이뤄진 적은 없다.
[1] 자치통감은 한술 더 떠서 '羽望見良麾蓋,策馬刺良於萬眾之中,斬其首而還,紹軍莫能當者。遂解白馬之圍,徒其民,循河而西。'라고 적고 있다. 즉, 당시 '멀리서 안량의 휘개를 보다가 말을 채찍질해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의 목을 벤 관우가 돌아오는데, 원소군들 누구도 능히 당해낼자가 없었다.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고, (조조는) 그 백성들을 황하 서쪽으로 옮겼다'며 기록하고 있다.[2] 다만 관우가 단독으로 돌격했다는 말은 없다. 기병 무리 선두에 서서 안량을 참했다 정도이지 혼자서 적진에 뛰어들어 무쌍을 찍었다 확신하기는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쳐도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란 서술에서 볼 수 있듯 (혼자이든 기병무리를 이끌었든) 대군 한복판에 뛰어들어 적 지휘관의 목을 벤 것이니 엄청난 무용임은 분명하다.[3] 일기토는 아니고 성이 함락되어 도주하는 것을 쫓아가서 잡은 것이다.[4] 속자치통감에 따르면 이 장수의 이름은 양언(楊言)이다.[5] 우에스기 겐신의 이름. 겐신은 법명.[6] 한문 뜻 그대로 적에게 일번으로 창을 휘두른 사람. 즉 돌격대의 선봉장과 비슷하다[7] 사실 센고쿠시대를 대표하는 이치반야리는 이이 나오마사지만 나오마사는 아카조나에라는 돌격 전문 기마대를 운용했기 때문에 개인 대 개인으로서 싸운 일기토 기록은 거의 없다. 현재까지 개인 대 개인의 일기토 기록이 가장 많은 장수는 시마즈 요시히로다[8] Sir John Froissart's Chronicles of England, France, Spain, and the Adjoining Countries: From the Latter Part of the Reign of Edward II. to the Coronation of Henry IV (trans. Thomas Johnes)[9] The ancient chronicles of Sir John Froissart, of England, France, Spain, Portugal, Scotland, Brittany, and Flanders, and the adjoining countries (trans. John Bourchier Berners)[10] 뵐케의 금언을 보면왜 1:1 전투를 했는지 알수 있는데 단순 기사도로 1대1을 하는게 아니라 1기의 적을 상대로 여러명이 덤빌 경우 적편대는 아군편대를 노리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후에 개발된 로테나 타치 위브도 2:1의 개념이 아닌 시간차로 1:1을 연속하는 차륜전의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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