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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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
2. 생애[편집]
1937년 경기도 안성군에서 태어났다. 성장기를 잠시 군산시에서 보내면서 군산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였고 1968년 총경 계급으로 들어가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전두환 정권 때 서울시경국장[1] 과 치안본부장, 경기도지사,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2] 등을 역임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 시절이던 1987년 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 은폐하는 것과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등에 책임이 있었다는 논란이 있었다.
해당 논란으로 인하여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경기도 안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앞서 말한 군사 정권 협력 이력 때문인지 당선 직후 대학생 15명이 사무실에 침입해 화염병 3개를 던지고 책상과 전화기 등 집기를 파손시킨 뒤 달아난 일도 있었다. 이후 1989년 민주정의당에 복당하였고 3당 합당 과정에서 그대로 잔류하여 민주자유당 소속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리고 민주자유당 제1사무부총장에 임명되었다. 김영삼 정권 출범 후인 1993년 2월부터 12월까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내무부 장관 재직 시절 한총련이 주도하는 학생시위를 진압하러 간 김춘도 순경이 학생 시위대에게 몽둥이로 맞아 순직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한총련의 조직과 배후세력의 실체 등을 정밀분석해 이적단체와의 접촉을 차단하여 폭력시위와 북한과의 통신행위를 엄단하겠다는 말을 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신한국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기도 안성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심규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심규섭 국회의원이 별세하여 치러진 2002년 재보궐선거에서 심규섭의 부인인 새천년민주당 김선미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3] 이어 불법 대북송금 사건이 일어나자 대북송금 진상조사특위 위원장을 맡아 사건을 조사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김선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안성시 소재 전문대학인 두원공과대학교에 영입되어 2019년까지 총장을 지냈으나 학교 측의 사정이 나빠지면서 사의를 표명했다.
3. 여담[편집]
- 국회의원을 4선을 지냈음에도 상임위원장을 지내지 못 했다. 3선 당시에는 여당 정책위의장을 지냈고, 4선 의원이 되어 원내에 복귀했을 때에는 이미 상임위원장 배분이 끝나서 자리가 없었다. 5선에 도전했지만 그 때는 심규섭 전 의원의 아내인 김선미 후보에게 밀려서 낙선하여 기회가 없었다.
- 18대 총선에서 당선된 이후 안성시에서 4선을 한 김학용 의원이 그의 최측근이었다. 1988년 이해구 의원 비서관을 시작으로 정계 입문, 1995~2004년에는 경기도의원을 지냈으며[4] , 2004년 이후에 안성시 당협위원장 자리에 올라 원외 위원장 생활을 하다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4선을 하게 되었다.
4. 논란[편집]
-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4일 후인 1997년 8월 10일에 조진형, 박세환을 비롯한 당시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사고기 잔해 앞에서 기념촬영을 파문이 일기도 하였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의 신기하 의원도 해외 연수 일정으로 부인 김정숙 및 24명의 당원들과 함께 괌으로 떠났다가 이 사고에 휘말려 참변을 당했는데 이런 일을 벌인 것. 이후 신기하 의원의 어머니 이묘현[5] 씨도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하다가 사고 49일 만에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5. 선거 이력[편집]
6. 소속 정당[편집]
7. 둘러보기[편집]
[1] 당시만 해도 이 보직은 치안감이 보임되었다.[2] 현재의 국정원 1차장은 차관급이나 이 시절에는 안기부장이 부총리급이고 안기부 차장이 장관급이었다.[3] 그리고 20년 후 그의 비서관을 지냈던 김학용이 2022년 3월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총선에서 낙선했던 보수정당 소속 후보가 2년 후 치러진 재보선에서 지역구를 탈환하는 일이 재현되었다.[4] 2004년 2월, 부의장 임기 중에 사퇴했는데 이건 고령의 이해구 의원이 5선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총선출마를 이유로 사직했기 때문이다.[5] 1904년생.[6]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7]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8]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9]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