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섭(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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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
이현기(李鉉夔)[1]
자 / 호
서규(瑞圭) / 우헌(愚軒)
본관
연안 이씨[2]
출생
1844년(헌종 10) 10월 26일
경상도 군위현 중리면 중구동
(現 대구광역시 군위군 효령면 중구리 중리마을)[3]
사망
1910년(융희 4) 9월 23일[4] (향년 65세)
경상북도 안동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837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이현섭은 1844년(헌종 10) 경상도 군위현 중리면 중구동(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효령면 중구리 중리마을)에서 임진왜란 때 정읍현감으로 종군하였던 이진(李軫)의 10대손인 이용연(李龍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생원시에 입격한 맏형 이현무(李鉉懋)[5]와 둘째 형 이현복(李鉉馥)이 있었다.

그는 12살 되던 1856년(철종 7) 5월 아버지를 여의었고, 그해 12월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산현 갈전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갈전리 원당마을)로 이주하였다.[6]

1878년(고종 15) 경상도 유생으로서 서원을 복구하여 설립해줄 것을 청하는 연명 상소에 이름을 올렸다.# 1885년(고종 22)에는 증광시 생원시에 3등 62위로 입격하였다.

1886년 봄에는 민씨 정권과의 불화로 4년간 평안도 철산도호부에 유배되는 형벌을 받았다. 이 당시에는 이현섭 뿐만 아니라, 맏형 이현무와 유기호(柳基鎬)·이만응(李晩鷹)[7]·이중린(李中麟)·조영기(趙永基)·이수학(李壽學)·이명연(李明淵) 등 많은 영남지방 유림들이 유배를 갔다고 하며, 이들은 1890년(고종 27) 1월 29일에 일제히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당시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일본 군대를 이끌고 궁중에 난입하였으며, 이듬해 1895년에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그는 통분을 참지 못하고 안동부 예안군 의동면 양평리(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양평마을)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은거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음식을 먹지 못했으며 결국 9월 23일 의관을 갖춘 후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고로 『우헌실기(愚軒實記)』 2권이 전하며, 본래 묘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매곡리 밤실마을에 있었으나 2008년 5월 15일 부인 여산 송씨·인동 장씨의 묘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837호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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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5년 증광 생원시 입격 후 예조에 뜻을 전달하여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2] #[3] 연안 이씨 집성촌이다.[4] 양력 10월 25일.[5] 1873년(고종 10) 식년시 생원시에 3등 24위로 입격했다.[6] 이현섭과 그 가족들이 살던 우헌고택은 갈전리 138번지에 있었으나, 2008년 경상북도청이 138-2번지로 이전하기로 계획되는 바람에 2016년 철거되었다.#[7] 1885년 6월 9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의 유생 김진우(金晉祐)의 상소에 이만응이, 고종의 명을 거역할 계책을 제창하고 겸해서 개인적인 감정을 푸는 말을 마구 하였습니다. 여러 진성 이씨 종친들을 서원 뜰에 많이 모아놓고 그 서자 족속의 항렬이 높은 자 몇 사람을 잡아다가 뜰 아래에 결박하여 꿇어앉히고 장(杖)을 치고 태(笞)를 치며 노예처럼 취급하고는 "서자(庶子) 부류를 허락하지 말라.〔勿許庶類〕"라는 네 글자의 글을 크게 써서 벽에다 붙였다고 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