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재/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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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이휘재

1. 데뷔
2. 전성기
3. 군입대
4. 가수 활동
5. 방송 복귀
6. MC로 전향
7. 방송 활동 중단


1. 데뷔[편집]


서울예대 연극과 1학년 때이던 1991년, 서울예대에 방문했던 MBC PD의 눈에 띄어서 서울예대 동갑 동기 김한석과 함께 MBC 개그 프로의 아이디어맨(작가 비슷한 일)으로 일하게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텝인 FD로 일하기 시작했다.[1] 그러다가 1992년, 이경규가 이휘재를 일요일 일요일 밤에내의 코너 몰래카메라엑스트라로 출연시켰고, 이것을 인연으로 해서 연예계에 데뷔하게 되었다. 이휘재는 이경규가 연예인으로 키워보자며 미리 점찍어둔 사람 중에 하나였다고... 이휘재 이외에 이경규가 연예인으로 키워보려고 점찍어둔 인물로는 강호동이 있다.

1992년 당시 몰래카메라 이상용 편으로 '가짜 우정의 무대'를 촬영하는데 이경규는 이휘재에게 "머리 한번만 밀면 스타덤에 오르게 해주겠다."고 꼬드겼다. 삭발한 병사로 출연하라는 것이였다. 이휘재는 이경규가 시키는 대로 '가짜 우정의 무대'를 촬영하기 위해 삭발을 했다. 하지만 해당 부대에서는 촬영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결국 이상용의 몰래카메라는 무산되었다. 이때 이휘재 본인은 버스 맨 뒷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이경규는 이로 인해서 이휘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한동안 이휘재를 본격적으로 밀어주게 된다. #

개그맨 치고는 상당히 잘생긴 외모와 큰 키로 주목받았으며 이러한 외형을 아예 캐릭터로 잡아 나갔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유명한 유행어롱다리.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이경규1993년 '코미디 동서남북'이란 프로그램에서였다. 참고로 숏다리김한석이었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 데뷔를 했던 게 '빅다리' 강호동이다.[2] 김한석은 곧 '숏팔이' 최성훈으로 교체되었다. 코미디 동서남북은 시청률 저조로 6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폐지되었지만 유행어만큼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우리말을 파괴하는 예로 많은 비판도 받았다.


2. 전성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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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994년도까지 MBC에서 방영한 일밤의 코너 중 하나인 TV인생극장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TV인생극장은 이휘재를 주인공으로 해서, 인생의 특정 순간에 상반되는 양자택일의 선택으로 인해 인생이 뒤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는 코너였으며, 여기서 이휘재는 훈훈한 비주얼, 적절한 개그와 특유의 능청스러운 연기로 잘생기고 유머러스한 남성상의 유행을 선도하며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이 당시 이휘재의 인기는 정선희가 방송에서 수 차례 언급했던 것처럼 실로 절대적이었다.[3] 김혜수, 최진실 등등 당시 말만 꺼내도 억 하는 톱 여배우들과 이휘재의 키스신이 꼬박꼬박 들어갈 정도였으니… 이 코너로 이휘재는 1994년 MBC 방송대상 코미디부문[4]에서 이경실과 함께 최우수상(실질적인 연예대상)을 받았다.

당시 이 코너와 관련해서 가장 유행했던 말로는 "그래. 결심했어!"가 있다. 이 대사는 이 코너 자체를 그대로 표현한다고 보면 된다. 이후 TV인생극장은 MBC에서 테마게임이라는 프로그램으로 계승되었다.


3. 군입대[편집]


그러나 이러한 인기를 뒤로 하고 1994년 12월, 대한민국 육군 현역병으로 입대.[5] 제8기동사단에 자대 배치를 받고 복무하다가[6] 연예병사로 차출되어 군생활을 마쳤다.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지원한 훈련병들의 입소와 훈련과정을 그린 드라마인 '신고합니다' 등에 차인표 등과 출연하기도 했다.


4. 가수 활동[편집]


이휘재는 자신의 인기에 힘입어 1집 'Say GoodBye'(1995)[7]와 2집 'Blessing You'(1997)라는 앨범을 발표하고 가수로도 활동했으나, 가수 활동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휘재는 이것을 개그 소재로 오랫동안 써먹기도 했다. 그래도 본인 말에 의하면 당시 1집은 35만 장 정도 팔았다고 한다. 1990년대에는 100만 장 이상 파는 가수들도 심심찮게 나왔던 음반 판매의 전성기였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당시 35만 장이면 마냥 망했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전문 가수가 아닌 개그맨 출신의 가수로서는 나름 선전한 편이었다.[8] 실제로 박명수의 바다의 왕자보다 이휘재의 가수 활동이 앨범 판매량이나 차트 순위로 볼 때 넘사벽으로 윗급이었다. 이휘재의 가수 활동이 실패라는 것은 어느 정도 개그를 위해서 과장해서 말했거나 기대치에 비해서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이지 객관적으로 망했다는 수준으로 인기가 없었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당시 이휘재의 가수로서의 실패를 한 연예 언론은 이렇게 분석했다. '이휘재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개그맨이기 때문에.' 즉, 얼굴이 잘생긴 것은 부차적인 것이고 기본적으로 부담없이 편안하고 위트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이휘재가 잘 나간 것이었는데 가수로서의 이휘재는 유머스러운 모습을 철저히 배제하고 마치 자신이 신승훈이나 이승환 같이 왕자님이 된 듯 자신을 너무 오버해서 표현했기 때문에 대중들이 괴리감을 느꼈다는 것.

이후에도 유재석과 듀엣으로 프린스란 그룹을 기획했지만, 그냥 프로젝트 선에서 머문 듯 싶다. 이때 두 사람 모두 예명을 만들었는데 이휘재는 '정빈', 유재석은 '유혁'이였다.[9]

5. 방송 복귀[편집]


1997년 2월 13일에 제대한 이휘재는 군 입대 이전의 인기를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다가 1999년, SBS에서 한 '남희석 이휘재의 멋진 만남'으로 인기를 회복하고 제2의 전성기를 누린다.[10] 동시간대에 KBS1에서는 대하드라마 왕과 비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멋진 만남'이 전혀 밀리지 않았다. 당시 남희석은 얼굴은 딸리지만 물량 공세를 동원한 화려한 데이트를 추구하는 돈 많은 지역유지[11]의 아들 컨셉으로 여자 게스트의 눈길을 끄는 '남재벌', 이휘재는 돈은 없지만[12] 멀쩡한 외모와 특유의 말빨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는 도시풍 바람둥이의 '이바람'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이휘재의 극렬 안티들은 이 때의 인기 회복이 남희석의 인기에 묻어간 거라고 극구 주장하지만, 멋진 만남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둘의 역할 분담과 호흡이 기가막히게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즉, 남희석이 프로그램을 혼자 이끌어가고 이휘재는 단순히 남희석의 인기에 얹혀갔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남희석과 이휘재 두 사람이 서로 번갈아 철저하게 망가지는 개그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시청률이 좋아졌고 이휘재 또한 방송의 인기에 큰 축을 담당했다. 당시 진행자로서의 이휘재의 역량은 과소평가를 받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훌륭했다. 실제로 이휘재의 최전성기였던 인생극장은 일종의 단막극 형식으로 짜여진 각본의 비중이 더 컸기에 남희석과 합을 맞춘 이 시기가 이휘재의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좋은 개인 폼을 보여줬다는 것이 중론이다.

다만 당시 인기를 비교하면 남희석이 확실히 더 우위였다. 그 당시 '좋은 친구들', '멋진 만남'이라는 당대 최고의 인기 예능 2개를 이끌던 남희석의 순간적인 인기는 (비록 조금씩 식고 있긴 했으나) 당대 원톱이었던 김국진을 위협할 정도였다.

참고로 이 때 멋진 만남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연예인이 그룹 클론을 패러디한 '클놈'으로 등장한 지상렬, 염경환, 그리고 탤런트 이유진 등이다. 이 때의 인연으로 지금도 이유진은 이휘재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6. MC로 전향[편집]


'남희석 이휘재의 멋진 만남'의 성공과 2000년대 초부터 높은 인기를 얻기 시작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일요일은 즐거워공포의 쿵쿵따 코너에서 강호동, 유재석, 김한석 등과 진행을 맡은 이후 이휘재는 본격적으로 MC로 전향하게 된다. 모르는 이들이 많은데, 90년대 초반부터 이미 일밤로 본격 MC 활동을 시작했다. 이래봬도 예능계 MC로의 경력만 따지면 이경규 다음쯤 된다.

군제대 이후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한 90년대 후반부터 탑은 아니라도 꾸준히 메인 MC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항상 정점이라기보단 정점의 약간 아래를 유지해 왔다. 그동안 이경규, 김국진, 남희석, 신동엽, 김용만, 유재석, 강호동 등 MC 최정점은 항상 바뀌었지만 이휘재의 살짝 아래 위치는 거의 고정.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강호동, 이수근, 김용만, 탁재훈, 이혁재, 신정환, 신동엽 같은 기존 MC들이 줄줄이 탈세, 절도, 도박, 폭행, 마약 등의 혐의로 잠시 주춤했기에 반사이익을 얻어 능력과는 무관하게 오랫동안 살아남은 현역 MC가 되었다.[13]

다만, 중간중간 스케일이 큰 논란이나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은근히 자주 있어서 탑 급[14] MC들 중에서 대중에게 팬심과 호감도와 평판은 가장 하위권이다. 쉽게 말해 이휘재만큼 자주 나오고 오랫동안 MC를 본 이는 매우 드물지만, 정작 그의 광팬이라거나 "그나마 이휘재 있으니까 이 방송 본다."[15]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얘기.

MC로서 능력은 무난한 편이다. 20여년 넘게 꾸준히 각종 예능 프로그램들의 MC를 맡고 있어서 모든 세대들한테 인지도도 나름 높은 편이다. 정해진 대본을 따라가며 자신 혹은 제작진이 미리 정해놓은 흐름을 벗어나는 발언이나 행동은 강하게 제지하는 편. 이러한 진행 스타일로 '지휘재'라는 별명도 얻었다. 다만, 화려한 입담이나 게스트를 살려주는 캐릭터 메이킹, 돌발적인 드립을 받아치는 순발력은 매우 떨어지는 편이다. 정신없이 드립이 오고가는 리얼 버라이어티나 돌발 상황이 벌어지기 쉬운 관찰 예능이나 직접적으로 부딪쳐 보는 체험 예능이나 남녀간에 짝을 맞춰 보는 짝짓기 예능이나 매주마다 대중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서바이벌 프로그램보다는 작가가 손수 강하게 관여하는 스튜디오 예능이나 토크쇼, 웃음보다는 순수한 진행 능력이 중요한 행사 진행, 이름 그대로 순수 퀴즈로 진행되는 퀴즈쇼 등에 강점을 보인다.[16] 근래 예능의 대세가 리얼 버라이어티와 관찰 예능과 체험 예능과 서바이벌 프로그램 위주로 변화함에 따라 트렌드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많다.

또한 토크나 상황극 등이 엎어지면 가차없이 잘라버린다. 그래서 머리 속에서 짜 놓은 대략적인 루트대로 토크가 이뤄지면 그야말로 청산유수지만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거나 갑자기 중간에 엇나가면 버벅대는 박명수와는 최악의 상성을 자랑한다. 박명수는 평상시에는 잘 해 나가는가 싶다가 돌연 예상에서 어긋나면 버벅거리는 나쁜 습관이 있는데, 유재석은 그 버벅거림도 본인의 뛰어난 능력으로 캐치해서 다시 살려주지만, 이휘재는 가차없이 잘라버리기 때문.

이휘재만의 캐릭터로는 상기한 멋진 만남에서부터 이어진 바람둥이 캐릭터가 있다. 방송용 멘트인지는 모르겠지만, 김나영, 한성주 등 여러 여자 연예인들의 적극적인 대시를 받고 있는 걸 보면 여러모로 여자들과는 결코 뗄레야 뗄 수 없는 운명인 듯. 이런 기믹들이 극대화(?)된 순위 정하는 여자라는 케이블 프로그램에서는 '여자가 끊이지 않는' 기믹으로 여자 연예인들 사이에서 '지휘재' 기믹을 발휘하고 있다.

남희석은 결혼과 더불어 당시의 '남재벌'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었지만, 2010년까지 미혼으로 남았던 이휘재는 '이바람' 이미지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이 때 잡힌 바람둥이 캐릭터는 결혼 이후까지도 한동안 방송에서 여성 출연자들과의 상황극에 꾸준히 써먹었었다. 결혼 전에는 김나영, 유이 등과 실제 스캔들처럼 연기를 했다면, 결혼 후에는 '오늘만큼은 특별히 과거로 돌아가겠다.'던지 등의 바람둥이 시절을 그리워하는 식의 애드립을 많이 치는 편. 이 때문에 여성 편력에 관련된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다만, 이바람 컨셉에도 불구하고 이휘재는 결혼 전까지는 큰 스캔들은 단 한 번도 낸 적이 없다. 이미 총각 시절부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로 이휘재가 바람기가 넘쳤다기보다는 그저 여자들에게 인기만 많았던 것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롱다리라는 별명의 원조답게 큰 키[17]와 코미디언으로써는 보기 드문 매우 잘생긴 얼굴, 게다가 상술했듯 좋은 집안에 위트와 재치에 입담까지 겸비했으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대학생 시절 가까웠던 지인들인 김현철[18], 김진수, 김한석 등이 직접 증언한 바로는 대학생 시절 주변의 많은 여자 선후배들이 이휘재에게 접근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다고 한다. 심지어 한 번은 남자 선배가 짝사랑하던 여자 선배와 이휘재가 놀러갔다가 그 남자 선배에게 들키는 바람에 이휘재가 하마터면 심하게 맞을 뻔해서 김현철이 말린 일도 있다고 한다. 이휘재 본인 말로는 그냥 같이 오리배 한 번 탄 것뿐이라고...

2010년 12월 5일부로 그동안 교제해 오던 여자친구와 결혼해서 유부남이 되면서 노총각에서 탈출하였다. 바람둥이 이미지 이후로는 별다른 특색이 없었는데,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면서 쌍둥이 아들들의 육아에 힘쓰는 가정적인 모습으로 그간의 다소 부정적이던 이미지를 탈바꿈, 제3의 전성기를 맞이한 후 2015년 KBS 연예대상까지 수상했다. 당시 이휘재는 인터뷰에서 "인기있는 연예인으로서가 아닌 열심히 쌍둥이를 키우는 훈훈한 아버지로서 대중들에게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 이휘재를 다시 봐야겠다며 칭찬해주는 여론도 많았다.

그러나 이듬해 2016년, 이휘재/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에 기재된 2.1.3번 문단에도 있는 내용인 SBS 연기대상에서 MC로서 큰 태도 논란을 저지르는 바람에 여론이 악화됐고, 그래서 한때는 활동이 감소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시청자 의견을 수용하고 진행 형식을 바꾸는 노력을 보여주면서 다시금 평판이 나아지고 있는 추세였다. #


7. 방송 활동 중단[편집]


하지만 2021년 연초, 이휘재/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에 서술한 층간소음 논란은 물론 본인 포함 가족들의 이런저런 비행들까지 줄줄이 까발려지면서 다시금 방송 활동에 상당한 지장이 생겼다.

이렇게 층간소음 논란을 포함한 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에 적힌 것들로 인해 그러잖아도 이휘재에 대해 혐오감이 깊은 젊은 층들에게 비호감 이미지로 쌓여 있던 것이 마침내 대폭발을 일으켰고, 그 결과 논란 이후로는 공중파보다는 주로 종편 채널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19] 박수홍의 역할을 많이 넘겨받았다.[20] 특히 부인과 아이들의 논란으로 인해 무엇보다 특히 3040 유부녀들 사이에서 이휘재에 대한 비호감 지수가 엄청 높아졌다. 이 세대는 방송국에서 특히 중요시하는 화제성을 만들어내는 세대니 공중파나 젊은 시청층이 많이 보는 tvN, JTBC 같은 곳들에서는 이휘재를 MC로도 게스트로도 섭외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결국 그나마 유일한 밥줄이라고 할 수 있었던 연중 라이브(後 연중 플러스)에서마저 2022년 4월에 개편으로 하차[21]한 이후로는 지상파고 케이블이고 종편이고 어디서고 통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은 물론 방송 섭외가 들어온다는 소식도 안 들리면서 근황도 불명이었다가 2022년 9월 14일에 오랜만에 근황이 알려졌는데, 방송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2022년 8월 25일, 가족과 함께 재정비 겸 휴식 차 캐나다로 갔고 동년 연말까지 캐나다에서 머무를 것이라고 한다. 이유인 즉슨, 각종 비판점들과 논란들로 인해서 방송 입지가 줄어들면서 프로그램에서 연달아 하차하고 섭외도 더는 들어오지 않아 충격을 많이 받은 것이 이유라고 한다. #

물론 말이 재정비지 사실상 은퇴 내지 제명이라고 보는 게 무방하며, 이휘재 일가의 수많은 비행들까지 만천하에 까발려지면서 설사 다시 국내로 돌아오더라도 어차피 이휘재를 아쉬워하거나 그리워하는 여론도 없어서 방송가에서 다시 불러줄 가능성은 제로라고 쳐도 될 정도고, 거기다 2023년 1월 14일에 모친상으로 잠시 귀국했을 당시 소속사였던 큐브엔터테인먼트와도 재계약을 하지 않아서 그대로 계약도 종료되었으며, 캐나다로 간 이유도 아들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는 언론 보도도 있었지만[22] 결과적으로 아들의 학교폭력을 옹호해서 캐나다로 추방당하다시피 쫓겨난 윤손하와 비슷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2023년 10월, 소유하고 있던 청담동 빌라를 팔아 최소 60억의 차익을 냈다고 한다.

[1] 출처는 힐링캠프 124회 이휘재 편.[2] 강호동도 이경규가 데뷔시킨 케이스다.[3] 현재 국민MC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유재석조차 이휘재의 아성에 가려진 때가 있을 정도. 이와 관련 유재석이 직접 증언한 적이 있는데 어느 지역업소에 유재석이 불려갔는데 가보니 그 업소의 사장이 밖에 나와 하염없이 담배를 피고 있더라고. 그래서 인사를 했더니 사장은 힐끔 쳐다본 후 유재석이냐 묻고는 무심하게 들어가보라고 했더란다. 그래서 들어가보니 손님이라고는 고작 3명 뿐이었으나 유재석은 이사람들에게라도 정성을 다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무대로 올랐더니 곧이어 업소 사장이 들어오더니만 내려오라고 외치더라는 것이다. 후에 알아봤더니 그 지역에서 불과 얼마되지 않은 곳에 이휘재가 출연해 다 그쪽으로 간 것이었다고.[4] 현재의 MBC 방송연예대상[5] 당시 창작 뮤지컬 '심수일과 이순애'에서 심수일 역에 캐스팅되었으나, 군입대로 무산되고 이휘재 대신 이상우배역을 맡게 되었다.[6] 복무기간 중에도 방송 인터뷰로 복무 부대로서 많이 알려지기도 했고, 전역 후에 공포의 쿵쿵따에서 8사단의 경례 구호인 돌격을 FM으로 외치는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때 주변 부대의 간부들을 비롯한 장병들이 싸인받으려고 얼마나 들락날락했는지 당시 부대 지휘관이 사적인 일로 이휘재 있는 곳에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지위계급을 막론하고 처벌하겠다고 공고했다 카더라.[7] 표지에 Experience라고 적혀 있어서 앨범 제목이 이건 줄 알았다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 발매는 이휘재가 군입대한 이후인 1995년에 했지만 앨범 녹음은 군입대 전인 1994년에 했다고 한다.[8] 솔로 가수가 1/2년에 한 번씩 꾸준히 10만 장 정도를 팔고 수익분배를 제대로 받았다면 별다른 공연이나 출연이 없어도 예나 지금이나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물론 개그 활동에 비하면 아무래도 적자를 기록했으니 사실상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긴 하다.[9] 이후 런닝맨에서는 유재석을 자막으로 아예 유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10] 참고로 이휘재는 멋진 만남의 시작과 동시에 KBS에서 '남희석 이휘재의 한국이 보인다'를 진행했다.[11] 남희석의 부모님은 고향에서 목욕탕을 한다.[12] 당연히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휘재의 아버지는 해양대학교 출신에 이휘재가 어릴 때부터 배를 몰던 선장이었고, 은퇴 후에도 해운회사 이사직을 역임할 정도로 부유했다. 이휘재가 그 동안 방송에서 스스로 말했던 중고등학생 시절 일화들을 보면, 아버지 지갑에 손을 대 친구들을 다 이끌고 놀러가서 다른 아이들 몫의 돈까지 펑펑 썼다가 나중에 아버지에게 걸려서 두들겨 맞았다는 경험담들이 많다. 한마디로 그만큼 집에 이 많았다는 것이다.[13] 다만 김용만은 도박 외에는 별다른 구설수를 일으키지 않았고, 현재는 이혁재와 신정환을 제외하면 전부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14] 대표적으로 언제나 대상 후보로 언급되는 이경규, 유재석, 강호동, 신동엽. 여기에 옛날의 영광을 생각하면 김국진, 송해, 이영자, 이홍렬, 허참, 이문세, 이덕화 등도 낄 수 있다. 조금 더 보태자면 자신들만의 방식대로 각자의 영역들을 확실히 구축하고들 있는 김성주, 전현무, 김구라, 박미선, 남희석, 김신영 등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가 있다.[15] 이 부분을 다른 MC들과 프로그램들로 비유하자면, '유재석 있으니까 무한도전/런닝맨/놀면 뭐하니? 본다'라거나 '강호동 있으니까 1박 2일/강심장/놀라운 대회 스타킹/아는 형님 본다'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 프로그램들의 장수 비결도 국민MC라고 불리우는 두 사람이 고정이었으니까 장수할 수 있었지 만일 이휘재가 있었으면 1년, 아니 6개월도 못 채우고 간판 내리는 건 시간문제였다.[16] 문제는 이휘재는 이런 류의 프로그램을 진행할만한 능력도 심히 부족해서 이런 쪽에서도 말아먹은 프로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나마 일부 장수 프로그램 중에서도 이휘재보단 다른 사람들이 더 돋보였을 뿐 이휘재는 본인이 중심이 돼서 프로그램을 이끈 적은 별로 없으며, 개중에는 닥터의 승부비타민처럼 처음부터 이휘재가 있었던 게 아니라 중간에 끼어들어간 경우도 상당하며, 반대로 이휘재는 아무리 생각해도 특정 프로그램에 오래 있기에는 부적절하니 이휘재를 중간에 하차시키는 경우도 다반사다. 또한 해당 장르들은 현재 한국에서는 사양길에 접어드는 것들이다.[17] 실제로 키가 178cm 정도로, 현재 기준으론 그리 큰 키가 아니지만, 90년대 초중반까지는 충분히 장신 소리를 들을 만한 피지컬이었다. 또한 현재는 나이가 어느덧 50대 초반에 접어들어 젊은 시절보다 키가 조금 줄었을 가능성도 있다.[18] 김현철은 이휘재의 충암고등학교 2년 선배이기도 하다.[19] 물론 사건 이전에도 종편 활동은 꾸준히 해 왔지만, 성과는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20] 중장년층들 중에서는 가부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다 이휘재의 모든 것들을 잘 모르거나 관심 없는 그들에게는 층간소음과 같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논란의 이휘재보다는 형제 간 다툼으로 가족의 유대를 끊게 만들었다는 박수홍이 더욱 이미지가 나빠졌고, 둘 다 중장년층들에게 인지도는 있으나, 그나마 기성세대들한테 이미지가 덜 나쁜 이휘재를 좀 더 많이 쓰는 것이다. 물론 중장년층들 사이에서도 박수홍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아서 박수홍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으며, 오히려 이들 중에서도 이휘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21] 이휘재 본인뿐만 아니라 파트너 이현주는 물론 리포터들도 다 하차시키면서 스튜디오를 없애고 마지막회까지 자료 화면 위주로만 방송했다.[22] 물론 이휘재와 가까운 관계자들은 그의 은퇴에 대해 부정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없다시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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